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집사는 민연주가 꼬리 자르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가 어르신과 도련님께 그토록 중요한 존재인 줄 몰랐다.이대로 있다간 민연주까지 엮이게 생겼는데 그녀까지 끌어내릴 바에야 혼자 죽는 게 나았다.오 집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니까 어르신이 화를 내더라도 화해하겠지만 자신이 사모님을 들추면 부씨 가문 전체에 밉보이며 때가 되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오 집사는 곧바로 모든 혐의를 자백했다.“네, 사모님께서는 분명히 전달했고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방에 난방이 없어서 수리공에게 연락했는데 오늘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일입니다. 제 태도가 나쁘고 아가씨께 함부로 대한 건 천벌 받아 마땅하지만 어르신과 도련님께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예상대로 민연주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며 그 대신 선처를 호소했다.“오 집사가 오랫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오늘 일은 잘못했어도 앞으로 고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죠.”미셸도 중얼거렸다.“그러게, 고작 난방이 없는 것뿐이잖아요?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이 난리를 부려요? 집사님도 우리 가족처럼 열심히 일하는데, 아빠, 오빠가 너무 심했어요. 때리고 욕도 했는데 이젠 해고까지 해요?”“별일이 아니야?” 부남진이 비웃었다.“그래, 좋아. 오늘 밤 사모님과 아가씨 방에 난방 끊어. 별일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난방 설비가 고장 나면 다른 방으로 바꾸면 되는데, 이 집에 빈방이 없나? 나머지 방이 다 고장 났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안 되는 거야? 굳이 사람을 찬 방에 재워야 해? 늙은 것이 눈이 멀어서 제멋대로 하는 걸 보니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 같네. 지금 당장 재무팀에 가서 이번 달 월급 챙겨가고 배상할 건 배상해 주면 되지. 부씨 가문에선 당신 못 써.”오 집사는 완전히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민연주의 다리를 껴안으며 선처를 빌었다.“사모님, 무슨 말씀 좀 해주세요. 전 부씨 가문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민연주 역시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얘기를 꺼내자 민연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빠한테는 금기 사항인 거 잘 알면서 입 다물어.”“금기라니, 아빠가 그때는 명예와 돈을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가 나중에 엄마랑 만나고 나서야 서서히 올라간 거잖아. 아빠도 따지고 보면 쓰레기야.”“말도 안 돼, 누가 그런 말을 했어?”미셸은 혀를 홀라당 내밀었다.“외할머니가.”“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민씨 가문이 네 아빠한테 붙어야 처지야. 제 아빠 성격 잘 알잖아. 그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 꺼냈다가 너 따귀 맞을 각오해야 해.”“알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저 여자는 생긴 것도 평범하고 아빠 닮지도 않았으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그래, 오늘 일 너도 봤겠지만 네 아빠와 네 오빠가 그년한테 너무 잘해줘. 오 집사도 쫓아낼 정도니까 앞으로 그 여자 앞에서 조심해. 걘 똑똑해서 넌 상대하지 못해.”미셸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똑똑해도 결국 가족도 없는 고아에 평생 나를 따라잡을 수 없는 천민일 뿐이잖아요!”“됐어, 그만하고 앞으로 이틀 동안 아빠 앞에서 얌전히 굴고 그 여자랑 말썽 일으키지 마.”“알겠어요 엄마. 집사님은...”“아빠가 지금 화가 나 있으니까 오 집사가 조금 참아야지. 그 여자는 오래 못 버틸 거야.”민연주의 눈빛에 악독한 기색이 역력했다.지아는 부남진과 함께 다실로 돌아갔고 부남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얘야, 내가 또 억울한 일을 만들었구나.”오늘 일을 누가 시작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민연주는 자기 아내였고, 사람들 앞에서 민연주의 체면을 낮출 수 없어 그냥 참으며 모든 잘못을 집사 탓으로 돌렸다.“괜찮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어요.”“넌 너무 물러.”지아는 웃으며 휠체어를 놓고 할아버지에게 차를 끓여드리러 다가갔다.“할아버지, 저 무르지 않아요. 정말 물렀다면 부장경 씨도 부르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큰일 내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한번 참으면 앞으로
부남진은 부드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네 성격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데다, 네 눈은...”“제 눈이요?” 지아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잘해, 널 야박하게 대하지 않을 테니까.” 부남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눈만 닮았을 뿐, 사람까지 닮은 건 지아였다.당시 도윤이 비공개로 결혼할 때는 신부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시상식에 도윤이 지아와 함께 나타났을 때 부남진은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당시 몰래 알아본 결과 지아의 아버지가 소계훈이고, 소씨 가문은 A시 출신으로 그 여자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지아는 항상 부남진이 뭔가 숨기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입을 열지 않았다.밖에 눈이 내리자 지아는 부남진 곁에서 약식, 차, 과자 등을 만들어 주었다.처음엔 전효와 도윤을 위해 부남진에게 다가가며 거들 생각이었다. 곁에 있으면 몰래 손을 쓸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그런데 진심으로 부남진을 돌보게 되면서 어릴 때부터 소계훈의 애정밖에 몰랐던 탓인지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에게 관심이 갔다.왠지 모를 친근감이 있었는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셸의 거듭되는 무례를 보며 이곳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해질 무렵, 장경이 직접 마련한 방은 부자의 방과 가까운 안뜰에 있었는데 넓을 뿐 아니라 청소도 아주 잘 되어 있었다.지아가 잠이 들려고 할 때 미셸이 미쳐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아빠, 왜 제 방 난방을 꺼요?”부남진이 그냥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부남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왔다.“하룻밤 난방을 안 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겪어보는게 어때서? 남은 없어도 되는데 너희들은 안돼?”미셸은 황급히 반박했다.“저 여자가 대체 뭔데 우리랑 비교해요?”“부설아!” 부남진의 낮은 목소리에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아는 미셸이 난방이 있든 없든 그건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그 시각 부남진의
