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오기 전 지아는 담배에 불을 붙였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이미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왔지만 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유독 술에 취한 주정뱅이 하나가 술 한잔하자고 진득하게 달라붙었고 지아가 거절해도 소용이 없자 그녀는 상대의 손등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내가 술 깨게 도와줄게.” 지아의 달콤한 미소에 상대는 순간 넋을 잃었지만 곧 손등에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린 그가 손을 빼냈다.“이년이 감히 나한테?”그러고는 손을 들어 지아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지만 지아를 다치게 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잡혔는데 장민호였다.살짝 비틀자 남자의 손뼈가 탈골됐고 장민호의 몸에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꺼져!”남자는 직감적으로 건드리면 안 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곧바로 한 마디를 외치며 도망쳤다.“딱 기다려!”장민호는 지아 앞에 놓인 술잔을 보며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지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속상한데 마시면 안 돼요? 나랑 같이 마셔요.”장민호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자격을 갖춘 암살자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해야 했기에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하지만 찰나의 순간 지아의 미소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잔을 따랐다.“요즘 어디 있었어요, 그 사람이 찾아왔나요?”지아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매우 가슴 아픈 표정을 드러냈다.“그런 얘기는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죠.”지아가 손을 들자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가 다시 드러났고, 매번 그 쥐를 볼 때마다 장민호의 시선이 멈칫했다.미연이 그녀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인 것 같았다.장민호가 술잔을 연거푸 들이키는 지아의 술잔에 손을 올렸다.“그만 마셔, 더 마시면 취해요.”“취하면 좋죠. 그 사람들, 그 일들이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정민호 씨, 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
장민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고 바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이 모든 일의 원인인 지아는 무관심하게 지켜보았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장민호를 ‘사랑'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까.여자를 구하는 영웅의 트릭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상황을 수습한 장민호는 서둘러 지아를 끌고 나갔다.장민호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과 마주치는 것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두 사람은 한밤중 골목을 미친 듯이 뛰었고 지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더는 못 뛰겠어요.”장민호도 진작 사라진 사람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는 이런 곳에 오지 마요. 너무 예쁜 것도 벌레가 많이 꼬여서 좋지 않아요.”지아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더욱 환하게 빛났다.“그럼 그쪽은요?”“저요?”지아가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장민호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몸을 벽에 밀착시켰고, 지아는 손을 뻗어 그의 볼에 대고 꽃처럼 웃었다.“당신한테도 그런지 궁금한데요?”두 사람은 너무 가까워서 지아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와 섞인 약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다른 사람한테서 맡아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냄새였다.장민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지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그의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지아는 이미 그의 몸에서 한 발짝 물러선 뒤였다. “미안해요, 머리가 좀 멍해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집이 어디예요?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지아가 장소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지아가 차를 몰고 왔고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고 지아는 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장민호는 토끼처럼 얌전하고 순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봤다.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 앞에서 이렇게 평온하다고?그렇
지아는 장민호가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고 나서야 입가의 미소가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악령처럼 굳어져 살벌해졌다.장민호, 네가 어떻게 도망가.지아는 재빨리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문을 열자마자 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두 손이 격렬하게 그녀를 끌어안았고 뜨거운 가슴이 다가왔다.“지아야, 하루 안 봤다고 남자 꼬시러 갔네.”지아는 두 손으로 상대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지만 내가 꼬시고 싶은 사람은 당신뿐이야.”“나쁜 여자.” 도윤은 지아의 입술을 반복해서 지분거렸다.“여기 말고 방으로 가.” 지아가 상기시켰다.“뭐가 무서워, 다른 사람도 없는데.”도윤은 지아의 몸을 나른한 소파에 눕혔다.“이렇게 입었어? 오늘 가만 안 둘 거야.”그의 말대로 도윤은 밤새 지아를 놓아주지 않았다.지아는 도윤의 들썩거리는 가슴에 엎드렸다.“들어보니까 장민호가 날 죽이려 했던 킬러와 접촉했더라고.”“그놈한테서 진실을 알고 싶은 거야?”“응. 장민호는 가까이서 접촉한 유일한 사람이고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우리가 알기 힘들 정도로 깊숙이 숨어 있어. 장민호는 내가 2년 넘게 쫓고 있는 단서야.”도윤은 한숨을 쉬었다.“너와 그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너와 가까이서 웃고 있는 그 자식을 생각하면 괴로워서 찢어 죽이고 싶어.”“걱정하지 마, 미워만 해도 부족한 사람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이 생길 리 없잖아.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방법이 없어.”도윤은 지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조심해야 해.”“응.”“참 각하 측에서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지아는 눈을 깜빡였다.“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사람 딸을 때린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너 같은 재능을 나라에 바치지 않는데 널 그냥 풀어줄 것 같아? 내일 장경이 직접 찾아올 거야. 지아 네 생각은 어때?”지아
