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어떤 음색도 들리지 않게 자신의 목소리를 숨겼다.다만 자신의 턱을 들어올릴 떼, 소지아는 은은한 약 냄새를 맡았다.소지아는 모두 서양의 의학을 배웠기에 한약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았고, 이것이 어떤 약재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약재가 혼합된 것인지 몰랐다.“날 죽이고 싶어?” 소지아가 직접 물었다.“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소지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날 여기에 묶은 이상 무슨 목적이 있는 거지?’“무슨 뜻이야?”상대방이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 소지아는 더욱 불안해졌다.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남긴 것은 틀림없이 이도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나와 이도윤은 이미 이혼했어.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없고. 넌 도대체 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거지?”소지아의 턱을 쥐고 있는 손가락은 더욱 조여졌고, 소지아는 통증을 느꼈지만, 시종 약간의 소리도 내려 하지 않았다.“넌 아주 총명한 여자군, 어쩐지 그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더라니.”상대방은 한눈에 소지아가 떠보려는 마음을 알아차렸고, 자신과 이도윤의 일에 대해서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소지아는 그녀가 속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계속 말했다.“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내가 오늘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만약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곳은 해변의 버려진 집일 거야. 이도윤은 나를 구하려 해도 늦었고.”“맞아.”“내가 죽기 전에 네가 누군지 보고 싶은데. 누가 우리 집안을 이렇게 만들었나 알아야 할 거 아니야.”턱을 쥐던 손가락에는 다시 힘을 더했다.“너는 아직 내 앞에서 요구할 자격이 없어.”상대방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려 하지 않았다.“내가 말했듯이, 오늘 죽는 사람은 꼭 네가 아닐 수도 있어.”소지아는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고, 곁의 사람은 전화를 받더니 말투가 나른했다.“좀 놀았을 뿐인데 왜? 마음 아파?”조용한 방에서 소지아는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남자란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자세히 듣기도 전에 턱을
어느 말이 문 의사를 화나게 했는지, 그녀는 버럭했다.“두려워? 내가 왜? 그녀는 원래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였고, 그동안 내가 그녀를 돌보지 않았더라면 간소연은 진작에 죽었을 거야. 나는 단지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을 뿐. 그런 사람이 이 지옥과 같은 인간 세상에 사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고문이지!”“그래서 당신이 간소연을 민 거예요?”“그럼 뭐가 어때서? 다 너 때문이야. 만약 네가 정신병원에 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살아 있을 수 있었는데, 탓하려면 너 자신을 탓해! 왜 기어코 끼어드는 거냐고!”소지아는 갑자기 정신과 진찰을 받아야 할 사람이 문 의사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녀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간소연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흥분하다니.’“간소연의 아기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무슨 아기? 난 몰라.”“그녀의 시체를 검사한 적이 있어요. 그녀의 배에는 임신 주름이 있고, 자궁도 출산한 흔적이 있죠.”문 의사는 소지아를 향해 소리쳤다.“지금와서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가? 소연은…….”소지아는 간소연에 관한 일을 더 많이 알아내려고 했지만 오정인이 달려들어 문청을 안아준 것 같았다.“청아, 진정해. 그 일은 이미 지나갔어.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해서 뭐 해?”‘지나갔어?’‘설마 간소연의 죽음이 그녀에게 큰 영향을 준 건 아니겠지?’‘왜?’‘문청은 간소연이 죽기를 원했는데 왜 또 이런 모습을 드러낸 거지?’오정인은 문청을 데려간 듯 세상은 다시 고요한 상태로 돌아갔다.이렇게 큰 방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오직 소지아의 심장 박동 소리와 가끔 한두 마리 뛰어다니는 작은 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원래 소지아는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였는데 지금은 죽기 직전이었으니 생명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아마도 쥐가 소지아의 숨결을 알아차렸는데, 그녀의 곁에서 이리저리 냄새를 맡았을 뿐,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얼굴이 붙어 있는 곳은 울퉁불퉁하여
