지아는 입을 벌리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니 자신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지아는 그저 꼬마가 즐겁고 무사히 자라기만 하면 됐다.얼마 지나지 않아 지윤은 눈을 감았다. 그는 머리를 지아의 품에 기대고 잠을 쿨쿨 잤는데, 입가에는 심지어 침이 반짝였다.지아는 손으로 닦아주며 부드럽게 지윤을 바라보았다.‘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지윤과 좀 닮았겠지? 다 이도윤의 아이들이니까.’“지아야.”조용한 밤, 도윤의 약간 잠기고 거친 목소리는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지아는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윤이 말하길 조용히 기다렸다.도윤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지윤이는 널 아주 좋아해. 나도 네가 지윤이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고. 넌 이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지아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백채원은 다리가 부러져 아이를 돌볼 수가 없으니 지금 나더러 네 아들을 챙겨주라, 이거야? 정말 뻔뻔스럽군.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얼른 네 아빠한테로 가.”말하면서 지아는 아무 잘못 없는 지윤을 도윤의 품속으로 밀어냈고, 자신이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흉악하게 말했다.꿈나라에 빠진 지윤은 쩝쩝거리며 작은 새처럼 따뜻한 곳으로 몸을 옮겼고, 손을 뻗어 도윤의 셔츠를 잡아당겼다.그리고 잠꼬대까지 했다.“엄마.”지아는 즉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아무런 죄도 없는 한 아이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냐고?’잔잔한 빛을 빌려, 도윤은 지아의 죄책감에 빠진 표정을 보았다.그의 지아는 줄곧 착한 사람이었다.도윤은 아이를 지아의 품으로 부드럽게 밀었고, 지윤이 자신의 엄마와 좀 더 오래 있게 해주고 싶었다.“지아야, 이 아이는 네가 몇 번 밀어내도 다시 달려와 너를 엄마라고 부를 거야.”지아는 시선을 돌렸지만 더는 지윤을 밀어내지 않았고 도
지아는 도윤의 싸늘함에 습관 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 도윤의 각박함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지아는 그제야 직접적인 공격이 지금 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눈에는 사랑을 머금고 있는 도윤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는 단지 추측일 뿐, 그녀는 자신이 이미 임신했다는 사실을 폭로할 엄두가 없었다.“이도윤,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그럴 리가 없다고.”그러나 도윤은 개의치 않았다.“지아야, 과거는 짧지만 미래는 길거든.”지아는 더 이상 도윤과 다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도윤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정신이 나간 사람과 따지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지아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소계훈이 완쾌되기를 기다리고, 그녀의 뱃속의 아이가 순조롭게 자라서 출산하기를 기다리며,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그 전에 절대로 다른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지아가 눈을 감자, 도윤은 부드럽게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고,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지아야, 날 떠나려 하지 마. 그건 아주 멍청한 생각이야, 알았지?”6월의 날씨는 무척 더웠지만, 지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더니 꼼짝도 하지 못했다.‘이도윤은 미친놈이거나 거의 미친 사람이야.’이튿날 아침, 지아는 산속의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그리고 바로 옆을 바라보니 도윤과 지윤은 모두 사라졌다.지아는 텐트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서야 텐트의 커튼을 열었다.산속의 상쾌한 아침 바람은 마음속의 모든 불쾌함을 없앨 수 있었고, 지아는 탐욕스럽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순간, 가슴속의 답답함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진봉은 어쩌다 다람쥐와 싸우게 됐는지, 허리손을 하며 화를 냈다.“야, 나무에 오를 능력은 있으면서, 왜 내려올 엄두는 없는 거지!”나무에는 크고 작은 다람쥐 두 마리가 있었는데, 큰 다람쥐는 진봉의 머리를 향해 아주 작은 솔방울을 하나 던졌다.“야, 이 자식이 감히 사람을 때리다니, 너희들 잡히
