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봤어. 기자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 것 같아.”“그러니까요. 민정 씨는 남우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간 것뿐인데 그렇게 엉뚱한 기사를 쓰다뇨...”윤소현이 말했다.이에 유남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사진에 뚜렷하게 찍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어? 민정이가 날 병원에 데려다줬다는 거 말이야.”윤소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홍 비서가 말해준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윤소현의 말을 듣고 유남우는 그녀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모르는 척했다.“알겠어. 그럼 나 이만 쉬러 갈게.”“네.”윤소현은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계속 찾아봤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말이다.하지만 윤소현과 달리 모함을 당한 박민정이 되려 꿀잠을 자고 있었다.박민정은 예전에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정신적 건강도 신체적 건강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은 이미 진서연에게 맡겨서 처리하라고 했으니 그저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들 때문에 슬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윤소현의 의도대로 되는 셈이니 말이다.다음 날, 박민정은 박민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박민호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었다.“누나, 윤석후와의 소송에서 이겼어!”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박민호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잘됐네. 그럼 이제부터 회사 잘 운영하도록 해.”“응, 알겠어.”박민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누나, 루머들은 신경 쓰지 마. 며칠 있으면 다 잠잠해질 거야.”박민정은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보다는 박민호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게 더 의외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괜찮아. 어차피 신경 안 쓸 거니까.”“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럼 어떡해요? 루머가 퍼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진서연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했다.박민정도 잠시 생각하다가 좋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이렇게 말했다.“일단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자.”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 사건이 터지자 마케팅 5팀 사람들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의 실적도 예전보다 못해졌고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는 듯했다.“민정 씨 말이에요. 우리 팀 매니저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임신 중인 데다가 인터넷에 안 좋은 여론도 너무 많잖아요. 앞으로 우리한테도 피해를 줄 거예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우릴 최현아한테서 구해준 사람이 누군데요. 그럼 최현아 같은 사람 아래에서 일하고 싶어요?”“맞아요, 돈만 벌 수 있으면 됐죠. 사람 성격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래요?”대부분 사람들은 박민정을 지지했다. 그녀가 직속 상사로 되고 나서 그들 월급이 몇 배나 올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다른 부서로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진서연이 이 사실을 박민정에게 전했다.박민정은 화내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서연아, 우리 회사 준비는 어떻게 돼?”“각종 서류는 다 준비됐고 장소도 임대했어요. 이제 출근만 하면 돼요.”진서연이 대답했다.“진지하게 우리만의 회사를 운영할 때가 된 거 같네.”박민정이 말했다.박민정은 호산 그룹 같은 큰 회사의 운영 방식을 파악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큰 회사를 갖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정말요? 너무 좋아요!”진서연은 많이 들떠 보였다.그녀는 해외에서 박민정이 작은 회사들을 운영하는 걸 도와줬었다. 그곳에서는 고위직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보통 직원이었기에 자주 스트레스를 받았다. 박민정 덕분에 버티고 있는 것이었지만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그래. 오늘 저녁은 팀 동료들이랑 먹어. 먹으면서 얘기하면 될 것 같아. 난 사직서 제출하러 갈 거라서.”박민정에게 놓고 말해서 사직은 꽤 간
진서연은 조금 의아해하며 말했다.“누구 차죠? 길을 막고 있는데...”순간, 차 창문이 내려지면서 유남준의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진서연은 유남우인 줄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유 대표님, 안녕하세요.”유남준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려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퇴사한 거야?”그는 진서연과 박민정의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박민정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요?”유남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세 시쯤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퇴근할 때 연락 안 할까 봐.”그리고는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진서연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진 비서님이시죠? 그동안 제 아내를 잘 돌봐줘서 고맙습니다.”예전 같으면 박민정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박민정이 행복해지면 유남준도 행복했기에 그녀가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진서연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은 유남우가 아니라 박민정의 남편이라는 걸 깨달았다.박민정도 의외라는 듯 유남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내가 아니라 전 부인이야, 서연아.”유남준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어, 전 부인.”미소를 짓는 유남준의 모습은 정말 잘생겨 보였다.“가자, 차에 타.”박민정은 진서연에게 함께 차에 타자고 손짓했다.진서연이 함께 타는 상황이었기에 유남준은 두 사람을 도원 별장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게다가 박민정도 혹시나 운전 기사가 운전을 하다가 다른 길로 새기라도 할까봐 계속 창밖을 내다봤으니 말이다.차에 올라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큰 봉지 하나를 꺼내 박민정과 진서연에게 건넸다.“차에서 배고프지 말라고 뭐 좀 많이 샀어. 다 네가 좋아하는 거야.”박민정은 먹을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지만 자제해 가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안 먹어도 돼요.”하지만 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서연은 이미 손을 내밀어 먹을 것을 한가득 챙겼다.“고마워요. 유윤우
