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계약 위반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게 두렵지 않아?” 오 집사가 다급하게 말하자 지아가 피식 웃었다.“걱정하지 마, 그 정도 돈은 감당할 수 있으니까.”“가면 안 돼! 난방되는 방을 원하는 거잖아, 바꿔주면 될 거 아니야.”민연주는 지아가 너무 편히 있게 하지 말라고 했을 뿐, 지아를 내쫓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만약 지아가 정말 떠난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집사의 속셈을 꿰뚫어 본 지아는 이렇듯 시답잖은 일로 텃세 부리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지아는 팔짱을 낀 채 오 집사를 향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다고 하더니 간다니까 이제 생겼어? 오 집사 지금 나한테 장난해? 아니면 내가 당신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 같았나?”오 집사는 불쾌한 듯 말했다.“고작 방 하나 가지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정말 자기가 아가씨라도 되는 줄 알아? 머물 곳만 있으면 되지 이것저것 따지기는...”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인물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오 집사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장경은 바람을 일구며 손을 들어 오 집사의 얼굴을 때렸다. “네까짓 게 어디 감히 바네사에게 그런 말을 해?” 오 집사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졌고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도, 도련님!”“어떻게 된 거야?” 장경은 몇 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손에 몇 명의 피를 묻혔는지 모른다.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살기 어린 기운에 오 집사는 발도 제대로 디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오 집사는 황급히 말했다.“도련님, 이 아가씨를 위해 좋은 방을 마련해 주었는데 방이 좋지 않다고 까다롭게 굴고 방을 바꿔 주겠다고 말했는데도 저를 모욕했습니다. 심지어 억대 부자도 자기 눈치를 본다며 부씨 가문이 뭐냐면서 자기가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머물기 싫으면 당장 나가겠다고 했습니다.”그의 말을 들은 지아는 하늘 아래 이런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지아를 본
“내 귀로 당신이 한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이렇게 헛소리를 잘하는 줄 몰랐을 거야.”오 집사는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 자기 얼굴을 세게 때렸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몰라뵀습니다. 도련님, 오랜 세월 열심히 일만 한 걸 봐서 용서해 주세요! 제가 늙어서 정신이 잘못됐나 봅니다.”“늙어서 노망이 났으면 집사직을 내려놔. 우리가 매일 높은 월급을 주는 건 집안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라고 하는 게 아니야.”집사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말을 듣고 오 집사는 더욱 울었다.부씨 가문 집사는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고 불로소득도 많은데 이렇게 좋은 직장을 어떻게 포기하겠나.뒤에서 민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민연주는 지아를 바라보며 아주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바네사, 우리 손님으로 오셨는데 아랫사람들이 잘못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오 집사한테 방을 보여주라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죠?”지아가 예전의 그 순진한 소녀였다면 민연주가 분명 상냥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최근 가까이서 본 민연주는 미셸보다 훨씬 고단수였다.아마도 자신 때문에 미셸이 뺨 몇 대 맞는 걸 참지 못하고 이젠 어르신도 깨어났으니 이러는 것이겠지.속 검은 사람들은 자기 급할 땐 손이야 발이야 빌더니 필요 없을 땐 한쪽으로 내팽개친다.부씨 가문 부자가 자신을 눈여겨보니 똑똑한 민연주는 미셸처럼 대놓고 난리를 부리지 않고 오 집사에게 시켜서 몰래 손을 쓴 것이다.자신이 부남진 앞에서 보인 얌전한 모습을 보고 소란을 피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은데 이젠 오 집사가 난처하게 됐다.지아는 오 집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민연주까지 끌어내릴지 궁금했다.개들끼리 물고 뜯는 건 꽤 재미있을 것 같다.“사모님, 저는 오늘 이 집에 처음 왔는데 어쩌다 집사님께 밉보인 건지 모르겠네요. 저에게 난방도 안 되는 방을 주고 견디라네요. 저는 원래도 몸이 연약한 여자라 영하 20도의 밤 날씨는 견딜 수야 있겠지만
