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진봉에게 분부한 다음 식힌 닭볶음탕을 들고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욕실에서 씻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아는 온몸에 물기를 띠고 나왔다.문을 밀자, 그녀는 도윤을 보았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말리지 않아 축축하게 드리워졌고, 하얀 얼굴은 정교했으며, 잠옷은 그녀의 가녀린 쇄골을 드러냈다.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시선을 옮겼고 은근히 침을 삼켰다.이런 지아의 모습은 늘 그로 하여금 그 꿈을 생각하게 했다. 피부의 촉감조차도 너무 진실했다.심지어 도윤은 아직도 지아의 체온과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닭볶음탕 다 끓였는데, 와서 맛 있는지 좀 먹어봐.”이른 아침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지아는 아직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했고 위는 이미 은근히 아프기 시작했다.그녀는 백정일에 의해 여기로 끌려오면서, 약조차 가져오지 않았다.그것은 한달의 복용량이었는데, 그 약을 복용한 두 주일 동안, 지아는 위가 아프지도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주원은 약을 끊지 말고 반드시 매일 제때에 복용해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그러나 돌아온 요 며칠 동안, 그의 전화는 줄곧 통하지 않은 상태였고, 약을 끊은 결과는 바로 위가 다시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래서 지아도 자신의 몸을 괴롭히지 않았다.“고마워.”지아는 도윤이 자신에게 약을 먹이려는 손을 피했다. 국의 온도가 딱이어서 그녀는 꿀꺽꿀꺽 단숨에 다 마셨다.도윤은 수건을 가져와 가볍게 지아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마치 그녀가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그는 말할 수 없이 조심스러웠다.지아는 그저 우습다고 여겼을 뿐, 그를 막지 않았다.배불리 먹은 다음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나 이제 잘래.”비록 지아는 지금 도윤과 다투지 않고 또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도윤은 그들 사이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떠날 수밖에 없다.“푹 쉬어.”지
독충이란 이름을 듣자, 지아는 즉시 엄숙해졌다.“아저씨, 저도 사실대로 말할게요. 전에 저를 납치한 사람들이 바로 독충과 관계가 있었어요. 그녀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요.”“알아, 나도 전에 그녀들을 극도로 증오했거든. 그녀들은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짓밟았지만 그 역시 사람을 기사회생시킬 수 있었지. 진희를 위해서라면, 나도 다른 선택이 없구나.”지아는 이번에 상대방이 자신 때문에 변진희를 겨냥했는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은 무척 악독했기에 함정을 만들어 백정일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그녀들을 찾는 것은 악마와 계약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지아야, 넌 진희가 떠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거야?”만약 일주일 전이었다면, 지아는 변진희의 생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 그녀는 변진희의 품에 안겨 있었으니, 지아는 이대로 변진희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올 때 진봉도 조사결과를 그녀에게 알려주었는데, 병실에 출입한 외부인은 오직 백채원뿐이었다.‘그런데 백채원은 정말 자신의 양어머니에게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을까? 그녀의 동기는 또 무엇일까?’아무튼 이것은 모두 지아의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지아가 침묵하는 것을 보고 백정일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아야,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어.”지아는 의기소침하게 떠나는 백정일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무력감을 느꼈다.지아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권력도 세력도 없었고 심지어 독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그녀는 변진희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가 배운 전공과 맞지 않았으니 지금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이도윤에게 도움을 청할까?’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이예린과 백채원이 있었다.지아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 두 후보는 모두 도윤과 관계가 깊었기에 지아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지아가 일어날 때, 가방이 땅에 떨어졌고 잘 닫지 못한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이 빠져나왔다.그녀는 허리를 굽혀 주웠지만, 시선은 소시후 세 글자에서 잠시 멈추었다.
