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적인 질문에 도윤은 심장이 입 밖으로 뛰쳐나올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력을 되찾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당연히 도윤은 인정하지 않았다!“지아야, 나도 하루빨리 시력을 되찾아서 너한테 폐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그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종이 가져올게.”“그래.”도윤은 지아가 무심하게 가운을 걸치고 베개 밑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자신의 얼굴에 고정된 지아의 시선은 무언가 알아내려는 듯했다.도윤이 그런 지아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지아는 이미 의심하고 있다.자신을 속이기 위해 앞을 못 보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아가 알게 된다면 그 끝은 상상만으로 알 수 있었다.도윤은 마음속으로 불안했지만 감히 얼굴에 빈틈을 드러내지 않았다.코피가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둔 채 그는 바보처럼 물었다.“지아야, 어디 있어? 돌아왔어?”지아는 도윤에게 다가가 휴지를 내려놓으며 평소처럼 말했다.“왔어.”지아는 휴지를 뽑는 순간 갑자기 칼을 뽑았고, 칼날이 도윤의 눈을 스쳐 지나가더니 안구에서 3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도윤은 눈을 깜빡이지도, 조금도 물러서지도 않았다.칼끝이 그의 눈을 똑바로 조준하고 있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던 터라 지아는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하지만 지아는 등 뒤에 있던 도윤의 손가락을 보지 못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도윤은 날카로운 통증으로 단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을 참았다.지아가 아무리 독해도 도윤보다는 아니었다.도윤은 일부러 몸을 움직이기까지 했다.“지아야, 종이 어디 있어?”지아는 서둘러 단검을 치웠다.“여기.”그녀는 그 순간 도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이 일로 도윤의 출혈도 기적적으로 멈췄다.피투성이가 된 도윤을 보자 다시 물을 받아 씻기기도 귀찮았다.“내가 방금 샤워해서 물이 아직 따뜻할 텐데, 안 더러우면 가서 씻어.”“안 더
이 세상에 도윤이 못해낼 일은 없다. 게다가 아직 지아와 그 사이엔 네 명의 아이가 있으니 서두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꽁꽁 얼린 얼음도 하루아침에 녹지 않는데, 자신과 지아 사이의 응어리를 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방금 전 진심을 다해 웃는 지아의 미소를 떠올리며 도윤은 진심으로 진심을 맞바꿀 계획을 세웠다.“지아야, 목욕 타월 어디 있어?”셔츠와 바지가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입을 수 없었던 터라 지아는 경훈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도윤을 피하기 위해서 지아는 방에서 나와 경훈더러 옷을 입히게 했다.“보스, 사모님께서 옷 입히고 방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어요.”도윤의 얼굴이 잔뜩 서늘하게 굳었다. 지아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하지만 태생이 반골인 도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도윤은 더 주저하지 않고 경훈을 따라 나갔다.아직 며칠이 남았는데 그사이에 지아와 진전이 없다면 전처럼 밤낮으로 상사병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하늘에 뜬 보름달을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했다.지아는 도윤이 자신을 귀찮게 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틀 동안 도윤은 그녀를 일부러 찾지 않았고 오히려 조원주와 가까워졌다.조원주는 도윤이에게 쪼개진 옥수수를 알맹이로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는 등 할 일을 던져주고, 옥수수를 수확할 때는 경훈과 함께 일꾼으로 데려가기도 했다.며칠 만에 도윤은 옥수수밭에 서서 바지 다리를 걷어 올리고 낫을 더듬으며 줄기를 자르는 등 농사일에 익숙해졌다.속도는 느리지만 체력이 좋았다!조원주는 도윤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자네, 태생이 옥수수 농사를 지을 인재인데 여기 남아서 날 도와 농사나 짓지 그래?”도윤은 숨기지 않았다.“좋죠, 할머님만 괜찮으시다면요.”조원주는 도윤을 직접 보기 전까지 그가 거칠고 위압적이고 배신자에 나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부지런하고 건장하고, 농사를 짓고 몸이 튼튼한 사람으로 바뀌었다.생각만큼 미운 행동도 하지 않고 지아를 향한 사랑을
