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의 시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김인우는 이곳에 더 머물면 분명 주목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그가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줄 안다.김인우는 화장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박예찬은 가엾은 모습을 금세 거두고 자신의 전화 시계를 들고 적당한 각도를 찾아 당황한 김인우를 찍었다.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김인우의 방에 들어갔다.멀지 않아 고영란은 이 아이를 발견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옆에 있던 이지원에게 말했다.“너무 귀여운 아이야.”“우리 남준이의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야.”어린아이를 대할 때만 고영란의 한결같던 차가운 얼굴이 자애롭게 변했다.이지원은 고영란이 자신을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알고는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임시로 설치된 방.김인우는 전화를 걸어 비서에게 새 옷을 한 벌 보내라고 했다.“대표님, 옷을 탁자 위에 놓았습니다.”“응, 가도 돼.”“네.”비서는 나가면서 소파 구석에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필경 김인우의 방은 일반인이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김인우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욕실 물소리를 들으며 살금살금 걸어 나온 박예찬은 김인우의 옷과 휴대전화를 3층에서 아래로 던졌다.“엄마를 괴롭힌 대가야.”이 모든 것을 끝내고, 호텔과 연결된 통신 장비를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박예찬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재빨리 나가 1층 로비에 도착해 문으로 나갔다.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한 남자의 곧고 긴 다리를 들이받았다.“죄송합니다...”박예찬은 고개를 들어 쓰레기 같은 아버지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유남준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친근감을 느꼈다.“괜찮아.”그는 냉담하게 대답했다.박예찬은 재빨리 달아났다.레스토랑을 나올 때까지도 그의 작은 심장은 계속 쿵쾅쿵쾅 뛰었는데, 뜻밖에도 유남준과 부딪친 것이다.마스크와 모자를 쓰길 잘한 것 같았다.한편, 방에서 샤워를 마친 김인우는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옷
“조씨 가문의 딸인 조하랑과 박민정은 대학 동창이에요. 조하랑은 졸업 후 바로 출국했고 박민정이 돌아온 후 곧 따라 귀국했어요.”“제가 조사한 바로는 조하랑은 같은 학년 남자인 강연우를 좋아해요.”“박민정을 선 자리에 보낸 이유가 강연우 때문인 것 같아요.”비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김인우에게 말했다.김인우는 눈앞이 캄캄했다.옷을 다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유남준과 이지원이 함께 서 있었다. 둘은 참 어울렸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일을 유남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9호 공관,박민정이 조하랑의 전화를 받자 슬픈 목소리가 들렸다.“민정아, 나 오늘 저녁에 돌아갈게.”“어떻게 됐어? 찾았어?”박민정의 물음에 조하랑은 목이 멨다.“응, 찾았어.”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다시 털털하게 말했다.“하지만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아. 우리 둘은 완전히 끝났어.”박민정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조하랑이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소개팅은 어땠어? 상대방이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지?”“말도 마.”박민정이 창밖을 내다보니 이미 해가 졌다.“저녁에 너와 예찬이 찾으러 갈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그래.”한여름 밤,조하랑은 돌아온 후 실망에 찬 표정을 감추고 강연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더 이상 자세하게 묻지 않고 오늘 소개팅에 대해 그녀에게 말했다.“김인우? 어떻게 그 사람일 수가 있어? 진작 알았으면 제대로 물어봤어야 했어.”조하랑은 한숨을 쉬었다.“너한테 복수할까 봐 걱정돼.”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러나 조하랑은 개의치 않았다.“남자가 여자 둘을 괴롭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아?”“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김인우는 이지원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잖아.”박민정은 김인우를 신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책을 읽으며 대화를 듣던 박예찬은 그동안 찍었던 김인우의 사진을 슬쩍 인터넷에 올렸다.박예찬의 조작으로 이튿날 아침 인터넷이 폭주했다.한 가지 뉴
역시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이번만 봐주겠어.”박예찬은 눈을 비비고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엄마, 하랑 이모,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야.”조하랑이 반갑게 맞이해주고 박민정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했다.“너희들 빨리 씻고 아침 먹어.”“예찬아, 이모가 유치원을 찾아주셨어. 오늘 입학 신청하러 가자.”원래 이맘때면 여름 방학이지만 소개된 국제유치원은 연중무휴였다.박민정이 박예찬을 유치원에 보내면 낮에 혼자 있을 걱정도 없다.게다가 다른 아이들과 더 많은 교류를 할 나이였다.“네.”그는 얌전히 대답했다.한편 화장실에서,작은 벤치에 서서 거울을 보며 이를 열심히 닦는 박예찬의 모습을 보며, 조하랑은 은근히 그를 건드리고 싶었다.“예찬아, 너 참 말을 잘 들어. 유치원에 대해 많이 묻지도 않고 그냥 가겠다고 한 거야?”조하랑은 이 녀석을 믿지 않았다.