지아는 더 이상 어리석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고 상류층일수록 일반인보다 더 많은 뉴스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각하를 따라다니는 것은 위험했지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보이지 않게 도윤을 도와 현 상황을 통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새벽 도윤이 눈을 뜨고 일어날 준비를 하자 지아는 작은 손으로 도윤의 허리를 감싸고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가려고?”“음, 요즘 좀 바빠.”“그렇게 바쁜데 굳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야?”지아가 놀리자 도윤은 몸을 뒤집어 그녀를 품에 안고 깨물었다.“지아가 너무 유혹적이라서, 내가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널 빼앗아 갈까 봐 항상 두려워서 그래.”두 사람은 오래도록 열정적인 키스를 나눴고 최근 들어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책임을 버리니 쾌락이 배로 다가왔다.어렵게 떨어진 도윤은 몇 분 동안 지아를 품에 안고 가만히 말했다.“지아야, 평생 이렇게 널 안고만 있으면 좋겠어.”“너무 부담스러워서 싫어. 이대로가 좋아, 어서 가.”도윤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지아의 이마에 입맞춤했다.“조금 더 쉬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말을 마친 도윤은 샤워를 하고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지아에게는 간만에 주어진 자유 시간에 몇 시간 더 잠을 잤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뜬 뒤였다.휴대폰이 여러 번 진동했고 아니나 다를까 장경의 번호였다.다시 전화를 걸자 지아의 피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장경은 조금 놀랐다. “아직도 자고 있어요? 미안해요, 몰랐어요.”“무슨 일이죠, 부장경 씨?”“바네사, 저 지금 집 밖에 있는데 잠깐만 만나고 싶어요.”“잠시만 기다려주세요.”지아는 하품하며 재빨리 변장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내려갔다.빌라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 호송 행렬이 있었는데, 맨 앞에 있는 검은색 차량의 빨간색 001 번호판이 눈길을 끌었다.차 위에 쌓인 눈으로 보아 그들은 분명히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았다.집에 침입하지 않
지아는 덤덤하게 말했다.“부장경 씨 체면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각하는 더 이상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 아니고 적절한 치료만 받으면 몸이 좋아질 거라서 제 역할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쪽 동생이 저를 별로 반기지 않는데 저 때문에 집안에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장경이 직접 찾아온 것은 단순히 곁에 남아 아버지의 치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아 같은 명의가 곁에 있으면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초기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런 인재를 어떻게 밖으로 내보내나.“저희도 이미 그 부분에 대해 상의했습니다. 제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버릇이 없어서 전에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제가 동생 대신 사과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겠습니다.”“부장경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저도 조건이 있어요. 외부에 아직 치료 중인 환자가 있는데 제 행동을 제한하지는 마세요.”“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곁에 있으려면 100% 자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는데 물론 이 또한 협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요구 사항은 없나요?”지아는 말을 이어갔다.“의료팀에 들어가서 함께 연구하고 싶은데 문제 있나요?”“아니요, 학구열이 높으시니 모든 공부 기회는 우선으로 주어지지만 해외에 갈 경우 미리 신청해야 합니다.”지아는 몇 가지 조건을 더 제시했고 장경은 기꺼이 그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알았어요, 그럼 됐어요.”장경이 손을 내밀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두 손을 맞잡자 장경의 손은 도윤의 손보다 굳은살이 더 많이 박여 있었고 매우 거칠었다.오히려 장경은 의사인 지아의 손이 이렇게 매끈할 줄은 몰랐다.잠깐이었지만 은근히 놀랐다.신분 때문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악수하지만 이렇게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은 처음 접했다.“별문제 없으면 지금 바로 함께 가시죠. 안 계시는 이틀 동안 아버지께서 바네사가 만들어준 약식에 익숙해져서 다른
