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 씨도 칠순 노인 아니잖아요. 서연이보다 고작 한두 살 많을 뿐인데요.”박민정이 웃으며 말하자 설인하는 박민정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그래도 우리는 애 있는 사람이잖아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설인하는 바로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화면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잠시 후,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전화를 한 거야? 내가 영상 통화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뻔했다.방성원이었다.방성원은 설인하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영상 통화를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은정이를 보겠어?”‘은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설인하의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봤잖아.”“어제 봤다고 오늘은 못 봐?”방성원이 반문하니 설인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성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서는 방은정이 보모와 함께 놀고 있었다. 휴대폰에 비친 방성원의 얼굴을 본 방은정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아빠!”“은정아, 밥은 먹었어?”방성원은 딸 앞에서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방은정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먹었어요! 아빠도 밥 먹었어요?”“응, 아빠도 먹었어. 아빠는 지금 은정이를 꼭 안아주고 싶네.”방성원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니 방은정은 영상 속의 아빠에게 뽀뽀를 보냈다.“뽀뽀!”부녀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설인하는 살짝 질투가 났다. 하지만 곧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아빠, 나 아빠 보고 싶어요.”“그럼 아빠가 당장 은정이 보러 갈게.”방성원이 약속하자 방은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전화가 끊겼는데도 휴대폰을 놓지 않은 아이를 보고 설인하는 다가가 몸을 낮추며 말했다.“은정아, 휴대폰 엄마한테 줘야지.”“싫어요! 저 아빠랑 있을 거예요!”방은정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한 것을
박민정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원 씨가 매일 오니 애가 아빠랑 더 친한 건 당연하죠. 아빠가 옆에 있길 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요.”“알아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속 이렇게 놔둘 순 없잖아요.”설인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이가 좀 더 크면 괜찮아질 거예요.”박민정의 위로는 진심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설인하가 왜 방성원과 이혼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네, 저 씻고 올게요.”설인하는 박민정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세면을 마친 뒤 방으로 돌아온 설인하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잠든 방성원과 방은정을 보았다.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방성원을 살짝 건드렸다.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왜?”“은정이가 자고 있으니 이제 돌아가.”설인하가 단호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하자 방성원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정말 매정하네, 설인하.”설인하는 전혀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우린 이미 별거 중이잖아. 널 붙잡을 이유가 없지.”방성원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침묵하더니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래?”그는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설인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설인하는 당황했다.“뭐 하는 거야? 당장 나가!”방성원의 눈가가 붉어졌다.“설인하, 내가 얼마나 더 설명해야 믿어줄 거야? 방씨 집안 일은 나랑 아무 상관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왜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대체 왜?”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애타게 말했다.“내가 어떻게 해야 널 설득할 수 있겠어? 심장을 꺼내서 보여줘?”설인하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단호히 외쳤다.“그럴듯한 말로 불쌍한 척하지 마. 아빠가 직접 말했어. 네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너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잊었어?”설인하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장래의 사위로서 장인어른의 재산을 물려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잖아!”