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친구를 만나는 것이 박예찬에게는 두려울 것 같았다무섭지 않아도 최소한 설레거나 다른 감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박예찬이 다 씻은 후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애들은 원래 유치원에 가야 해요. 제가 허락 안 해도 결국에는 가야죠.”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 “...”어린애 같지 않아 전혀 귀엽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기사가 차를 몰고 세 사람을 유치원으로 데려다주었다.조하랑 덕분에 박예찬은 입학 수속을 빨리 마치고 당일에 등교 할 수 있었다.“엄마, 하랑 이모, 가서 일 보세요. 열심히 듣고 올게요.”조하랑은 멀지 않은 교실에 있는 짧은 머리를 한 남자아이를 가리켰다.“저 아이가 이모의 조카야, 조동민이라고 해. 너를 잘 보호해달라고 가서 부탁했어.”“다른 아이들이 괴롭히면 쟤를 찾아.”박예찬의 예쁜 두 눈에서 눈빛이 반짝거렸다.“좋아요.”애초에 박예찬은 박민정과 조하랑이 정리하는 틈을 타 이 유치원을 조사했다.그중 유지훈이라는 아이가 유씨 가문의 장손이자 유남준의 큰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을 발견했다.쓰레기 같은
집에 있던 꼬맹이를 보내고 나니 박민정과 조하랑은 모처럼 함께 쇼핑할 수 있었다.강연우의 일 때문에 조하랑은 이 기간에 진주 시에 남아 박예찬을 돌볼 생각이였다.“하랑아,너무 고마워.”“우리 둘 사이에 사양할 필요 없어.”한편 유치원에서.박예찬이 반에 나타나자 예쁘장한 그의 얼굴이 유치원생들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선생님께서 방금 외국에서 돌아온 아이라고 소개하셨고, 다들 잘 돌봐달라고 하셨다.조동민은 어젯밤 이모로부터 오늘 전학생이 있으니 좋은 친구가 되라는 전화를 받았다.그는 상대방도 자신처럼 건장한 남자인 줄 알았다.그러나 그렇게 예쁜지 몰랐다. 여자보다 더 예쁘고 귀엽고 보호하고 싶게 생겼다.조동민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박예찬은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앉았다.“네가 박예찬이야? 이모가 널 돌봐달라고 하셨어.”조동민은 가슴을 쳤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네 일이 내 일과 마찬가지야.”“잘 부탁해.”조동민은 그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목소리도 예쁘다는 것을 발견했다.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박예찬은 조동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교실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그는 비싼 양복 차림이었고 단추마저도 모두 값어치가 있었다.교탁 앞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고 작은 얼굴에는 도도함이 가득했다.조동민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유씨 가문의 장손 유지훈이야. 절대로 건드리지 마.”“그의 미움을 산다면 나도 널 지켜줄 방법이 없어.”박예찬은 속으로 웃었다.조카가 아니랄까봐, 하랑 이모와 정말 똑같았다.“걱정하지 마.”박예찬은 안도의 눈빛을 보냈다.조동민은 이모가 소개해 준 친구가 마음이 놓였다.유치원의 수업은 주로 그림그리기, 종이접기, 놀기, 가끔 취미로 외국어를 배웠다...하지만 박예찬은 전에 이미 다 익혔다.그래도 튀지 않기 위해 평범한 아이인 척했다.오전 내내 반의 모든 여학생들이 그를 에워싸고, 하나같이 앞다투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맛
박예찬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유지훈이 말했다.“난 네가 싫어. 오늘 돌아가면 엄마 아빠한테 자퇴시켜 달라고 해.”말을 들은 박예찬은 담담한 표정으로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 손을 꼼꼼히 씻었다.“왜?”“내가 호산 그룹의 미래 후계자니까!”유지훈은 도도하게 말했다.진주 시에서는 호산 그룹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내 미움을 산다면 너와 네 부모님도 책임질 수 없을 거야. 이 학교는 모두 호산 그룹이 지원하는 거야.”“내가 나가라고 하면 넌 나가야 해.”박예찬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는 자신의 쓰레기 같은 아버지가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한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다.“그래.”유지훈은 박예찬이 동의한 줄 알고 득의양양해하고 있었다.이어 박예찬이 말했다.“안 갈 건데.”유지훈는 화가 났다.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들어 박예찬을 걷어차려 했다.박예찬이 눈치가 빨라 그를 막았다.외국에 있을 때 엄마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 킥복싱을 배웠었다.몇 분 후, 유지훈은 화장실에서 싹싹 용서를 빌었다...“그래도 나를 자퇴시킬거니?”“아니...”“고자질 할 거야?”“그럴 일 없어...”유지훈의 작은 얼굴은 둥글고 보기 좋게 맞았다.박예찬은 다시 손을 씻었다.“기억해. 고자질하면 너가 보일 때마다 때릴 거야.”“...”이렇게 창피한 일을 당했는데 고자질 할 수가 없었다.유지훈은 사나이였다.조하랑은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박민정는 오랜만에 혼자 진주 시에서 산책했다.한여름, 날씨 변화가 매우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흐려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처마 밑에 서 있는데 벤틀리 한 대가 천천히 그녀 앞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지며 남자의 환한 얼굴이 나타났다.“타.”유남준은 운전석에 주저앉아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나는 운전기사가 아니야. 앞에 앉아.”뒷문이 도무지 열리지 않으니 할