지아의 꿈은 대부분 아이와 관련이 있었는데, 한동안 그녀는 매일 아름다운 꽃밭에 서서 한 아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아이는 손에 예쁜 화환을 들고 웃으며 그녀에게 씌웠다.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아가야.”“엄마, 예뻐요.” 지윤은 기뻐서 빙그레 웃었다.지아는 이 아이가 크면 틀림없이 훈남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친절하고 따뜻하다니.그녀는 지윤의 얼굴에 가볍게 뽀뽀를 했고,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지윤이 내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지아는 아이의 무릎을 털어주며 위의 잡초와 흙을 떨쳐냈다.그리고 그녀는 곁눈으로 도윤이 먼 산비탈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도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미칠까 봐 아예 멀리서 바라보기로 한 것 같았다.지윤은 지아의 옆에 앉아 강물이 콸콸 흐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좀 더 따뜻하면 물에 들어가 놀 수 있었는데, 지금 두 사람은 강가에서 돌을 주울 수밖에 없었다.꼬마는 평소에 집에서 고급 장난감을 놀았지만 강가에서 돌을 줍는 것도 아주 즐겁다고 생각했다.작은 돌을 물에 던지면, 그 튀기는 물보라만 봐도 지윤은 하하 웃을 수 있었다.가끔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 지윤은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물고기, 작은 물고기.”지아는 웃으며 말했다.“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아줌마가 지윤이 데리고 물고기 잡으러 갈까?”지윤은 물고기를 잡는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아와 함께 있기만 하면 매우 즐거웠다.두 사람은 물가에서 오랫동안 놀았고, 도윤은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그제야 그들에게 다가가 아침 먹자고 불렀다.지아는 지윤을 안으려고 몸을 웅크렸지만, 문득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내가 안을게.” 도윤은 한 손으로 지윤을 안고 다른 한 손은 지아의 손을 잡았다.지아는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남자의 힘은 무척 세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지아는 한 번 시도한 다음 바로 포기했고, 도윤이 자신을 데리고 가도록 내
지아는 놀라서 몸을 떨며 영문도 모른 채 도윤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의 일은 의외의 사고가 아니었어. 누군가 지윤을 죽이려고 아주 높은 계단에서 그를 밀었거든.”지아는 안색이 변했다.“어떤 사람이 그런 거야?”“지금은 단서가 너무 적어서 아직 확정할 수 없어. 하지만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볼 때, 일반인이 아닌 프로 킬러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난 그들 남매를 안전한 곳으로 보낼 거야.”지아는 떠보며 물었다.“독충과 관계가 있는 거야?”“그건 아닌 것 같아. 독충은 의학 분야에 정통한 조직이기에 그들이 사람을 죽이려면 대부분 약물을 위주로 하거든. 진희 아주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지윤이에게 손을 댄 사람은 아니야. 그들은 분명히 지윤을 죽이려고 했어. 이렇게 어린 아이가 그 회전 계단에서 떨어졌거든. 지윤이 얼른 난간을 잡고 제때에 멈추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야.”지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떨리더니 참지 못하고 지윤을 잡았다.‘이 아이가 지금 내 앞에 멀쩡히 서서 웃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더는 도윤에 대한 분노를 발산하지 않았고, 손가락으로 지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아가야, 많이 아팠지?”지윤은 지아의 뜻을 잘 알지 못했지만, 지아가 자신을 쓰다듬어 주기만 하면 그는 매우 기뻐했고 줄곧 지아를 불렀다.“엄마, 엄마.”지아는 부드럽게 지윤의 손을 잡았다. 원래 아침을 먹고 시내로 돌아가야 했지만, 지아는 또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놀아주었다.그녀는 지윤에게 꽃을 따주며 나비를 잡아주었다.도윤은 신발과 양말을 벗은 다음, 바짓가랑이까지 걷어붙이고 물에 들어가 지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었다.아이를 봐서 지아는 도윤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두 사람은 증오와 미움을 내려놓았고, 평범한 부부처럼 아이를 데리고 가장 순수하고 간단한 즐거움을 체험했다.노을이 붉게 물들자, 일행은 그제야 차를 몰고 떠났다