백채원은 이도윤의 전화를 끊은 후, 당황하던 마음이 갑자기 기쁨에 잠겼다.‘도윤이 마침내 나와 결혼하려 하는구나!’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일이었다.백채원은 마음속의 답답함을 떨치고 특별히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서야 외출했다.외출할 때, 백채원은 전화 한 통을 받았고, 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간청했다.“난 이미 말한 대로 했단 말이에요. 그 여자는 오래 살 수 없을 테니까 나 내일 떠나면 안 돼요? 이따가 중요한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안돼! 네 골수가 그녀와 일치한다는 거 잊지 마.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면 그녀는 여전히 살 수 있어. 내가 사람을 보내 널 데리러 갈게. 너는 3일만 숨어 있어. 3일 후, 그녀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백채원은 짜증이 좀 났다.“그래요, 저녁만 먹고 갈게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조금만 더 있어도 괜찮겠지.’차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백채원은 또다시 변진희의 얼굴을 떠올렸다.‘전에 그렇게 싫어했던 사람이 마침내 죽었으니 난 기뻐해야 할텐데.’백채원은 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려고 했다. 손가락이 변진희가 준 카드에 닿자, 그녀는 멈칫했다.변진희는 카드의 비밀번호가 자신의 생일이라고 말했는데, 그동안 백채원은 줄곧 변진희의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죽어야 할까?’백채원은 마음이 또 복잡해졌다.도윤이 어디에 도착했냐고 묻는 문자를 보고서야 백채원은 기분이 좀 풀렸고 급히 위치를 알렸다.그녀는 음성 버튼을 눌렀다.“도윤 씨, 10분 후에 도착할 거예요, 기다…… 쾅.”음성통화는 중단되었고, 마지막 순간은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도윤은 즉시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전화를 했지만 이미 아무도 받지 않는 상태였다.“방향 돌려, 백채원에게 사고가 났어!”백채원의 차는 맞은편에서 뛰쳐나온 대형 화물차에 부딪혀 날아갔고 길가의 큰 나무를 들이박았다.그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었다.
백채원은 신속하게 다른 한 화물차로 옮겨졌고, 차에는 구급차에 비견될 정도로 전문적인 의료 용구와 의사가 갖추어져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누군가가 백채원의 상처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숨을 크게 쉬고 있었다.백채원의 의식은 아직 깨어나지 않아 눈에 초점이 없었고, 그녀는 몇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처리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피를 엄청 많이 흘렸으니 이번엔 정말 죽겠지.’백채원의 머릿속에는 많은 화면이 떠올랐고, 마지막에는 변진희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과 그녀가 지아를 배에서 밀어낸 장면에서 멈췄다.백채원은 마치 온 하늘에 눈송이가 흩날리며 바닷바람을 휩쓸고 정면으로 불어오는 것을 다시 본 것 같았다.그날의 바닷물은 매우 차가웠고, 지아는 이로 인해 그녀의 아이를 잃었다.‘이것이 바로 내가 남을 해쳐서 받는 벌이야.’‘근데 난 왜 그랬을까?’차는 어디론가 향해 질주했고, 백채원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밀려 내려왔다.처음부터 끝까지 백채원은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백채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름답고 큰 장미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두 다리를 꼬자 섹시한 긴 다리가 드러났다.피부는 새하얀 데다 몸매는 가늘고 아름다웠다.얼굴에 더욱 정교한 화장을 한 그녀는 백채원을 나른하게 바라보았다.백채원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입술을 가볍게 떨고 있었는데, 내뿜은 숨은 하얀 안개처럼 마스크에 번져 가벼운 소리를 냈다.여자는 일어서서 아름다운 몸짓을 움직이며 백채원을 향해 다가갔다. 피투성이가 된 백채원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백채원은 그 여자의 손목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자신의 손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여자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나타났다.“그 교통사고, 내가 계획한 것이냐고 묻고 싶은 거지?”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그 손가락은