지아는 서둘러 말했다.“미안해요, 그냥 무심코 물어본 거예요.”장경 역시 싸늘한 기운을 거두어들였다.“제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그 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고, 지아는 처음 결혼했을 당시의 도윤보다 더 꼿꼿한 남자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무서운 사람이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심지어 차에서 내릴 때는 직접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춥고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요.”장경의 눈에 여자는 늘 약한 존재였기에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르면서도 선을 그었다.돌아온 지아를 보자 부남진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다시 나타났다.“얘야, 드디어 돌아왔구나. 지난번에 만들어 주기로 한 대추 앙금 케이크도 안 만들어줬잖아.”지아는 미소를 지었다.“그럼 지금 만들러 갈게요.”“서두를 거 없어, 힘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왔으니까 좀 쉬면서 차나 끓여줘.”“알았어요.”민연주의 시선이 지아에게 향했다. 늘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고 거리를 두는 부남진도 유독 이 의사만은 다르게 대했다.처음에는 부남진을 죽음에서 살려준 지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이 부자는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너무 관대했고 심지어 부남진은 무척 의지하고 있었다.지아가 떠난 후 이틀 동안 부남진의 식욕이 현저히 떨어졌고,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약식도 지아가 만들어준 것과 맛이 다르다고 말하기까지 했다.여자로서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특히 장경은 아직 미혼인데 부남진이 자칫 잘못해서 이 여자를 장경과 결혼시키면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했다.그래도 민연주는 미셸보다 나이가 많아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지아가 돌아왔을 때도 매우 열성적이었다.“당신도 참, 이제 막 집에 왔는데 일단 쉬게 해야지 차를 끓여달라니요. 그건 제가 할게요, 제 전문이니까.”지아도 더 나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저녁 약식 준비하러 갈게요. 그리고 각하의 검진 결과지를 보고 몸 상태에 따라 약
부남진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결혼이 무슨 밥 먹는 건 줄 알아?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 상해도 기껏해야 설사 몇 번 하면 괜찮지만 도윤이가 싫다는데 억지로 둘을 붙여놨다가 애정 없는 결혼에서 결국 속상한 건 우리 딸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은 거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집착을 버릴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감정을 쏟은 것 같아.”민연주는 조금 화가 난 듯 침대에 앉았다.“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우리 딸은 어려서부터 보배처럼 귀하게 자랐는데 이제 와서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데 그럼 어떡해요?”“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이혼남이랑 결혼해?”부남진은 더 깊이 생각했다.“결혼을 몇 번 하든 우리 딸이 좋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이 이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내 방식대로 할 거예요.”민연주가 결심을 굳히자 부남진은 불쾌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도대체 뭘 그렇게 서둘러?”“엄마로서 뭘 서두르겠어요? 당신 딸도 이제 20대인데, 이대로 뒀다가 남들 농담거리로 만들 생각이에요?”부남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도윤이와 다시 얘기해 볼게.”“알았어요.”불쾌함이 가득한 부남진의 얼굴을 본 민연주는 다시 자세를 부드럽게 고쳐 앉았다.“여보, 나는 우리 딸 위해서 그러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과부와 뭐가 달라요. 똑같이 불행하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낫죠.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다 집에서 맺어준 사람과 결혼하지 어디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랑 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도 다 결혼하고 감정 키운 거잖아요.”“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 도윤이한테 전화해, 내가 얘기해 볼게.”“알았어요.”연락을 받고 온 도윤은 그다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남진이 본론을 꺼냈다.“눈 깜짝 할 사이에 너도 이렇게 컸네. 그때 네 결혼식에 참석 못 한 게 한이었어. 넌 내 손으로 키운 애고 네 성격을 잘 아니까
지아의 목소리는 모든 우울함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산들바람 같았고 부남진의 이마 주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부남진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아는 사람은 눈치껏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 민연주조차도 그가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감히 다가오지 않았다.지아에게 나가 있다가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말했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지아는 도윤을 모른 척했다. “이도윤 씨도 오셨네요. 다행히 많이 만들어서 같이 드시면 되겠어요.”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들어온 이 여우가 일부러 자신에게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연기 실력이 점점 늘고 있다.“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각하 쉬시는데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지아는 대추떡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차 테이블로 걸어갔다.“어르신, 어떤 차 마시겠어요?”부남진은 물 흐르듯 차 도구를 닦는 지아의 움직임을 보며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오랜 세월 먼지가 쌓여 있던 과거의 일들이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때렸고 그는 더욱 복잡한 표정으로 대추떡 한 조각을 먹었다.대답을 듣지 못한 지아는 서둘러 부남진을 돌아보며 물었다.“어르신?”그제야 부남진은 정신을 차렸다.“미안하다, 내가 잠깐 넋을 잃었어.”고작 그 사람을 닮은 눈을 가진 아이 때문에 이처럼 넋을 잃다니, 아마도 대추떡 맛이 너무 익숙해서 이미 지나간 옛사람이 떠오른 것 같다.“용정차 어때요?”“좋지.”부남진은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지아가 그를 도와주려고 일어나려 하자 손을 들어 지아의 움직임을 막았다.“아니, 내가 알아서 할게.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뼈만 남겠어.”“네,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젊은 사람 몸도 아니니까 조심하세요.”“얘야, 가족은 있니?”지아는 고개를 저었다.“글쎄요,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르신 안 드세요? 제가 맛없게 만들었나요?”이는 할머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