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채원은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구조를 요청했다.“도윤 씨, 아빠, 살려줘요! 제발 나 구해요, 나 죽고 싶지 않아요.”그러나 소지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을 먹지 않아 위가 슬슬 아프기 시작했고 이마에는 땀이 빽빽이 맺혔으며 바닷바람은 더욱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지아는 백채원처럼 도움을 청할 힘이 없었고, 허리춤에 감긴 밧줄에 숨이 조여왔다.그녀는 애원하든 애원하지 않든 결과가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윤은 1년 전에 백채원을 선택했으니 1년 후인 지금, 여전히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다만 이번에 지아는 더 이상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고, 영원히 나타날 수 없는 결과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희망이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지아가 의기소침해지며 자신이 어떻게 도망갈 수 있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그리고 연회장의 화면이 나타났다.그 중 변진희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뚜렷했다.“채원아, 지아야, 너희들 괜찮니?”지아는 조금의 파동도 없는 눈을 천천히 떴다. 비록 얼굴에 검은 천을 덮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바라보았다.백채원은 이 소리를 듣고 더욱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엄마, 살려주세요!”“채원아, 안심해. 네 아빠가 반드시 너를 구할 거야.”지아는 위가 매우 아팠고, 입술도 말라서 약간 갈라졌다. 그녀는 입술을 핥았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도윤의 선택보다 지아는 자신이 변진희의 선택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결국 변진희는 지아의 친어머니였다. 지아는 자신의 곰돌이 시계를 만졌고, 속으로 매우 불안했다.마치 성적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입시생들처럼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긴장을 느꼈다.비록 변진희는 지아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래도 그녀는 백채원의 계모일 뿐이었다.‘친딸과 의붓딸 사이에서, 그래도 날 선택하겠지?’뻔
만약 상대방이 돈을 원한다면, 이씨와 백씨 두 집안이 약혼으로 손을 잡은 이상,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것이 바로 돈이었다.그래서 그들은 상대방이 돈보다 다른 중요한 것을 원할까 봐 두려웠다.백씨 집안 어르신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팔걸이에 올려놓은 마른 손등에 핏줄이 드러났다.백정일은 표정이 엄숙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돈에 비해 이도윤의 신분이 절대 폭로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설사 오늘 백채원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도윤의 비밀을 지켜야 했다.어르신은 백정일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바로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그들의 손녀, 딸 백채원이 바다 속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어도, 그 비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아무것도 모르는 변진희만이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말해봐, 얼른 말하라고.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돈을 얼마나 원하는데, 우리는 다 줄 수 있다고.”“백 부인의 눈물은 정말 사람을 감동시키는군요. 내 가슴까지 아프게 하다니.”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비록 안타까운 말투였지만 사람의 귀에 떨어지니 말할 수 없이 음산했다.아니나 다를까 그 목소리는 또 한마디 덧붙였다.“이렇게 슬픈 눈물이 과연 의붓딸을 위한 것인지 친딸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네요.”변진희는 코를 훌쩍거렸다.“그녀들은 모두 나의 딸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허.”상대방은 가볍게 웃었다.“당연히 있죠. 비록 열 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지만 결국 다르잖아요.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단지 당신들과 폭탄 게임을 하고 싶어요.”“모두들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겠죠? 폭탄 제거 전문가가 마지막 고비에 이르러 두 개의 선 중 하나를 끊는 상황에 부딪치는 것을. 하나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쿵하고 터지는 소리죠.”상대방은 일부러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흉내 냈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랐다.“자, 그녀들은 지금 각각 파란색과 빨간색의 실로 묶여 있죠. 게임 규칙은 당신들이 1분
변진희는 대형 스크린에 비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일부러 고화질 화면에 그녀들의 모습을 가까이 보여주었다.그래서 사람들은 인질의 상태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백채원이 입은 드레스의 화려한 다이아몬드는 햇빛에 눈부신 빛을 반사했다.눈을 가린 검은 천은 이미 눈물에 흠뻑 젖었고, 눈물은 백채원이 오늘 아침 정성 들여 화장한 얼굴을 망가뜨렸다.그러나 이때의 백채원은 이미 자신이 창피한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반면, 소지아는 백채원과 너무나도 달랐다.눈이 가려져 아무도 지아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어떤 사람들은 지아가 이미 기절한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그리고 지아 머리에 맺힌 땀방울을 본 사람도 있었다.그것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아니라 땀이었다.지아는 분명히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 피부색은 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하얬고 심지어 입술까지 이상할 정도로 하얗게 비쳤다.“이도윤 전처는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생사의 고비에 이르렀는데 왜 당황하는 기색이 없지?”“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가?”“구조를 요청하는 것은 살고 싶은 희망이 있는 것이지.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니, 자신이 포기될 그 사람이라고 이미 예상한 것 같은데. 아무리 반항해도 같은 결말인 이상, 왜 이런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려 하겠어?”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여태껏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이 전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모두들의 추측에 줄곧 입을 열지 않던 지아가 천천히 말했다.“엄마, 나도 궁금해요. 나와 백채원 중 누구를 선택할 거예요?”이번에 지아는 변진희를 백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랜만에 엄마라고 불렀다.다른 때였으면 변진희는 분명 기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지아는 조용히 말했다.“난 당신이 어릴 때부터 날 무시한 것을 탓하지