“사직했어요.”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앞으로 아이는 시터에게 맡기고 저희는 낮에 열심히 일하면 돼요.”“정말이에요?”설인하의 눈이 빛났다.그녀는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정식으로 일을 시작하면 그녀도 방성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이혼 후, 아이를 방성원에게 뺏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그래요.”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설인하가 유남준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민정 씨, 저 사람은 왜 온 거예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무시하면 돼요.”“알겠어요.”일행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유남준도 따라 들어갔는데 물건을 내려놓은 뒤에도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박민정이 물었다.“언제 갈 거예요?”“오늘은 너무 늦었어.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갈게.”유남준이 뻔뻔하게 말했다.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안 돼요. 불편해요.”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설인하도 덧붙였다.“맞아요. 다 여자들인데 남자가 여기 머무는 건 좀 불편하지 않겠어요?”조금 전 유남준이 건네준 음식을 먹고 선물도 받은 진서연은 불편해진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유남준의 편을 들었다.“집도 꽤 크니 제일 위층에서 혼자 잔다면 저희에게 방해되지 않을 것 같네요.”설인하가 진서연을 흘겨보았다.‘얘는 왜 다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우리끼리는 뭉쳐야 한다는 거 모르나?’진서연이 자기편을 들어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유남준이었지만 그는 바로 답했다.“괜찮아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윤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갈게요.”그의 말에 설인하와 박민정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아버지가 아이를 보겠다는데 더 이상 뭐라 하겠는가.“그럼 그렇게 해요.”박민정은 요리사와 함께 저녁 준비하러 갔다.유남준도 이내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왜 따라왔어요?”“도와주려고 왔지. 임신 중이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유남준이 부드럽게 말했
박윤우가 두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물었다.“약속하신 거예요?”박민정이 마침 주방에서 나오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박윤우가 거짓말을 했다.“아빠가 이모들 부르라고 하셨어요.”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유남준이 있는 식사 자리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약간 어색해 보였다.그 와중에 박윤우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열심히 유남준에게 말을 걸며 그가 최근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면서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박민정은 그런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다.아이에게는 여전히 아빠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자신을 자책하며 앞으로는 아이가 아빠와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드디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민수아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하나둘씩 핑계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이제 거실에는 유남준, 박민정, 박윤우 세 사람만 남았다.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민정아, 이건 내가 모두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나중에 대신 전해줘. 난 먼저 가볼게.”유남준이 말하며 박윤우를 바라보았다.박윤우도 유남준의 시선을 바로 눈치챘다.유남준이 떠나려 하자 박윤우는 달려가 그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아빠, 왜 가요? 저랑 엄마가 화나게 했어요? 아니면 이제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박윤우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완벽한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유남준은 난처한 척하며 답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왜 가요? 왜 우리를 두고 가야 하는데요? 가족끼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박민정이 급히 다가와 말했다.“박윤우, 전에 얘기했잖아. 지금 우리 집에는 이모들이 함께 살고 있어서 불편하다고.”“뭐가 불편하다는 거예요? 집이 이렇게 큰데! 아빠랑 엄마는 한방 쓰면 되잖아요.”박윤우는 이제 더 이상 그런 핑계에 넘어가지 않았다.이 집은 평범한 집이
박민정이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윤우가 아니었다면 남준 씨를 머물게 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알아서 잘 행동하세요. 소파에서 주무세요.”유남준은 그녀가 지난번 일로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알았어. 소파에서 잘게.”그는 단번에 답했다.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가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그러나 유남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박민정의 방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낮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던 탓인지 박민정은 평소보다 깊이 잠들지 못했다.한밤중,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며 잠꼬대했다.“꺼져. 꺼지라고...”잠에 들지 못했던 유남준은 박민정의 소리를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다행히 방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유남준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민정아, 왜 그래?”박민정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살려줘, 살려줘...”악몽 속에서 박민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나같이 그녀를 괴롭히고 질책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박민정은 자신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유남준의 손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손길 같았고, 그녀는 간신히 잡은 유일한 구원의 손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나 여기 있어.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민정은 자신의 잠꼬대 소리에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자신 곁에 서서 손을 잡은 유남준을 발견한 그녀는 놀라 급히 손을 빼내면서 이전과 같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나가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여기서 잘게.”박민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밖에서 자기로 얘기 마쳤잖아요.”“바닥에 이불을 깔고 네 옆에서 잘게. 네가 다시 악몽이라도 꾸면 가까이에서 도와줄 수 있으니까.”유남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박민정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조금 전