이 말에 박민정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마치 끓는 물에 덴 듯이 화끈거렸다.“하지만 인하 씨도 그 사람과 따로 산 지 한참 됐잖아요. 설마 그러겠어요?”“한때 연인이었고 부부였던 사이인데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진 마.”유남준은 그렇게 말하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박민정은 그가 옷깃을 푸는 것을 보자 아까 그 말이 떠올랐고 순간 겁이 덜컥 났다.“당신 옷은 왜 벗어요?”유남준은 외투를 벗어놓으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장난칠까 하다가 오해할까 봐 더 놀리지 않기로 했다.“샤워하려고. 같이 할래?”“난 됐어요! 아까 씻었거든요.”박민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자책했다. 차라리 스스로를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유남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그녀도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요즘 들어 유남준은 매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박민정을 놀리는 걸로 그럭저럭 하루를 버티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겨우 참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웃을 일이 많아져서 그것만으로도 견딜 만했다.한편, 설인하와 방성원의 대치 상황은 결국 설인하의 승리로 끝났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방성원의 몸 이곳저곳을 할퀴었다. 그리고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이를 악물었다.“더 이상 다가오지 마! 안 그러면 정말 네 앞에서 죽어버릴 거야!”애초에 그녀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방성원은 아예 아픔을 느끼지도 않는 듯했다. 결국, 위협의 방식이라도 바꿔야 했다.방성원은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내일 다시 너랑 은정이를 보러 올게.”“오지 마!”설인하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야.”그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설인하는 그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한밤중이 되도록 뒤척이기
김인우는 문 구멍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할아버지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이나 푹 자라. 뭐 하고 있는 거냐?”“할아버지, 안 주무세요?”“이 늙은이는 여섯 시간만 자면 충분해. 밤에도 자고 낮에도 자고 아무 때나 잘 수 있어.”김훈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는데 병에 걸렸다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김인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됐어, 한숨 쉬지 말고 하랑이랑 같이 침대에서 자라. 바닥에서 자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이 말에 조하랑과 김인우 둘 다 당황했다.조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또 이러시면 저 할아버지 안 볼 거예요.”김인우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우리 둘 다 할아버지랑 안 놀아줄 거예요.”정말이지, 나이가 들면 철든다더니, 이 할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다니.김훈은 이 말을 듣고는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휴, 늙으니 손자한테까지 미움받네... 참, 세월이 야속하다...”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는데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그 쓸쓸한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조하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를 따라가 위로해드리려 했다.하지만 김인우가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다.“또 마음 약해지지 마요. 우리 할아버지 성격 몰라요? 다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최근 김인우는 할아버지가 말한 병들이 모두 꾸며낸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냈다.조하랑은 발걸음을 멈췄다.“생각해보니 맞네요. 할아버지는 진짜 연기 대장이세요.”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지만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김인우를 보고 마음이 쓰였다.“인우 씨도 침대에서 자요. 우리 각자 한쪽씩 쓰면 되잖아요.”그도 그럴 것이, 방 안 난방이 끊겨 지금은 초봄이라 꽤 쌀쌀했다. 김인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괜찮긴 한데, 또 나 때리는 거 아니에요?”예전에 김인우가 잠결에 조하랑을 안았고 그녀가 그걸 발견고는 제대로 혼내준 적이 있었다.조하랑은
조하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됐어요. 얼른 일어나요.”자기도 너무 무리하게 떼를 쓸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김인우는 이불을 들어 올려 자기 몸을 덮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조하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아니, 이불은 왜 가져가는 건데요?”김인우가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있었다.조하랑은 그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걸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아래층 거실에서는 할아버지와 박예찬이 일찍부터 일어나 있었다. 박예찬은 김훈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위층에서 나는 인기척을 듣자 누구보다 기뻐했다.“이번에는 틀림없어.”김훈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였으나 박예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증조할아버지, 또 반칙하신 거예요. 방금 이 흑돌, 여기 있지 않았잖아요.”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어이구, 예찬아, 넌 눈썰미가 왜 이렇게 좋냐?”그는 곧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나중에 꼭 하랑이가 너처럼 착한 증손자를 하나 낳아야 할 텐데.”박예찬과 오래 지내다 보니 손자 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증손자라도 곁에 두고 싶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자기 손자인 김인우는 영 못 미더웠다.남의 집, 이를테면 유남준만 해도 아들만 네 명을 두었다.네 명이라니!김훈은 작년에 유씨 집안에서 쌍둥이 돌잔치를 열었을 때 그 토실토실한 아이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던지.“걱정 마세요! 하랑 아줌마랑 인우 아저씨가 꼭 튼튼한 증손자 한 명 낳아 드릴 거예요!”박예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는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인우 아저씨가 하랑 아줌마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며칠 전에도 하랑 아줌마가 밖에서 잘생긴 남자를 쳐다봤다고 질투하지 않았던가.하랑 아줌마는...박예찬 생각엔 그저 예전에 상처를 받아서 아직 자기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럼 됐어, 그럼 됐어...”김훈은 그 말에 기쁨