생사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소지아는 죽기 전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변진희를 보고 싶었다.지아는 자신이 요 몇 년 동안 헛되이 기다리지 않았고, 그녀들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단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지아가 원하는 것은 변진희의 실제적인 모성애이지, 입으로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지아는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변진희의 표정을 보지 못했고 순간 초조하고 불안해졌다.그녀는 이미 백채원에게 한 번 졌으니 두 번 다시 지고 싶지 않았다.오랫동안 변진희의 대답을 얻지 못하자, 판다 인형은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왜요, 친딸과 의붓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요?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죠. 여봐라, 지금 당장 그 밧줄 두 개를 잘라버려.”“안 돼!” 변진희는 비명을 질렀다.“채원을 선택할게.”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나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뜻밖에도 의붓딸을 선택했다니?”“이 세상에 정말 자기 딸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있다니, 나도 참 신기한 일을 본 셈이네.”“너희 젊은이들이 뭘 안다고? 사람들은 항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법이지. 그녀가 백씨 집안으로 들어간 이상, 당연히 백씨 집안의 이익에 대해 고려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어떡하려고?”“자신의 앞날을 위해 친딸의 목숨을 희생하다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까?”“친엄마한테 포기당한 그 딸은 얼마나 괴로워할까?”비록 모두들 공감할 리가 없었지만, 현재 지아의 심정을 나름 헤아릴 수 있었다.줄곧 흘리지 않았던 눈물은 변진희가 내뱉은 말을 들은 순간, 바로 떨어졌다.“왜요…… 왜 난 영원히 포기된 사람일까요?”눈물은 가녀린 턱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지아는 크게 떠들지도, 큰소리로 원망하지도 않았다.마치 너덜너덜해진 낡은 인형처럼, 지아는 살아남을 여지가 있었지만 가장 친근한 사람에게 마지막 목숨을 빼앗겼다.그 사람 말
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순식간에 이도윤을 향해 바라보았다.백채원은 여전히 그곳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어르신의 목소리도 차갑게 들려왔다.“망설일 필요가 어딨다고. 얼른 채원을 선택하겠다고 말해라.”백정일은 이도윤의 어깨를 두드렸다.“이 일은 자네가 스스로 결정해. 누구를 선택하든 난 자네를 탓하지 않을 거야.”판다 인형은 모래시계를 하나 꺼냈다.“1분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요. 만약 그때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선택할 거예요.”모래시계 속의 모래는 빠르게 내려갔고, 마치 지금 흘러가는 시간과 같았다.도윤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백채원은 끊임없이 구조를 요청했지만 반대로 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방금 변진희가 입을 열었을 때 지아는 적어도 몇 마디 했는데, 지금은 자신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도윤의 눈앞에는 1년 전의 겨울이 떠올랐다. 그날 밤,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려왔다.지아와 백채원은 동시에 바다에 떨어졌는데, 도윤은 즉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한 전림을 떠올렸다.백채원의 뱃속에는 심지어 전림의 아이가 있었다.게다가 진환도 따라서 뛰어내렸기에 도윤은 지아가 무사할 것이라 확신하며 즉시 백채원을 구하러 갔다.그러나 도윤은 지아의 발이 그물에 걸릴 줄 몰랐고, 구조 받을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 조산을 초래할 줄은 더욱 몰랐다.이것들은 모두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도윤은 지금까지 지아에게 한 마디라도 설명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지아뿐이란 것을.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그때와 달랐고, 이 세상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없었다. 두 눈을 감으면, 도윤은 여전히 피가 멈추지 않는 전림이 자신을 보고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울, 울지 마. 대장은…… 죽을 수 없어. 난 널 대신해서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해.”“내…… 내 아내와 아이는 너에게 부탁할게.”말을 마치자 전림은 숨을 거두었다.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소지아도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리둥절했다.이도윤은 전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판다 인형도 도윤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이는 그녀의 모든 계획을 완전히 망쳤다.이때, 도윤의 손에는 칼이 나타났고, 그는 침착하게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난 당신이 그녀들을 잡은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만약 오늘 굳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 약혼식을 장식하려 한다면, 나는 이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그녀들을 풀어줘, 내가 죽을 테니까.”“이 자식이, 너 미친 거 아니야!” 어르신은 노발대발했다.“얼른 그를 막아!”도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들을 막아.”