오 집사는 민연주가 꼬리 자르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가 어르신과 도련님께 그토록 중요한 존재인 줄 몰랐다.이대로 있다간 민연주까지 엮이게 생겼는데 그녀까지 끌어내릴 바에야 혼자 죽는 게 나았다.오 집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니까 어르신이 화를 내더라도 화해하겠지만 자신이 사모님을 들추면 부씨 가문 전체에 밉보이며 때가 되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오 집사는 곧바로 모든 혐의를 자백했다.“네, 사모님께서는 분명히 전달했고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방에 난방이 없어서 수리공에게 연락했는데 오늘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일입니다. 제 태도가 나쁘고 아가씨께 함부로 대한 건 천벌 받아 마땅하지만 어르신과 도련님께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예상대로 민연주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며 그 대신 선처를 호소했다.“오 집사가 오랫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오늘 일은 잘못했어도 앞으로 고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죠.”미셸도 중얼거렸다.“그러게, 고작 난방이 없는 것뿐이잖아요?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이 난리를 부려요? 집사님도 우리 가족처럼 열심히 일하는데, 아빠, 오빠가 너무 심했어요. 때리고 욕도 했는데 이젠 해고까지 해요?”“별일이 아니야?” 부남진이 비웃었다.“그래, 좋아. 오늘 밤 사모님과 아가씨 방에 난방 끊어. 별일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난방 설비가 고장 나면 다른 방으로 바꾸면 되는데, 이 집에 빈방이 없나? 나머지 방이 다 고장 났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안 되는 거야? 굳이 사람을 찬 방에 재워야 해? 늙은 것이 눈이 멀어서 제멋대로 하는 걸 보니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 같네. 지금 당장 재무팀에 가서 이번 달 월급 챙겨가고 배상할 건 배상해 주면 되지. 부씨 가문에선 당신 못 써.”오 집사는 완전히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민연주의 다리를 껴안으며 선처를 빌었다.“사모님, 무슨 말씀 좀 해주세요. 전 부씨 가문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민연주 역시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얘기를 꺼내자 민연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빠한테는 금기 사항인 거 잘 알면서 입 다물어.”“금기라니, 아빠가 그때는 명예와 돈을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가 나중에 엄마랑 만나고 나서야 서서히 올라간 거잖아. 아빠도 따지고 보면 쓰레기야.”“말도 안 돼, 누가 그런 말을 했어?”미셸은 혀를 홀라당 내밀었다.“외할머니가.”“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민씨 가문이 네 아빠한테 붙어야 처지야. 제 아빠 성격 잘 알잖아. 그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 꺼냈다가 너 따귀 맞을 각오해야 해.”“알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저 여자는 생긴 것도 평범하고 아빠 닮지도 않았으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그래, 오늘 일 너도 봤겠지만 네 아빠와 네 오빠가 그년한테 너무 잘해줘. 오 집사도 쫓아낼 정도니까 앞으로 그 여자 앞에서 조심해. 걘 똑똑해서 넌 상대하지 못해.”미셸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똑똑해도 결국 가족도 없는 고아에 평생 나를 따라잡을 수 없는 천민일 뿐이잖아요!”“됐어, 그만하고 앞으로 이틀 동안 아빠 앞에서 얌전히 굴고 그 여자랑 말썽 일으키지 마.”“알겠어요 엄마. 집사님은...”“아빠가 지금 화가 나 있으니까 오 집사가 조금 참아야지. 그 여자는 오래 못 버틸 거야.”민연주의 눈빛에 악독한 기색이 역력했다.지아는 부남진과 함께 다실로 돌아갔고 부남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얘야, 내가 또 억울한 일을 만들었구나.”오늘 일을 누가 시작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민연주는 자기 아내였고, 사람들 앞에서 민연주의 체면을 낮출 수 없어 그냥 참으며 모든 잘못을 집사 탓으로 돌렸다.“괜찮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어요.”“넌 너무 물러.”지아는 웃으며 휠체어를 놓고 할아버지에게 차를 끓여드리러 다가갔다.“할아버지, 저 무르지 않아요. 정말 물렀다면 부장경 씨도 부르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큰일 내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한번 참으면 앞으로