카페.소지아는 아주 일찍 도착했다. 소시후의 신분을 알게 된 후, 그녀는 다소 긴장했다. 소씨 집안은 파산하기 전에 A시에서 겨우 2등급 수준의 그룹이었다.그리고 상대방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인데다, 평소에 접견하는 사람들은 고급 정부 요인이나 업계 거물이었다.소시후가 문을 밀고 들어오자 지아는 바삐 일어섰는데, 잔뜩 긴장을 보였다.“안녕하세요.”앞서 두 번 만났을 때, 지아는 항상 급해했다. 생김새 때문인지 소시후는 오히려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으니 얼른 앉아요.”두 사람이 마주 앉자, 지아는 두 손을 맞잡고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미안해요, 대표님, 내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부탁은 무슨.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 어떤 도움이 필요하든지 입만 열면 돼요.”소시후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진심으로 지아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돈을 주며 그녀를 보냈을 것이다.“시간이 급하니 나도 말을 빙빙 돌리지 않겠어요. 대표님, 독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방금 레몬물을 두 모금 마신 소시후는 담담하게 컵을 내려놓았고 안색은 여전히 평온했다.“아, 일반인보다 좀 더 많이 알고 있죠. 지아 씨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솔직히 말하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얼마 전에 난 독충의 사람에게 납치되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그들 중 한 명은 여러 차례 나에게 손을 대려고 했고요. 그러나 현재 우리 엄마는 백혈병에 걸렸고,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어요. 그녀는 원래 말기가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 병세가 갑자기 심해졌고, 의사는 이미 위독 통지서를 내렸어요.”지아는 아주 빨리 말했고 겨우 세 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난 독충이 그녀에게 손을 댔다고 의심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는 갑자기 발병하기 시작했고요. 지금 나의 계부는 엄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독충의 사람을
소시후는 다시 룸으로 돌아왔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이미 사람 시켜 지아 씨의 부탁을 처리하라고 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남자는 많이 아파보였지만, 웃으면 왼쪽 볼에 작은 보조개가 하나 있어 그를 많이 부드럽게 만들었다.“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대표님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않는 거죠? 또 지난번처럼 쓰러지면 어떡하려고요.”“고질병이라 이미 습관됐어요.”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오자 지아는 그를 향해 웃었다.“마음대로 주문했는데 대표님의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네요.”소시후가 줄곧 부드러움을 유지했기 때문인지 지아도 처음처럼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다.식사하는 동안, 지아는 놀랍게도 자신이 소시후의 입맛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두 사람도 점차 친근해졌다.처음부터 끝까지 소시후는 온화한 눈빛으로 지아를 보았다.“지아 씨를 보면 내 여동생이 생각나는군. 그녀도 너보다 그리 크진 않거든.”“그럼 여동생이란 분은 아주 예쁘겠네요.”여동생을 언급하자, 소시후의 눈빛이 밝아졌다.“음, 아주 예쁘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의 귀염둥이였고 아주 응석받이로 자랐는데, 지금은…….”여기까지 말하자 소시후의 눈빛은 갑자기 어두워졌고, 지아는 얼른 물었다.“무슨 일 생겼어요?”“그 녀석이 실종됐어. 내가 이번에 온 것도 그녀를 찾기 위해서고. 최근에 알아낸 소식은 그녀가 입국했다는 거야.”“그럼 아직도 A 시에 있는 건가요?”“그런 잘 모르겠어. 그녀가 확실히 A시에 왔다는 것만 단정할 수밖에 없어서. 아마도 우리에게 발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종적을 감췄을 거야. 내가 이쪽에 와도 미처 그녀의 행방을 찾지 못했으니까.”“어쩐지 그날 길가에 쓰러지셨더라니, 동생분을 찾기 위해서였군요?”소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는 휴대전화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았다.“이게 바로 내 여동생이야. 난 조만간 A시를 떠날 건데, 만약 뭐라도 발견