부남진은 지아에게 애정을 쏟고 있을 뿐 며느리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지아가 무슨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반발하는 민연주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바네사는 명성 높은 의사인데 뭐가 어때서?”“미셸이 애까지 낳았다고 한 거 못 들었어요? 눈도 초록색이래요. 남편이 다른 인종일지도 모르는데 내 아들을 그런 하자 있는 여자 뒤치다꺼리나 시킬 수 없어요.”탁-부남진이 탁자를 세게 때렸다.“민연주, 말 가려서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단지 내 목숨을 구해주고 가족도 없는 아이라 안쓰러웠을 뿐이야. 게다가 그 아이는 지금 명성으로 돈도 부족하지 않은데 걔 말이 맞지. 돈 많은 사람도 아프면 수술할지 말지 걔 눈치를 보잖아. 내 곁에 있지 않아도 그만이야, 걔가 원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라고.”민연주는 남편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여보,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안 그렇다니 안심이 되네요. 화내지 마요. 우린 부부인데 내가 당신 성격 모르겠어요? 설마 정말 날 오늘 밤 그런 얼음 창고에서 지내게 할 거예요?”“당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앞으로 당신 딸도 사람 존중할 줄 몰라.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할 말 없어. 이미 뱉은 말 되돌릴 마음도 없고.”민연주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부남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결국 차갑게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부남진 씨, 대단하네요!”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녀를 미셸이 그대로 본받은 것 같다.그동안 사람들 앞에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척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오만한 아가씨였다.부남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으로 걸어가 안쪽의 어두운 캐비닛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수묵화로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흑백으로만 그려져 있었지만 그림 속 인물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한 어린 소녀가 나뭇가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장난스럽고 귀여웠다.부남진이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아직 살아 있어? 그때 누나를 일부러
“무슨 파티인데?”“아마 짝을 간택하는 자리가 아닐까.” 도윤은 지아를 빤히 보았다. “빨리 보고 싶어.”지아는 전화를 끊고 저 모녀가 오늘 저녁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했다.부남진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할 줄이야.강제로 난방을 끄게 된 민연주 모녀는 벌써 지쳐가기 시작했고 미셸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아빠 미친 거 아니에요? 저년 때문에 우리가 얼어 죽으라고?”“그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이번 일은 내가 미처 생각 못 했어. 저 물건이 일을 크게 벌일 줄이야.”민연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몰래 수작을 부려 지아에게 한 방 먹이려고 했는데 작은 일로 지아가 부남진에게까지 알리며 부남진에게 해명해달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가장으로서 부남진이 이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딸이 직접 나서야 할 수밖에 없었다.“망할 년이 꽤 똑똑하네.”“엄마, 외부인이 우리 머리 위에 올라타서 괴롭히는 걸 그냥 용납할 수 있어요?”“흥, 못 참아도 참아야지. 네 아버지와 네 오빠가 지금 그 여자를 구세주로 삼고 있으니 당분간은 그 여자랑 부딪히지 말자. 중요한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도윤이야.”민연주는 가득 채운 온수 주머니를 이불 밑에 넣고 히터 두 개를 최대로 돌리자 서서히 방 안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어쨌든 부남진은 난방을 켜면 안 된다는 말만 했지 다른 걸로 온기를 취하는 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민연주는 히터를 감싼 채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네 결혼 문제도 해결할 때가 됐어.”“엄마, 내가 결혼하고 싶어도 오빠가 싫다면서 일부러 때리기까지 해요. 나랑 결혼하기 싫은 거야!”미셸은 도윤에 한해서만 고개를 숙였다.“그렇다고 납치해서 가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멍청하긴, 남자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다 방법이 있지.”“무슨 방법?”민연주가 손을 내밀자 미셸이 귀를 쫑긋 세웠다.“엄마, 가르쳐 줘요.”“남자는...”민연
지아는 이날 밤,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의 방은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방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눈송이들이 춤추는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유리창은 천장까지 높게 뻗어 있었고, 커튼은 자동으로 열리고 닫혔다.여기서 바깥에 하얀 눈이 흰 벽과 검은 기와에 조용히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고대로 돌아간 듯한 기시감이 들곤 한다. 지아는 간단히 씻은 뒤 다시 가면을 쓰고 나와 부남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는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몰려왔고 이에 지아는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고 온도도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지아는 먼 곳을 바라보았고 마음 속엔 지윤이 떠올랐다. 