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씁쓸하게 웃었다.“아버님, 제가 잘못을 저질러서 지아를 불쾌하게 했어요. 그러나 안심하세요. 저는 반드시 지아의 용서를 구할 거예요.”“그래, 자네가 지아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거, 나도 다 알고 있어.”도윤의 이런 태도를 보자 소계훈도 안심했다.“사람은 한평생 자신이 사랑하고 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해. 그리고 너희들처럼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는 법이지. 자네도 자아와 이런 인연이 있으니 절대로 놓치면 안 돼.”“아버님, 저도 알아요. 그러니 절대로 지아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소계훈은 온화하게 웃었다.“나한테 발을 안마해주는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자네는 대표님인데, 다른 사람이 이를 알면 자네를 비웃지도 몰라.”“그래도 효도가 가장 중요하죠. 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누가 험담을 할 수 있겠어요. 아버님도 안심하고 여기서 휴양하세요. 다른 것은 저에게 맡기면 되니까요. 만약 여기 장원에 장미만 심은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다면, 제가 사람 시켜 좋은 난초를 심으라고 할게요. 나중에 다리가 좀 좋아지면 제가 아버님 데리고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요.”“그래, 자네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만으로 난 만족하구나.”도윤이 방에서 나올 때, 시간은 이미 10시가 되였고 지아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그가 문을 밀고 들어오자, 지아는 침대에 누워 의학에 관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그와 들어와도 그녀는 눈을 들지 않았다.도윤은 지아의 곁으로 가서 불빛을 좀 밝게 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어두우면 눈에 안 좋아.”지아는 아예 책을 덮고 도윤을 향해 눈을 부라린 다음 침대에 누우며 바로 이불로 머리를 덮었다. ‘보이지 않으면 짜증도 나지 않는 법이지.’전에 지아가 이렇게 할 때마다 도윤은 떠났지만, 오늘 그는 떠나지 않았다.지아는 도윤이 침대 옆에 앉은 것을 느꼈고, 그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지아야, 나 곧 백채원과 결혼할 거야.”
지아는 헛구역질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뒤, 그녀는 기름기가 가득한 음식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구역질이 났다.그리고 헛구역질이 구토로 변하자, 지아는 더 이상 침착하지 못했다.지아는 섬에서 돌아온 이후로 약을 복용하지 않았고, 위도 오랫동안 아프지 않았다.그녀는 처음에 다시 위병이 도진 줄 알았는데, 요 며칠 구토 반응은 점점 더 강렬해졌고, 위병 대신 오히려 임신 초기의 증상인 것 같았다.이것을 깨닫자, 지아는 온몸이 차가워졌다.그 당시 대출혈을 겪으며 낳은 그 아이가 요절한 후, 의사는 지아의 몸이 좋지 않아 앞으로 임신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그녀는 요 2년 동안 몸조리를 한 적이 없었고, 그날 도윤이 아플 때, 얼떨결에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그때는 안전기간인 데다, 지아는 또 의사의 말을 떠올렸기에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그렇다고 바로 임신할 리가 없잖아?’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아는 자신의 생리가 이미 두 주일 째 늦었다는 것을 발견했고, 속으로 더욱 당황했다.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달래며 은근히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아, 생리가 제때에 오지 않는 것도 정상인걸. 내일 올지도 모르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어.’“지아야?” 뒤에서 소계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아는 깜짝 놀랐다.소계훈은 휠체어를 타고 와서 그녀를 관심했다.“요 며칠 너 입맛이 별로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야? 어디가 많이 아픈 거야?”“아빠, 난 괜찮아요.”지아는 재빨리 웃음을 지었다.“난초가 오늘 도착했는데, 우리 얼른 가서 봐요. 이번에 다른 꽃도 함께 도착했어요.”소계훈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자신의 딸은 걱정거리가 많았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도윤은 통이 정말 컸는데, 장미가 가득한 정원에 땅을 하나 파서 소계훈이 좋아하는 꽃을 심도록 했다.지아는 도윤의 시선이 자신에게 떨어진 것을 느끼고 얼른 삽을 들고 하인과 함께 꽃을 심었다.그녀는 비록 일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