지아는 소씨 가문이 율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상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씨 집안의 재력에 경탄했다.‘수천 억을 들고 도망을 갔다고?’“그럼 당신들과 연락한 적은 없나요?”“응, 그녀는 떠나기 전에 모든 가족을 차단했어. 그래서 우리는 그녀와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고.”“그럼 돈은요? 그녀는 돈을 써야하지 않겠어요? 이를 통해 그녀의 위치를 판단할 수 없나요?”소시후는 고개를 저었다.“그게 가능했으면 좋겠지만 두 달 전, 율이는 소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떠날 때 온 가족이 그녀가 남긴 난장판을 수습하고 있었어. 우리는 율이를 너무 핍박하여 그녀가 더욱 미친 일을 할까 봐 먼저 그녀를 내버려뒀어. 바깥의 무서움을 알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하지만 그녀가 떠나자마자 일부러 종적을 감추고 신속하게 돈세탁을 해 그녀의 계좌에 있는 수천억의 자산을 이전할 줄은 몰랐어. 우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율이는 이미 A시에 도착했고, 계좌는 텅 비어 있어 소비 기록으로 그녀를 찾을 수 없었던 거야.”지아는 들을수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도망치는 것 같지가 않고 마치 누군가 일찍 계획한 것처럼 느껴지네요. 짧은 시간에 돈세탁을 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전문적인 팀이 있을 것이고, 또 자신의 행방을 숨길 수 있었다니. 나는 율이 아가씨가 다른 사람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우리도 이런 추측을 하고 특별히 그 남자의 가족을 찾아갔는데, 그의 국적과 신분이 전부 가짜란 것을 발견했어.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몰라. 가족은 이미 한달 내내 율이를 찾고 있었고, 나도 특별히 A시로 날아온 거야. 왜냐하면 그녀는 전에 이 나라가 너무 좋아서 이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나 내가 여기에 온지 일주일이나 넘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소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우리 가족은 모두 안달이 났어. 가능한 한 빨리 율이를 찾아야 하는데, 얘도 참…….”
소시후는 사방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사실대로 말하였다.“사실 맨처음에 독충은 천웅이란 의학조직이었어. 천하 사람들의 영웅이란 것을 의미하거든. 이 조직을 건립하는 초심은 과학연구를 위해, 인류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어. 각국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했는데, 바로 인류가 해결할 수 없는 병증을 공략하기 위해서야. 예를 들면 암, 에이즈, 백혈병, 광견병 및 각종 바이러스로 인한 병증들. 그러나 후에 조직 내부에서 점차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지.”“어떡해요?”“어떤 실험은 아주 잔혹했거든. 실험은 보통 임상적인 시험이 필요한데, 그것은 한두 명의 사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은 고가로 자원자를 모집했고 또 그들더러 자발적으로 생사 협의서에 사인하라고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어. 그렇게 실험체가 부족하면 일부 특수한 경로를 빌어야 하지.”여기까지 말하자, 소시후는 지아를 한 번 보았다.“양심을 어기고 불법적인 수단으로 사람을 상품으로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조직이 많다는 거, 알고 있어? 이런 경로를 통해 구매한 사람들은 강한 생존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 거야.”“일부 사람들은 생존욕이 있는 사람에게 실험을 하는 것은 양심이 없고, 살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어. 다른 일부 사람들은 좋은 결과만 있다면 이 사람들의 희생은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이는 가치가 있다고 믿었거든.”“이로 인해 양쪽에서 격렬한 다툼이 벌어진 후, 일부 극단적인 학자들은 천웅에서 나와 그 후 다시 독충이라는 조직을 세웠지. 천웅과 독충은 마치 해와 달 같았고, 행동 방식도 확연히 달랐지. 심지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변하면서, 사람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한 거야.”지아는 속으로 감탄했다.“이런 일이 있었군요.”“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독충은 비록 많은 국가의 정부 요인들과 이익 관계를 형성했지만, 이 나라에서는 줄곧 엄격히 단속하며 금지하고 있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