그녀는 유남준이 아직도 이곳을 기억하고 있고, 기억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승인하도록 자신을 강요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니었다.유남준은 뼈가 굵은 손으로 핸들을 꽉 쥔 채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그 아이는 어떻게 되였어?”그는 김인우가 박민정에 관한 의료 파일을 자신에게 줬을 때, 그 위에 임신 2주라고 적힌 것을 기억하고 있다.유남준은 줄곧 묻지 않았고 그녀가 먼저 말하게 하려고 했다.박민정이 아이라는 두 글자를 들었을 때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아이라니요?”차를 세우고 박민정을 바라보는 유남준의 마음은 유난히 무거웠다.“그때 임신한 거 알아.”그의 깊은 눈동자는 박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녀는 유남준이 이미 박예찬을 발견했을까 봐 매우 두려웠다.비록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유남준이 박예찬과 박윤우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저는 제가 유산했다고 주치의가 말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아요.”유남준의 심정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는 진작에 그 아이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었다. 만약 아이가 존재한다면 박민정은 혼자 돌아올 수 없었다.조사하라고 보낸 사람이 그녀를 그토록 따라다녔지만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그리고 그때 박민정의 몸이 허약했기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유남준은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박민정은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매우 조마조마했다.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연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전화기가 연결되었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아, 왜?”연지석은 박민정이 일이 없는 한 먼저 자신에게 전화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오늘 유남준이 나를 찾아와 아이에 관해 물었어. 그는 내가 전에 임신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박민정이 사실대로 말했다.잠시 후 연지석이 위로해 주었다.“걱정하지 마, 예찬이와 윤우의 생년월일은 내가 이미 다 바꿨어.”“그럼 다행이야.”박민정은 잠시 당황했다
이번에는 서다희가 박민정을 막지 않았다.이 시각 유남준은 창가 앞에 서서 담배를 태우면서 어제 박민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그녀는 유산된 적이 있고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했다.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는 손에 든 담뱃불을 껐다.“들어와.”박민정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핏 된 정장을 입고 훤칠한 몸매를 한껏 뽐내는 유남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십여 년 전에 유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와 오늘이 매우 비슷한 것 같았다. 그때도 햇빛 아래에 서있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유남준의 눈에도 박민정의 얼굴은 매우 정갈해 보였고 몸매도 매력적이었다.그가 멍하니 박민정의 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무실의 문을 닫고 그의 앞에 와 있었다.“대표님, 어제 말씀드린 후 과거 자료를 찾아봤는데, 제가 오해했습니다. 저희가 정말 결혼했었네요.”“한 가지 해명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전에 제가 소개팅을 했다고 한 건 사실 제 절친을 대신해서 나간 겁니다.”사실 그날 유남준은 돌아간 후 바로 조사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자기 입으로 해명할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조금 의아했다.“그래서 그 일을 해명하려고 나를 찾아온 거야?”박민정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저는 결심했어요. 모든 기억을 되찾을 겁니다. 근데 어떤 일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어보려고 왔어요.”그녀는 남자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뭐가?”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한번 삼켰다.“우리가 예전에 뜨겁게 사랑했나요?”유남준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하지만 박민정은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저는 지금 많은 사람과 일들이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유남준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도저히 알아보기 힘들었다.“맞아, 나를 많이 사랑했어.”그는 또박또박 말하다가 어느샌가 눈시울이 붉어졌다.박민정은
하지만 유남준은 차갑게 거절했다.“시간 없어.”이지원은 그가 단번에 거절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방금 그와 박민정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또 화가 나기 시작해서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뜯었다.그래도 불쾌함을 꾹 참고 옆에 있던 박민정에게도 물었다.“민정 씨는 혹시 올 수 있나요?”“마침 발표회가 끝난 뒤 대학 동창회가 있는데 옛 동창들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유남준의 시선도 박민정에게로 향했다.그녀는 방금 유남준에게 기억을 찾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한 관계로 거절하기 힘들었다.“그래요.”그렇게 박민정은 이지원의 초대장을 받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박민정이 발표회에 참석한다고 하니 유남준도 마음이 흔들렸다.이지원의 설득 끝에 그럼 그도 가겠다고 했다.유남준이 점점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이지원은 박민정에 대한 원망이 더욱 쌓여갔다.한 편, 유남준의 사무실에서 나온 박민정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거의 다 됐었는데!늦은 시각.박민정은 초대장에 적힌 시간에 맞춰 저녁에 운전기사더러 오페라 하우스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다.