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의 입술이 닿으려고 할 때 문 앞에서 때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쓰레기 아빠, 엄마...아침 먹을 시간이에요.”박윤우가 다가가자 엄마아빠가 서로 가까이 기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는 즉시 눈을 가렸다.박민정은 정신을 차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이때 박윤우가 계속해서 말했다.“쓰레기 아빠, 엄마, 할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동생 두 명 더 낳으려는 거예요?”“이번엔 여동생 낳으면 안 돼요? 남동생이 너무 많아요.”그는 여동생이 생기면 오빠로서 잘 보호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여동생을 낳으라는 말을 들은 박민정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유남준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박윤우에게 다가가 그를 들어 올린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다음엔 눈치 좀 챙겨.”박윤우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쓰레기 아빠,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아빠가 엄마를 쫓아다닐 때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요.”사실이긴 해서 유남준은 잠시 말을 잃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알겠어. 아무튼 앞으로 조심해.”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에 둘이 뽀뽀할 때는 멀리 떨어져 있을게요.”박윤우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기에 뒤에 서 있는 박민정한테도 들렸고 그녀는 윤우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애들이 이렇게 조숙할 줄은 몰랐다.박민정은 부끄러움에 머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박민정이 정씨 가문에 다녀온 이후로 정수미는 종종 그녀한테 문자를 보냈고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귀찮아 해할까 봐 정수미는 PMJ회사에 온갖 혜택을 퍼붓기도 했다.비서가 그런 정수미를 바라보며 웃으면서 말했다.“정 대표님, 그러다가 저희가 손해를 보게 될 판이에요.”“괜찮아. 민정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손해 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정수미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고 비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둘째 아가씨가 빨리 대표님 곁으로 돌아와서 대표님의 처지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정
정수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박민정의 용서를 얻고 싶었던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자존심마저도 내려놓을 각오를 했다.이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박민정은 결국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조하랑이 일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된 건 정수미가 윤소현을 감싸다가 벌어진 일이었다고.정수미는 박민정에게서 오는 답장을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깊이 무너져 내렸고 가슴은 마치 수많은 바늘로 찔리는 듯 아팠다.“민정아,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정수미는 계속 메시지를 보내면 박민정이 완전히 자신을 무시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더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그녀는 비서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전에 청각 회복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으라고 부탁했잖아? 그 일은 어떻게 됐어?”“찾고 있는 중입니다.” 비서는 답한 뒤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덧붙였다.“대표님, 사실 유 대표도 분명 좋은 의사를 많이 구했을 겁니다. 작은 아가씨를 아끼는 분이잖아요.”“알아. 하지만 난 민정이를 위해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정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의 박민정은 부족한 게 없는 상태였다.“내 개인 변호사를 불러와 줘.”비서는 놀란 듯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가서 불러와.”정수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를 본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장 변호사가 오자 윤소현 쪽도 곧바로 소식을 들었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정수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인 장 변호사가 이 시점에 찾아왔다는 건 단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바로 유언장과 관련된 일이었다!정수미는 오래전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어 지금도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그래서 일찍이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다.정수미는 출산 능력을 잃은 이후 대부분의 재산을 윤소현에게 남기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변호사
“네, 알겠습니다.”장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의 편애는 변호사로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심지어 정수미가 모든 재산을 박민정에게 물려준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장 변호사는 정수미가 제시한 모든 내용을 확인한 후, 서류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대표님, 곧바로 초안을 작성하고 이틀 안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좋아, 수고해.”정수미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장 변호사가 로펌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한 차량이 그의 차를 막아섰다.그는 약간 의아해하며 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에서 누군가 내려왔는데 바로 윤소현이었다.윤소현은 손을 들어 그의 창문을 두드렸다.“장 변호사님, 정말 오랜만이에요.”