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며 반박했다.“본능적인 거야,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도윤이 목을 핥자 지아는 목을 뒤로 젖히며 몸에 느껴지는 특별한 감각을 무시하려고 애썼다.하지만 개도윤은 자신의 몸의 모든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그녀를 농락했다.잠시 쉬고 있던 저쪽에서는 그동안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듯 벌써 세 번째 놀이가 시작되었고, 수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지아의 정상이었던 체온이 서서히 올라가고 눈가는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입은 앙다문 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도윤은 자신의 입술을 지아의 입술에 문지르며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지아야, 나한테 빌어도 돼.”“꿈 깨!”지아는 얼굴을 붉혔다.“당신과 나 중에 누가 더 힘든지 보자고.”어색하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지아의 눈빛에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아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고집투성이였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제일 힘든 사람은 분명히 자신이었다.하지만 누구도 이 감정적인 줄다리기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분명 별다른 진전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땀을 흘리며 목을 뒤로 젖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과거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도윤은 이러한 행위를 대부분 침대에서만 했고, 가끔 함부로 다룰 때도 여전히 장소는 그의 집이었다.이런 곳은 처음이라 도윤과 지아의 육체적 본능은 마른나무에 붙은 불처럼 닿자마자 달아올랐다.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은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하듯 상대를 괴롭히는 동시에 본인도 고통스러웠다.지아는 밑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약을 먹지 않았지만 개미 떼에 둘러싸여 살과 피를 갉아 먹히는 듯 고통스러웠다.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웠고 보름달이 빛을 최대한 발산했다.시골의 달빛은 너무 밝아서 도윤은 지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꽉 깨문 붉은 입술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마침내
지아는 이 일이 알려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란 생각만 들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도윤의 귀에 속삭였다.“부탁할게.”도윤은 역시나 잠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우석과 수아의 발걸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지아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옥수수 줄기 더미뿐이었다.다행인 건 옥수숫대 더미가 두 사람을 쉽게 가릴 수 있을 만큼 높이 쌓여 있었다.지아의 심장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세게 뛰고 있었다.반대로 도윤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들켜도 어차피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니 죄가 되지 않았다.저녁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바스락거리자 우석은 나뭇잎을 가리키며 말했다.“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괜한 의심이야.”수아도 이때 정신을 차리고 천으로 된 신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몰라?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그런 거잖아.”“뭐가 무서워? 널 데리고 떠나겠다고 했잖아. 할머님 찾으러 가자, 분명 우릴 도와줄 거야. 수아야, 난 네가 정말 좋아, 우리 함께 도망가자.”두 사람은 밖에서 도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지아는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도윤의 이마에도 구슬땀이 맺힌 것을 보니 지아만 괴로운 게 아닌 것 같았다.두 사람은 반나절 동안 탈출 방법을 논의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그제야 허둥지둥 떠났다.정말 불이 붙은 사람은 도윤이었고, 그는 몸을 기울여 지아의 귀에 속삭였다.“지금은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않으니까 소리 내도 돼.”...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아는 그날 밤 달빛이 밝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따뜻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고, 그녀의 마음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모든 이성과 생각을 잊게 했다.낮은 수준의 욕망은 조금만 방탕해도 얻을 수 있지만, 높은 수준의 욕망은 절제가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도윤은 자신의 욕망이 낮은 수준인지 높은
“지아야, 난 그냥...”“나 건드리지 마, 역겨워.”달빛 아래 눈물로 얼룩진 지아의 얼굴이 도윤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칼 같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아가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아의 얼굴에서 역겨움만 보였다.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던 도윤의 손은 허공에 머물러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도윤 씨, 대체 왜 내 인생에 불쑥 들어왔다가 떠나고 이제 와서 돌아오겠다는 건데, 날 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 우린 오래전에 이혼했잖아, 이혼이 무슨 뜻인지 말해줘? 남녀가 서로 상관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사는 건데, 지금 뭐 하는 거야?”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잘못했던 건 인정하지만, 너와 아이에게 만회할 기회를 줄 수 없어?”“그럴 필요 없어. 당신이 없어도 우린 잘 지내고 있어. 도윤 씨, 당신이 멀리 떠나는 게 나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야.”“지아야, 넌 내가 그렇게 미워?”“그래 미워, 증오해. 나한테 그런 고통을 겪게 한 것도 싫고, 아름다운 환상을 꿈꾸게 해놓고 스스로 깨뜨린 것도 싫고, 지금의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싫어.”도윤의 눈빛이 갑자기 먹구름에 덮인 달처럼 어두워졌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도윤은 씁쓸하게 말했다.“미안해.”그는 지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가 또 거짓말을 했어. 시력 돌아왔어. 널 떠나기 싫어서 앞이 안 보이는 척을 했어. 넌 날 더 미워하겠지.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하고 싶지 않은데 난 계속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너한테 상처만 주네. 네 말이 맞아, 난 정말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사람이야.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게 후회스럽겠지.”도윤은 다시 손을 뻗어 지아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모두 나 때문에 잘못된 거야. 지금 이런 상황도 다 내가 자초한 거야. 내가 잘못했어. 널 다시 내 곁에 데리고 오려는 게 아니었는데.”도윤은 천천히 일어났다.“지아야, 3년이 넘었는데도 포기하지 못한 건 나였어...”지아를 내려다보는 도윤의 눈은 슬픔