날이 밝기도 전에 지아와 소계훈은 장미 장원을 떠났고, 지아조차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도착해서야 지아는 이곳이 한국식 정원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생각해보니 도윤의 명의로 된 이런 집이 없는 것 같았다.보아하니 안전을 위해 도윤은 특별히 안전한 곳을 찾았고 그 누구도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소계훈은 오히려 이곳을 매우 좋아했는데, 소씨 집안 본가와 매우 비슷했다.차에서 내리자, 소계훈은 지팡이를 빌리지 않고 뜻밖에도 스스로 일어서서 몇 걸음 걸었다.지아는 이 상황을 보고 얼른 가서 그를 부축했다.“아빠, 조심하세요.”소계훈의 평온한 얼굴에 기쁨이 번쩍였다.“지아야,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응, 아빠, 우리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요. 넘어지지 말고요.”소계훈의 상태가 날로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지아도 무척 뿌듯했다. 이제 그가 안정되면 그녀도 그때의 사실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매일 그 비밀들을 안고 자면서, 지아는 꿈속에서조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진봉은 재빨리 와서 소계훈을 부축했다.“나리, 몸이 빨리 회복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적당히 운동 좀 하시면 돼요.”“안심해라, 나도 다 알아.”소계훈은 웃었다. 사실 그는 속으로 무척 조급해하고 있었다. 지금 아직 하지 못한 일이 많은 데다 그도 지아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매일 방에 돌아온 후, 소계훈은 벽을 짚고 운동을 했고, 그는 다시 재기할 기회가 있었다.새 정원은 아주 쾌적해서 태교를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그때 작별을 한 후, 행방을 드러낼까 봐 두려웠는지, 아니면 너무 바빠서인지, 아니면 곧 결혼할 준비를 해야 해서인지, 도윤은 더는 오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20일이 지났고, 지아의 임신 반응도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최근에 식사량이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바로 배가 고팠다.구토를 하지 않은 이후, 지아의 안색은 갈수록 좋아졌고, 얼굴에 약간 살이 붙어
도윤은 바로 미연의 전화를 받았다. 비록 그동안 지아를 보러 가지 않았지만 지아의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었다.미연은 도윤의 생각을 몰랐고, 그저 그가 묵묵히 지아를 주시하고 지아를 지키는 좋은 전남편이라고 생각했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임신검사를 받으러 가고 싶어합니다.”도윤의 테이블 위에는 한 쌍의 결혼반지가 놓여 있었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그 큰 다이아몬드를 어루만지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응, 내가 처리할게.”미연은 한숨을 돌렸다.“대표님은 역시 아가씨를 관심하고 있었네요. 근데 아가씨가 무엇 때문에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도윤은 음침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고 반지를 상자에 넣었다.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갔고, 하늘은 뿌옇고 흐려서 마치 비가 올 것 같았다.지금은 퇴근 시간이어서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차들도 쉴 새 없이 달렸다.먼 곳의 고층 건물도 불을 속속 켰는데, 도윤의 긴 그림자는 더욱 길게 당겨졌다.빗줄기는 비스듬히 날아와 유리에 떨어졌다가 다시 우르르 떨어져 빗자국을 하나 남겼다.도윤의 그림자는 빗속에서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지아야, 네가 말했잖아, 나와 영원히 함께 있을 거라고.’한참 뒤, 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했고,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응, 나야.”답장을 받은 지아는 마땅히 기뻐해야 했지만 마음속은 이유 없이 초조해졌다.‘아무래도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운 것 같아.’미연은 지아가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좀 이해하지 못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승낙하셨는데, 왜 기분이 좋지 않는 거예요?”“그게…….”지아는 손가락을 가슴에 놓았고, 이것이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없었다.‘아무튼 이건 아닌 것 같아.’‘의심스러울 정도로 순조롭잖아.’“그는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미연은 깨끗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네, 아가씨, 사실 대표님은 아가씨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가씨를 더욱 사랑하고 더욱 신경 쓰고