장 변호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오랜만입니다, 큰 아가씨.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그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며 묻자 윤소현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무슨 일이겠어요? 오늘 제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궁금해서요. 대표실에서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셨더라고요.”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자라서인지 그녀는 원체 겁이 없었다.장 변호사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윤소현이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별일 아닙니다. 그냥 최근 회사의 몇몇 건에 대해 논의했을 뿐입니다.”정수미의 개인 변호사로서 그는 눈치가 제법 빨랐는데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윤소현은 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곧장 물었다.“회사의 일만이 아니잖아요. 유언장에 대한 얘기도 있었죠? 어머니가 제 동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는 거 아닌가요?”장 변호사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큰 아가씨, 그런 일은 대표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그저 고용된 변호사일 뿐이라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비밀이요?”윤소현은 냉소를 띠
요즘 유남준은 정신없이 바빴다.유석진이 여러 사람들과 손잡고 IM을 견제하려고 가짜 소문을 퍼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유남준은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지만 아무리 늦어도 여전히 시간을 내어 박민정과 아이를 보러 집에 들렀다.박민정도 이곳 생활에 완전히 녹아들었고 더 이상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돌아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가끔 꿈을 꾸거나 떠오르는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을 제외하고는 과거를 거의 떠올릴 수 없었다.“생각나지 않으면 억지로 생각하지 마.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기억이 돌아올 거야.”설인하가 위로하며 말하자 진서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몸 상태를 회복하는 거예요. 조급해하지 마세요.”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오늘 민수아를 제외한 이들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민수아는 서다희와 함께 결혼식을 준비하러 갔고 얼마 전 박민정과 다른 사람들에게 웨딩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정말 예쁘네요, 웨딩 사진.”진서연이 감탄하며 말하자 설인하도 맞장구쳤다.“네, 정말 예뻐요.”그러다 진서연은 설인하와 박민정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보스, 두 사람도 결혼할 때 웨딩 사진 찍었어요? 저 정말 보고 싶어요!”이 말에 두 사람 모두 순간 멈칫했고 잠시 후 박민정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글쎄... 기억이 안 나네.”아마 찍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찍었다면 빌라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게 분명했다.설인하도 고개를 저었다.“없어요. 그 사람하고는 찍고 싶지 않았거든요.”이제는 방성원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그녀였다.진서연은 분위기가 미묘해진 걸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했다.“아... 미안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설인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은 정말 너무 행복하고 아주
두 사람이 업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정민기가 떠나려던 순간, 박민정은 문득 진서연이 떠올라 그를 불렀다.“아까 부엌에서 우리가 서연이랑 장난 삼아 농담을 좀 했거든요. 서연이는 조금 수줍음이 많아요.”박민정은 혹시 정민기가 진서연을 오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정민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담담한 태도를 보며 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민기 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서연이 좋아해요?”박민정은 진서연을 아끼는 마음에 물은 것이었다. 진서연은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런 진서연이 괜히 감정적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으니까.정민기는 매번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기에 그가 정말 진서연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긴 침묵 끝에 정민기가 답을 내놓았다.“전 서연 씨를 항상 친구로 여겨왔어요.”“친구요?”박민정의 입가가 약간 떨렸다.“그럼 민기 씨 말은... 서연이를 남녀 간의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진서연에게 빨리 알려줘야 했다. 그녀가 너무 깊이 빠지기 전에.그런데 정민기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냥 친구는 아니에요.”“...”박민정은 어이없어졌다.이 남자도 참 부끄러움이 많았다.“진짜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대단하네여. 나는 민기 씨가 서연이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줄 알았잖아요.”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근데 잘됐네요. 민기 씨도 마음이 있고 서연도 마음이 있으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적극적으로 나서 봐요. 여자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빨리 마음을 터놓으라고요.”정민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흥얼거리며 돌아갔다.집 안에서는 진서연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그녀는 혹시나 자신의 말 때문에 정민기가 정말로 자신을 친구로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박민정이 돌아오자 진서연은 재빨리 그녀에