부남진은 부드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네 성격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데다, 네 눈은...”“제 눈이요?” 지아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잘해, 널 야박하게 대하지 않을 테니까.” 부남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눈만 닮았을 뿐, 사람까지 닮은 건 지아였다.당시 도윤이 비공개로 결혼할 때는 신부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시상식에 도윤이 지아와 함께 나타났을 때 부남진은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당시 몰래 알아본 결과 지아의 아버지가 소계훈이고, 소씨 가문은 A시 출신으로 그 여자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지아는 항상 부남진이 뭔가 숨기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입을 열지 않았다.밖에 눈이 내리자 지아는 부남진 곁에서 약식, 차, 과자 등을 만들어 주었다.처음엔 전효와 도윤을 위해 부남진에게 다가가며 거들 생각이었다. 곁에 있으면 몰래 손을 쓸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그런데 진심으로 부남진을 돌보게 되면서 어릴 때부터 소계훈의 애정밖에 몰랐던 탓인지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에게 관심이 갔다.왠지 모를 친근감이 있었는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셸의 거듭되는 무례를 보며 이곳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해질 무렵, 장경이 직접 마련한 방은 부자의 방과 가까운 안뜰에 있었는데 넓을 뿐 아니라 청소도 아주 잘 되어 있었다.지아가 잠이 들려고 할 때 미셸이 미쳐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아빠, 왜 제 방 난방을 꺼요?”부남진이 그냥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부남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왔다.“하룻밤 난방을 안 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겪어보는게 어때서? 남은 없어도 되는데 너희들은 안돼?”미셸은 황급히 반박했다.“저 여자가 대체 뭔데 우리랑 비교해요?”“부설아!” 부남진의 낮은 목소리에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아는 미셸이 난방이 있든 없든 그건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그 시각 부남진의
부남진은 지아에게 애정을 쏟고 있을 뿐 며느리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지아가 무슨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반발하는 민연주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바네사는 명성 높은 의사인데 뭐가 어때서?”“미셸이 애까지 낳았다고 한 거 못 들었어요? 눈도 초록색이래요. 남편이 다른 인종일지도 모르는데 내 아들을 그런 하자 있는 여자 뒤치다꺼리나 시킬 수 없어요.”탁-부남진이 탁자를 세게 때렸다.“민연주, 말 가려서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단지 내 목숨을 구해주고 가족도 없는 아이라 안쓰러웠을 뿐이야. 게다가 그 아이는 지금 명성으로 돈도 부족하지 않은데 걔 말이 맞지. 돈 많은 사람도 아프면 수술할지 말지 걔 눈치를 보잖아. 내 곁에 있지 않아도 그만이야, 걔가 원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라고.”민연주는 남편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여보,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안 그렇다니 안심이 되네요. 화내지 마요. 우린 부부인데 내가 당신 성격 모르겠어요? 설마 정말 날 오늘 밤 그런 얼음 창고에서 지내게 할 거예요?”“당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앞으로 당신 딸도 사람 존중할 줄 몰라.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할 말 없어. 이미 뱉은 말 되돌릴 마음도 없고.”민연주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부남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결국 차갑게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부남진 씨, 대단하네요!”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녀를 미셸이 그대로 본받은 것 같다.그동안 사람들 앞에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척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오만한 아가씨였다.부남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으로 걸어가 안쪽의 어두운 캐비닛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수묵화로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흑백으로만 그려져 있었지만 그림 속 인물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한 어린 소녀가 나뭇가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장난스럽고 귀여웠다.부남진이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아직 살아 있어? 그때 누나를 일부러
