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늘 저녁에 안 돌아올 거야?”그 진지한 모습에 이도윤은 바로 소지아가 무척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걸로 협박했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엄청 기뻐하다니?’소지아는 확실히 기뻐했다. 요 며칠 이도윤과 동침하면서 그는 수도 없이 하마터면 그녀와 관계를 맺을 뻔했다.이도윤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이든지, 소지아는 지금 이도윤에게서 멀어질수록 좋았다.이도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너는 내가 돌아오지 않기를 매우 바라는 것 같더라?”소지아는 전의 사람 짜증나게 하는 자신을 떠올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지금 너는 백채원의 약혼자잖아. 너희들은 약혼을 앞두고 있으니 절대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 틀어지면 안 돼. 만약 너와 나에 관한 소문이 터진다면 회사 주가에도 영향을 줄 거야.”말을 마친 소지아는 또 이도윤의 손을 두드리며 맹세했다.“안심해. 난 절대로 과거처럼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조용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할게.”‘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맹세한 이상, 이도윤은 그래도 내가 눈치 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겠지?’소지아는 자신이 이렇게 비위를 맞추면 이도윤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도윤의 안색이 점점 더 보기 흉해지더니 그녀의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더 커질 줄은 전혀 몰랐다.‘이 정도로 아직 부족한 건가?’소지아는 미간을 비틀어 사색했다.이도윤은 그녀의 눈빛에서 섭섭하고 슬퍼하는 감정을 보지 못하자, 손을 거두어 차갑게 소지아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 남겼다.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오늘 밤, 나는 백씨 집안에 남을 거야.”“그래, 그럼 나 먼저 밥 먹으러 갈게.”이도윤이 소지아의 표정에 슬픔이 나타났는지를 관찰하기도 전에, 소지아는 그가 손을 놓은 순간 차문을 열고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그 뒤도 안 돌아보는 뒷모습은 조금의 슬픔이라도 없었다.그들은 이혼한 지
술을 마시자, 탁자에서 ‘펑'하는 소리가 들렸고, 백정일은 손에 든 술잔을 탁자 위에 세게 찧었다.전쟁터에서 싸워온 사람은 카리스마를 절로 내뿜었으니, 몸에는 강하고 싸늘한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줄곧 웃지 않던 백정일은 차갑게 말했다. “먹으려면 먹고, 먹지 않으려면 당장 꺼져!”변진희는 재빨리 그의 팔을 잡고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말렸다. “당신 또 왜 그래. 도윤이 어렵게 시간을 내서 왔는데, 왜 눈치를 주는 거야? 정말 그가 당신 밑에서 훈계를 받는 신병인 줄 아나보지?”말을 마치고 변진희는 또 이도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도윤아, 그를 탓하지 마. 그는 부대에 있는 게 습관이 돼서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자신이 부대에 있는 줄 안다니깐.”백채원도 재빨리 말했다. “아빠, 도윤 씨는 평소에 바빠서 그래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이해 좀 해줘요.”전에 백정일은 이도윤이 마음에 무척 들었지만, 소지아가 그의 전처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백정일은 마음이 좀 불편했다.필경 모두 같은 명문 집안이었기에, 이도윤이 소지아와 이지윤을 찾기 위해 전례를 깨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는지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백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성질이 좀 난폭했고, 백정일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자네는 채원이와 아이까지 있는데, 두 사람 결혼부터 하라니까 하필이면 굳이 약혼을 먼저 하려 하다니. 약혼 시간을 질질 끌면 그만이지만, 지금까지 두 사람은 혼인 신고조차 안 했어. 대체 내 딸과 결혼할 거야 말 거야, 오늘 나에게 똑똑히 말해봐.”“아빠,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우리 모두 한 가족이니까 할 말 있으면 천천히 하세요.”“그래, 화 좀 풀어, 애들 놀라겠다.”이 일에 있어서 변진희와 백채원은 마음이 맞았다.줄곧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던 백씨 집안 어르신도 젓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여자들은 입 닥쳐!”어르신이 말을 꺼내자 변진희는 몸을 떨었고, 그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자네 결혼한 적이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의견이
