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고 바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이 모든 일의 원인인 지아는 무관심하게 지켜보았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장민호를 ‘사랑'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까.여자를 구하는 영웅의 트릭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상황을 수습한 장민호는 서둘러 지아를 끌고 나갔다.장민호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과 마주치는 것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두 사람은 한밤중 골목을 미친 듯이 뛰었고 지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더는 못 뛰겠어요.”장민호도 진작 사라진 사람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는 이런 곳에 오지 마요. 너무 예쁜 것도 벌레가 많이 꼬여서 좋지 않아요.”지아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더욱 환하게 빛났다.“그럼 그쪽은요?”“저요?”지아가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장민호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몸을 벽에 밀착시켰고, 지아는 손을 뻗어 그의 볼에 대고 꽃처럼 웃었다.“당신한테도 그런지 궁금한데요?”두 사람은 너무 가까워서 지아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와 섞인 약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다른 사람한테서 맡아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냄새였다.장민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지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그의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지아는 이미 그의 몸에서 한 발짝 물러선 뒤였다. “미안해요, 머리가 좀 멍해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집이 어디예요?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지아가 장소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지아가 차를 몰고 왔고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고 지아는 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장민호는 토끼처럼 얌전하고 순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봤다.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 앞에서 이렇게 평온하다고?그렇
지아는 장민호가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고 나서야 입가의 미소가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악령처럼 굳어져 살벌해졌다.장민호, 네가 어떻게 도망가.지아는 재빨리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문을 열자마자 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두 손이 격렬하게 그녀를 끌어안았고 뜨거운 가슴이 다가왔다.“지아야, 하루 안 봤다고 남자 꼬시러 갔네.”지아는 두 손으로 상대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지만 내가 꼬시고 싶은 사람은 당신뿐이야.”“나쁜 여자.” 도윤은 지아의 입술을 반복해서 지분거렸다.“여기 말고 방으로 가.” 지아가 상기시켰다.“뭐가 무서워, 다른 사람도 없는데.”도윤은 지아의 몸을 나른한 소파에 눕혔다.“이렇게 입었어? 오늘 가만 안 둘 거야.”그의 말대로 도윤은 밤새 지아를 놓아주지 않았다.지아는 도윤의 들썩거리는 가슴에 엎드렸다.“들어보니까 장민호가 날 죽이려 했던 킬러와 접촉했더라고.”“그놈한테서 진실을 알고 싶은 거야?”“응. 장민호는 가까이서 접촉한 유일한 사람이고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우리가 알기 힘들 정도로 깊숙이 숨어 있어. 장민호는 내가 2년 넘게 쫓고 있는 단서야.”도윤은 한숨을 쉬었다.“너와 그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너와 가까이서 웃고 있는 그 자식을 생각하면 괴로워서 찢어 죽이고 싶어.”“걱정하지 마, 미워만 해도 부족한 사람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이 생길 리 없잖아.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방법이 없어.”도윤은 지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조심해야 해.”“응.”“참 각하 측에서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지아는 눈을 깜빡였다.“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사람 딸을 때린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너 같은 재능을 나라에 바치지 않는데 널 그냥 풀어줄 것 같아? 내일 장경이 직접 찾아올 거야. 지아 네 생각은 어때?”지아
지아는 더 이상 어리석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고 상류층일수록 일반인보다 더 많은 뉴스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각하를 따라다니는 것은 위험했지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보이지 않게 도윤을 도와 현 상황을 통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새벽 도윤이 눈을 뜨고 일어날 준비를 하자 지아는 작은 손으로 도윤의 허리를 감싸고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가려고?”“음, 요즘 좀 바빠.”“그렇게 바쁜데 굳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야?”지아가 놀리자 도윤은 몸을 뒤집어 그녀를 품에 안고 깨물었다.“지아가 너무 유혹적이라서, 내가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널 빼앗아 갈까 봐 항상 두려워서 그래.”두 사람은 오래도록 열정적인 키스를 나눴고 최근 들어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책임을 버리니 쾌락이 배로 다가왔다.어렵게 떨어진 도윤은 몇 분 동안 지아를 품에 안고 가만히 말했다.“지아야, 평생 이렇게 널 안고만 있으면 좋겠어.”“너무 부담스러워서 싫어. 이대로가 좋아, 어서 가.”도윤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지아의 이마에 입맞춤했다.“조금 더 쉬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말을 마친 도윤은 샤워를 하고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지아에게는 간만에 주어진 자유 시간에 몇 시간 더 잠을 잤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뜬 뒤였다.휴대폰이 여러 번 진동했고 아니나 다를까 장경의 번호였다.다시 전화를 걸자 지아의 피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장경은 조금 놀랐다. “아직도 자고 있어요? 미안해요, 몰랐어요.”“무슨 일이죠, 부장경 씨?”“바네사, 저 지금 집 밖에 있는데 잠깐만 만나고 싶어요.”“잠시만 기다려주세요.”지아는 하품하며 재빨리 변장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내려갔다.빌라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 호송 행렬이 있었는데, 맨 앞에 있는 검은색 차량의 빨간색 001 번호판이 눈길을 끌었다.차 위에 쌓인 눈으로 보아 그들은 분명히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았다.집에 침입하지 않