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많은 인플루언서와 언론 기자들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리고 옛날 대학 동창들도 있었다.이지원이 오페라극장의 음악 연주 홀과 전시장을 전부 예약해서 초대받은 사람 외에는 입장할 수 없었다.박민정이 초대장을 들고 들어가니 시야가 넓은 곳에 그녀를 안배했다.그 자리가 거의 무대의 절반 정도가 보이는 위치였다.처음에는 이지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누군가의 낯익은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유남준이다. 그것도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분명 안 온다고 하지 않았나?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차갑게 웃었다. 역시 이지원의 부탁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다.하여튼 젊은 여자면 다 좋아하는 바람둥이.유남준이 여기에 오는 바람에 언론 기자들이 앞다투어 이지원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기 시작했고 모두 메인 기사에 실릴법한 내용을 보도했다
어렵게 되찾은 친엄마의 사랑을 다시 잃는 게 두려워서일까?박민정은 그렇게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저녁.박민정은 유남준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남아서 정수미 곁을 지키려 했다.그러나 정윤아도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그렇게 밤이 되자 정수미는 또다시 통증이 밀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어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다.그 모습을 발견한 박민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엄마, 잠이 안 오면 우리 수다나 떨어요. 어차피 저도 안 피곤하거든요.”정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모, 우리 얘기나 나눠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래.”정윤아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꺼냈다.“민정 언니, 언니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어렸을 때라...박민정은 그 시절 행복했던 부분만 말해줬다.“사실 별거 없어요. 그때 저는 한 가정부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박민정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자 정윤아와 정수미는 모두 귀 기울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특히 정수미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그녀한테는 너무 소중한 시절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그러다가 중간중간에 정윤아는 궁금한 점도 박민정에게 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눴고 정수미의 통증도 어느새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저녁 10시.정수미는 시계를 보다가 문득 내일 박민정의 수술이 생각나 졸린 척 하품했다.“안 되겠다. 나 너무 피곤한데 우리 이만 자자.” “네? 한참 재밌는데 벌써 잔다고요?”정윤아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아직 하나도 안 졸려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 같은 늙은이가 너희 젊은 사람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쉬운 줄 알아? 자, 너희 둘은 옆에 칸에 가서 자. 민정이는 내일 수술도 해야 하잖
유남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그저 물어본 거예요.”그러고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그거 알아요? 저는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주변 사람들이 제 곁을 떠나는 건 너무 무서워요.”처음에는 박형식이었고 그 뒤로는 은정숙마저 떠나버렸다.그리고 지금은 친엄마인 정수미마저 건강이 점점 악화하고 있다.박민정은 요 며칠 꿈에서 거의 매일 누군가를 떠나보냈는데 깨어나 보면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며 답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어느 날 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다시 만난다는 말에 박민정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정말 그렇게 될까요?”“당연하지.”예전의 유남준이라면 분명 이런 위로의 말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날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여태껏 죽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눈앞의 박민정이 슬퍼하니 자신마저 가슴이 저린 것 같았다.박민정은 문득 가게에 다른 손님들도 있는 걸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괜찮은 척 말했다.“남준 씨 말이 맞아요. 어차피 우리도 결국에는 죽을 텐데 이렇게까지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은 여전히 씁쓸해 보였다.그렇게 주문했던 요리가 포장되어 나오자 그들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빠르게 달려와 박민정에게 말했다.“형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건 운명에 한 번 맡겨봅시다.”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알겠어요.”김인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아무 고통도 없이 정 대표님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네네.”“그러면 민정 씨도 내일 바로 수술 진행할까요?”사실 박민정은 원래 수술 날짜를 뒤로 미루려고 했는데 정수미가 병실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박민정을 불렀다.“민정아.” 박민정