두 사람은 번갈아 입을 열어 이도윤에게 거절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이도윤과 백채원의 결혼은 이미 확정된 일이었다.백채원은 그동안 이도윤이 소지아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애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도윤이 후회할까 봐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쥐어뜯었다.이도윤은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우로 술잔을 들더니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백채원은 걱정하던 마음이 그제야 놓였고 얼굴에 다시 웃음이 나타났다. “할아버지, 아빠, 내가 말했잖아요, 도윤 씨는 내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고.”어르신은 이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제일 좋고.”백정일도 일깨워 주었다.“지아는 그래도 진희의 친딸이니 우리 백씨 집안의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자네가 돌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녀를 잘 보살펴 줄 거야.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일부터 너희들 계속 얽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이도윤은 술잔을 든 손가락에 힘을 주더니 눈동자가 어두워졌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래 그는 소지아에게 일부러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지금은 정말 돌아갈 수 없을 줄이야.이도윤은 백씨 집안 별장에 갇혀 억지로 한 방에서 묵었다.밤이 점점 깊어지자 백채원은 목욕을 마치고 특별히 섹시한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소파 옆의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이도윤은 그녀에게 뒷모습만 남겨주었을 뿐, 앉아 있어도 그의 등은 구부러진 적이 없었다.이도윤은 한 손은 팔걸이에, 다른 한 손은 휴대전화를 꼭 쥐고 있었고, 미간에는 근심이 가득 찼다.백채원은 이도윤이 지금 자신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도윤 씨, 지금 아주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이도윤은 심지어 눈조차 들지 않았다. “응.”“그, 시간도 늦었는데, 먼저 씻으러 가요. 난…….”백채원은 얼굴을 붉히며 아양을 떨었다. “난 여기서 기다릴게요.”어슴푸레한 밤빛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나무 위를 날아가며 울부짖는 소리
소지아는 이런 일에 있어 자신이 이미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여전히 이 남자를 자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제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렇게 오래 이 남자를 사랑한 소지아는 두석 달 만에 포기할 수 없었다.그녀는 두 무릎을 안고 머리를 무릎에 얹으며 이도윤이 지금 백채원과 침대에 있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가슴은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팠다.이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생각했고, 소지아는 밤을 지새우며 그 부엉이가 떠날 때까지 버텼다.소지아는 곁의 그 차가운 침대를 보고 자신을 비웃었다.이때 침대 머리맡의 휴대폰이 울리더니, 그녀는 재빨리 받았다. 맞은 편에서 변진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소지아에게 백씨 집안으로 올 것을 재삼 요구했다. 변진희는 소지아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아침밥을 지어준데다 또 백정일도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소지아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지만 다리는 스스로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엄마가 한 아침밥을 먹지 못했다.기억 속에서 변진희는 어진 아내라 요리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비록 그녀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매번 솜씨를 선보일 때마다 소지아를 놀라게 했다.소지아가 정신을 차릴 때, 그녀는 이미 백씨 집 앞에 도착했다.하인은 정중하게 그녀를 맞이했도, 변진희는 여전히 고귀하고 대범했다.백정일은 그녀에게 확실히 잘해 준 모양이었다. 그동안 만날 때, 변진희는 줄곧 활짝 웃고 있었다.소계훈의 곁에 있었던 날과는 달랐다. 그때의 변진희는 종래로 웃지 않았다.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변진희는 감정을 모두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는 소계훈과 소지아에게 무척 냉담했고, 밥을 하는 것조차도 기분이 좋을 때만 하곤 했다.소지아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사이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기에 될수록 착한 아이로 행동했다.설사 어머니가 만든 밥을 아주 좋아한다 하더라도, 매번 학부모회의 때, 변진희가 가주길 원하더라도, 소지아는 종래로 언급하지 않았다.