지아는 재빨리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고 하인은 재빨리 입을 다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름이 뭐야?”“강미연이요, 저를 미연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강미연은 영리하게 대답했다.“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강미연은 계속 말했다.“대학을 금방 졸업했는데, 원예를 전공해서 장미원을 가꾸러 왔어요.”그녀의 눈빛은 매우 깨끗했다. 지아도 요 며칠 장원에 있는 하인들의 성격을 거의 파악했는데, 적어도 다른 사람이 수다를 떠는 동안 이 소녀는 줄곧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고, 여태껏 잡담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그럼 나 좀 도와줄래?”“아가씨, 별말씀을요. 아가씨는 장미 장원의 주인이니 무슨 요구를 하시든 당연하죠.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지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돼, 할 수 있겠니?”“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도련님께서 엄청 잘해 주시는 것 같은데, 아가씨가 정말 임신을 했다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요?”지아는 천천히 말했다.“너도 그가 곧 결혼한다는 거, 알고 있지? 설마 내 아이도 나처럼 영원히 명분 없이 남의 사생아로 살아가야 할까?”강미연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아가씨,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사러 갈게요.”지아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우선 빨리 자신이 임신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식사를 할 때, 지아는 줄곧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고, 입맛이 없었지만 도윤이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참아야 했다.다행히 그때 지아가 임신하자마자 바로 도윤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임신 초기에 심하게 토했을 때, 도윤은 아예 보지 못했다.그래서 어젯밤에 지아가 헛구역질을 하는 것을 보고, 도윤은 기껏해야 지아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고, 결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소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아야, 너 요 며칠 입
흰색 테스트기 위에는 두 개의 붉은 선이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하나는 색깔이 매우 짙었지만 하나는 매우 옅었다.지아는 그 두 줄을 보았을 때, 호흡이 멈추었고 머리도 새하얘졌다.‘나 임신했어, 내가 정말 아이를 가졌다니!’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일제히 밀려오자, 지아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뜻밖에도 기쁨이었다.지아가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볼 때, 그녀는 이미 눈물투성이로 되었다.지아는 일년 넘는 시간으로 그 아이를 잃은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지금 그녀는 뜻밖에도 다시 임신했다.그녀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지아는 곧 이 타이밍에 임신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녀는 죽지 않고 이미 반년 넘게 살았지만.그녀의 몸에 암세포가 있는 한, 그것은 시한폭탄이었다. 일단 폭발하면 그녀 외에 이 작은 생명까지 죽을 수 있었다.그러나 자신의 뱃속에 또 하나의 작은 생명이 다시 생겼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머니인 지아는 얼굴에 은은한 모성의 빛이 더해졌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왼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에 놓았다. 비록 지금, 아이는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작은 씨앗처럼 생겼지만 지아는 여전히 미소를 금치 못했다.그리고 눈물 하나하나가 세면대에 떨어지며 지아는 중얼거렸다.“아가야, 너 맞지? 네가 또 엄마를 찾으러 온 거지?”지아는 1년 넘게 악몽에 빠졌는데, 매번 악몽을 꿀 때마다 한 아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곤 했다.이제 아이가 마침내 다시 돌아왔으니, 지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그리고 살아갈 동력이 하나 더 많아졌다.지아는 맹세했다. 이번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아이를 잘 보호하겠다고.짧디짧은 10분 동안, 지아는 슬펐다 기뻤다 했다.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서야 지아는 천천히 걸어 나갔고, 얼굴에는 확고함이 더 생겼다.여자는 약했지만 어머니로 된 지금, 그녀는 오히려 힘이 넘쳐났다. 이제부터 그녀는 보호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지아는 도윤의 의미심장한 눈빛