“인하 씨도 칠순 노인 아니잖아요. 서연이보다 고작 한두 살 많을 뿐인데요.”박민정이 웃으며 말하자 설인하는 박민정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그래도 우리는 애 있는 사람이잖아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설인하는 바로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화면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잠시 후,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전화를 한 거야? 내가 영상 통화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뻔했다.방성원이었다.방성원은 설인하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영상 통화를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은정이를 보겠어?”‘은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설인하의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봤잖아.”“어제 봤다고 오늘은 못 봐?”방성원이 반문하니 설인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성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서는 방은정이 보모와 함께 놀고 있었다. 휴대폰에 비친 방성원의 얼굴을 본 방은정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아빠!”“은정아, 밥은 먹었어?”방성원은 딸 앞에서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방은정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먹었어요! 아빠도 밥 먹었어요?”“응, 아빠도 먹었어. 아빠는 지금 은정이를 꼭 안아주고 싶네.”방성원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니 방은정은 영상 속의 아빠에게 뽀뽀를 보냈다.“뽀뽀!”부녀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설인하는 살짝 질투가 났다. 하지만 곧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아빠, 나 아빠 보고 싶어요.”“그럼 아빠가 당장 은정이 보러 갈게.”방성원이 약속하자 방은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전화가 끊겼는데도 휴대폰을 놓지 않은 아이를 보고 설인하는 다가가 몸을 낮추며 말했다.“은정아, 휴대폰 엄마한테 줘야지.”“싫어요! 저 아빠랑 있을 거예요!”방은정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한 것을
박민정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원 씨가 매일 오니 애가 아빠랑 더 친한 건 당연하죠. 아빠가 옆에 있길 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요.”“알아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속 이렇게 놔둘 순 없잖아요.”설인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이가 좀 더 크면 괜찮아질 거예요.”박민정의 위로는 진심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설인하가 왜 방성원과 이혼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네, 저 씻고 올게요.”설인하는 박민정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세면을 마친 뒤 방으로 돌아온 설인하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잠든 방성원과 방은정을 보았다.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방성원을 살짝 건드렸다.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왜?”“은정이가 자고 있으니 이제 돌아가.”설인하가 단호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하자 방성원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정말 매정하네, 설인하.”설인하는 전혀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우린 이미 별거 중이잖아. 널 붙잡을 이유가 없지.”방성원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침묵하더니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래?”그는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설인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설인하는 당황했다.“뭐 하는 거야? 당장 나가!”방성원의 눈가가 붉어졌다.“설인하, 내가 얼마나 더 설명해야 믿어줄 거야? 방씨 집안 일은 나랑 아무 상관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왜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대체 왜?”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애타게 말했다.“내가 어떻게 해야 널 설득할 수 있겠어? 심장을 꺼내서 보여줘?”설인하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단호히 외쳤다.“그럴듯한 말로 불쌍한 척하지 마. 아빠가 직접 말했어. 네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너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잊었어?”설인하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장래의 사위로서 장인어른의 재산을 물려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잖아!”
이 말에 박민정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마치 끓는 물에 덴 듯이 화끈거렸다.“하지만 인하 씨도 그 사람과 따로 산 지 한참 됐잖아요. 설마 그러겠어요?”“한때 연인이었고 부부였던 사이인데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진 마.”유남준은 그렇게 말하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박민정은 그가 옷깃을 푸는 것을 보자 아까 그 말이 떠올랐고 순간 겁이 덜컥 났다.“당신 옷은 왜 벗어요?”유남준은 외투를 벗어놓으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장난칠까 하다가 오해할까 봐 더 놀리지 않기로 했다.“샤워하려고. 같이 할래?”“난 됐어요! 아까 씻었거든요.”박민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자책했다. 차라리 스스로를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유남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그녀도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요즘 들어 유남준은 매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박민정을 놀리는 걸로 그럭저럭 하루를 버티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겨우 참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웃을 일이 많아져서 그것만으로도 견딜 만했다.한편, 설인하와 방성원의 대치 상황은 결국 설인하의 승리로 끝났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방성원의 몸 이곳저곳을 할퀴었다. 그리고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이를 악물었다.“더 이상 다가오지 마! 안 그러면 정말 네 앞에서 죽어버릴 거야!”애초에 그녀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방성원은 아예 아픔을 느끼지도 않는 듯했다. 결국, 위협의 방식이라도 바꿔야 했다.방성원은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내일 다시 너랑 은정이를 보러 올게.”“오지 마!”설인하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야.”그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설인하는 그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한밤중이 되도록 뒤척이기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