지아는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뭐라 그랬어요?”경훈은 당황한 표정이었다.“보스 방에서 이걸 찾았어요.”경훈에게 여기 머물면서 편히 쉬라는 쪽지였고 또 하나는 두툼한 봉투였다.“보스가 독극물에 중독되어 살아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쓴 유언장인데 이 편지는 사모님께 쓴 거예요.”지아는 무거운 편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가 열어보았다.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사인할 때처럼 휘갈겨 쓴 글씨가 아닌 도윤 본인처럼 한 획 한 획 정갈하고 깔끔한 글씨체였다.[지아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야.이 소식을 들으면 네가 기뻐할까, 아니면 슬퍼할까? 정말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니까 생각만큼 두렵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죽으면 널 찾을 수 있지 않을까?네가 떠난 3년 동안 너를 생각하며 늘 그리워했는데, 내가 중독된 것 같아 너 말고는 다른 해독제가 없어.걱정 마, 지윤이는 키도 많이 크고 몸도 튼튼해졌어. 우리 아들 아주 대단해, 작년에는 3등 공로상까지 받았어. 너는 또 내가 잘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게 했다고 원망하겠지.하지만 그래야만 아이도 더 빠르게 잘 성장할 수 있고 언젠가 내가 죽어도 널 지킬 수 있으니까.네가 옆에 없으니까 애가 나를 닮아 말수가 없어. 같이 있을 땐 말보다 침묵할 때가 더 많아. 종종 네가 준 작은 자물쇠를 들고 오후 내내 앉아서 바라보곤 해.애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이 편지를 받았다면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아이를 만나러 가.네가 벚꽃이 피면 같이 보러 간다고 약속해서 해마다 꽃이 피면 애가 함께 머물렀던 섬으로 돌아가서 해가 뜰 때부터 해 질 녘까지, 꽃이 피고 질 때까지 있어꽃이 피는 내내 아이는 널 기다리고 있어.해경이와 소망이도 많이 컸겠지. 아이들이 한 번도 날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게 일생의 한이야. 두 아이를 정말 사랑하지만 아빠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네.난 곧 죽을 거고,
편지지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종이를 꽉 잡은 지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사모님, 저희는 곁에서 두 분을 함께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보스가 얼마나 사모님을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겠지만 그동안 보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사모님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모르실 겁니다. 이번 독살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고, 구천에서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 모릅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보스 본인도 피해자가 아닙니까? 잘 짜인 아가씨의 판에 보스도 속은 겁니다. 보스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이 산산조각 났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의지할 사람은 아가씨뿐이었습니다. 순진하게 아가씨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수년 동안 찾았는데 돌아온 답이 그거라면 사모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 겁니까, 화를 내시겠습니까 아님 가족에게 복수를 하시겠습니까?전림의 죽음도 보스 마음속 짐이었습니다. 가까운 형제가 자기 대신 총알을 맞아 죽고 유일한 바람이 백채원을 돌보라는 건데, 보스가 결혼하기 싫어도 백채원의 협박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백채원은 항상 전림이 보스 대신 총을 막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거고, 자신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아빠가 있었을 거라며 자신을 돌보라는 전림의 유언을 언급했습니다. 사모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선택을 하든 제일 힘든 건 보스였습니다. 사모님도 괴로운데 보스라고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가족이 떠나고 형제가 죽고, 사모님과 인생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보스는 혼자였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을 한 번도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이제 한 번 더 사랑하는 게 그렇게 힘드십니까?”경훈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보스는 사모님을 많이 그리워했고 눈과 마음에는 처음부터 사모님밖에 없었습니다. 사모님이 떠나겠다고 하니 밤낮으로 힘들어도 보내줬습니다. 사모님은 아이도 있고 일도 있지만 보스에겐 뭐가 남았습니까? 수많은 적이 노리고 있고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면서 전쟁터를 누비며 혼자 꿋꿋이 버티고 있
절벽에 서니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리고, 아래는 구름으로 가려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지아는 도윤이 왜 이 길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위험하긴 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한은 적어도 감당할 수 있는 길이었다.이 길은 독극물이나 짐승이 없는 유일한 길이고 하늘의 뜻에 달린 데다 도윤은 암벽 등반 경험도 있었다.하지만 도구 없이 무작정 내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조금만 부주의하면 온몸이 가루가 될 수 있었다.“사모님, 보스가 이 길로 갔다고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냄새가 여기서 끊겼고, 여기 밧줄이 있는 걸 보면 떠나기 전에 만든 거예요.”“그럼 제가 찾으러 갈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이 산은 나만큼 익숙하지도 않고, 게다가 다리에 매일 침을 맞으면 격렬한 운동도 할 수 없는데, 평생 불구로 살고 싶지 않잖아요?”“사모님 말씀은...”지아가 경훈의 어깨를 두드렸다.“제가 갈게요. 제가 있는 곳에선 절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게요.”어차피 며칠 뒤면 떠날 계획이었기에 산으로 갈 예정이었다.“할머님 잘 돌봐주세요.”“사모님 안 돼요, 위험해요.”“본인이나 챙겨요. 나도 위험한 일 많이 해봐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지아는 도윤의 밧줄을 따라 천천히 내려와 착지했다. 도윤은 날이 밝아올 때 떠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두운 곳에선 위험할 테니까.두 시간 정도 차이가 있으니 조금만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어차피 지아에겐 처음 오는 곳도 아니고 처음 훈련을 받았을 때 이 절벽부터 시작했었다.매번 도윤이 응급실로 실려 간 후 자신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듯한 간호사와 의사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과 미셸의 따귀를 떠올리면서 지아는 악에 받쳐 출산하기 전 의료 기술을 열심히 공부했고, 출산 직후부터 체력 훈련을 시작했다.병이 완치된 지아는 이제 남자 못지않은 강인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제비가 돌담을 밟듯 민첩하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경훈도 깜짝 놀랐다.