지아는 덤덤하게 말했다.“부장경 씨 체면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각하는 더 이상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 아니고 적절한 치료만 받으면 몸이 좋아질 거라서 제 역할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쪽 동생이 저를 별로 반기지 않는데 저 때문에 집안에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장경이 직접 찾아온 것은 단순히 곁에 남아 아버지의 치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아 같은 명의가 곁에 있으면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초기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런 인재를 어떻게 밖으로 내보내나.“저희도 이미 그 부분에 대해 상의했습니다. 제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버릇이 없어서 전에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제가 동생 대신 사과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겠습니다.”“부장경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저도 조건이 있어요. 외부에 아직 치료 중인 환자가 있는데 제 행동을 제한하지는 마세요.”“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곁에 있으려면 100% 자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는데 물론 이 또한 협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요구 사항은 없나요?”지아는 말을 이어갔다.“의료팀에 들어가서 함께 연구하고 싶은데 문제 있나요?”“아니요, 학구열이 높으시니 모든 공부 기회는 우선으로 주어지지만 해외에 갈 경우 미리 신청해야 합니다.”지아는 몇 가지 조건을 더 제시했고 장경은 기꺼이 그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알았어요, 그럼 됐어요.”장경이 손을 내밀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두 손을 맞잡자 장경의 손은 도윤의 손보다 굳은살이 더 많이 박여 있었고 매우 거칠었다.오히려 장경은 의사인 지아의 손이 이렇게 매끈할 줄은 몰랐다.잠깐이었지만 은근히 놀랐다.신분 때문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악수하지만 이렇게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은 처음 접했다.“별문제 없으면 지금 바로 함께 가시죠. 안 계시는 이틀 동안 아버지께서 바네사가 만들어준 약식에 익숙해져서 다른
지아는 서둘러 말했다.“미안해요, 그냥 무심코 물어본 거예요.”장경 역시 싸늘한 기운을 거두어들였다.“제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그 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고, 지아는 처음 결혼했을 당시의 도윤보다 더 꼿꼿한 남자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무서운 사람이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심지어 차에서 내릴 때는 직접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춥고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요.”장경의 눈에 여자는 늘 약한 존재였기에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르면서도 선을 그었다.돌아온 지아를 보자 부남진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다시 나타났다.“얘야, 드디어 돌아왔구나. 지난번에 만들어 주기로 한 대추 앙금 케이크도 안 만들어줬잖아.”지아는 미소를 지었다.“그럼 지금 만들러 갈게요.”“서두를 거 없어, 힘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왔으니까 좀 쉬면서 차나 끓여줘.”“알았어요.”민연주의 시선이 지아에게 향했다. 늘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고 거리를 두는 부남진도 유독 이 의사만은 다르게 대했다.처음에는 부남진을 죽음에서 살려준 지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이 부자는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너무 관대했고 심지어 부남진은 무척 의지하고 있었다.지아가 떠난 후 이틀 동안 부남진의 식욕이 현저히 떨어졌고,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약식도 지아가 만들어준 것과 맛이 다르다고 말하기까지 했다.여자로서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특히 장경은 아직 미혼인데 부남진이 자칫 잘못해서 이 여자를 장경과 결혼시키면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했다.그래도 민연주는 미셸보다 나이가 많아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지아가 돌아왔을 때도 매우 열성적이었다.“당신도 참, 이제 막 집에 왔는데 일단 쉬게 해야지 차를 끓여달라니요. 그건 제가 할게요, 제 전문이니까.”지아도 더 나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저녁 약식 준비하러 갈게요. 그리고 각하의 검진 결과지를 보고 몸 상태에 따라 약