비록 이도윤과 백채원의 일은 이미 결정이 났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보니 소지아는 여전히 충격을 받았다.소지아는 방에서 걸어 나오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두 사람의 눈빛은 공중에서 마주쳤다.이도윤의 검은 눈동자에는 분명히 놀라움이 스쳤고, 그는 입을 벌리고 무엇을 설명하려 했지만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변진희가 입을 열었다.“도윤아, 어젯밤 잘 잤어? 만약 익숙하지 않는다면, 이따가 내가 사람 시켜 너희들에게 매트리스를 주문할게. 나중에 결혼하면 여기서 자야 하니까 여기를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이때 백채원도 자신의 연기를 발휘했다. 그녀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머니 생각이 맞네요. 나와 도윤 씨는 어젯밤에 확실히 잠을 잘 자지 못했어요.”백채원은 말을 할 때 얼굴에 부끄러움이 번쩍였는데, 분명히 다른 뜻이 있었다.소지아는 마침내 그들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변진희는 자신을 그리워하는 게 전혀 아니라 일부러 자신을 불러 주제 파악을 하라고 알려주는 것에 불과했다.소지아가 스스로 물러나 현실을 똑똑히 보라고.‘참 아이러니하군.’자신의 생모는 지금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여 의붓딸을 맞이하고 있었다. 변진희는 의붓딸의 모든 취향을 기억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아침 식사조차 생각나지 않았다.어쩌면 자신의 출생은 그냥 의외일지도 모른다.예전에 소지아는 변진희에게 틀림없이 고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어떻게 엄마가 자신의 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제야 소지아는 세상에 정말 이런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변진희는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몰랐다.백채원은 사랑하는 사람의 딸이기 때문에 변진희는 어떻게든 아부해야 했다.소지아는 그들 일가족 4명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그저 남이란 것을 발견했다.이도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가장 아픈 일이 아니었다. 가장 아픈 일은 자신의 가슴에 꽂힌 그 칼이 자신이 마음속으로 10여
변진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잖아? 너희들 지금 아직 함께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아야, 너는 이혼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거야? 넌 아직 젊으니까, 더 이상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 폐를 끼칠 뿐만 아니라 도윤과 채원도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야. 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니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또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소지아는 이미 자신이 도대체 심장이 아픈지 아니면 위가 아픈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장육부가 마치 개미에게 매섭게 갉아먹어 만신창이가 되도록 아픈 것 같았다.소지아는 슬픔을 참으며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군요.”“어머니, 지아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결국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철없는 것도 정상이에요. 우리가 가족인 이상 서로 받아들여야죠. 저는 괜찮아요.”이때의 백채원은 마음이 넓어 보였고, 오히려 소지아를 시시콜콜 따지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변진희는 정색하며 말했다.“채원아, 안심해. 지아는 내가 낳은 딸이니 나도 자연히 이 일을 책임질 거야. 다시는 그녀가 너와 도윤 사이의 감정을 파괴하지 못하게.”소지아는 자신의 기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고,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짙게 났다.그러나 그녀는 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죽어라 삼켰다.피비린내가 입안으로 번졌고, 소지아가 입을 열려고 하자 이도윤은 차가운 소리를 냈다. “소지아는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녀를 돌보고 싶어서 그래요.”“도윤아, 나는 네가 의리가 있는 좋은 아이라는 거 다 안다. 넌 이 계집애를 대신해서 변명할 필요가 없어. 그녀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쟁이라서, 난 그녀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녀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거야.”소지아는 손에 힘을 줘서 관절이 하얗게 변했고, 옷자락까지 그녀에 의해 모양이 변했다.그녀는 심지어 한 마디도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