지아는 지형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장비를 다 챙기지 않은 데다 산속에는 신호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바위가 미끄러워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다행히 경험이 많았던 그녀는 넘어지면서 나뭇가지를 붙잡았다.격렬하게 잡아당기는 손은 진작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했다.재수가 없는 데다 비까지 계속 내렸다.지아는 작은 나무에 서서 숨을 고르며 손바닥을 펴서 피 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팠지만 슬퍼할 시간이 없었고, 가장 시급한 것은 서둘러 절벽 아래로 내려가 도윤을 찾는 것이었다.숲이 워낙 복잡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단검과 총 외에는 아무런 보급품도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할수록 도윤과 엇갈리게 될 것이 뻔했다.생각보다 지아는 도윤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원초적인 반응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도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지아는 장비도 챙기지 않고 떠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지아는 이를 악물고 남은 여정을 계속했는데, 중간에 몇 번 삐끗했지만 다행히도 길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주 긴 덩굴이 있어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원시림은 특히 으스스해 보였다.맑은 날에도 머리 위 햇빛이 차단되어 있었는데, 흐린 날에는 빛이 더 어두웠다.낮이었다면 나무 그늘에 따라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최악의 상황이다.이런 곳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피난처를 찾아야 하는데, 비가 온 뒤 계곡의 기온이 낮아져 깨끗한 옷이 없으면 체온이 쉽게 떨어지고 뱀이나 벌레에게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하지만 지아는 여전히 도윤이 걱정이 되어 쉴 수가 없었다.도윤은 그보다 두 시간 일찍 출발했는데, 내려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았을 테고, 폭우에 그가 남긴 흔적은 모두 씻겨 내려갔을 것이다.지아는 나무 그늘에 서서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키 큰 초목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속상함을 느꼈다.도대체 그녀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어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아는 갑자기 바닥에서 뛰어올라 뱀 동굴에서처럼 도윤을 꼭 껴안았다.“나쁜 놈, 누가 도망가라고 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도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동공이 심하게 확장되며 놀라움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어젯밤 지아는 분명 도윤을 역겹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미워했다.그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지아를 울리지 않으려 그녀의 눈앞에서 눈엣가시가 되지 않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하지만 지아의 포옹에 불구덩이에서 타죽었던 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도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마구 뛰며 억눌렸던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났다.“지아야, 뭐라고 그랬어...”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나와 이를 갈았다.“내가 엄청 걱정했다고, 못 들었어?”지아는 도윤의 옷깃을 세게 잡아당기며 자신의 목을 기울여 도윤의 입술에 키스했다.도윤의 머릿속이 펑 터졌다.지... 지금 뭘 본 거지?지아가 먼저 입을 맞추다니.예전엔 지아와 입 맞추려 갖은 방법을 썼는데 오늘 그녀가 먼저 다가오자 도윤은 익숙하지 않은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도윤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고 깨어나자마자 지아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이 순간 시공간이 멈춘 것 같았다.도윤이 그토록 오랫동안 억눌러왔는데 지아라고 다를까.사랑과 증오, 죄책감 사이에서 오고 가다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서로 낯선 사람이 되길 선택한 것이다.세월이 모든 것을 씻어낸다는 옛말처럼 지아는 지난 몇 년 동안 도윤을 잊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번 재회를 통해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과거 도윤이 지아를 물에서 건져 올린 순간처럼 한 번의 눈빛이 평생의 기억으로 남았다.앞으로 지아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도윤을 잊지 못할 것이다.오래도록 지속된 키스에 이 순간만큼은 지아는 모든 증오를 잊었다.내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살아 있는 도윤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쌓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