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자 지윤은 바로 울기 시작했고 큰소리로 울부짖었다.“엄마, 엄마 보고 싶어.”지윤은 영리한 아이라 평소에 거의 울지 않았지만 지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주 슬프게 울었다.도윤은 하는 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이 마지막이야, 엄마를 만나면 우리 바로 떠나야 해. 알았지?”지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엄마만 볼 수 있으면 됐기에 작은 얼굴에 눈물을 머금은 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도윤은 손을 뻗어 지윤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또 그가 흘린 침까지 깨끗이 닦았다.“가자, 엄마 만나러.”에어텐트 위에 걸린 등불은 별처럼 노란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평소라면 지윤은 이 시간에 이미 잠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커다란 두 눈을 깜박였고, 도착하기도 전에 도윤의 품에서 벗어나 짧은 다리로 텐트를 향해 달려갔다.지아는 잠이 오지 않아 이때 카펫에 앉아 하늘의 별을 세고 있었다.그러다 꼬마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는데, 지아는 약간 믿을 수 없었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같았다.전에 도윤은 백채원에게 불려가기만 하면 더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는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지아가 걱정하던 지윤까지 데려왔다.“엄마, 엄마.”지윤은 즐겁게 지아의 품속으로 달려갔고, 지아는 흥분하며 손을 뻗어 그를 껴안았다. 지윤은 행복을 느끼며 그녀의 얼굴을 비볐다.지아가 한 손으로 자신을 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윤은 작은 소리로 불평했다.“안아줘, 엄마가 안아줘.”지아는 난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아줌마는 손이 다쳐서 널 안아줄 수 없을 것 같아.”지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른 지아의 오른손을 잡았지만 그 손바닥이 나른하게 축 처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는 눈을 끔벅거리며 또 자신의 손을 보았는데, 마치 무엇을 깨달은 것 같았다.그리고 지윤은 지아의 손목에 있는 상처를 향해 호 해주었다.“호, 엄마 아프지 마.”이 말 한마디에 지아는 목이 멨고, 어머니가 된 지금, 그녀는 아이 앞에서
지아는 입을 벌리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니 자신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지아는 그저 꼬마가 즐겁고 무사히 자라기만 하면 됐다.얼마 지나지 않아 지윤은 눈을 감았다. 그는 머리를 지아의 품에 기대고 잠을 쿨쿨 잤는데, 입가에는 심지어 침이 반짝였다.지아는 손으로 닦아주며 부드럽게 지윤을 바라보았다.‘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지윤과 좀 닮았겠지? 다 이도윤의 아이들이니까.’“지아야.”조용한 밤, 도윤의 약간 잠기고 거친 목소리는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지아는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윤이 말하길 조용히 기다렸다.도윤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지윤이는 널 아주 좋아해. 나도 네가 지윤이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고. 넌 이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지아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백채원은 다리가 부러져 아이를 돌볼 수가 없으니 지금 나더러 네 아들을 챙겨주라, 이거야? 정말 뻔뻔스럽군.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얼른 네 아빠한테로 가.”말하면서 지아는 아무 잘못 없는 지윤을 도윤의 품속으로 밀어냈고, 자신이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흉악하게 말했다.꿈나라에 빠진 지윤은 쩝쩝거리며 작은 새처럼 따뜻한 곳으로 몸을 옮겼고, 손을 뻗어 도윤의 셔츠를 잡아당겼다.그리고 잠꼬대까지 했다.“엄마.”지아는 즉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아무런 죄도 없는 한 아이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냐고?’잔잔한 빛을 빌려, 도윤은 지아의 죄책감에 빠진 표정을 보았다.그의 지아는 줄곧 착한 사람이었다.도윤은 아이를 지아의 품으로 부드럽게 밀었고, 지윤이 자신의 엄마와 좀 더 오래 있게 해주고 싶었다.“지아야, 이 아이는 네가 몇 번 밀어내도 다시 달려와 너를 엄마라고 부를 거야.”지아는 시선을 돌렸지만 더는 지윤을 밀어내지 않았고 도