도윤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 부탁을 할 때의 지아의 표정을 상상해 봤다. 그녀는 틀림없이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아이를 가지자고? 그래, 그럼 너와 네 여동생 중 한 명은 죽어야 해.”지금 그와 지아의 대화는 거의 이렇게 변했다.“당신 왜 아직도 죽지 않은 거야?”“안 죽었는데 왜 왔어?”“오늘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당신은 왜 죽으러 가지 않는 거야? 마땅한 산소를 찾지 못한 건가?”“이도윤, 나 오늘 좋은 무덤 하나 알아보았는데, 당신을 묻기에 아주 적합하더군.”“만약 정말 죽고 싶지 않다면, 내가 당신과 같이 죽을게. 이렇게 하면 당신도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지 않겠어?”지아의 얼굴에는 비아냥거리는 미소 외에 싸늘한 웃음이었고, 자신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도윤은 그래도 무척 만족했다.적어도 그는 시시각각 지아를 볼 수 있었다.소계훈을 침대에 눕힌 다음, 도윤은 다시 지아의 방으로 갔다. 문을 밀자 그는 지아가 한 손을 자신의 배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넘쳐흘렀다.다만 자신을 본 순간, 지아의 눈빛은 갑자기 차가워졌고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노크할 줄도 모르는 거야?”그녀는 마치 온몸에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처럼 시시각각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미안.”도윤은 나간 다음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여긴 분명 내 집인데, 왜 내가 낯선 사람과 같지?’‘하긴, 나와 예린이 지아에게 많은 빚을 졌지.’그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안에서 지아의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돼, 꺼져.”그러나 도윤은 여전히 문을 밀고 들어왔고, 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염치없다니깐.”도윤은 지아의 싸늘한 표정을 무시하고 곧장 걸어왔다.“지아야, 난 단지 네가 좀 보고 싶었을 뿐이야.”“나 보지 마, 정말 토할 것 같아.” 지아는 자신의 입덧 반응에 대해 좋은 핑계를 댔다.도윤은 한숨을
지아의 비웃음에 도윤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고 그저 마음이 아팠다.전의 지아는 엄청 해맑은 여자였는데,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기쁘면 됐어.”지아는 자기가 이렇게 심하게 말을 하면 도윤이 백채원을 감싸며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도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성질은 오히려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나야 당연히 기분이 좋지. 근데 당신 말이야, 팔자가 너무 센 거 아니야? 전처는 손을 쓸 수 없게 왰지, 약혼녀는 다리가 부러졌지, 어쩜 두 사람은 멀쩡한 사람 하나 없을까?”도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며 지아는 속이 후련해졌다.“나 이제 자고 싶으니까 당신도 빨리 꺼져.”“그래, 알았어. 푹 쉬어”도윤은 천천히 떠났고, 떠나기 전에 또 사람 시켜 야식을 준비하여 보내라고 했다.원래 지아는 아무런 입맛도 없었지만, 지금 뱃속에 또 하나의 작은 생명이 있다는 생각과 전에 아이를 잃은 아픔으로 그녀는 이 아이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그래서 지아는 구역질을 참으며 먹었지만, 오히려 이 아이를 너무 얕잡아 보았다.이번에 입덧 반응은 지난번보다 더 강렬했는데, 지아는 방금 입에 넣자마자 바로 토했다.강미연은 안쓰러워하며 그녀의 뒤에서 등을 두드렸다.“아가씨, 이러면 안 되는데요. 뭘 먹자마자 바로 토하다니,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야 해요.”“아니야, 제발 비밀로 해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이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야. 예전에 임신했을 때도 이렇게 토했거든.”강소연은 말을 하려다 참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먹을 것 좀 더 가져다 드릴게요. 이렇게 토하면 안 돼요. 몸이 다 망가지겠어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반드시 버텨야 했다.몇 번 먹고 몇 번 토해도 그녀는 참고 견뎌낼 것이다.지아는 단지 이번에 이 작은 생명이 순조롭게 이 세상에 태어나길 바랄 뿐이었다.지아는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남자인지 아니면 여자인지에 대해 궁금하