박민정이 몸을 일으켜 앉더니 물었다.“그래서요?”더는 그녀를 속이고 싶지 않았던 유남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난 네가 나랑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너라면 나랑 꽤 괜찮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박민정의 가문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유남준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수많은 고민들을 해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박민호의 결혼식에서 약속을 어겨 상류층의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린 지금, 그는 자신의 속에 쌓인 모든 화를 박민정에게 쏟아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혹시라도 박민정이 괜한 오해를 할 것을 염려한 유남준이 뒤늦게 덧붙였다.“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거야.”갑작스러운 유남준의 고백에 박민정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네, 네. 알겠으니까 이제 자요.”“너는? 정말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하지만 유남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대답을 할 수 없었던 박민정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 유남준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뉴스 기사 같은 건 내가 다 잘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왜 안 물어요?”박민정은 일부러 유남준을 떠보듯 물었다.“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다 처리할 거야.”유남준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더는 말을 이어나갈 마음이 없어진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잠을 청했다.혼자 바닥에서 자게 된 유남준은 잠에 들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수시로 박민정에게 향했다. 잠에 든 여성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에서 울리자 유남준은 결국 참지 모사고 몸을 일으켜 박민정을 품에 안았다.박민정을 품에 안은 유남준은 그제야 자신을 괴롭히던 고민들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다.창밖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뜨거운 열기에 박민정은 잠에서 깨어났다. 요즘 일교차가
“가자, 윤우야. 엄마랑 세수해야지.”박민정은 박윤우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문밖에 서 있던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윙크를 날리더니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엄마는 아빠랑 같이 있어 주세요. 아빠는 매일 밖에서 혼자 가족도 없이 추고 배고프게 지내는데 불쌍하잖아요.”아이의 황당한 발언에 박민정은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 녀석은 어쩜 아빠만 그렇게 걱정하는 건지, 유남준이 그렇게 불쌍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전 세계 상위 0.1%의 부자인데, 이런 유남준이 불쌍하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죽어야 한다는 말일까?“그럼 윤우는 여기 있어. 엄마는 세수하러 갈 거야.”박민정은 박윤우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세수를 마치고 나와 보니 거실이 소란스러웠다. 궁금증이 일어 가까이 가보니 박윤우가 민수아 일행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오늘 아침에 꽤 일찍 일어나서 엄마 방으로 갔거든요. 가보니까 엄마랑 아빠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어요. 게다가 아빠는 옷도 안 입고 있었고요.”“뭐라고? 그다음엔?”민수아는 아이의 말에 눈을 반짝이더니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설인하도 그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듣고 있었다.그리고 아직 연애 경험이 없는 진서연은 달아오른 얼굴로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제가 엄마 아빠를 불렀거든요. 그랬더니 두 분 다 엄청 당황하신 것 같았어요. 저한테 뭘 들킬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처럼 막 제 눈을 피하더라니까요.”박윤우의 말은 듣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박민정은 자기 아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박윤우,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서 세수나 해. 아침 먹어야 하니까.”사실 박윤우는 이모들에게 엄마와 아빠의 재결합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렇게 하면 이모들도 유남준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박민정의 말이 끝나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자리
박민정은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뭘 봐야 하죠?”“지금은 몸과 정신을 잘 추슬러야 해. 내일 출근해서 회의 도중 졸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를 확고히 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그의 말을 듣자 박민정도 슬슬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쉬러 갈게요. 당신도 일찍 자요.”“응.”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유남준은 노트북을 꺼주고 휴대폰을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민정이가 지엔에 출근해. 혹시라도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지엔 그룹 안에도 유남준의 사람이 있었다....윤소현은 최근 들어 더욱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병원에서 몇 차례나 아이의 위독 통보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한편, 그녀는 아버지 윤석후를 회사로 들여보냈고 부녀가 함께 회사를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수미는 이미 박민정을 새 총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넘길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이 물건들은 전부 대표님이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정말 다 버리시겠습니까? 만약 대표님이 회복되신다면 찾으실 텐데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소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창고에 쌓아 두면 되겠네.”“하지만...”“하지만은 무슨. 지금 회사 관리는 내가 하고 있어. 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그녀는 단호히 말했고 그때 윤석후가 들어왔다.“딸, 내 사무실은 옆방으로 하면 되겠군.”그가 가리킨 곳은 정호철의 사무실이었다.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호철과 함께 고위 임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호철은 어제 박민정과 만났던 지라 상황을 잘 파악하