“무슨 파티인데?”“아마 짝을 간택하는 자리가 아닐까.” 도윤은 지아를 빤히 보았다. “빨리 보고 싶어.”지아는 전화를 끊고 저 모녀가 오늘 저녁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했다.부남진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할 줄이야.강제로 난방을 끄게 된 민연주 모녀는 벌써 지쳐가기 시작했고 미셸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아빠 미친 거 아니에요? 저년 때문에 우리가 얼어 죽으라고?”“그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이번 일은 내가 미처 생각 못 했어. 저 물건이 일을 크게 벌일 줄이야.”민연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몰래 수작을 부려 지아에게 한 방 먹이려고 했는데 작은 일로 지아가 부남진에게까지 알리며 부남진에게 해명해달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가장으로서 부남진이 이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딸이 직접 나서야 할 수밖에 없었다.“망할 년이 꽤 똑똑하네.”“엄마, 외부인이 우리 머리 위에 올라타서 괴롭히는 걸 그냥 용납할 수 있어요?”“흥, 못 참아도 참아야지. 네 아버지와 네 오빠가 지금 그 여자를 구세주로 삼고 있으니 당분간은 그 여자랑 부딪히지 말자. 중요한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도윤이야.”민연주는 가득 채운 온수 주머니를 이불 밑에 넣고 히터 두 개를 최대로 돌리자 서서히 방 안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어쨌든 부남진은 난방을 켜면 안 된다는 말만 했지 다른 걸로 온기를 취하는 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민연주는 히터를 감싼 채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네 결혼 문제도 해결할 때가 됐어.”“엄마, 내가 결혼하고 싶어도 오빠가 싫다면서 일부러 때리기까지 해요. 나랑 결혼하기 싫은 거야!”미셸은 도윤에 한해서만 고개를 숙였다.“그렇다고 납치해서 가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멍청하긴, 남자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다 방법이 있지.”“무슨 방법?”민연주가 손을 내밀자 미셸이 귀를 쫑긋 세웠다.“엄마, 가르쳐 줘요.”“남자는...”민연
지아는 이날 밤,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의 방은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방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눈송이들이 춤추는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유리창은 천장까지 높게 뻗어 있었고, 커튼은 자동으로 열리고 닫혔다.여기서 바깥에 하얀 눈이 흰 벽과 검은 기와에 조용히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고대로 돌아간 듯한 기시감이 들곤 한다. 지아는 간단히 씻은 뒤 다시 가면을 쓰고 나와 부남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는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몰려왔고 이에 지아는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고 온도도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지아는 먼 곳을 바라보았고 마음 속엔 지윤이 떠올랐다. 도윤의 말로 그 아이는 해도로 훈련을 떠났고 자신 또한 한동안은 지윤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년 봄쯤, 지윤은 한 달의 휴가가 있을 것이라 한다. ‘그 아이, 아마 많이 컸겠지?’ “좋은 아침이예요.” 부장경은 얇은 반팔 차림으로 정원에서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몸에 딱 붙은 타이트한 운동복에 그의 완벽한 몸매가 드러났다. 게다가 부장경의 준수한 얼굴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 선생님, 일찍하네요.” “이젠 익숙해져서요.” 지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때 부장경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참, 바네사 씨. 내일 저녁 부씨 가문에 연회가 있습니다.” 부설아에 비해 부장경은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었기에 그의 혼사가 더욱 중요했다. 때문에 내일 연회에는 명문가의 유명 인사들을 불러 부장경에게 선을 보게 할 지도 모른다. “네, 그럼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리면 되나요?” “아니요, 오해하셨습니다. 이번에 저희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건 전부 바네사 씨 덕분입니다.” “게다가 이번 연회는 저희 아버지의 완쾌를 축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꼭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지난 번의 교훈으로 요 며칠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