민아는 지아의 어깨를 두드렸다.“야, 나도 네 마음 너무 잘 알지. 그때 내가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그 썩을 놈한테 집을 사준 것처럼, 누구나 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시절이 있지 않겠어? 날 봐,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게 돈을 벌고 있잖아.”두 사람은 지난날의 풋풋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기분도 많이 좋아졌다.이때 민아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지아야, 나 목 좀 마르니까 사과 깎아 줘.”그녀는 여전히 거침없이 계속 말했다.“난 아직도 널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는데. 그때의 너는 사과도 깎을 줄 몰랐지. 우리가 샘 뵈러 갔을 때, 넌 사과 꼭지만 남을 정도로 사과를 깎았잖아. 그때 우리는 네가 재벌 집 딸이라서 이런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널 얼마나 비웃었는데. 후에 넌 개도윤을 위해…….”민아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지아가 오른손을 내민 것을 보았는데, 그녀의 손이 나른하게 늘어진 것을 보고 민아는 말을 뚝 그쳤다.“미안, 민아야, 너한테 사과를 깎아줄 수 없을 거 같아. 내가 간호사 찾아올게.”민아는 지아의 손을 잡더니 눈시울은 순식간에 붉어졌다.“누가 그랬어?”“말하자면 길어…….”“그럼 짧게 말하자. 개도윤이지? 그 남자 미친 거야? 어떻게 네 손을 다치게 할 수 있지? 넌 의사가 될 사람이잖아!”모든 사람들은 지아의 꿈이 의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독 도윤만 신경 쓰지 않았다.지아는 민아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가능한 한 평온한 척했다.“그때의 상황은 좀 복잡했어.”그녀가 담담해 할수록, 민아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줄곧 웃기를 좋아하던 민아였지만, 지금은 지아의 손등에 눈물을 뚝뚝 흘렸고, 목소리조차 떨렸다.“이럴 수가, 개도윤이 어떻게 널…….”민아의 마음속에 있어, 지아는 바로 엄친딸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 외에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노래와 춤, 피아노와 바둑 등, 지아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등학교 때, 지아는 학교를 대표해 피아노 대
민아는 코를 훌쩍이며 지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좋은 소식.”지아는 천천히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졌고, 눈을 드리우자 얼굴에는 모성애가 가득했다.“나 임신했어.”“뭐?”민아는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그럼 나쁜 소식은?”“이도윤의 아이야.”민아는 한참이 걸려서야 이 소식을 받아들였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한참 동안 냉정한 후에야 민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러니까, 네가 임신한 이 상황에서, 그가 뜻밖에도 백채원과 결혼하기로 선택한 거야? 그 남자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이 결혼 정말 안 하면 안 되나 보지?”지아는 고개를 저었다.“그는 내가 임신한 거 몰라. 심지어 나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어.”“설마 너 시험관 시술이라도 받은 거야?” 민아는 눈을 깜박였다.“비록 개도윤은 좀 잘생기긴 했지만, 전 세계에 그란 남자만이 있는 건 아니잖아. 넌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혼혈아를 낳을 순 없는 거야?”“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와 관계를 가질 때, 그는 열이 나서 전혀 의식이 없었던 거라고.”“이 개자식은 꿈만 꾸다가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니,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지? 넌 어쩌려고? 설마 아이를 낳으려는 건 아니겠지?”지아는 입을 열었다.“맞아, 이 아이를 낳고 싶어.”이 말을 하자마자 민아는 바로 흥분했다.“지아야, 너 미쳤어! 이렇게 할 순 없어. 넌 그 아이가 종양의 크기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거야? 넌 몸이 좋지 않은 데다 아이는 태반을 통해 끊임없이 네 영양을 섭취할 거야. 그럼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넌 죽을 수도 있다고.”“민아야, 네가 말한 거, 나도 다 알아.”“알면 더욱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해선 안 되잖아. 네가 전에 잃어버린 아이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러나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야. 지금 네 상태는 간신히 안정되었는데, 심지어 앞으로 5년을 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