“설인하...”정보주는 그녀의 이름을 되뇌다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설지태가 혹시 네 할아버지 아니야?”그 이름이 나오자 설인하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할아버지를 아세요?”“알다마다! 예전에 네 할아버지께서 날 자주 불러 같이 놀곤 하셨어. 그때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정보주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운 듯 덧붙였다.“다만 안타깝게도 설씨 가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너도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겠구나?”그녀는 몇 마디 말만으로 순식간에 설인하와의 거리를 좁혔다.처음에는 진서연과 마찬가지로 설인하도 정보주를 경계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설인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다 지난 일이에요.”정보주는 깊은 연민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설씨 가문에 일이 생겼을 때 난 아직 힘이 없었어.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설인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운명이었어요. 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설인하가 친정 이야기를 꺼내는 걸 처음 보았다.그때, 정보주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설인하에게 내밀었다.“인하야, 무슨 일이든 나를 찾아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꼭 도와줄게.”설인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고맙습니다.”그녀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설인하는 정보주의 명함을 받아들고서 잃어버릴까봐 꽉 쥐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을 무렵, 정보주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아침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으면 내가 대접할게.”진서연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아직이요! 아침부터 짐 정리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그럼 가자.”정보주는 자연스럽게 박민정의 팔을 끼며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굴었다.“민정아, 너랑 서연이 그리고 인하가 좋아하는 음식 말해 봐. 이모가 다 사줄게.”박민정은 이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구는 사람을 처음 봤다. 게다가 그 사람이
“보스,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윤소현을 도와주고 보스를 험담하던 사람이 다름 아닌 보스 친이모라니요.”진서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그렇지만 그때는 이모도 보스가 누군지 몰랐으니 그냥 오해였던 거죠.”그녀가 말을 마칠 즈음,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정보주가 뛰어왔다.“민정아!”정보주는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분명 마흔이 넘었을 나이인데 서른 대 초반처럼 보였다.그녀는 또다시 박민정을 껴안으려 했지만 이번엔 박민정이 미리 대비하고 피했다.그러자 정보주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왜 이렇게 야박하게 구니? 이모가 한 번만 안아보자.”그녀는 애교까지 부렸다. 진서연은 대단한 인물로만 알고 있던 정보주가 박민정 앞에서 이러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아줌마, 그러지 마세요.”박민정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러자 정보주는 일부러 삐친 척하며 볼을 부풀렸다.“이모라고 불러주면 안 돼? ‘아줌마’는 너무 늙어 보이고 또 딱딱하잖아.”박민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이모,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모’라고 부르는 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그러자 정보주는 한결 기분이 풀린 듯했다.“그냥 너 보러 왔지.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나 혼자 진주시에 왔는데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잖아.”그녀는 말을 하면서 곁에 서 있는 진서연을 힐끗 바라보았다.“이 아가씨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너 친구?”미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은 진서연은 기분이 살짝 들떠 있었다.이때 박민정이 답했다.“진서연이라고 하고 제 친구이자 예전 직장 동료예요.”“오오~ 진서연, 이름도 참 귀엽네.”정보주는 처음 본 사이임에도 거리낌 없이 진서연의 손을 잡았다.“손금도 괜찮은데? 큰 부귀를 누릴 팔자야. 다만...”정보주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연애운이 좀 순탄치 않겠어.”“연애운이 안 좋다고요?”진서연은 바로 긴장했다.“아줌마, 제 연애운이 왜 안 좋다는 거예
