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모퉁이에서 진봉은 가속페달을 밟았고,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나타났다.지아는 뒤를 바라보았는데, 그 뮬산은 중간에 갇혔고, 앞뒤 좌우로 4대의 차가 나타났다.‘누굴까?’몇 분 후, 뮬산은 강제로 멈추었다.진봉은 성질이 사나워서 지아를 달랜 다음 바로 차에서 내렸다.‘대체 누가 이렇게 겁도 없이 우릴 미행한 거지?’뮬산은 비록 강제로 멈추었지만, 검은 유리가 안의 모든 것을 막았고, 진봉은 건달처럼 차창을 두드렸다.“스스로 내려올래 아니면 내가 문을 부술 때까지 기다릴래?”주위의 십여 명의 경호원은 일제히 차를 포위했고, 길가의 행인들은 호기심에 모두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방탄유리가 천천히 내려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릎에 걸친 손이었다.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에는 눈부신 사파이어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그리고 네이비 색 양복은 빳빳했고, 셔츠조차도 주름이 없었다.남자의 잘생긴 턱선이 조금씩 드러나더니 그 칠흑 같은 동공은 진봉과 마주쳤다.진봉은 비록 겁이 없고 머리도 둔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소시후 대표님.”전에 진봉은 도윤을 따라 국제금융회의에 참가했는데, 소시후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남자는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도 비길 데 없는 귀티가 났다.“무슨 일이지?” 진봉을 바라보는 소시후의 좁고 긴 눈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진봉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귀신을 잡다 오히려 귀족을 잡았다니.“죄송합니다.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오해?” 소시후는 차갑게 웃었는데, 진봉에 대답에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진봉은 도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또 무엇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때 지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확실히 오해예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봉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눈빛은 순식간에 바뀌더니 그는 심지어 차 문을 열고 내려왔다.지아는 먼저 설명했다.“최근 안 좋은 일이 좀 생겨서 집안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어서요. 악당에게 찍힌 줄 알고 그런 것이니
지아는 급히 병원으로 돌아갔고, 변진희는 이미 응급실에 실려 갔다.백정일은 멍하니 수술실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지아는 손에 먹을 것을 가득 들고 있었다.“아저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제가 떠나기 전에 엄마의 상태는 나름 괜찮았고, 심지어 만두까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구급실에 실려간 거예요?”백정일은 지아가 손에 들고 있는 먹을 것을 보고 목이 멨다.“갑…… 갑자기 피를 흘리기 시작했어.”지아는 재빨리 손에 든 물건을 의자에 올려놓고 백정일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매우 거칠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그렇게 강하고 의지가 굳센 남자가 지금 몸이 떨릴 정도로 두려워하자 지아는 위로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예요. 아저씨, 꼭 강해져야 돼요.”백정일은 공포를 느꼈고,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이번에는 달라. 넌 피투성이가 된 진희를 못 봐서 그래. 아마도 이번에 버티지 못할 것 같구나.”지아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도 의대를 나왔기에 의문이 들었다.“제가 떠난 후, 엄마 혹시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이상해서 그래요. 백혈병을 발견했을 때, 말기가 아니었고 엄마도 그동안 줄곧 병원에서 요양을 했잖아요. 비록 병세가 조금씩 악화되겠지만 이유 없이 갑자기 이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지아야, 그게 무슨 뜻이야?”지아는 백정일이 냉정해진 것을 보고 그제야 손을 놓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아저씨, 반년 전에 우리 아빠도 병원에서 휴양을 하셨거든요. 그때 그의 몸은 이미 많이 좋아졌고, 각 방면의 상황도 모두 안정적이었어요. 그날, 간병하던 아주머니는 우리 아빠에게 아침밥을 사주러 갔는데, 돌아왔을 때 그는 바로 응급실로 실려갔어요. 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식물인간이 되었고요.”지아는 멈추더니 계속 말했다.“처음에는 저도 아저씨처럼 병세가 악화된 줄 알았는데, 후에 많은 일이 생겼고, 저는 그제야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부터 식물인간으로 된 것이 모두 남이 일부러 한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지난번에 제