단호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오히려 그로 인해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어제 일을 겪고 나서 설인하는 방성원과 하루라도 빨리 관계를 정리하고 이혼을 끝내고 싶었다.“제가 예전에 이혼 소송을 걸었다고요?”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제야 설인하는 지금의 박민정이 정말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당시의 일을 설명하려 했지만 등 뒤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설인하가 고개를 돌리자 유남준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는데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벌써 여덟 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아침 안 먹고 뭐 해요?”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설인하을 재촉했다.“출근 안 해요?”설인하는 순간 말을 삼켰다. 남의 집안일을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었다.“아, 지금 가요.”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하지만 박민정의 머릿속은 여전히 설인하의 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유남준이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바로 물었다.“저 예전에 당신한테 이혼 소송을 걸었어요?”유남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숨기지 않고 사실을 인정했다.“응. 그때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어.”“그럼 왜 지금까지 저한테 말 안 했어요?”박민정은 살짝 화가 난 듯했다.유남준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땐 많은 일이 있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사심이 있어서 안 좋은 일들은 일부러 숨겼어.”그는 한숨을 쉬었다.“네가 끝내 기억을 되찾지 못할까 봐, 혹시라도 그 일들을 알게 되면 나를 멀리할까 봐 두려웠어.”“그래서요? 도대체 제가 그때 왜 이혼 소송을 걸었는데요?”박민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남준은 숨기지 않고 당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그때는 내 잘못이 컸어. 넌 나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혼하려고 했던 거야.”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우리 지금도 법적으로는 이혼 상태야.”그 한마디에 박민정은 그만 얼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다. 이 점을 유남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박민정과 친구들을 회사에 내려준 후 혼자 IM으로 향했다.얼마 전, 부하들의 조사로 유석진이 또다시 수작을 부릴 기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유남준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유석진이 한패들과 함께 세운 신생 회사를 거침없이 압박해버렸다. 그러나 정작 유석진 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대체 또 무슨 속셈일까.그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 도착한 유남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유명훈을 발견했다.노인은 발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렸는데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곧바로 유남준을 꿰뚫어 보았다.“남준아, 왔구나.”유남준은 태연히 걸어 들어갔다.“할아버지.”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은 후 차갑게 굳어 있는 손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손주를 향한 온기는 없었다.“이 회사를 보니 호산보다도 더 대단하구나.”유남준은 예의상 대꾸했다.“과찬이십니다.”그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유명훈도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았다.“하아, 요즘 네 큰아버지랑 사촌 형이 날 찾아와서 네가 너무 몰아붙이는 바람에 밥조차 먹을 수 없다고 하더구나.”아니나 다를까. 역시 유석진과 유성혁 때문이었다.할아버지가 정말 정신이 흐려진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큰아들네 가족이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질렀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유씨 가문이 그렇게까지 궁핍해졌습니까? 어쩌다 ‘밥도 못 먹을’ 지경이 되었는지 저는 듣지도 못했는데요. 그들이 정말 돈이 없다면 저를 찾아오라고 하세요. 빌려드릴 테니까요.”그의 말투는 뼈를 담고 있었고 유명훈은 그런 태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큰아버지와 사촌 형을 IM에 자리 하나 마련해 줘라. 아니면 최소한 계열사라도 보내서 일을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애초부터 목적은 그것
유남준은 회사에서 업무에 집중하느라 박민정 쪽 상황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는 알지 못했다. 박민정이 회사에 온 뒤로 쉬는 시간만 되면 에리가 그녀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온갖 살가운 말들을 늘어놓으며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밥 먹을 시간이야.”에리는 환하게 웃으며 각종 맛있는 음식들을 들고 왔는데 박민정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놀랐다.“여기서 먹는 거야?”그녀는 밖에서 먹으러 나갈 줄 알았다.“밖엔 사람이 너무 많잖아. 붐비는 데서 먹으면 불편하니까. 차라리 여기서 먹는 게 조용하고 좋지.”사무실 밖, 설인하와 동료들은 박민정을 불러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려 했지만 이 분위기를 보아하니 불가능해 보였다.진서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유 대표가 알게 되면 또 질투에 눈이 돌아가겠네요.”설인하가 피식 웃었다.“어쩔 수 없죠. 저라도 불안할 것 같은데요. 에리 정도면 솔직히 너무 경쟁력 있잖아요?”잘생겼지, 인기 폭발하는 대스타지, 심지어 유 대표보다 나이도 어리지.그 순간, 멀리 떨어진 회사에서 일하던 유남준이 별안간 재채기를 했다.진서연도 설인하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다가왔다.“같이 점심 먹을래요?”정민기였다.며칠 전, 박민정이 한마디 툭 던진 이후로 정민기는 진서연을 불러내 식사하고 영화 보고 산책하는 일이 잦아졌다.진서연은 기다렸다는 듯 설인하의 팔짱을 꼈다.“좋죠! 가요, 인하 씨!”설인하는 단박에 분위기를 눈치챘다. 이럴 때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건 최악이다.“전 됐어요. 오늘은 바깥 음식 안 땡껴서 이미 배달시켜 놨어요.”“뭐? 언제요? 저한텐 말도 없었잖아요!”진서연이 억울하다는 듯 볼을 부풀렸으나 설인하는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아, 미안요. 깜빡했네요.”“됐어요. 다음부턴 조심해요.”진서연은 심각한 척하며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설인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무실로 잽싸게 돌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면 몰래 나가서 먹으면 되니까.진서연은 결국 정민기와