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좋아. 한번 해볼게.”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키워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정수미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응.”결정을 내린 후 박민정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연지석은 그녀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일을 맡아보겠다고 전했다.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오후에 병원으로 먼저 들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박민정은 모두 받아들였다.그녀는 유남준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왜 그래?”박민정은 그제야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유남준은 이 일이 제법 의외였다. 하지만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회사를 맡기려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박민정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놀라웠다.박민정은 덧붙였다.“지석이가 그러더라고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후, 유남준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연지석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정수미의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던 주주들까지 급히 병원을 찾을 정도였다.비서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작은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에 계신 분들은 모두 지엔 그룹의 주주들과 고위 임원들입니다. 대표님께서 미리 만나보라고 하셨어요.”정수미가 미리 이들을 불러놓은 듯했다. 나이 지긋한 주주들과 임원들은 그녀를 보고 모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작은 아가씨.”박민정이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수
정수미의 말이 끝나자 박민정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비서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박민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곧바로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는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자신이 없어요.”그러나 정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그냥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생각하면 돼.”“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차라리 윤소현 씨에게 맡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민정이 다시 말했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박민정이 선뜻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정수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에 동생에게 배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민정아, 내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솔직히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나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줄 수 없니?”“소현이는 회사를 경영할 사람이 아니야. 만약 그 애에게 회사를 넘긴다면 지엔 그룹은 끝장날 거야.”“그리고 생각해 봐. 넌 내 친딸이야. 당연히 네가 회사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수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자신의 회사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이 거대한 지엔 그룹을 책임질 수 있을까?“안 돼요. 저는 정말 감당할 수 없어요. 만약 소현 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차라리 전문적인 경영인을 고용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다시 설득했다.“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직접 경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를 도와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네가 나한테 보고하고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어때?”“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서 직접 나설 수도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친딸인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단다.”그 말에 박민정의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래.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거라. 생각이 정리되면 내게 연락해 줘.”그렇게 말한 후, 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
지엔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윤소현이 정수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사실 정수미의 건강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지엔 그룹은 당연히 윤소현의 것이 될 터였다.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병원에서 요양 중인 정수미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윤소현은 회사를 접수하는 한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하나씩 내몰았다. 특히 정수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오래된 간부들은 모두 그녀 손에 의해 잘렸다.며칠 전 유남준이 풀어준 정호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지엔 그룹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면서도 정호철는 그곳에 대한 미련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그는 요즘 병원 근처를 자주 찾아와 멀리서 조용히 정수미를 지켜보곤 했다.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그런 그를 정수미의 비서가 발견했다.“정 매니저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혹시 대표님을 뵈러 오셨나요?”순간 정호철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우연히.”그러나 그의 어설픈 변명이 정수미 곁에서 잔뼈가 굵은 비서를 속일 리 없었다.비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마침 지나가신 김에 들어가 보시죠. 대표님께서 병원에만 계시느라 몹시 지루해하셨거든요.”그렇게 정호철은 반쯤 떠밀리듯 정수미의 병실로 들어서게 되었다.병실에는 약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거북한 냄새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정수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대표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신 겁니까?”정호철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저 평소처럼 앓다가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정수미는 그런 그의 반응이 오히려 우습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이전부터 이랬어. 별일 아니야.”그러면서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지금 시간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