백채원이 대답했다.“그야 당연히 가장 먼저 의사와 간호사를 불렀죠. 근데 아침에 뭘 잘못 먹었는지 배탈나는 바람에 난 화장실에 갔어요. 그리고 지금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달려왔고요. 아줌마는 괜찮은 거예요?”백정일은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상황이 매우 좋지 않구나.”“아빠, 안심하세요. 아줌마는 별일 없을 거예요. 요 며칠 나도 집에서 많은 반성을 했는데, 전에 난 아줌마가 가식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야 아줌마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전에 아줌마를 그렇게 대한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좋아지면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화나게 하지 않을 거예요.”이 말을 듣고 백정일은 백채원을 껴안았다.“네 엄마는 괜찮을 거야. 우리 가족은 이번 고비를 넘길 거라고.”“네.”이 장면을 본 소지아는 마음이 복잡했다.결국 백채원은 전에 그렇게 모질게 자신을 대했고, 그들 사이에는 심지어 한 아이의 목숨까지 걸린 피맺힌 원한이 남아 있었기에, 사실 지아는 백채원이 행복하길 원하지 않았다.시선을 돌리려 할 때, 지아는 갑자기 백채원이 두 손으로 옷자락을 꼭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정상인들은 이때 아마 자신의 아버지를 안고 위로를 하겠지만, 지아는 그녀의 표정에서 복잡한 기색을 보았다.긴장, 죄책감 심지어 두려움.잠시 후, 변진희는 다시 밀려나왔지만, 이번에 그녀는 깨어나지 못했다.백정일은 얼른 다가가서 물었다.“내 아내는 어떻게 됐지?”의사는 마스크를 벗었다.“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요. 비록 수술은 성공했지만 사모님은 이미 의식을 잃었거든요. 지금 중환자실에 보내 관찰을 좀 해야 하는데, 사모님의 이런 상황은 마지막 방법밖에 없어요. 지금은 반드시 빨리 이식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의사는 백정일의 얼굴을 힐끗 훑으며 말했다.“이번 달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네요.”백정일은 큰 타격을 입으며 몇 걸음 후퇴했다.“어떻게 이럴 수가.”“사모님은
도윤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는 지아와 이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지아야, 나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 도윤은 꿀 먹은 벙어리와도 같았다.지아는 싸늘하게 웃었다.“그녀는 우리의 아이를 죽였고, 날 2년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게 만들었어. 심지어 지금은 이런 일까지 저질렀는데, 난 정말 궁금해. 당신이 매번 그녀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그 이유가 말이야.”‘만약 이도윤이 정말 백채원을 사랑한다면, 또 어떻게 이렇게 내 환심을 사려 하겠어? 그는 종래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어떤 일들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때가 되면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할게.”때가 되면. 지아는 대체 언제 그가 말한 그 때가 올지 몰랐다.그녀는 단지 자신이 이 일에 말려들어 집안이 망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좀 쉬어, 내가 가서 닭볶음탕 준비할게.” 도윤은 일부러 이 화제를 피하며 서둘러 주방으로 걸어갔다.솥을 열자, 음식의 향긋한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는 나무 주걱으로 가볍게 휘저었다.핸드폰이 진동하자 도윤이 전화를 받았는데 진환의 목소리였다.“대표님, 조사 결과, 사모님은 확실히 소시후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단지 사람을 응급실에 보내 비용을 대신 지불한 후 급히 떠나셨고, 소시후와 다른 왕래가 없었습니다.”도윤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무척 불쾌했다.“소시후 쪽은 어떻게 된 일이지?”“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업무상의 일을 위해 온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아마 사적인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몰래 소시후의 신체검사 보고서를 찾아냈습니다.”“무슨 병이지?”진환은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신기능 부전입니다.”“알았어, 사람 시켜 잘 감시해.”“네.”“참…….”도윤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고, 곁눈질로 문 쪽을 향해 바라보았는데 지아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간 것을 발견하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독충 쪽은 어떻게 됐어?”“아직은 결과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보호를 제공한 모양인