지아는 소달구지에 올가미를 매고 있었다. 마을의 교통수단은 소달구지 아니면 말이었고 생활 조건이 조금 악랄해도 지아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행복했다. 서로 물고 뜯는 대도시의 삶보다 훨씬 좋았다.“도윤이랑 같이 가. 둘이 가면 더 빠르니까.”경훈은 침을 맞고 약을 바르느라 당분간 움직이지 못했고,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었던 조원주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지아는 거절할 수 없었다.도윤과 지아는 덜컹거리는 소달구지에 나란히 앉았고 이따금 몸이 마구 흔들렸다.도윤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았다.“왜 웃어?”“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재미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넌 소달구지를 몰고 난 옥수수를 뜯고, 이런 일상도 나쁘지 않네. 평화롭고 소박하고, 심지어 평생 여기서 너와 농사지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어.”지아가 미간을 찌푸렸다.“난 싫어.”아직 끝내지 못한 일,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경훈을 볼 때마다 젊고 아름다웠던 미연이 자신의 심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려다 결국 눈앞에서 생을 마감하던 게 떠올랐다.지아는 2년 동안 이를 갈았다. 이제 그 사람에게 미연이 겪은 것의 백배를 갚아주는 일만 남았다!미연에게 빚진 걸 한꺼번에 다 갚을 생각이었다.도윤은 그저 웃으며 중얼거렸다.“그냥 내 희망 사항이라고 생각해.”밭에 도착하자 지아는 도윤을 옥수수밭으로 이끌었다.“여긴 당신이 베, 내가 나중에 정리할게.”“알았어.”도윤의 눈은 완전히 나았지만 지아 앞에서 계속 아픈 척을 해야 했다.적어도 이렇게 손이라도 잡을 수 있으니까.도윤은 한 번 자를 때마다 지아를 한참이나 쳐다봤다.지아는 마을에서 항상 수수한 옷을 입고 민첩하게 일을 했다.짧은 시간에 밭에서 많은 양의 벼를 베내는 지아는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잘하는 사람이었다.그런 천재가 자신의 무지로 인해 미래를 잃을 뻔한 것이다.도윤도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옥수수 줄기를 잘랐다. 7시간 넘게 연달아 일하니 체력 좋은 도윤도 구
마을이 크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이 다 수아를 알았지만,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나 커플이 아니었다.여자의 이름은 수아, 남자의 형수로 2년 전 남편이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르다 절벽에서 떨어진 다음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어 그 부위의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수아는 아마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의 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것 같다.불륜은 도시에서 흔한 일이고 들키면 최악의 상황은 이혼이지만, 마을의 관습에는 이혼은 없고 과부가 되는 것뿐이라 수아는 들키면 그냥 죽는다.두 사람 역시 집에서 들킬까 봐 이런 곳으로 왔고, 이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얼떨결에 지아와 도윤만 남았다.도윤이 입을 열었다.“지...”소리를 내기 바쁘게 지아가 입을 막았다.도윤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마을의 풍습을 잘 몰랐다.수아가 발각되면 가족들에게 맞아 죽기 전에 스스로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지아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마음 따뜻하고 어린 여자가 무고하게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지아는 서둘러 도윤의 손을 잡고 커다란 옥수수 줄기 뒤에 숨었다.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도윤의 귀에 속삭였다. “말하지 마!”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수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우석 씨, 나 그래도 불안한데 가서 확인해 봐.”두 사람은 옥수수 더미에서 내려와 주위를 살폈고, 지아는 혹시나 우석이 알아챌까 봐 도윤을 밀치고 그의 가슴에 몸을 엎드렸다.두 사람 밑에는 갓 수확한 벼가 깔려 있었고, 두 사람의 몸은 옥수수 대 더미로 안전하게 가려져 있었다.“의심이 너무 많아, 여기 사람이 어디 있어? 수아야, 나 못 참겠어, 도와줘.”“나쁜 놈, 매번 날 죽을 정도로 몰아붙이잖아.”“그래서 싫어?”틈 사이로 두 사람이 어렴풋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시 사람들만큼 화려한 기술이 없었던 둘은 곧바로 행위를 시작했다.지아는 도윤 위에 누워 차마 주변을 둘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왜 하필 이 시간에 옥수수를 뜯으러