정수미와 정호철이 돌아간 후, 윤소현 역시 박민정의 말을 전해 들었다.“엄마, 아저씨. 두 분은 어른이잖아요. 사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신 거예요?”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두 내 탓이야. 그때 악행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됐구나.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업보다.”그의 말을 듣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탓이 아니야. 모든 건 내 불찰이었어.”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과거의 오만함이었다.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던 그 시절.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눈에 노골적인 냉소를 띠었다.“이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민정이가 제 동생일 줄은.”정수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그게 친족이든 아니든, 우리는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어.”“그래.”정호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릎 위를 주먹으로 툭 쳤다.“난 평생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정씨 가문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음가짐도 변하고 말았지.”그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현아, 너도 이제 성격을 좀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해서는 안 돼. 너희 어머니와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앞으로는 너 혼자 가야 해.”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아저씨, 어릴 때는 그렇게 안 말씀하셨잖아요? 전 정씨 가문의 장녀니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설령 빼앗아서라도 말이에요.”정호철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수미도 더 이상 그녀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다시 물었다.“민정이가 저까지 감옥에 가라고 했어요? 설마 두 분도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정호철은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라. 예전 일은 내
정호철이 박민정 앞까지 걸어가더니 말없이 무릎을 꿇자 박민정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하는 거예요?”그때 정수미가 정호철의 곁으로 다가섰다.“민정아, 예전에 예찬이를 납치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내가 시킨 일이었어.”정호철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작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수미의 온몸이 떨렸다.정호철은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정아, 네게 부탁하고 싶구나. 이 사람을 용서해주겠니?”이 말을 꺼내는 데조차 정수미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사실 나야말로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어.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정호철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으니.”박민정은 이제야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조차 박예찬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쉽게 용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제가 용서하지 않으면요?”그때 유남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섰다.“정 대표님, 지금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민정이는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죠.”정수미의 눈가가 붉어졌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남준아, 민정아,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정수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죠. 당신과 정호철, 그리고 윤소현. 당시 당신들은 제 아들의
윤소현은 정수미와 정보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결심을 내렸다. 정보주가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었다.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수미는 직접 정보주를 공항까지 배웅했다.집으로 돌아오자, 윤소현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엄마, 우유 드세요.”“그래, 고맙구나.”정수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우유를 받아 들이켰다. 모두 마신 후, 그녀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 이모랑 함께 민정이를 만나고 왔어.”윤소현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이제 민정이가 엄마를 용서했나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나를 멀리해.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소현아, 엄마가 유언장을 수정했어. 유산의 절반을 민정이에게 주기로 했다. 네가 너무 마음 쓰진 않았으면 좋겠구나.”유산의 절반!윤소현의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대체 무슨 이유로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않는 그 애한테 재산의 절반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박민정이에게?윤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는 오히려 모든 유산을 동생에게 주실 줄 알았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내 딸인데.”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윤소현은 그 손길이 너무나 역겨웠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세상에서 정수미는 사라질 것이고 더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엄마, 정말 고마워요. 저 같은 양녀까지 친딸처럼 대해 주시다니요.”겉으로는 감격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정수미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자야겠다.”“네, 편히 쉬세요.”윤소현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가 사라지자 윤소현은 들고 있던 우유 잔을 깨끗이 씻어냈다.“엄마, 날 원망하지 마세요. 