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호기심이 동해서 물었다.“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요?”부남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냐, 먹어.”부남진은 굳이 지아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지아는 작게 불렀다.“할아버지.”“착하지, 착하지.” 부남진은 손을 들어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천하를 호령하는 그가 어떻게 지금처럼 친절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보일 수 있을까.그의 손이 지아의 머리에 닿았을 때 지아도 마음속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가족들과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마음속에는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며칠 후 부남진은 퇴원했고 이제 그의 전담 주치의가 된 지아는 그를 따라 부씨 가문으로 향했다.호송대가A시 한 정원으로 들어섰고 밖에는 다섯 걸음에 한 명씩 사람들이 서 있었으며 전부 훤칠한 대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지아는 마당에 멈춘 차에서 내려 얼른 다가가 부남진을 부축했다.미셸과 민연주는 뒤에 있는 차에 앉았는데 내리자마자 미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저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아빠와 같은 차에 타, 웃겨 진짜.”장경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고 미셸은 전처럼 오만하게 굴지 못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아 역시 못 들은 척 어르신을 도와 부씨 가문으로 들어갔다.들어서자마자 마당에 대추나무 몇 그루가 보였는데 겨울이라 대추가 다 떨어지고 나무줄기에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마당에 쌓인 눈은 깨끗하게 쓸려 있었고 매실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부씨 가문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건물로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부남진은 옷을 벗어 지아에게 건넸고 옷을 걸 곳을 찾던 지아에게 마침 집사가 다가왔다.“저한테 주세요.”부남진이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는데 민연주가 옆에서 지시했다.“특별히 남편 돌봐주러 온 친구야. 오 집사, 부엌 구경 좀 시켜줘.”지아는 민연주가 점점 자신에게 거리감을 두는 것을 느꼈고 마치 잡일을 하러 온 사람 취급했다.지아는 별다
지아는 집사를 올려다보았다.“부씨 저택이 이렇게 큰데 다른 방이 있지 않나요?”“부씨 가문에 손님이 온 적은 드물고 게다가 다른 방도 다 이래요. 오랜 시간 사람이 없어서 다 난방 설비가 고장 났죠. 하룻밤이니까 사람 시켜서 따뜻한 핫팩 가져오라고 할게요. 주무시는데 별로 춥지 않을 거예요.”지아는 오 집사를 향해 담담하게 웃었다.“그래요.”“전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서두를 것 없어요.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오 집사님 방은 어디죠?”“안마당요, 왜요?”“오늘 밤에 방을 바꾸죠, 그쪽이 여기서 자요.”오 집사는 얼굴을 붉혔다.“어떻게 그래요, 그건 너무 불편할 것 같은데요.”“뭐가 불편해요? 내가 그쪽 물건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만 자는 건데 저도 상관없어요. 핫팩은 그쪽이 쓰면 되겠네요. 그러면 별로 춥지 않을 거예요.”지아는 집사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되받아쳤다.“저와 아내가 제 아내가 한방을 쓰니까 불편할 것 같네요.”“그러면 더 편하죠. 아주머니와 전 다 여자니까요. 집사님께서 여기 있는 제 짐 방으로 옮겨주세요.”오 집사는 말문이 막혔다. 만만한 상대인 줄 알았는데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지아는 캐리어를 끌고 문 앞까지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말했다.“집사님처럼 착하신 분이 빈방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시진 않으시겠죠?”“물, 물론이죠!”지아는 오 집사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드러냈다.“집사님께서 거짓말한 거면 저 어르신한테 절 못되게 대한다고 말씀드릴 거예요.”오 집사는 손등에 핏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아가씨께선 각하를 모시러 왔는데 설마 자기를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쪽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남 시중이나 드는 처지 아닌가요?”“오 집사님은 자신의 주제에 대한 인식이 정말 부족한 것 같네요.”지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첫째, 나는 이 댁 도련님께서 직접 찾아와 달라고 애원했던 전속 주치의로서 어르신 건강만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계약 위반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게 두렵지 않아?” 