일찌감치 남자의 잔뜩 팽팽해진 몸을 느끼고 있었다. 답답한 공기 속에 두 사람은 농사일로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지아의 몸에서 풍기는 약 냄새는 독처럼 점점 더 도윤을 유혹하고 있었다.지아는 자꾸 움직이는 도윤의 손을 툭툭 쳤다. “얌전히 있어.”도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 빈틈이 필요했던 그에게 우석과 수아는 그와 지아의 벽을 깰 기회였다.둘은 정말 오랜 시간 참은 것처럼 불이 붙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시간이라 불 꺼진 들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식사를 하러 돌아가고 이 한적한 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그래서 이런 분위기와 상황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더 자극하고 옥수수 줄기는 거의 꺾일 지경이었다.도윤의 입김이 바로 귀 옆에 닿았고, 저녁 바람마저 타는 듯한 건조한 열기로 두 사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도윤은 한숨을 쉬었다.“지아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겠지만 네가 이러면 나도 참지 못하겠어, 일어나.”도윤이 손을 뻗어 지아를 밀어내자 지아는 황급히 다시 엎드리며 목소리를 낮추고 그의 귓가에 매섭게 쏘아붙였다.“움직이지 마.”“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너도 움직이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 하는 걸 그냥 듣고만 있기가 힘들어.”지아는 붉어진 얼굴로 작게 설명했다.“수아 씨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웠어. 다른 사람이 알면 시댁 식구들 손에 죽거나 수치심에 자살할 텐데 지금 나가면 사람 목숨을 해치는 거야.”도윤은 비웃었다.“저 여자가 죽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너도 아닌데.”그 순간 지아는 도윤의 뼛속까지 차가운 말에 정신을 차렸다.“우리 마을에는 이혼은 없고 사별만 허락해. 남편은 하반신 마비 상태고 이혼을 말했지만 세 번이나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혔어.”지아가 설명했다.“그게 바람을 피운 이유라고? 지아야, 나는 지금까지 밖에서 다른 사람 만난 적 없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법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도덕으로 지켜야지. 바람은 바람이야,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배신에 이유를 찾지 마, 아무리
지아는 언제든 도윤에게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옥수수 잎을 바깥쪽으로 밀쳐냈다.뜻밖에도 우석이 수아를 밀치며 자세를 바꾸었고 수아의 상의는 겨드랑이까지 말려 올라간 채 아래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피부가 까맣게 그을렸지만, 수아는 예외적으로 타지 않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몸은 완벽한 곡선을 자랑하고 있었다.우석의 몸은 검게 그을렸고 오랜 세월 밭에서 일한 탓에 허리에는 복근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어두워질 저녁 검고 하얀 두 피부가 격하게 부딪혔다.혈기 왕성한 나이에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지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넓은 땅에서 두 사람은 온 세상이 그들의 것인 것처럼 전례 없는 자유를 느꼈다.눈앞에 벽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려도 돌아서지 않는 것이 청춘이다.지아도 어떤 일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설령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다고 해도 한창 즐거움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겠나.“우석 씨, 역시 당신이야. 이렇게 빨리 다시 시작하잖아. 침대에 기운 없이 누워있는 당신 형과는 전혀 달라.”“수아야, 나랑 같이 가자.”“간다고?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인데 어디로 갈 수 있어?”“하늘은 넓고 어디든 갈 수 있지. 손발만 있으면 돈도 벌어서 도시에 정착하자. 아이 둘만 낳아줘. 그러면 우린 이렇게 몰래 만나지 않고 당당하게 함께 할 수 있어. 도시에는 종이 한 장에 이름을 쓰면 평생 헤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어.”수아의 눈에는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고, 평생 헤어지지 않은 채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두 사람은 더욱 감정이 격해졌다.“우석 씨, 조금만 빨리, 죽을 것 같아.”미래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섞여 나왔다.역시 젊은 게 좋다. 어떤 길이든 대담하게 달려가니까.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두려움이 생기고, 매사에 앞뒤를 살펴