다른 사람은 이미 도착했다. 특히 변진희는 한복을 입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존귀했다.그녀는 백정일의 팔짱을 끼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변진희의 친딸이 약혼한 줄로 알 것이다.그녀의 미소는 이도윤에게 있어 눈에 거슬렸다.진환은 얼른 대답했다.“백 선생님과 백 부인님은 일찍 출발하셨고, 그들은 미리 와서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백채원 아가씨는 예복 쪽에 문제가 좀 생겨 직원들은 어젯밤에 야근을 해서 고쳤습니다. 그리고 백채원 아가씨는 아침 일찍 가서 화장을 하고 예복을 입었는데, 이치대로라면 곧 도착할 것입니다.”이도윤은 백채원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가 그렇게 원한 약혼식이었기에 일찍 와서 자랑했으면 했지 절대로 지각할 리가 없었다.현장은 설비를 여러 번 조정하여 백채원이 와서 의식을 거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공기 속에는 꽃이 만발하는 냄새가 가득했고, 눈에 띄는 대로 각양각색의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아하게 누볐다.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아이들은 또 즐겁게 나무 아래를 뛰어다니며 매우 조화로운 광경을 이루었다.이지윤마저 주은청에 안겨 있었고, 호기심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리는 벚꽃 잎을 바라보았다.바람이 없을 때도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이지윤은 손을 뻗어 받으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꽃잎은 마침 그의 코에 떨어졌다.어린 꼬마는 꽃잎이 떨어질까 봐 꼼짝도 하지 못했고, 이 화면은 매우 귀엽고 힐링되었다.변진희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백채원을 보지 못하고 얼른 백정일 팔을 잡아당겼다.“채원은 왜 아직도 오지 않았지?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그 계집애는 꾸미길 좋아해서, 이전부터 예복의 사소한 문제로 굳이 남들더러 밤새 고치라고 했으니, 아마 지금도 예복 일로 사람과 다투고 있을 거야.”백정일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건 안 되지. 의식이 곧 시작될 것 같은데, 조금의 착오도 생기면 안 돼. 내가 가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재
헬리콥터에 탄 백채원은 불평을 늘어놓았다.“그게 무슨 개떡 같은 디자이너야, 내가 이렇게 비싼 가격을 썼는데도 나에게 흠이 있는 드레스를 만들어 주다니. 나의 약혼식 날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니.”이 드레스 때문에 백채원은 어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어젯밤 밤새 잠을 자지 못했고 헬리콥터에 오르자마자 바로 잠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지옥까지 잤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백채원은 깨어났을 때, 눈앞이 캄캄한 것을 발견했고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있었다.‘섬은? 이도윤은? 약혼식은?’백채원은 즉시 당황했다.“이곳은 어디지? 내가 누군지 아는 거야? 이씨 집안 사모님이라고! 너희들이 감히 나를 납치하다니, 우리 남편은 반드시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백채원이 입을 열었을 때, 온 방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고, 게다가 고약한 냄새가 곧장 코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사람 살려!”“힘 좀 아껴요. 만약 소리치는 게 쓸모가 있다면, 이 세상에는 납치범이 없을 거예요.”백채원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노호하며 소리쳤다.“소지아, 이 천한 년아, 이거 네가 꾸민 짓이지? 내가 도윤 씨에게 시집가는 것을 질투하여 이런 더러운 수단을 썼다니…….”이 말에 소지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당신 무슨 망상증 같은 거 있어요? 상상력이 이렇게 풍부한데 왜 소설을 쓰지 않는 거죠?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다니, 솔직히 나는 이도윤이 도대체 당신의 뭐가 좋은지 정말 궁금하네요.”백채원은 마음이 급해지자 그 자리에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욕을 심하게 할수록 소지아는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도윤의 곁을 이렇게 오래 따라다녔으니 소지아는 이도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백채원이란 사람은 생김새나 성격까지 모두 이도윤의 취향이 아니었고, 설령 애인을 찾아 자신을 질투하게 한다 하더라도 많은 선택이 있을 텐데, 백채원을 고를 리가 없었다.“짝짝짝.”옆에서 박수를 치는 소리는 마침내 백채원을 현실로 돌려보냈다.“참 재밌는