지아는 도윤의 싸늘함에 습관 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 도윤의 각박함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지아는 그제야 직접적인 공격이 지금 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눈에는 사랑을 머금고 있는 도윤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는 단지 추측일 뿐, 그녀는 자신이 이미 임신했다는 사실을 폭로할 엄두가 없었다.“이도윤,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그럴 리가 없다고.”그러나 도윤은 개의치 않았다.“지아야, 과거는 짧지만 미래는 길거든.”지아는 더 이상 도윤과 다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도윤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정신이 나간 사람과 따지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지아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소계훈이 완쾌되기를 기다리고, 그녀의 뱃속의 아이가 순조롭게 자라서 출산하기를 기다리며,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그 전에 절대로 다른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지아가 눈을 감자, 도윤은 부드럽게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고,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지아야, 날 떠나려 하지 마. 그건 아주 멍청한 생각이야, 알았지?”6월의 날씨는 무척 더웠지만, 지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더니 꼼짝도 하지 못했다.‘이도윤은 미친놈이거나 거의 미친 사람이야.’이튿날 아침, 지아는 산속의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그리고 바로 옆을 바라보니 도윤과 지윤은 모두 사라졌다.지아는 텐트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서야 텐트의 커튼을 열었다.산속의 상쾌한 아침 바람은 마음속의 모든 불쾌함을 없앨 수 있었고, 지아는 탐욕스럽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순간, 가슴속의 답답함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진봉은 어쩌다 다람쥐와 싸우게 됐는지, 허리손을 하며 화를 냈다.“야, 나무에 오를 능력은 있으면서, 왜 내려올 엄두는 없는 거지!”나무에는 크고 작은 다람쥐 두 마리가 있었는데, 큰 다람쥐는 진봉의 머리를 향해 아주 작은 솔방울을 하나 던졌다.“야, 이 자식이 감히 사람을 때리다니, 너희들 잡히
지아의 꿈은 대부분 아이와 관련이 있었는데, 한동안 그녀는 매일 아름다운 꽃밭에 서서 한 아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아이는 손에 예쁜 화환을 들고 웃으며 그녀에게 씌웠다.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아가야.”“엄마, 예뻐요.” 지윤은 기뻐서 빙그레 웃었다.지아는 이 아이가 크면 틀림없이 훈남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친절하고 따뜻하다니.그녀는 지윤의 얼굴에 가볍게 뽀뽀를 했고,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지윤이 내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지아는 아이의 무릎을 털어주며 위의 잡초와 흙을 떨쳐냈다.그리고 그녀는 곁눈으로 도윤이 먼 산비탈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도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미칠까 봐 아예 멀리서 바라보기로 한 것 같았다.지윤은 지아의 옆에 앉아 강물이 콸콸 흐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좀 더 따뜻하면 물에 들어가 놀 수 있었는데, 지금 두 사람은 강가에서 돌을 주울 수밖에 없었다.꼬마는 평소에 집에서 고급 장난감을 놀았지만 강가에서 돌을 줍는 것도 아주 즐겁다고 생각했다.작은 돌을 물에 던지면, 그 튀기는 물보라만 봐도 지윤은 하하 웃을 수 있었다.가끔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 지윤은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물고기, 작은 물고기.”지아는 웃으며 말했다.“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아줌마가 지윤이 데리고 물고기 잡으러 갈까?”지윤은 물고기를 잡는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아와 함께 있기만 하면 매우 즐거웠다.두 사람은 물가에서 오랫동안 놀았고, 도윤은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그제야 그들에게 다가가 아침 먹자고 불렀다.지아는 지윤을 안으려고 몸을 웅크렸지만, 문득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내가 안을게.” 도윤은 한 손으로 지윤을 안고 다른 한 손은 지아의 손을 잡았다.지아는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남자의 힘은 무척 세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지아는 한 번 시도한 다음 바로 포기했고, 도윤이 자신을 데리고 가도록 내