그러나 그날, 변진희는 아침 일찍 문을 나서서 미용을 하고 차를 마시며 뮤지컬을 보러 갔다.집사의 전화가 걸려오자 그녀는 냉담하게 말했다. “나에게 말하면 뭐가 달라지지? 난 의사도 아니고. 아프면 의사를 찾든가.”소지아는 열이 나서 꿈속에서도 줄곧 케이크를 찾았다.그녀는 열이 내릴 때까지 하루 종일 케이크를 중얼거렸고, 밖에 큰 눈이 흩날리는 것을 보며 집사가 케이크를 들고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소지아는 활짝 웃었다.“엄마가 만든 거 맞죠?”“네.”그러나 나중에 소지아는 그 케이크가 사실 셰프가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는 그녀를 돌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녀의 상황조차 묻지 않았다.시간이 흐르자 소지아는 기억과 겹치는 이 얼굴을 보았다.솔직히 그 차가운 얼굴은 그녀에게 있어 좀 야박하기까지 했다.변진희의 미소를 볼 수 있도록 소지아는 학우들이 부모님이 모두 성적이 좋은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해서 어릴 때부터 전교 일등을 그녀는 항상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엄마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소지아는 가끔 2등으로 떨어져도 쉬지 않고 다시 1등을 하려고 노력했다.이렇게 집착하는 자신은 변진희에게 있어 자랑이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고집쟁이였다.소지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소름 끼치게 웃었다. 이도윤은 눈썹을 찌푸리고 그녀를 위해 설명하려 했다.그러나 변진희는 계속해서 말했다.“지아야, 채원은 정말 착한 아이야. 그녀는 가까스로 자신의 가정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이 엄마가 부탁할게. 도윤을 놓아주는 건 어때? 엄마는 정말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허, 나는 처음으로 착한 아이가 불륜녀로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것을 봤네요. 백 부인, 당신은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아까워할 때, 내가 그녀 때문에 이혼을 당한 느낌이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너희들의 과거에 대해 나는 잘 모르니까 다른 말을 하지 않겠어. 그러나 너희들이 지금
소지아는 눈을 감았고, 머릿속은 어릴 때부터 변진희의 뒤를 쫓는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했다.그때의 소지아는 어려서 엄마가 왜 항상 기분이 좋지 않은지 몰랐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좀 말을 잘 들으면 엄마가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변진희가 떠난 지 그렇게 오래 됐어도, 소지아는 변진희를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변명을 했다. 어머니는 단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것이라고.자신은 그녀의 딸이니 그녀는 틀림없이 고충이 있을 것이라고.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해서, 어머니에 대한 소지아의 인상은 여전히 부드럽고 착한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도 자신처럼 자신을 무척 그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제 보면 사람들의 감정은 서로 통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숨을 크게 쉬며 목구멍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피비린내를 삼켰다.다시 눈을 떴을 때, 소지아의 눈은 무척 맑았고,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변진희 여사, 백 부인, 지금부터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당신은 나라는 딸을 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나도 당신이라는 엄마가 없는 걸로 간주할게요.”‘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변진희는 소지아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소지아, 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너 같은 불효녀를 낳았을까! 네 교양은 개가 잡아먹은 거야?”변진희는 자신의 가슴을 안구 노기를 띤 얼굴로 소지아를 쳐다보았다. “너 어떻게 이렇게 변했니?”백정일은 재빨리 와서 변진희를 부축하였다. 필경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기에 그는 변진희의 편에 섰다.“지아야, 네 엄마가 이렇게 하는 것도 모두 너를 위해서야. 넌 그녀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녀를 이렇게 화나게 할 수 있는 거야? 빨리 와서 사과해.”평소였다면 백채원은 옆에서 구경을 했겠지만, 지금 소지아가 현장에 있었으니 그녀는 또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백채원은 변진희를 부축하며 슬프게 말했다.“지아야, 나도 네가 나를 탓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아무리 내가 도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