백채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와 손을 잡겠다고 하지 않았어요?”“손을 잡아?”그 사람은 비웃었다. “그럴 자격이 있긴 한 거야?”격렬한 공포가 마음속에서 퍼지자 백채원은 안색이 유난히 보기 흉했고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너,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내 남편은 이도윤이에요. 감히 나를 건드리면 그는 절대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아픔을 느꼈고, 발이 백채원의 허리를 짓눌렀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소지아에게 당한 그때를 제외하고 백채원은 이런 굴욕을 겪은 적이 없었다.“내가 경고하는데, 나한테 손을 대려면 자신에게 목숨이 몇 개가 있는지부터 가늠하는게……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채원의 허리를 밟은 그 발은 힘을 더 주었고, 백채원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먼저 네 자신에게 몇 개의 목숨이 있는지, 자격이 있는지부터 가늠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이 점에 있어 넌 소지아보다 못하지. 봐, 그녀는 나를 화나게 하지 않잖아.”백채원은 그제야 소지아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빠졌단 것을 알게 되었다.“당신의 목적은 종래로 소지아 한사람이 아니라 우리였단 말인가요?”“물론이지.”상대방의 목소리는 남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두 가지 이유일 뿐이었다. 연적이기 때문에 백채원과 소지아를 혐오하고 있거나, 이도윤의 적이기에 이 기회를 틈타 이도윤을 협박하려 하거나.어떤 신분이든 백채원은 오늘 살아서 나가기가 매우 어려웠다.여기까지 생각하자 백채원은 갑자기 공포에 질려 방금 날뛰던 태도를 감추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제발 살려줘요. 나 정말 죽고 싶지 않거든요! 나한테 아직 두 아이가 있단 말이에요. 나는 죽을 수 없어요.”그리고 말머리를 돌리더니 백채원은 계속 말했다.“죽이려면 소지아를 죽여요. 그녀는 이도윤의 전처이자 이도윤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거든요.”가장 사랑하는 여자란 말은 소지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그녀는 언젠가 이도윤이 자신을
소지아는 백채원의 공포에 질린 모습에 비해 훨씬 냉정해 보였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일어나도 같은 결과란 것을.눈을 감으면 소지아는 차가운 바다에서 백채원을 향해 몸을 던진 이도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이 일은 악몽처럼 그녀를 꼬박 일 년 동안 괴롭혔고, 소지아는 가까스로 최근에 다시 시작하려고 걸어 나왔다.“왜…….” 소지아는 중얼거렸다.“뭐?”소지아는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비록 그녀는 지금 극도로 굴욕적인 자세로 땅에 엎드려 있었지만, 여전히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었다.“왜 자꾸 이런 수작을 부리는 거지? 재밌어?”상대방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왜 재미가 없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을 보면, 난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하거든.”소지아는 여러 번 밧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녀는 참고 또 참았는데, 자기가 지금 벗어나면 철저히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당신이 그를 좋아한다면, 공평하게 경쟁해야지, 이런 수단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지?”소지아는 이해가 안 됐다.비록 상대방은 줄곧 잘 숨어 있었지만, 남녀 사이에서 소지아는 여전히 상대방이 여성이라고 생각했다.이도윤과 원한이 있는 남자라면 일반적으로 더욱 직접적이고 난폭한 수단을 선택했을 것이다.몇 년 동안의 시간을 낭비해 가며 백채원과 자신을 잡아 이도윤더러 선택하라고 하다니.이것은 딱 봐도 여자가 할 짓이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마음이 모질고 악랄할 뿐만 아니라 사이코패스였다.그러나 상대방의 목적은 이도윤의 여자일 뿐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도윤과 소지아의 관계가 가장 나쁜 이 2년 동안, 백채원이 올라갈 이유가 없었으니까.이 사람이 이도윤을 이렇게 잘 알고 있었으니, 도리상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백채원보다 이도윤에게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2년 동안 이도윤과 가깝게 지내던 여자는 백채원 뿐이었고 다른 여자는 없었다.만약 이도윤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또 왜 이렇게 애를 썼을까?소지아의 마음속에는 너무