부남진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결혼이 무슨 밥 먹는 건 줄 알아?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 상해도 기껏해야 설사 몇 번 하면 괜찮지만 도윤이가 싫다는데 억지로 둘을 붙여놨다가 애정 없는 결혼에서 결국 속상한 건 우리 딸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은 거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집착을 버릴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감정을 쏟은 것 같아.”민연주는 조금 화가 난 듯 침대에 앉았다.“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우리 딸은 어려서부터 보배처럼 귀하게 자랐는데 이제 와서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데 그럼 어떡해요?”“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이혼남이랑 결혼해?”부남진은 더 깊이 생각했다.“결혼을 몇 번 하든 우리 딸이 좋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이 이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내 방식대로 할 거예요.”민연주가 결심을 굳히자 부남진은 불쾌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도대체 뭘 그렇게 서둘러?”“엄마로서 뭘 서두르겠어요? 당신 딸도 이제 20대인데, 이대로 뒀다가 남들 농담거리로 만들 생각이에요?”부남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도윤이와 다시 얘기해 볼게.”“알았어요.”불쾌함이 가득한 부남진의 얼굴을 본 민연주는 다시 자세를 부드럽게 고쳐 앉았다.“여보, 나는 우리 딸 위해서 그러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과부와 뭐가 달라요. 똑같이 불행하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낫죠.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다 집에서 맺어준 사람과 결혼하지 어디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랑 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도 다 결혼하고 감정 키운 거잖아요.”“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 도윤이한테 전화해, 내가 얘기해 볼게.”“알았어요.”연락을 받고 온 도윤은 그다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남진이 본론을 꺼냈다.“눈 깜짝 할 사이에 너도 이렇게 컸네. 그때 네 결혼식에 참석 못 한 게 한이었어. 넌 내 손으로 키운 애고 네 성격을 잘 아니까
지아의 목소리는 모든 우울함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산들바람 같았고 부남진의 이마 주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부남진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아는 사람은 눈치껏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 민연주조차도 그가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감히 다가오지 않았다.지아에게 나가 있다가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말했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지아는 도윤을 모른 척했다. “이도윤 씨도 오셨네요. 다행히 많이 만들어서 같이 드시면 되겠어요.”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들어온 이 여우가 일부러 자신에게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연기 실력이 점점 늘고 있다.“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각하 쉬시는데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지아는 대추떡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차 테이블로 걸어갔다.“어르신, 어떤 차 마시겠어요?”부남진은 물 흐르듯 차 도구를 닦는 지아의 움직임을 보며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오랜 세월 먼지가 쌓여 있던 과거의 일들이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때렸고 그는 더욱 복잡한 표정으로 대추떡 한 조각을 먹었다.대답을 듣지 못한 지아는 서둘러 부남진을 돌아보며 물었다.“어르신?”그제야 부남진은 정신을 차렸다.“미안하다, 내가 잠깐 넋을 잃었어.”고작 그 사람을 닮은 눈을 가진 아이 때문에 이처럼 넋을 잃다니, 아마도 대추떡 맛이 너무 익숙해서 이미 지나간 옛사람이 떠오른 것 같다.“용정차 어때요?”“좋지.”부남진은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지아가 그를 도와주려고 일어나려 하자 손을 들어 지아의 움직임을 막았다.“아니, 내가 알아서 할게.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뼈만 남겠어.”“네,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젊은 사람 몸도 아니니까 조심하세요.”“얘야, 가족은 있니?”지아는 고개를 저었다.“글쎄요,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르신 안 드세요? 제가 맛없게 만들었나요?”이는 할머님에게
지아는 호기심이 동해서 물었다.“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요?”부남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냐, 먹어.”부남진은 굳이 지아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지아는 작게 불렀다.“할아버지.”“착하지, 착하지.” 부남진은 손을 들어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천하를 호령하는 그가 어떻게 지금처럼 친절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보일 수 있을까.그의 손이 지아의 머리에 닿았을 때 지아도 마음속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가족들과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마음속에는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며칠 후 부남진은 퇴원했고 이제 그의 전담 주치의가 된 지아는 그를 따라 부씨 가문으로 향했다.호송대가A시 한 정원으로 들어섰고 밖에는 다섯 걸음에 한 명씩 사람들이 서 있었으며 전부 훤칠한 대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지아는 마당에 멈춘 차에서 내려 얼른 다가가 부남진을 부축했다.미셸과 민연주는 뒤에 있는 차에 앉았는데 내리자마자 미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저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아빠와 같은 차에 타, 웃겨 진짜.”장경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고 미셸은 전처럼 오만하게 굴지 못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아 역시 못 들은 척 어르신을 도와 부씨 가문으로 들어갔다.들어서자마자 마당에 대추나무 몇 그루가 보였는데 겨울이라 대추가 다 떨어지고 나무줄기에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마당에 쌓인 눈은 깨끗하게 쓸려 있었고 매실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부씨 가문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건물로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부남진은 옷을 벗어 지아에게 건넸고 옷을 걸 곳을 찾던 지아에게 마침 집사가 다가왔다.“저한테 주세요.”부남진이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는데 민연주가 옆에서 지시했다.“특별히 남편 돌봐주러 온 친구야. 오 집사, 부엌 구경 좀 시켜줘.”지아는 민연주가 점점 자신에게 거리감을 두는 것을 느꼈고 마치 잡일을 하러 온 사람 취급했다.지아는 별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