정수미는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예전에 엄마는 키워준 아이들한테 속아서 많은 약을 먹게 되었고 나중에는 어디 갇혔다가 불에 타 죽을뻔하기도 했어. 그때 아마 많은 유해 물질도 같이 마셨을 거야. 비록 네 아빠가 나중에 구해주긴 했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온몸에 큰 화상까지 입었어.”“그 이후로 비록 치료를 받았어도 여러 질병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었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심장이 하도 따끔거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렵게 찾은 친엄마가 곧 그녀를 떠나간다.정수미도 진작에 그녀의 슬픈 얼굴을 알아챘지만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사실 박민정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여태껏 잘 키워주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또 병마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민정아... 이렇게 또 너만 두고 가서 엄마가 너무 미안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건 엄마 잘못도 아니고 엄마 탓도 아니에요.”박민정은 정수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러자 정수미도 어느새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착한 딸, 엄마 이해해 줘서 고마워.”박민정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정윤아와 유남준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두 모녀가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박민정은 정수미에게 기대어 좀처럼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이때 정수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 나 배고파.”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뭐 먹고 싶어요? 제가 사 올게요.” “아무거나 다 돼.”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배고픈 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버틸만하다는 뜻이 아닐까?”그러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당연하죠.”“금방 갔다 올게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와 그제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유남준에게 말했다.“먹을거리 좀 사 올 테니
정윤아는 한눈에 봐도 다급한 기색이었다.그러자 의사는 마스크를 벗고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요... 가족분들도 아시다시피 환자분의 지금 상태로는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정윤아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혹시 며칠 전 먹었던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요?”그러자 의사가 의심의 눈초리로 되물었다.“혹시 환자분은 상태를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정윤아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떻게 이럴 수가?”의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정윤아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러나 이미 진작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박민정은 덤덤한 얼굴로 의사에게 다가가 말했다.“의사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그러자 의사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아닙니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환자분과 많은 시간을 나누시길 바랍니다.”“네.”말을 마친 뒤 의사는 자리를 떴다.그렇게 박민정은 정수미의 침대를 밀고 병실로 돌아왔다.정윤아는 뒤따라오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 언니, 언니는 고모 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박민정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답했다.“저도 며칠 전에야 알았어요. 그때 윤아 씨는 윤소현 씨한테 한창 속고 있을 때였죠. 저는 엄마의 건강에 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어 예전에 엄마 주치의였던 분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더니 지금까지 병이 계속 악화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속이고 계셨더라고요.”정윤아는 순간 눈이 새빨개져서는 말까지 더듬었다.“어떻게 이럴 수가...”박민정은 본인도 슬펐지만 오히려 눈앞의 정윤아를 먼저 위로했다.“괜찮으니까 울지 말아요... 그리고 이따 엄마 보러 가서도 꼭 눈물을 참아야 해요, 알겠죠?”정수미는 분명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박민정의 말에 정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울지 않을게요. 이런 상황이면 분명 당사자부터 마음이 약해질 텐데 그럴수록 저희가 옆에서 파이팅 해드려야 고모가 병마