박민정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정수미는 드디어 박민정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었고 뜨거운 촉감은 그녀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그리고 어느새 누가가 빨개진 채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민정아, 민정아...”“네, 저 여기 있어요.”“내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 민정이구나. 난 네가 또, 또 사라지는 줄 알았어.”정수미는 아주 기나긴 악몽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 딸을 데려갔고, 또 나중에 박민정을 만났는데 꿈속의 그녀는 절대 정수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차갑게 말했다.박민정은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유남준이 마침 마실 물을 가져왔고 박민정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먹여줬다.의사도 와서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해줬다.모든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병실 밖에서 그들에게 결과를 말해줬다.길연서도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정 대표님께서 혹시 깨어나셨나요?” 그녀가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깨어나셨어요.”길연서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지금 당장 큰 아가씨한테 알릴게요.”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의사가 길연서 더러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전했다.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정수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귓가에 무언가 말해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다시 핸드폰을 끄더니 이후에도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길연서의 부름에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가 한껏 기운 없는 목소리로 박민정을 불렀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그러자 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정아, 괜히 나 때문에 온 밤 고생했어.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박민정은 가볍게 대답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자마자 정수미는 갑자기 침대에 털썩하고 쓰러지더니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넘었으나 정수미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길연서는 야식을 배달시켰다. “두 분은 이것 좀 드시고 가서 쉬어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윤소현은 진작에 졸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녀의 말에 음식을 힐끗 보더니 손을 저으며 답했다.“저는 안 먹을래요. 시간도 늦었고 지금 먹으면 살도 찌고 건강에도 안 좋아요.”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그럼 전 이만 쉬러 갈 테니까 제 동생이랑 지키고 있어요. 혼자서 지키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사실 윤소현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졸리지도 않았고 이따 유남준이 오기에 그를 기다려야 했다.윤소현이 떠나가자마자 길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20년 넘게 키운 수양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지금껏 헤어져 있었던 친딸보다 더 정이 없는지, 길연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둘째 아가씨, 아니면 저기 간병인 침대에서 잠깐만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그러나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안 졸려요.”“그럼 뭐라도 좀 드세요.”박민정은 그녀의 말대로 음식을 조금 가져와서 먹은 뒤 계속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찾아왔는데 가녀린 몸으로 정수미 곁을 지키고 있는 박미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민정아.”박민정은 지금 유남준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떨렸다.“왔어요?”원래 유남준에게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아이들을 재우고 이쪽으로 달려왔다.길연서는 정수미의 사위가 온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유 대표님.”“안녕하세요.”“그럼 말씀 나누세요.”굳이 부부 사이에 끼기 싫어 길연서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원래 그녀를 불러세우려고 했으나 한발 늦은 것 같았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이때, 박민정이 어색함을 깨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시간도 늦었고 내일 출근해야 하
어쨌든 정수미는 박민정의 친엄마다.길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나서야 안심되었다.그러나 윤소현은 계획이 틀어지자 박민정에게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민정아, 설마 엄마 유산을 네가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여기 남겠다는 건 아니지?”박민정은 원래 그녀와 입씨름하기 싫어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 자극하는 윤소현을 더는 봐주기 힘들어 이참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맞아요. 정 대표님은 제 친엄마인데 당연히 제가 유산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더구나 유언장에도 제가 유산 절반을 상속받는다고 되어있고요.”박민정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정 대표님께서 진짜 돌아가셨는데 제가 없는 틈에 누군가가 유언장에 손을 대면 어떡해요?”“너!”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높게 들자 옆에 서 있던 정민기가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내팽개쳤다.그러다가 윤소현은 뒤로 몇 발짝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박민정, 엄마가 죽길 바라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윤소현이 불같은 화를 냈지만 박민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수술실 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정수미가 밀려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의사한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그러자 의사가 대뜸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혹시 환자분께서 어제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뭘 드셨을까요?”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늘 드시던 음식이었어요.”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한 분이 대표로 가서 혹시 환자분이 먹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싸 오세요.”의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길연서는 곧바로 집안 도우미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윤소현이 그녀를 말렸다.“매일 먹다 남긴 음식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갖고 와요? 의사 선생님,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저렇게 된 걸까요?”“일단 응급처치해서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여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