도윤의 말로 그 아이는 해도로 훈련을 떠났고 자신 또한 한동안은 지윤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년 봄쯤, 지윤은 한 달의 휴가가 있을 것이라 한다. ‘그 아이, 아마 많이 컸겠지?’ “좋은 아침이예요.” 부장경은 얇은 반팔 차림으로 정원에서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몸에 딱 붙은 타이트한 운동복에 그의 완벽한 몸매가 드러났다. 게다가 부장경의 준수한 얼굴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 선생님, 일찍하네요.” “이젠 익숙해져서요.” 지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때 부장경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참, 바네사 씨. 내일 저녁 부씨 가문에 연회가 있습니다.” 부설아에 비해 부장경은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었기에 그의 혼사가 더욱 중요했다. 때문에 내일 연회에는 명문가의 유명 인사들을 불러 부장경에게 선을 보게 할 지도 모른다. “네, 그럼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리면 되나요?” “아니요, 오해하셨습니다. 이번에 저희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건 전부 바네사 씨 덕분입니다.” “게다가 이번 연회는 저희 아버지의 완쾌를 축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꼭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지난 번의 교훈으로 요 며칠
밤이 된 후, 경찰차들이 앞에서 길을 텄고 국연의 요리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아는 자신이 국연의 요리를 먹어보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을 손으로 잡으며 7년 전 암에 걸렸던 때가 떠올랐다.새삼 그때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는데 말이다. 고풍스러운 홀에서 지아는 각양각색의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지아는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예쁘고 착한 아이들까지 여러 명 낳았다. 오늘 이 자리는 비록 지아가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시선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미셸도 매우 단아하고 고급지게 단장했는데 온몸의 보석들이 빛나고 있는 것이 부잣집 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타이트한 이 검은색 드레스는 몸매가 아주 좋아야만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검은색 드레스의 포인트는 바로 가슴 튜브탑 부분에 장식으로 되어 있는 검은색 솜털과 악세사리로 따라온 길게 늘어진 귀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지아는 끝없은 매력을 발산해냈다. 지아의 등장으로 방금까지 미셸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지아의 곁으로 향했다. “당신이 바로 바네사 의사인가요?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네요.” “바네사 씨, 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저의 할아버지가 엄중한 심장병을 앓고 있어 제가 당신을 1년 넘게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혹시 저희 할아버지 진료를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명의님, 전부터 명성이 자자하여 당신의 이름은 익히 들어본 적 있습니다. 제 어머니의 병은 의사들이 전부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부디 명의님께서 살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지아의 곁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전부 그녀에게 병을 보이려는 사람들이었고 모두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한편 미셸은 자신이 아무렇게 던져준 그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지아가 너무 아름다운 모습에 샘이 났다. 지아의 피부는
하용이 미셸을 대하는 것은 마치 미셸이 도운을 대하는 모습과 같았다. 자신이 호감을 가지는 상대가 본인에게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말이다. 미셸은 심드렁하여 대충 대답했다.“고마워.” 말을 마친 미셸은 다시 도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무시를 당한 하용은 조용히 주먹을 꽉 잡았다. 도윤은 정장 차림에 반쪽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가면을 뚫고 나오는 잘생김과 신비감으로 많은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오빠.” 미셸은 드레스를 들고 얼른 도윤의 곁으로 뛰어왔다. 지아는 손에 잔을 든 채 흔들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마치 동화 같은 이 장면을 쳐다보았다. 미셸은 키가 컸기에 5cm밖에 되지 않는 힐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도윤에게로 달려가는 순간 발이 삐끗했고 당장 넘어져 도윤의 품에 안길 것 같았다. 이런 자리에서 만약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온 연회장의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누구든 분명 자신이 완전히 넘어지게 두진 않을 거라 미셸은 생각했다. 하지만 도윤은 뒤에 있던 진봉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고 이건 미셸이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진봉도 속으로는 수만 번 원치 않는 마음이 더욱 컸지만 이 상황에서 정말 미셸이 그대로 넘어지게 둘 수 없었다. 진봉은 두 손으로 미셸을 받아냈다. “미셸 아가씨, 괜찮아요?” 미셸은 싸늘한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보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기에 겨우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진봉은 얼른 미셸에게서 손을 뗐다. 이때 도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떴고 부장경이 다가와 미셸의 어깨를 잡으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셸, 괜찮아?” 미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빠, 나 괜찮아.” 부장경은 그대로 미셸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드레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바네사가 이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길래 나랑 바꿨어. 지금 저 여자 노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