오 집사가 다급하게 말하자 지아가 피식 웃었다.“걱정하지 마, 그 정도 돈은 감당할 수 있으니까.”“가면 안 돼! 난방되는 방을 원하는 거잖아, 바꿔주면 될 거 아니야.”민연주는 지아가 너무 편히 있게 하지 말라고 했을 뿐, 지아를 내쫓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만약 지아가 정말 떠난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집사의 속셈을 꿰뚫어 본 지아는 이렇듯 시답잖은 일로 텃세 부리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지아는 팔짱을 낀 채 오 집사를 향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다고 하더니 간다니까 이제 생겼어? 오 집사 지금 나한테 장난해? 아니면 내가 당신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 같았나?”오 집사는 불쾌한 듯 말했다.“고작 방 하나 가지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정말 자기가 아가씨라도 되는 줄 알아? 머물 곳만 있으면 되지 이것저것 따지기는...”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인물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오 집사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장경은 바람을 일구며 손을 들어 오 집사의 얼굴을 때렸다. “네까짓 게 어디 감히 바네사에게 그런 말을 해?” 오 집사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졌고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도, 도련님!”“어떻게 된 거야?” 장경은 몇 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손에 몇 명의 피를 묻혔는지 모른다.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살기 어린 기운에 오 집사는 발도 제대로 디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오 집사는 황급히 말했다.“도련님, 이 아가씨를 위해 좋은 방을 마련해 주었는데 방이 좋지 않다고 까다롭게 굴고 방을 바꿔 주겠다고 말했는데도 저를 모욕했습니다. 심지어 억대 부자도 자기 눈치를 본다며 부씨 가문이 뭐냐면서 자기가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머물기 싫으면 당장 나가겠다고 했습니다.”그의 말을 들은 지아는 하늘 아래 이런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지아를 본
“내 귀로 당신이 한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이렇게 헛소리를 잘하는 줄 몰랐을 거야.”오 집사는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 자기 얼굴을 세게 때렸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몰라뵀습니다. 도련님, 오랜 세월 열심히 일만 한 걸 봐서 용서해 주세요! 제가 늙어서 정신이 잘못됐나 봅니다.”“늙어서 노망이 났으면 집사직을 내려놔. 우리가 매일 높은 월급을 주는 건 집안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라고 하는 게 아니야.”집사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말을 듣고 오 집사는 더욱 울었다.부씨 가문 집사는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고 불로소득도 많은데 이렇게 좋은 직장을 어떻게 포기하겠나.뒤에서 민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민연주는 지아를 바라보며 아주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바네사, 우리 손님으로 오셨는데 아랫사람들이 잘못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오 집사한테 방을 보여주라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죠?”지아가 예전의 그 순진한 소녀였다면 민연주가 분명 상냥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최근 가까이서 본 민연주는 미셸보다 훨씬 고단수였다.아마도 자신 때문에 미셸이 뺨 몇 대 맞는 걸 참지 못하고 이젠 어르신도 깨어났으니 이러는 것이겠지.속 검은 사람들은 자기 급할 땐 손이야 발이야 빌더니 필요 없을 땐 한쪽으로 내팽개친다.부씨 가문 부자가 자신을 눈여겨보니 똑똑한 민연주는 미셸처럼 대놓고 난리를 부리지 않고 오 집사에게 시켜서 몰래 손을 쓴 것이다.자신이 부남진 앞에서 보인 얌전한 모습을 보고 소란을 피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은데 이젠 오 집사가 난처하게 됐다.지아는 오 집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민연주까지 끌어내릴지 궁금했다.개들끼리 물고 뜯는 건 꽤 재미있을 것 같다.“사모님, 저는 오늘 이 집에 처음 왔는데 어쩌다 집사님께 밉보인 건지 모르겠네요. 저에게 난방도 안 되는 방을 주고 견디라네요. 저는 원래도 몸이 연약한 여자라 영하 20도의 밤 날씨는 견딜 수야 있겠지만