진봉 진환 뿐만 아니라 도윤의 다른 네 비서들도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와 어르신의 사람을 가로막았다.여섯 사람은 도윤을 가운데로 감쌌고 도윤은 칼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겨누었다.“도윤 씨,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하지 마요!” 백채원은 당황했다.“소지아를 죽이면 되잖아요! 그녀는 죽어야 할 사람이니까요.”판다 인형의 목소리는 좀 변했다.“거짓말 하지 마요. 내가 당신의 이런 연기에 속아넘어갈 것 같아요?”“그래?”도윤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그 동작은 깔끔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구경꾼들은 모두 가슴에 통증이 전해온 것을 느꼈다. 도윤은 오늘 검은색 예복을 입었는데 평소에 출근할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피가 하얀 셔츠에서 조금씩 번져 나왔지만, 도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이러면 되겠지? 그녀들을 풀어주면 난 바로 자살할 거야.”지아의 머릿속은 마치 현장의 그 시끄러운 소리처럼 혼란에 빠졌다.‘이도윤은 정말 자살하려고 하는 것 같아.’그 평온한 심장은 그의 이 행동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고, 지아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왜?”이것은 지아가 잡힌 이래 도윤에게 한 첫 마디였다.“이미 날 포기했는데, 지금은 왜 또 날 구하는 거지?”비록 지아는 지금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도윤은 여전히 입꼬리를
귓가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소지아는 변진희와 이도윤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분별해낼 수 있었다.지아는 아주 웃기다고 느꼈다. 자신의 가족은 그녀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를 뼈에 사무칠 정도로 미워하는 남자는 오히려 그녀의 목숨을 살려주고 있었다.이런 가족에게 지아는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전에 지아는 항상 집 앞에 앉아 변진희가 떠난 그 길을 바라보았는데, 도윤과 냉전하는 동안 그녀도 줄곧 그래왔다.식은 음식을 데운 다음 또 문 앞 계단에 앉아 기다렸다.그리고 정원의 화초가 봄부터 여름까지, 가을부터 눈 덮인 겨울까지 버티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러나 지아는 결국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했다.그녀의 일생은 마치 장난과도 같았다.지아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백 부인, 나는 다음 생에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설령 정말 다음 생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단지 평생 당신과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네요!”“지아야, 엄마도 어쩔 수 없었어. 정말이야…….”변진희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백정일을 너무 사랑했고, 백정일이 외동딸을 잃게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변진희는 전에 유산한 후에 임신을 할 수 없었는데, 만약 백채원이 죽는다면 백씨 집안은 대가 끊긴 거와 다름이 없었다.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든 변진희는 백채원을 구할 것이다.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더라도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이도윤, 나도 이런 나날이 지긋지긋해. 네가 나에게 빚진 것은 네 목숨으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야.”그녀는 웃음을 지었다.“기억해, 그녀가 나를 죽였단 것을! 내가 죽은 후에 넌 그녀를 찾아가서 복수해.”도윤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감했다.“지아야, 무엇을 하려는 거지? 바보 같은 짓 하지마.”눈을 감은 지아는 바닷물이 배를 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멀리서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한두 번 들렸다.‘자유의 기분이구나.’카메라가 찍히지 않은 곳에서, 지아는 뒤
“왜 그녀를 건드린 거야!”바다에 떨어지기 전, 소란스러운 바닷바람 속에서 소지아는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누구일까?’‘지금 날 가리키는 건가?’지아는 줄곧 그 칼날을 꽉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바다에 들어가자마자 지아는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가볍게 풀었다.오늘 일을 통해 그녀도 똑똑히 알아냈다. ‘주모자는 틀림없이 여자일 거야. 게다가 이 여자는 이도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고.’백채원도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주모자가 진정으로 상대하고 싶은 사람은 확실히 지아였고, 그녀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했다.지아는 머리를 쥐어짜도 자신이 어떻게 이런 사람을 건드렸는지 몰랐다.소씨 집안이 망한 것은 그 사람의 짓이었으니 지아는 달갑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살아남아야 해. 설령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이 더러운 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해.’지아는 그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가서 그녀에게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지아는 수영을 잘했는데, 전에 그녀는 아이를 잃어버린 고통에 빠져 줄곧 악몽 속에서 지냈다.해변에 접근할 때마다 지아는 한 아이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래서 지아는 저항을 포기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그 아이와 더 가까워지려 했다.그러나 오늘, 지아는 자신을 가둔 철장을 직접 부수고 그 안을 뚫고 나왔다.그녀는 자신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잡아당겼고,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빛이 밀려들었다.지아는 머리 위의 푸른 물결이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 갔다.이곳에는 해변에 좌초된 폐선들이 많아 지아는 이미 목표를 찾았다.수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아마도 날 죽이러 왔을 거야.’지아는 이미 어두운 곳에 도착했는데, 그녀는 그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움직이는 폭이 작기만 하면 그 사람은 지아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