도윤은 진봉에게 분부한 다음 식힌 닭볶음탕을 들고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욕실에서 씻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아는 온몸에 물기를 띠고 나왔다.문을 밀자, 그녀는 도윤을 보았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말리지 않아 축축하게 드리워졌고, 하얀 얼굴은 정교했으며, 잠옷은 그녀의 가녀린 쇄골을 드러냈다.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시선을 옮겼고 은근히 침을 삼켰다.이런 지아의 모습은 늘 그로 하여금 그 꿈을 생각하게 했다. 피부의 촉감조차도 너무 진실했다.심지어 도윤은 아직도 지아의 체온과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닭볶음탕 다 끓였는데, 와서 맛 있는지 좀 먹어봐.”이른 아침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지아는 아직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했고 위는 이미 은근히 아프기 시작했다.그녀는 백정일에 의해 여기로 끌려오면서, 약조차 가져오지 않았다.그것은 한달의 복용량이었는데, 그 약을 복용한 두 주일 동안, 지아는 위가 아프지도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주원은 약을 끊지 말고 반드시 매일 제때에 복용해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그러나 돌아온 요 며칠 동안, 그의 전화는 줄곧 통하지 않은 상태였고, 약을 끊은 결과는 바로 위가 다시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래서 지아도 자신의 몸을 괴롭히지 않았다.“고마워.”지아는 도윤이 자신에게 약을 먹이려는 손을 피했다. 국의 온도가 딱이어서 그녀는 꿀꺽꿀꺽 단숨에 다 마셨다.도윤은 수건을 가져와 가볍게 지아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마치 그녀가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그는 말할 수 없이 조심스러웠다.지아는 그저 우습다고 여겼을 뿐, 그를 막지 않았다.배불리 먹은 다음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나 이제 잘래.”비록 지아는 지금 도윤과 다투지 않고 또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도윤은 그들 사이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떠날 수밖에 없다.“푹 쉬어.”지
독충이란 이름을 듣자, 지아는 즉시 엄숙해졌다.“아저씨, 저도 사실대로 말할게요. 전에 저를 납치한 사람들이 바로 독충과 관계가 있었어요. 그녀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요.”“알아, 나도 전에 그녀들을 극도로 증오했거든. 그녀들은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짓밟았지만 그 역시 사람을 기사회생시킬 수 있었지. 진희를 위해서라면, 나도 다른 선택이 없구나.”지아는 이번에 상대방이 자신 때문에 변진희를 겨냥했는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은 무척 악독했기에 함정을 만들어 백정일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그녀들을 찾는 것은 악마와 계약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지아야, 넌 진희가 떠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거야?”만약 일주일 전이었다면, 지아는 변진희의 생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 그녀는 변진희의 품에 안겨 있었으니, 지아는 이대로 변진희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올 때 진봉도 조사결과를 그녀에게 알려주었는데, 병실에 출입한 외부인은 오직 백채원뿐이었다.‘그런데 백채원은 정말 자신의 양어머니에게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을까? 그녀의 동기는 또 무엇일까?’아무튼 이것은 모두 지아의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지아가 침묵하는 것을 보고 백정일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아야,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어.”지아는 의기소침하게 떠나는 백정일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무력감을 느꼈다.지아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권력도 세력도 없었고 심지어 독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그녀는 변진희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가 배운 전공과 맞지 않았으니 지금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이도윤에게 도움을 청할까?’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이예린과 백채원이 있었다.지아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 두 후보는 모두 도윤과 관계가 깊었기에 지아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지아가 일어날 때, 가방이 땅에 떨어졌고 잘 닫지 못한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이 빠져나왔다.그녀는 허리를 굽혀 주웠지만, 시선은 소시후 세 글자에서 잠시 멈추었다.