이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이끌었고 기자들은 잇달아 카메라를 스크린으로 돌렸다.화면 속 장면은 넓은 바다였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은 판다 모양의 인형복을 입고 있었다.목소리나 몸집, 그 어느 것 하나 드러내지 않았다.멀리 있는 진봉이 달려와 보고했다.“컴퓨터가 해킹당했습니다.”이도윤은 진환에게 눈빛을 주었고 다른 말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았다.백채원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도윤은 어두운 얼굴로 손을 뒤로 했다.‘보아하니 오늘 번거로운 일에 부딪친 거 같은데.’‘이 날을 택하여 손을 쓰다니, 정말 애를 썼군.’이 순간, 도윤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진환은 조용히 물러나 상대방의 위치를 추적하려 했다.그리고 도윤은 계속 시간을 끌었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스크린을 직시했다.“사람, 당신한테 있나?”현장에는 틀림없이 상대방이 그들과 연락할 수 있는 설비가 있을 것이다.마치 도윤의 사무실에 설치된 그 몇 개의 마이크로 카메라처럼, 비록 그는 바로 조사를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눈치채고 숨어버렸다.도윤은 상대방이 꼬리를 드러내기를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자신의 약혼식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현장의 모든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무슨 일 생겼지? 설마 백채원이 납치된 건 아니겠지?’일시에 모든 사람들은 긴장하면서도 흥분해 했다. 이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인플루언서들조차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라이브를 하며 이 모든 것을 기록했다.그 판다는 매우 날뛰고 있었다.“어느 사람을 말하는 거죠?”‘어머!’‘이 사람은 갑부 약혼녀를 납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납치했단 말인가?도윤의 그 담담한 얼굴에는 마침내 변화가 생겼고, 그의 머릿속에는 왠지 모르게 소지아의 약혼 축하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오늘 아침, 도윤은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지아라면 특별히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약혼 축하한다고 비꼬았을 리가 없는데
백채원은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구조를 요청했다.“도윤 씨, 아빠, 살려줘요! 제발 나 구해요, 나 죽고 싶지 않아요.”그러나 소지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을 먹지 않아 위가 슬슬 아프기 시작했고 이마에는 땀이 빽빽이 맺혔으며 바닷바람은 더욱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지아는 백채원처럼 도움을 청할 힘이 없었고, 허리춤에 감긴 밧줄에 숨이 조여왔다.그녀는 애원하든 애원하지 않든 결과가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윤은 1년 전에 백채원을 선택했으니 1년 후인 지금, 여전히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다만 이번에 지아는 더 이상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고, 영원히 나타날 수 없는 결과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희망이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지아가 의기소침해지며 자신이 어떻게 도망갈 수 있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그리고 연회장의 화면이 나타났다.그 중 변진희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뚜렷했다.“채원아, 지아야, 너희들 괜찮니?”지아는 조금의 파동도 없는 눈을 천천히 떴다. 비록 얼굴에 검은 천을 덮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바라보았다.백채원은 이 소리를 듣고 더욱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엄마, 살려주세요!”“채원아, 안심해. 네 아빠가 반드시 너를 구할 거야.”지아는 위가 매우 아팠고, 입술도 말라서 약간 갈라졌다. 그녀는 입술을 핥았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도윤의 선택보다 지아는 자신이 변진희의 선택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결국 변진희는 지아의 친어머니였다. 지아는 자신의 곰돌이 시계를 만졌고, 속으로 매우 불안했다.마치 성적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입시생들처럼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긴장을 느꼈다.비록 변진희는 지아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래도 그녀는 백채원의 계모일 뿐이었다.‘친딸과 의붓딸 사이에서, 그래도 날 선택하겠지?’뻔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