당연히 기뻤다.한 집에서 정민기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감정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단둘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진서연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당연히 원하죠.”그러다 문득 설인하가 떠올랐다.“그런데 인하 씨는요?”자신이 떠난다고 해도 집에는 아직 설인하가 남아 있지 않은가.유남준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여러 채의 별장이 있어 공간은 충분했지만 설인하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건 내일 다시 고민해보기로 했다.그날 밤, 박민정은 몹시 부끄러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자신과 유남준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도저히 말로 옮길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머릿속엔 온통 그 장면이 떠오르며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박민정은 스스로를 다독였다.“민정아, 너 왜 이래? 정신 좀 차려!”어제 유남준과 입을 맞추었던 일도, 그 장면을 진서연에게 들킨 일도 떠올라 방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가 밖이 조용해진 걸 확인한 후에야 겨우 문을 열고 나왔다.그런데 거실에서 진서연이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박민정이 당황하며 물었다.“서연아, 뭐 하는 거야? 이사 가려는 거야?”혹시 어제 일 때문인가 싶어 더 난처해졌다.그녀는 황급히 해명했다.“어제 일은 그냥 오해야. 신경 쓰지 마. 제발 가지 마.”하지만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보스, 걱정 마세요. 이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뒷채로 옮기는 거예요. 민기 씨와 함께 살기로 했어요.”그때 설인하가 방에서 나왔다.“민정 씨, 저도 이사 가려고 해요. 괜찮죠?”박민정이 더 당황했다.“갑자기 왜요?”“방씨 집안에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려고요. 은정이를 자주 보러 가고 싶거든요.”며칠 동안 보지 못한 딸아이가 너무 그리웠다.마침 그날 아침,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와 방성원의 저택 근처에 있는 별장을 하나 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박민정도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홍주영은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자를 보냈다.[할머니, 알겠어요. 다시 한 번 민재 씨와 만나 볼게요.]이 메시지를 보내자 할머니는 드디어 조용해졌다.홍주영은 휴대전화를 꺼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침내, 고씨 집안에 도착했다.유남우도 눈을 뜨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는데 아까 통화의 내용은 서로 언급하지 않았다.......한편, 박민정과 유남준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앞으로 계속 본가에서 지내게 되는 거예요?”지금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정이 들었다.“네가 기억을 되찾고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다면 그때 함께 살도록 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박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박민정은 먼저 박윤우를 재우기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아이가 잠이 들자 방을 나와 자기 방으로 가려 했다.그녀가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유남준이 마치 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깨울까 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유남준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같은 방에서 자자.”박민정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약간 더듬거렸다.“그,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뭐가 불편해?”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부부야. 나를 이렇게 계속 혼자 두는 게 괜찮아?”“혼자 자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박민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유남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넌 이제 정말 나한테서 마음이 떠났구나.”예
유남우는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차 안에는 이미 홍주영이 타고 있었고 유남우를 보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겁니까?”원래 유남우가 오늘 돌아온 이유는 고영란을 만나 고씨 집안과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그는 미간을 손으로 눌러 지그시 마사지하며 말했다. “굳이 어머니와 이야기할 필요 없어. 어머니는 항상 우리 형만 편들었어. 차라리 고현문을 찾아가는 게 낫겠지.”홍주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고영란은 유남우에게도 유남준과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럼에도 유남우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홍주영은 운전사에게 차를 고씨 집안으로 몰라고 지시했다.고현문은 성격이 괴팍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 과연 그가 유남우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유남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현문의 약점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쉬려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박민정과 그녀의 가족이 떠올랐다.본래 그 따뜻하고 화목한 풍경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는데 이제는 유남준에게 그 모든 것이 돌아갔다.유남준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굳이 자신의 여자까지 빼앗으려 하는가?그는 손을 꽉 쥐었고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마침 그때, 홍주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유남우가 자는 줄 알고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유남우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괜찮으니까.”“네.”홍주영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 할머니?”“민재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어. 주영아, 너도 이제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애를 다시 받아 줘야지.” 노인의 목소리는 엄격한 듯했지만 속뜻은 애원에 가까웠다.홍주영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답했다. “할머니, 저와 그 사람은 정말 맞지 않아요. 이제 그만 이으세요.”“너는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