백채원은 이도윤의 전화를 끊은 후, 당황하던 마음이 갑자기 기쁨에 잠겼다.‘도윤이 마침내 나와 결혼하려 하는구나!’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일이었다.백채원은 마음속의 답답함을 떨치고 특별히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서야 외출했다.외출할 때, 백채원은 전화 한 통을 받았고, 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간청했다.“난 이미 말한 대로 했단 말이에요. 그 여자는 오래 살 수 없을 테니까 나 내일 떠나면 안 돼요? 이따가 중요한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안돼! 네 골수가 그녀와 일치한다는 거 잊지 마.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면 그녀는 여전히 살 수 있어. 내가 사람을 보내 널 데리러 갈게. 너는 3일만 숨어 있어. 3일 후, 그녀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백채원은 짜증이 좀 났다.“그래요, 저녁만 먹고 갈게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조금만 더 있어도 괜찮겠지.’차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백채원은 또다시 변진희의 얼굴을 떠올렸다.‘전에 그렇게 싫어했던 사람이 마침내 죽었으니 난 기뻐해야 할텐데.’백채원은 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려고 했다. 손가락이 변진희가 준 카드에 닿자, 그녀는 멈칫했다.변진희는 카드의 비밀번호가 자신의 생일이라고 말했는데, 그동안 백채원은 줄곧 변진희의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죽어야 할까?’백채원은 마음이 또 복잡해졌다.도윤이 어디에 도착했냐고 묻는 문자를 보고서야 백채원은 기분이 좀 풀렸고 급히 위치를 알렸다.그녀는 음성 버튼을 눌렀다.“도윤 씨, 10분 후에 도착할 거예요, 기다…… 쾅.”음성통화는 중단되었고, 마지막 순간은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도윤은 즉시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전화를 했지만 이미 아무도 받지 않는 상태였다.“방향 돌려, 백채원에게 사고가 났어!”백채원의 차는 맞은편에서 뛰쳐나온 대형 화물차에 부딪혀 날아갔고 길가의 큰 나무를 들이박았다.그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었다.
백채원은 신속하게 다른 한 화물차로 옮겨졌고, 차에는 구급차에 비견될 정도로 전문적인 의료 용구와 의사가 갖추어져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누군가가 백채원의 상처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숨을 크게 쉬고 있었다.백채원의 의식은 아직 깨어나지 않아 눈에 초점이 없었고, 그녀는 몇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처리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피를 엄청 많이 흘렸으니 이번엔 정말 죽겠지.’백채원의 머릿속에는 많은 화면이 떠올랐고, 마지막에는 변진희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과 그녀가 지아를 배에서 밀어낸 장면에서 멈췄다.백채원은 마치 온 하늘에 눈송이가 흩날리며 바닷바람을 휩쓸고 정면으로 불어오는 것을 다시 본 것 같았다.그날의 바닷물은 매우 차가웠고, 지아는 이로 인해 그녀의 아이를 잃었다.‘이것이 바로 내가 남을 해쳐서 받는 벌이야.’‘근데 난 왜 그랬을까?’차는 어디론가 향해 질주했고, 백채원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밀려 내려왔다.처음부터 끝까지 백채원은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백채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름답고 큰 장미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두 다리를 꼬자 섹시한 긴 다리가 드러났다.피부는 새하얀 데다 몸매는 가늘고 아름다웠다.얼굴에 더욱 정교한 화장을 한 그녀는 백채원을 나른하게 바라보았다.백채원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입술을 가볍게 떨고 있었는데, 내뿜은 숨은 하얀 안개처럼 마스크에 번져 가벼운 소리를 냈다.여자는 일어서서 아름다운 몸짓을 움직이며 백채원을 향해 다가갔다. 피투성이가 된 백채원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백채원은 그 여자의 손목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자신의 손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여자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나타났다.“그 교통사고, 내가 계획한 것이냐고 묻고 싶은 거지?”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그 손가락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