핸드폰에 관해서, 지아뿐만이 아니라 도윤도 매번 거절했기에 소계훈도 점차 깨달았다.결국 그는 이미 세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아는 재빨리 말했다.“아빠,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확실히 일이 좀 생겼어요. 난 아빠가 회복되면 천천히 알려주고 싶었고요.”소계훈은 이 말을 듣자마자 흥분하더니 다시 손을 떨기 시작했다.“분명히 안 좋은 일이 생긴 거지? 내가 깨어나자마자 넌 손을 다친 데다 도윤과의 관계도 엄청 나빠졌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소계훈이 이렇게 흥분한 것을 보고 지아는 재빨리 그를 부축하여 앉혔다.“아빠, 봐요. 이게 바로 내가 아빠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예요. 사실 큰일도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과 몇 가지 일로 한바탕 싸웠거든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이도윤이 매일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 만약 정말 무슨 큰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벌써 갈라졌겠죠.”소계훈의 감정은 그제야 점차 지아에 의해 가라앉았다.“네 말도 맞아. 도윤이 나에게 네 마음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재삼 약속했었지. 그럼 너희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아빠, 나중에 다시 말할게요, 이제야 좀 나아졌는데, 자극받으면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잊으셨어요?”지아는 그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따라주었다.“사실 그 일들은 모두 지나갔어요. 이 세상에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딨겠어요? 이거 다 정상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다시 해결하면 돼요. 아빠 딸은 이미 다 커서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그래, 하지만 억울함 당하면 반드시 이 아빠한테 말해. 아빠는 이 병든 몸을 돌보지 않더라도 도윤을 찾아 혼내줄 테니까.”지아는 가볍게 웃었다.“알아요, 이 세상에 아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그녀는 서서히 평온해진 소계훈의 손을 힐끗 보더니 마음속의 의문을 또다시 삼켰다.‘지금은 아직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려.’“아빠, 푹 쉬세요, 나 먼저 갈게요.”지아는 소계훈의 방에서 나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아는 잔뜩 긴장했다. 그때 출혈로 인해 아이를 잃은 불안한 감정이 다시 엄습하자, 그녀의 안색은 크게 변했고 목소리마저 떨렸다.“무,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그리고 손가락은 자기도 모르게 옷 자락을 잡으면서 지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그러나 의사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아가씨, 축하해요. 아가씨는 쌍둥이를 가졌어요. 맥박이 두 개인 것을 봤거든요.”이 말을 들은 지아의 눈가는 촉촉해졌고,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아이의 상태는요?”“음, 지금으로서는 잘 자란 것 같아요. 아가씨 긴장하지 마요.”지아는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며 기쁨에 겨워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아이가 하나만 생긴 게 아니라 쌍둥이를 가졌다!미연이 문을 밀고 들어올 때, 지아의 이런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왜요? 아이의 발육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기술이 무척 발달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지아는 감격에 겨워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의 상태는 아주 좋아. 내가 사실…….”“얼른 말하세요, 답답해 죽겠네요. 사실 뭔데요?”옆에 있던 의사까지 웃었다.“아가씨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거 같네요. 아가씨는 쌍둥이를 임신했고, 아이의 발육은 문제없어요.”“이건 좋은 일이잖아요, 아가씨, 정말 대단해요, 쌍둥이라니.”지아는 눈물을 훔쳤다.“그러게, 나도 쌍둥이일 줄은 몰랐어.”아이가 하나라도 충분히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었는데, 뜻밖에도 아이가 둘이라니, 지아는 너무나도 기뻤다.지아는 흥분해하며 연신 허리를 굽혀 의사에게 인사했다.“정말 고마워요, 의사 선생님.”의사는 손을 흔들었다.“나야 그냥 아가씨의 상황을 검사한 것뿐인데요. 그래도 휴식 잘 해야 해요, 쌍둥이는 정말 힘드니까요.”“난 두렵지 않아요.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미연은 지아를 대신해서 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