애초에 엄마가 쓸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정수미는 옆에서 몰래 정보주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있었다.“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정이랑 그 친구들을 데리고 나온 거야?”“이건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야, 언니.” 정보주는 여유롭게 말했다.“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야.”정수미도 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었다.정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민정이는 착한 아이야.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는 거지, 어떤 신분으로 다가갈지는 중요하지 않아.”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정보주는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언니, 제발 자기 몸 좀 더 신경 써.”갑작스러운 포옹에 정수미는 어색한 듯 몸을 살짝 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알았어, 근데 넌 왜 이래? 별일도 아닌데 자꾸 끌어안고.”“이렇게 해야 더 친밀한 느낌이 나잖아.”정보주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자, 가자. 민정이랑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먹자고.”“좋아.”정수미는 선뜻 동의했다.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니 왠지 자신도 한층 젊어진 기분이었다.다만, 그녀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진서연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정 대표님, 저희 회사에 투자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정수미는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요. 회사는 분명 더 성장할 거예요.”진서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 역시 놀라운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한편, 오늘 윤소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정보주가 변호사를
“설인하...”정보주는 그녀의 이름을 되뇌다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설지태가 혹시 네 할아버지 아니야?”그 이름이 나오자 설인하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할아버지를 아세요?”“알다마다! 예전에 네 할아버지께서 날 자주 불러 같이 놀곤 하셨어. 그때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정보주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운 듯 덧붙였다.“다만 안타깝게도 설씨 가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너도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겠구나?”그녀는 몇 마디 말만으로 순식간에 설인하와의 거리를 좁혔다.처음에는 진서연과 마찬가지로 설인하도 정보주를 경계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설인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다 지난 일이에요.”정보주는 깊은 연민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설씨 가문에 일이 생겼을 때 난 아직 힘이 없었어.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설인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운명이었어요. 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설인하가 친정 이야기를 꺼내는 걸 처음 보았다.그때, 정보주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설인하에게 내밀었다.“인하야, 무슨 일이든 나를 찾아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꼭 도와줄게.”설인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고맙습니다.”그녀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설인하는 정보주의 명함을 받아들고서 잃어버릴까봐 꽉 쥐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을 무렵, 정보주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아침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으면 내가 대접할게.”진서연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아직이요! 아침부터 짐 정리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그럼 가자.”정보주는 자연스럽게 박민정의 팔을 끼며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굴었다.“민정아, 너랑 서연이 그리고 인하가 좋아하는 음식 말해 봐. 이모가 다 사줄게.”박민정은 이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구는 사람을 처음 봤다. 게다가 그 사람이
“보스,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윤소현을 도와주고 보스를 험담하던 사람이 다름 아닌 보스 친이모라니요.”진서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그렇지만 그때는 이모도 보스가 누군지 몰랐으니 그냥 오해였던 거죠.”그녀가 말을 마칠 즈음,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정보주가 뛰어왔다.“민정아!”정보주는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분명 마흔이 넘었을 나이인데 서른 대 초반처럼 보였다.그녀는 또다시 박민정을 껴안으려 했지만 이번엔 박민정이 미리 대비하고 피했다.그러자 정보주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왜 이렇게 야박하게 구니? 이모가 한 번만 안아보자.”그녀는 애교까지 부렸다. 진서연은 대단한 인물로만 알고 있던 정보주가 박민정 앞에서 이러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아줌마, 그러지 마세요.”박민정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러자 정보주는 일부러 삐친 척하며 볼을 부풀렸다.“이모라고 불러주면 안 돼? ‘아줌마’는 너무 늙어 보이고 또 딱딱하잖아.”박민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이모,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모’라고 부르는 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그러자 정보주는 한결 기분이 풀린 듯했다.“그냥 너 보러 왔지.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나 혼자 진주시에 왔는데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잖아.”그녀는 말을 하면서 곁에 서 있는 진서연을 힐끗 바라보았다.“이 아가씨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너 친구?”미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은 진서연은 기분이 살짝 들떠 있었다.이때 박민정이 답했다.“진서연이라고 하고 제 친구이자 예전 직장 동료예요.”“오오~ 진서연, 이름도 참 귀엽네.”정보주는 처음 본 사이임에도 거리낌 없이 진서연의 손을 잡았다.“손금도 괜찮은데? 큰 부귀를 누릴 팔자야. 다만...”정보주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연애운이 좀 순탄치 않겠어.”“연애운이 안 좋다고요?”진서연은 바로 긴장했다.“아줌마, 제 연애운이 왜 안 좋다는 거예