박민정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하랑이 잘 부탁드릴게요. 임신이 처음이라 많이 서툴 텐데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셔도 돼요.”김인우가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산부인과 지식까지는 섭렵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그럴게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잘 돌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에 자기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뻤다.그 덕분에 최근 병원의 복지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박민정과 정수미는 그제야 병원에서 나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는데 가는 길 내내 정수미는 오늘 많이 피곤했는지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그러자 박민정이 자기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엄마, 너무 피곤하면 제 어깨에 기대어 한잠 자요.”“그래.”정수미는 박민정의 말대로 그녀에게 기댄 뒤 눈을 꼭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박민정은 이상하게 어깨가 축축한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정수미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순간 깜짝 놀란 박민정은 빠르게 운전기사더러 차를 세우게 했다.“당장 병원으로 다시 가주세요.”“네.”그녀의 말에 운전 기사는 황급히 핸들을 돌려 병원으로 향해 달려갔다.“엄마, 엄마...”박민정은 정수미를 안고 낮은 소리로 불러보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마음이 점점 조급해진 박민정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엄마!”다행히 그들은 빠르게 다시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정수미가 수술실 안에 들어갈 때까지 박민정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이때, 김인우가 다급히 뛰어오더니 그녀의 어깨가 피로 흥건하게 젖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은 그제야 정수미의 병이 재발했다고 알려줬다.그러자 김인우는 침착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네.”김인우는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뒤 곧바로 수술실 안으로 뛰어갔다.가기 전에 유남준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수미는 약을 먹고 얼마간 쉬다 보니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모든 사람이 그녀와 같이 아침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이건 제가 사 온 아침인데 혹시 괜찮은지 드셔보시겠어요? 요리할 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사 왔어요.”진서연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정수미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세팅된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칭찬하기 시작했다.“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데요?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그러면 다행이네요. 일단 죽 한 그릇 담아드릴게요.”“고마워요.”진서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에게 죽을 담아서 건넸다.그리고 박예찬은 옆에서 새우 하나를 까더니 정수미의 접시에 올려놨다.“외할머니, 여기 새우도 드세요.”정수미는 오랜만에 이런 행복감을 느껴보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았다.“우리 예찬이도 고마워.”“할머니,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가족끼리는 고맙다는 말을 안 하는 거래요.”“그래? 알겠어.”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사실 지금 정수미는 미각을 거의 잃은 상태였지만 오늘의 음식은 유난히 맛있는 것 같았다.그렇게 아침을 다 먹은 뒤 정수미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그때 김인우 씨한테서 난청 수술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러면 빨리 수술 스케줄부터 잡아. 엄마가 같이 가줄게.”정수미는 마음이 조급했다.박민정의 얼굴에 난 상처와 난청이라는 장애가 정수미한테는 줄곧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원래 지금처럼 안 들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때 먹지 말아야 할 약을 먹고 그 영향이 그대로 아이한테까지 가게 된 것 같았다.“알겠어요.”“말이 나왔던 참에 오늘 바로 가보는 건 어때?”정수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기 전에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었다.“네.”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곧바로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오늘 시간이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정수미와 같이 차를
그럼 그렇지.박예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엄마. 걱정 마세요.”그 한마디에 박민정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밤이 되자 박민정은 씻고 나온 후 유남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곧, 그의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뒤로한 채 정수미의 방으로 향했다.“엄마.”정수미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아직 잠들지는 않은 상태였다. 박민정을 본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오늘 엄마랑 같이 자도 돼요?”정수미는 순간 멈칫했고 박민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아이고, 다 큰 애가 무슨... 이제 남준이랑 함께 지내기 시작했는데 둘 사이의 정을 쌓아야지.”그러나 박민정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남준 씨랑은 꽤 오래 함께 보냈어요. 하루쯤은 괜찮아요. 그냥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그녀는 장난스러운 투로 말을 덧붙였다.“다른 집 애들은 어릴 때 엄마랑 자는 게 당연한데 전 한 번도 엄마랑 같이 잔 적이 없잖아요.”그 말은 단순히 함께 있고 싶다는 의미였지만 정수미의 가슴에는 짙은 아픔이 스며들었다.그녀는 주름진 손을 들어 박민정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미안해, 내 사랑하는 딸.”