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625화

작가: 윤지
유남준이 나와보니 텐트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고 산사태도 발생한 흔적이 있었다.

“위험할뻔했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나?”

분명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박민정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

“세상에. 만약 어제 비가 조금만 더 세게 내렸다면 우리 텐트도 분명 물에 잠기거나 바위에 깔렸을 것 같네요.”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유남준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재빨리 다가와 안심시켰다.

“우린 하느님이 도와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 선생님들도 눈앞의 상황에 매우 놀랐다.

지금은 비가 그쳤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기에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곳은 분명 최현아가 사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결정했던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만약 이 거대한 바위들과 흙들이 비에 씻겨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적어도 몇 집은 이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들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게 무리인 것 같아 모두가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는 민박집을 예약했다.

“너무 좋아요. 이곳에서 자는 것보다 민박집에서 자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네요.”

학부모들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저마다 찬성하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 시각, 최현아는 진작에 산에서 내려와 혹시나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뉴스가 뜬 게 없는지 계속 핸드폰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때, 유지훈도 진작에 잠에서 깼다가 문득 최현아에게 물었다.

“엄마, 저희는 왜 계속 산에 있지 않고 내려왔나요? 저는 배도 안 아픈데.”

그의 말에 최현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선생님께서 오늘에는 더 높은 산에 올라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산에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6화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화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화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3화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4화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5화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6화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7화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최신 챕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6화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5화

    유남준이 나와보니 텐트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고 산사태도 발생한 흔적이 있었다.“위험할뻔했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나?”분명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박민정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세상에. 만약 어제 비가 조금만 더 세게 내렸다면 우리 텐트도 분명 물에 잠기거나 바위에 깔렸을 것 같네요.”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유남준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재빨리 다가와 안심시켰다.“우린 하느님이 도와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학교 선생님들도 눈앞의 상황에 매우 놀랐다.지금은 비가 그쳤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기에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이곳은 분명 최현아가 사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결정했던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만약 이 거대한 바위들과 흙들이 비에 씻겨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적어도 몇 집은 이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선생님들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게 무리인 것 같아 모두가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는 민박집을 예약했다.“너무 좋아요. 이곳에서 자는 것보다 민박집에서 자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네요.”학부모들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저마다 찬성하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시각, 최현아는 진작에 산에서 내려와 혹시나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뉴스가 뜬 게 없는지 계속 핸드폰으로 확인했다.그러나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이때, 유지훈도 진작에 잠에서 깼다가 문득 최현아에게 물었다.“엄마, 저희는 왜 계속 산에 있지 않고 내려왔나요? 저는 배도 안 아픈데.”그의 말에 최현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선생님께서 오늘에는 더 높은 산에 올라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산에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4화

    저녁이 되더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점차 빗방울이 굵어졌다.원래 유남준은 오늘 이불을 덮고 자려고 했으나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낭에서 자야 했다.박민정은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천둥소리가 무서워 이불 안으로 꼭꼭 숨었다.옆에 자기 아들이 누워있어 티는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박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예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침낭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엄마, 나랑 같이 자자.”“응? 왜?”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아니면 나랑 같이 잘까? 나 천둥소리가 너무 무서운데.”이때,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예찬은 원래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에게 뺏긴 게 너무 괘씸해서 그를 도끼눈으로 째려봤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다고요?”“응. 좀 무섭네?”유남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박민정은 사람마다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같이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도 분명 약점이나 두려워하는 게 있을 텐데 저 사람한테는 그게 천둥소리인가 싶었다.“괜찮아요. 잠들면 금방 안 들릴 테니까.”박민정은 아까까지 너무 무서웠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그러나 유남준은 약간 진정된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세워둔 작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이쪽으로 좀 오지 않을래?”그의 말에 박민정은 침낭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가 마침 박예찬의 침낭에 딱 붙게 되었다. 박예찬이 흐뭇해하던 찰나에 또다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찬이는 천둥소리가 안 무섭지?”박예찬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답했다.“당연하죠. 남자로서 어떻게 천둥소리 따위를 무서워하겠어요? 제가 보호해 줄 테니까 안심하세요.”“그럼 네가 침낭 끝에 자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래?”유남준의 말에 박예찬은 그제야 그의 꾀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3화

    박민정은 뜬금없이 자기 앞으로 내미는 음식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예요?”“형수가 담아줬는데 안에 고기도 있더라고. 아까 잘 못 먹던데 이거라도 먹어.”최현아는 마침 그의 뒤를 따라왔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똑똑히 듣게 되었는데 순간 뜨겁게 불타올랐던 마음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이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호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마음을 이용해서 박민정에게 애정 공세 할 줄은 몰랐다.“남준 씨는 참 다정한 남편이네요. 제가 가져다준 음식을 그대로 민정 씨에게 줄 만큼.”말속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솔직히 저녁 식사가 부실했던 건 사실이었고 양도 적은 데다가 온통 채소뿐이라 박민정은 진작에 허기져 있었다.그가 건네준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최현아를 보고는 막 거절하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빨리 먹어. 너무 늦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현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형님,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최현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겨우 답했다.“많이 먹어요.”그리고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뒤돌아서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최현아는 원래 유남준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면 이따가 이 남자만 살려주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세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면 될 것 같았다.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박민정은 도시락에 담긴 다양한 음식을 보고는 순식간에 식욕이 올라왔다.“와, 너무 맛있겠다.”그리고 다시 반찬들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두 사람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예찬아, 남우 씨, 너무 많아서 저 혼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이 먹어요.”뜬금없이 자신을 남우라고 부르는 모습에 살짝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티를 낼 수 없었다.“그래.”그렇게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2화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1화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20화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19화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18화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