당연히 기뻤다.한 집에서 정민기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감정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단둘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진서연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당연히 원하죠.”그러다 문득 설인하가 떠올랐다.“그런데 인하 씨는요?”자신이 떠난다고 해도 집에는 아직 설인하가 남아 있지 않은가.유남준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여러 채의 별장이 있어 공간은 충분했지만 설인하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건 내일 다시 고민해보기로 했다.그날 밤, 박민정은 몹시 부끄러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자신과 유남준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도저히 말로 옮길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머릿속엔 온통 그 장면이 떠오르며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박민정은 스스로를 다독였다.“민정아, 너 왜 이래? 정신 좀 차려!”어제 유남준과 입을 맞추었던 일도, 그 장면을 진서연에게 들킨 일도 떠올라 방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가 밖이 조용해진 걸 확인한 후에야 겨우 문을 열고 나왔다.그런데 거실에서 진서연이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박민정이 당황하며 물었다.“서연아, 뭐 하는 거야? 이사 가려는 거야?”혹시 어제 일 때문인가 싶어 더 난처해졌다.그녀는 황급히 해명했다.“어제 일은 그냥 오해야. 신경 쓰지 마. 제발 가지 마.”하지만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보스, 걱정 마세요. 이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뒷채로 옮기는 거예요. 민기 씨와 함께 살기로 했어요.”그때 설인하가 방에서 나왔다.“민정 씨, 저도 이사 가려고 해요. 괜찮죠?”박민정이 더 당황했다.“갑자기 왜요?”“방씨 집안에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려고요. 은정이를 자주 보러 가고 싶거든요.”며칠 동안 보지 못한 딸아이가 너무 그리웠다.마침 그날 아침, 유남준이 그녀를 찾아와 방성원의 저택 근처에 있는 별장을 하나 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박민정도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홍주영은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자를 보냈다.[할머니, 알겠어요. 다시 한 번 민재 씨와 만나 볼게요.]이 메시지를 보내자 할머니는 드디어 조용해졌다.홍주영은 휴대전화를 꺼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침내, 고씨 집안에 도착했다.유남우도 눈을 뜨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는데 아까 통화의 내용은 서로 언급하지 않았다.......한편, 박민정과 유남준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앞으로 계속 본가에서 지내게 되는 거예요?”지금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정이 들었다.“네가 기억을 되찾고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다면 그때 함께 살도록 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박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박민정은 먼저 박윤우를 재우기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아이가 잠이 들자 방을 나와 자기 방으로 가려 했다.그녀가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유남준이 마치 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깨울까 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유남준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같은 방에서 자자.”박민정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약간 더듬거렸다.“그,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뭐가 불편해?”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부부야. 나를 이렇게 계속 혼자 두는 게 괜찮아?”“혼자 자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박민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유남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넌 이제 정말 나한테서 마음이 떠났구나.”예
유남우는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차 안에는 이미 홍주영이 타고 있었고 유남우를 보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겁니까?”원래 유남우가 오늘 돌아온 이유는 고영란을 만나 고씨 집안과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그는 미간을 손으로 눌러 지그시 마사지하며 말했다. “굳이 어머니와 이야기할 필요 없어. 어머니는 항상 우리 형만 편들었어. 차라리 고현문을 찾아가는 게 낫겠지.”홍주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고영란은 유남우에게도 유남준과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럼에도 유남우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홍주영은 운전사에게 차를 고씨 집안으로 몰라고 지시했다.고현문은 성격이 괴팍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 과연 그가 유남우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유남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현문의 약점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쉬려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박민정과 그녀의 가족이 떠올랐다.본래 그 따뜻하고 화목한 풍경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는데 이제는 유남준에게 그 모든 것이 돌아갔다.유남준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굳이 자신의 여자까지 빼앗으려 하는가?그는 손을 꽉 쥐었고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마침 그때, 홍주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유남우가 자는 줄 알고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유남우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괜찮으니까.”“네.”홍주영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 할머니?”“민재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어. 주영아, 너도 이제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애를 다시 받아 줘야지.” 노인의 목소리는 엄격한 듯했지만 속뜻은 애원에 가까웠다.홍주영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답했다. “할머니, 저와 그 사람은 정말 맞지 않아요. 이제 그만 이으세요.”“너는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