오 집사는 민연주가 꼬리 자르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가 어르신과 도련님께 그토록 중요한 존재인 줄 몰랐다.이대로 있다간 민연주까지 엮이게 생겼는데 그녀까지 끌어내릴 바에야 혼자 죽는 게 나았다.오 집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니까 어르신이 화를 내더라도 화해하겠지만 자신이 사모님을 들추면 부씨 가문 전체에 밉보이며 때가 되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오 집사는 곧바로 모든 혐의를 자백했다.“네, 사모님께서는 분명히 전달했고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방에 난방이 없어서 수리공에게 연락했는데 오늘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일입니다. 제 태도가 나쁘고 아가씨께 함부로 대한 건 천벌 받아 마땅하지만 어르신과 도련님께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예상대로 민연주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며 그 대신 선처를 호소했다.“오 집사가 오랫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오늘 일은 잘못했어도 앞으로 고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죠.”미셸도 중얼거렸다.“그러게, 고작 난방이 없는 것뿐이잖아요?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이 난리를 부려요? 집사님도 우리 가족처럼 열심히 일하는데, 아빠, 오빠가 너무 심했어요. 때리고 욕도 했는데 이젠 해고까지 해요?”“별일이 아니야?” 부남진이 비웃었다.“그래, 좋아. 오늘 밤 사모님과 아가씨 방에 난방 끊어. 별일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난방 설비가 고장 나면 다른 방으로 바꾸면 되는데, 이 집에 빈방이 없나? 나머지 방이 다 고장 났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안 되는 거야? 굳이 사람을 찬 방에 재워야 해? 늙은 것이 눈이 멀어서 제멋대로 하는 걸 보니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 같네. 지금 당장 재무팀에 가서 이번 달 월급 챙겨가고 배상할 건 배상해 주면 되지. 부씨 가문에선 당신 못 써.”오 집사는 완전히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민연주의 다리를 껴안으며 선처를 빌었다.“사모님, 무슨 말씀 좀 해주세요. 전 부씨 가문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민연주 역시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얘기를 꺼내자 민연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빠한테는 금기 사항인 거 잘 알면서 입 다물어.”“금기라니, 아빠가 그때는 명예와 돈을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가 나중에 엄마랑 만나고 나서야 서서히 올라간 거잖아. 아빠도 따지고 보면 쓰레기야.”“말도 안 돼, 누가 그런 말을 했어?”미셸은 혀를 홀라당 내밀었다.“외할머니가.”“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민씨 가문이 네 아빠한테 붙어야 처지야. 제 아빠 성격 잘 알잖아. 그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 꺼냈다가 너 따귀 맞을 각오해야 해.”“알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저 여자는 생긴 것도 평범하고 아빠 닮지도 않았으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그래, 오늘 일 너도 봤겠지만 네 아빠와 네 오빠가 그년한테 너무 잘해줘. 오 집사도 쫓아낼 정도니까 앞으로 그 여자 앞에서 조심해. 걘 똑똑해서 넌 상대하지 못해.”미셸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똑똑해도 결국 가족도 없는 고아에 평생 나를 따라잡을 수 없는 천민일 뿐이잖아요!”“됐어, 그만하고 앞으로 이틀 동안 아빠 앞에서 얌전히 굴고 그 여자랑 말썽 일으키지 마.”“알겠어요 엄마. 집사님은...”“아빠가 지금 화가 나 있으니까 오 집사가 조금 참아야지. 그 여자는 오래 못 버틸 거야.”민연주의 눈빛에 악독한 기색이 역력했다.지아는 부남진과 함께 다실로 돌아갔고 부남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얘야, 내가 또 억울한 일을 만들었구나.”오늘 일을 누가 시작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민연주는 자기 아내였고, 사람들 앞에서 민연주의 체면을 낮출 수 없어 그냥 참으며 모든 잘못을 집사 탓으로 돌렸다.“괜찮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어요.”“넌 너무 물러.”지아는 웃으며 휠체어를 놓고 할아버지에게 차를 끓여드리러 다가갔다.“할아버지, 저 무르지 않아요. 정말 물렀다면 부장경 씨도 부르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큰일 내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한번 참으면 앞으로