지아는 놀라서 몸을 떨며 영문도 모른 채 도윤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의 일은 의외의 사고가 아니었어. 누군가 지윤을 죽이려고 아주 높은 계단에서 그를 밀었거든.”지아는 안색이 변했다.“어떤 사람이 그런 거야?”“지금은 단서가 너무 적어서 아직 확정할 수 없어. 하지만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볼 때, 일반인이 아닌 프로 킬러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난 그들 남매를 안전한 곳으로 보낼 거야.”지아는 떠보며 물었다.“독충과 관계가 있는 거야?”“그건 아닌 것 같아. 독충은 의학 분야에 정통한 조직이기에 그들이 사람을 죽이려면 대부분 약물을 위주로 하거든. 진희 아주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지윤이에게 손을 댄 사람은 아니야. 그들은 분명히 지윤을 죽이려고 했어. 이렇게 어린 아이가 그 회전 계단에서 떨어졌거든. 지윤이 얼른 난간을 잡고 제때에 멈추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야.”지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떨리더니 참지 못하고 지윤을 잡았다.‘이 아이가 지금 내 앞에 멀쩡히 서서 웃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더는 도윤에 대한 분노를 발산하지 않았고, 손가락으로 지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아가야, 많이 아팠지?”지윤은 지아의 뜻을 잘 알지 못했지만, 지아가 자신을 쓰다듬어 주기만 하면 그는 매우 기뻐했고 줄곧 지아를 불렀다.“엄마, 엄마.”지아는 부드럽게 지윤의 손을 잡았다. 원래 아침을 먹고 시내로 돌아가야 했지만, 지아는 또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놀아주었다.그녀는 지윤에게 꽃을 따주며 나비를 잡아주었다.도윤은 신발과 양말을 벗은 다음, 바짓가랑이까지 걷어붙이고 물에 들어가 지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었다.아이를 봐서 지아는 도윤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두 사람은 증오와 미움을 내려놓았고, 평범한 부부처럼 아이를 데리고 가장 순수하고 간단한 즐거움을 체험했다.노을이 붉게 물들자, 일행은 그제야 차를 몰고 떠났다
날이 밝기도 전에 지아와 소계훈은 장미 장원을 떠났고, 지아조차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도착해서야 지아는 이곳이 한국식 정원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생각해보니 도윤의 명의로 된 이런 집이 없는 것 같았다.보아하니 안전을 위해 도윤은 특별히 안전한 곳을 찾았고 그 누구도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소계훈은 오히려 이곳을 매우 좋아했는데, 소씨 집안 본가와 매우 비슷했다.차에서 내리자, 소계훈은 지팡이를 빌리지 않고 뜻밖에도 스스로 일어서서 몇 걸음 걸었다.지아는 이 상황을 보고 얼른 가서 그를 부축했다.“아빠, 조심하세요.”소계훈의 평온한 얼굴에 기쁨이 번쩍였다.“지아야,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응, 아빠, 우리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요. 넘어지지 말고요.”소계훈의 상태가 날로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지아도 무척 뿌듯했다. 이제 그가 안정되면 그녀도 그때의 사실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매일 그 비밀들을 안고 자면서, 지아는 꿈속에서조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진봉은 재빨리 와서 소계훈을 부축했다.“나리, 몸이 빨리 회복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적당히 운동 좀 하시면 돼요.”“안심해라, 나도 다 알아.”소계훈은 웃었다. 사실 그는 속으로 무척 조급해하고 있었다. 지금 아직 하지 못한 일이 많은 데다 그도 지아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매일 방에 돌아온 후, 소계훈은 벽을 짚고 운동을 했고, 그는 다시 재기할 기회가 있었다.새 정원은 아주 쾌적해서 태교를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그때 작별을 한 후, 행방을 드러낼까 봐 두려웠는지, 아니면 너무 바빠서인지, 아니면 곧 결혼할 준비를 해야 해서인지, 도윤은 더는 오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20일이 지났고, 지아의 임신 반응도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최근에 식사량이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바로 배가 고팠다.구토를 하지 않은 이후, 지아의 안색은 갈수록 좋아졌고, 얼굴에 약간 살이 붙어