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박민정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곧바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엄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앞으로 우리, 그냥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미안해하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씁쓸한 고통이 번졌다. 자신이 얼마나 더 박민정의 곁에 머물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영원히 딸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박민정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정수미의 몸이 지나치게 마른 걸 깨달았다.손끝에 닿는 감촉은 온통 뼈뿐이었다.“엄마...”박민정의 목소리가
박예찬은 묻지 않아도 김훈이 말하는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증조할아버지, 혹시 저 동생이 생긴다는 말씀하시려는 거예요?”김훈은 순간 당황했다.“아이구, 우리 예찬이, 넌 그걸 어떻게 안 거냐?”그는 오늘에서야 조하랑과 김인우에게서 들었다. 두 사람이 일부러 자신에게 비밀로 하며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이다.“그냥 찍어봤어요.”박예찬은 일부러 진실을 숨겼다. 괜히 자신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간 증조할아버지가 서운해하며 왜 숨겼냐고 잔소리를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김훈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젊은 머리는 다르구나! 예찬아, 넌 참 똑똑해. 그래, 네 하랑 아줌마가 임신했단다. 벌써 두 달이나 됐어.”“축하드려요, 증조할아버지. 이제 진짜 증손주를 품에 안으실 수 있겠네요.”박예찬이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니 김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어허, 우리 예찬이도 내 친증손주나 마찬가지지. 너희 둘 다 내겐 똑같이 소중한 아이들이야.”“네.”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훈이 단순히 핏줄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너 언제 올 거냐? 네가 보고 싶구나.”김훈은 정말 박예찬이 그리웠다. 집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는 법이니까. 게다가 박예찬은 영특해서 때론 증손자 같기도, 때론 좋은 친구 같기도 했다.“그럼 내일 갈게요.”박예찬도 흔쾌히 답했다.사실, 그도 김훈이 그리웠다. 동생인 박윤우는 아직 너무 어리숙했고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단순히 장기만 두는 게 아니라 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그 덕분에 그는 여러 가지 상업적인 수완을 익혔고 나중에 분명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였다.“그래, 그래! 내일 당장 데리러 가마.”“아니에요, 증조할아버지. 내일 유치원 끝나고 제가 직접 갈 테니 그냥 기사 아저씨만 보내 주세요.”“알겠다.”김훈은 흔쾌히 수긍했다.사실 그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아 자주 외출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오늘도 조하
정윤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마워요, 언니!”그녀가 연신 ‘언니’라고 부르는 모습에 두 어른은 다소 의아해했다.처음엔 분명 박민정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더니 어쩌다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걸까?하지만 두 사람이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흐뭇해졌다.“너희 자매는 꼭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절대 싸우면 안 돼.”임은숙의 다정한 당부에 정윤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언니 말 잘 들을 거예요. 절대 속 썩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요!”박민정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 외할머니. 걱정 마세요.”임은숙은 흐뭇하게 웃었다.“그래, 잘 지내기만 하면 돼.”그날 밤, 박민정은 두 어른을 위해 진주시의 특산물을 정성껏 챙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공항까지 배웅한 후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하지만 정수미는 함께 돌아가지 않았다. 진주에 당분간 머물기로 결정한 것이다.그녀는 박민정과 한집에 살지 않기로 했는데 박민정이 자신의 병을 알아차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정작 그녀는 몰랐다. 박민정은 이미 어머니가 병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엄마, 그냥 저희랑 같이 지내요.”떠나려는 정수미를 붙잡고 박민정이 말했지만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는 이제 늙었어. 너희 젊은 사람들 생활에 방해가 되면 안 되지. 시간 날 때 가끔씩 보러 올게.”그러나 박민정은 어머니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그럼 제가 엄마랑 같이 가서 지낼게요.”그녀는 그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갖고 싶었다.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그런 딸의 태도에 정수미는 이상함을 느끼고 되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뇨, 그냥... 엄마랑 다시 만나고 나서 제대로 함께한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요.”그 말을 듣자, 정수미의 가슴이 먹먹해졌고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딸의 등을 조용히 토닥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앞으로 매일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