부남진은 부드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네 성격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데다, 네 눈은...”“제 눈이요?” 지아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잘해, 널 야박하게 대하지 않을 테니까.” 부남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눈만 닮았을 뿐, 사람까지 닮은 건 지아였다.당시 도윤이 비공개로 결혼할 때는 신부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시상식에 도윤이 지아와 함께 나타났을 때 부남진은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당시 몰래 알아본 결과 지아의 아버지가 소계훈이고, 소씨 가문은 A시 출신으로 그 여자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지아는 항상 부남진이 뭔가 숨기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입을 열지 않았다.밖에 눈이 내리자 지아는 부남진 곁에서 약식, 차, 과자 등을 만들어 주었다.처음엔 전효와 도윤을 위해 부남진에게 다가가며 거들 생각이었다. 곁에 있으면 몰래 손을 쓸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그런데 진심으로 부남진을 돌보게 되면서 어릴 때부터 소계훈의 애정밖에 몰랐던 탓인지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에게 관심이 갔다.왠지 모를 친근감이 있었는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셸의 거듭되는 무례를 보며 이곳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해질 무렵, 장경이 직접 마련한 방은 부자의 방과 가까운 안뜰에 있었는데 넓을 뿐 아니라 청소도 아주 잘 되어 있었다.지아가 잠이 들려고 할 때 미셸이 미쳐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아빠, 왜 제 방 난방을 꺼요?”부남진이 그냥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부남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왔다.“하룻밤 난방을 안 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겪어보는게 어때서? 남은 없어도 되는데 너희들은 안돼?”미셸은 황급히 반박했다.“저 여자가 대체 뭔데 우리랑 비교해요?”“부설아!” 부남진의 낮은 목소리에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아는 미셸이 난방이 있든 없든 그건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그 시각 부남진의
부남진은 지아에게 애정을 쏟고 있을 뿐 며느리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지아가 무슨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반발하는 민연주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바네사는 명성 높은 의사인데 뭐가 어때서?”“미셸이 애까지 낳았다고 한 거 못 들었어요? 눈도 초록색이래요. 남편이 다른 인종일지도 모르는데 내 아들을 그런 하자 있는 여자 뒤치다꺼리나 시킬 수 없어요.”탁-부남진이 탁자를 세게 때렸다.“민연주, 말 가려서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단지 내 목숨을 구해주고 가족도 없는 아이라 안쓰러웠을 뿐이야. 게다가 그 아이는 지금 명성으로 돈도 부족하지 않은데 걔 말이 맞지. 돈 많은 사람도 아프면 수술할지 말지 걔 눈치를 보잖아. 내 곁에 있지 않아도 그만이야, 걔가 원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라고.”민연주는 남편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여보,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안 그렇다니 안심이 되네요. 화내지 마요. 우린 부부인데 내가 당신 성격 모르겠어요? 설마 정말 날 오늘 밤 그런 얼음 창고에서 지내게 할 거예요?”“당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앞으로 당신 딸도 사람 존중할 줄 몰라.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할 말 없어. 이미 뱉은 말 되돌릴 마음도 없고.”민연주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부남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결국 차갑게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부남진 씨, 대단하네요!”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녀를 미셸이 그대로 본받은 것 같다.그동안 사람들 앞에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척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오만한 아가씨였다.부남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으로 걸어가 안쪽의 어두운 캐비닛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수묵화로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흑백으로만 그려져 있었지만 그림 속 인물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한 어린 소녀가 나뭇가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장난스럽고 귀여웠다.부남진이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아직 살아 있어? 그때 누나를 일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