도윤은 바로 미연의 전화를 받았다. 비록 그동안 지아를 보러 가지 않았지만 지아의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었다.미연은 도윤의 생각을 몰랐고, 그저 그가 묵묵히 지아를 주시하고 지아를 지키는 좋은 전남편이라고 생각했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임신검사를 받으러 가고 싶어합니다.”도윤의 테이블 위에는 한 쌍의 결혼반지가 놓여 있었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그 큰 다이아몬드를 어루만지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응, 내가 처리할게.”미연은 한숨을 돌렸다.“대표님은 역시 아가씨를 관심하고 있었네요. 근데 아가씨가 무엇 때문에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도윤은 음침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고 반지를 상자에 넣었다.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갔고, 하늘은 뿌옇고 흐려서 마치 비가 올 것 같았다.지금은 퇴근 시간이어서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차들도 쉴 새 없이 달렸다.먼 곳의 고층 건물도 불을 속속 켰는데, 도윤의 긴 그림자는 더욱 길게 당겨졌다.빗줄기는 비스듬히 날아와 유리에 떨어졌다가 다시 우르르 떨어져 빗자국을 하나 남겼다.도윤의 그림자는 빗속에서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지아야, 네가 말했잖아, 나와 영원히 함께 있을 거라고.’한참 뒤, 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했고,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응, 나야.”답장을 받은 지아는 마땅히 기뻐해야 했지만 마음속은 이유 없이 초조해졌다.‘아무래도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운 것 같아.’미연은 지아가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좀 이해하지 못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승낙하셨는데, 왜 기분이 좋지 않는 거예요?”“그게…….”지아는 손가락을 가슴에 놓았고, 이것이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없었다.‘아무튼 이건 아닌 것 같아.’‘의심스러울 정도로 순조롭잖아.’“그는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미연은 깨끗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네, 아가씨, 사실 대표님은 아가씨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가씨를 더욱 사랑하고 더욱 신경 쓰고
핸드폰에 관해서, 지아뿐만이 아니라 도윤도 매번 거절했기에 소계훈도 점차 깨달았다.결국 그는 이미 세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아는 재빨리 말했다.“아빠,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확실히 일이 좀 생겼어요. 난 아빠가 회복되면 천천히 알려주고 싶었고요.”소계훈은 이 말을 듣자마자 흥분하더니 다시 손을 떨기 시작했다.“분명히 안 좋은 일이 생긴 거지? 내가 깨어나자마자 넌 손을 다친 데다 도윤과의 관계도 엄청 나빠졌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소계훈이 이렇게 흥분한 것을 보고 지아는 재빨리 그를 부축하여 앉혔다.“아빠, 봐요. 이게 바로 내가 아빠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예요. 사실 큰일도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과 몇 가지 일로 한바탕 싸웠거든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이도윤이 매일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 만약 정말 무슨 큰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벌써 갈라졌겠죠.”소계훈의 감정은 그제야 점차 지아에 의해 가라앉았다.“네 말도 맞아. 도윤이 나에게 네 마음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재삼 약속했었지. 그럼 너희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아빠, 나중에 다시 말할게요, 이제야 좀 나아졌는데, 자극받으면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잊으셨어요?”지아는 그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따라주었다.“사실 그 일들은 모두 지나갔어요. 이 세상에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딨겠어요? 이거 다 정상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다시 해결하면 돼요. 아빠 딸은 이미 다 커서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그래, 하지만 억울함 당하면 반드시 이 아빠한테 말해. 아빠는 이 병든 몸을 돌보지 않더라도 도윤을 찾아 혼내줄 테니까.”지아는 가볍게 웃었다.“알아요, 이 세상에 아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그녀는 서서히 평온해진 소계훈의 손을 힐끗 보더니 마음속의 의문을 또다시 삼켰다.‘지금은 아직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려.’“아빠, 푹 쉬세요, 나 먼저 갈게요.”지아는 소계훈의 방에서 나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