지아는 그동안 배운 호신술로 도윤에게 대항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 시끄러워 수아와 우석에게 들키면 그동안 숨고 있었던 게 헛수고가 되지 않나.자신 때문에 수아가 수치심에 자살을 한다면 죄책감에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 바람을 피운 것은 잘못이지만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었다.많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경훈은 발을 다쳐 후유증이 남았고 미연은 땅 속에 뭍힌 채 자신의 앞에서 떨어졌다.도윤의 등에 난 흉터도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이다.그런 일들이 하나씩 지아의 마음속 짐이 되었고 다시는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도윤, 이 개자식, 이거 놔.”지아는 이를 갈며 낮게 말했고 도윤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지아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너그럽게 대하면서 왜 나한테만 야박하게 구는 거야?”지아는 도윤의 눈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정말 이유를 모르겠어?”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지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지아야, 잘못은 이미 했고 상처도 남겨졌는데 대체 내가 어떻게 보상해 주길 바라? 내게 남은 거라곤 목숨뿐인데 네가 원한다면 줄게.”지아는 도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증오하던 순간에도 함께 뛰어내렸으니까.위험이 닥쳤을 때 언제나 달려가 자신을 감싸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바로 도윤이었다.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도 바로 도윤이었다.“난 당신 목숨을 원하지 않아. 다시는 얽히지 않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지아야,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그는 지난 세월의 그리움으로 인한 고통을 충분히 겪었다.“우석 씨, 죽을 것 같아. 차라리 날 죽여, 난 못 해, 아...”똑같은 말, 다른 의미.동시에 두 사람 사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며 도윤의 손가락이 지아의 얇고 헐렁한 상의 속으로 파고들었고 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개자식, 건드리기만 해.”수줍고 부끄러워하는
지아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며 반박했다.“본능적인 거야,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도윤이 목을 핥자 지아는 목을 뒤로 젖히며 몸에 느껴지는 특별한 감각을 무시하려고 애썼다.하지만 개도윤은 자신의 몸의 모든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그녀를 농락했다.잠시 쉬고 있던 저쪽에서는 그동안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듯 벌써 세 번째 놀이가 시작되었고, 수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지아의 정상이었던 체온이 서서히 올라가고 눈가는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입은 앙다문 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도윤은 자신의 입술을 지아의 입술에 문지르며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지아야, 나한테 빌어도 돼.”“꿈 깨!”지아는 얼굴을 붉혔다.“당신과 나 중에 누가 더 힘든지 보자고.”어색하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지아의 눈빛에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아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고집투성이였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제일 힘든 사람은 분명히 자신이었다.하지만 누구도 이 감정적인 줄다리기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분명 별다른 진전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땀을 흘리며 목을 뒤로 젖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과거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도윤은 이러한 행위를 대부분 침대에서만 했고, 가끔 함부로 다룰 때도 여전히 장소는 그의 집이었다.이런 곳은 처음이라 도윤과 지아의 육체적 본능은 마른나무에 붙은 불처럼 닿자마자 달아올랐다.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은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하듯 상대를 괴롭히는 동시에 본인도 고통스러웠다.지아는 밑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약을 먹지 않았지만 개미 떼에 둘러싸여 살과 피를 갉아 먹히는 듯 고통스러웠다.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웠고 보름달이 빛을 최대한 발산했다.시골의 달빛은 너무 밝아서 도윤은 지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꽉 깨문 붉은 입술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마침내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