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이렇게 어린 두 아이가 벌써 자기 일을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러자 박윤우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엄마. 나랑 형은 엄마 아들이니까 엄마를 보호해야 해.”이 말을 듣고 박민정은 웃었다.입구에서 세 여자는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아이를 낳는 게 무서웠는데 예찬이와 윤우를 보니 아이를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진서연이 말했다. 설인하는 자신의 딸을 안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정말 천사 같은 아이들이에요. 내 딸도 빨리 컸으면 좋겠어요.”민수아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박민정과 윤우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다들 왜 왔어?”박민정은 그제야 그녀들을 보고 들어와서 앉으라고 했다.“그냥 윤우가 왜 보스를 방으로 몰래 데려갔는지 궁금해서요.”진서연이 대답했다.다들 이렇게 철이 들고 착한 아들을 둔 박민정을 부러워했다.소문은 더 퍼져갔다. 전에 윤소현은 많은 사람을 매수해 박민정을 욕하라고 시켰는데 도리어 자기의 발등을 찢는 셈으로 되었다. 점점 많은 사람이 이 일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윤우의 팬은 만만치 않았다. 각종 헛소문의 기사 아래 댓글을 달았다.윤소현은 너무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진작 알았더라면 그녀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헛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서 도리어 역작용을 했다. 하필이면 이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소현 씨, 우리 회사의 많은 계정이 고소당했어요.”“고소당했다고요? 누가 한 건데요?”“일부분은 박민정이 했고요. 그리고...”비서는 의아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IM 그룹 홍보팀인 것 같아요.”“IM 그룹이 우리를 왜 고소하는데요?”윤소현은 박민정이 고소하는 것은 전혀 무섭지 않지만, IM 그룹은 무서웠다. 유씨 가문의 적지 않은 사업이 IM 그룹에 넘어갔고 윤씨 가문도 크게 당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속 연예인 에리와 관련돼서 그런
유남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봤어. 기자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 것 같아.”“그러니까요. 민정 씨는 남우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간 것뿐인데 그렇게 엉뚱한 기사를 쓰다뇨...”윤소현이 말했다.이에 유남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사진에 뚜렷하게 찍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어? 민정이가 날 병원에 데려다줬다는 거 말이야.”윤소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홍 비서가 말해준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윤소현의 말을 듣고 유남우는 그녀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모르는 척했다.“알겠어. 그럼 나 이만 쉬러 갈게.”“네.”윤소현은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계속 찾아봤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말이다.하지만 윤소현과 달리 모함을 당한 박민정이 되려 꿀잠을 자고 있었다.박민정은 예전에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정신적 건강도 신체적 건강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은 이미 진서연에게 맡겨서 처리하라고 했으니 그저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들 때문에 슬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윤소현의 의도대로 되는 셈이니 말이다.다음 날, 박민정은 박민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박민호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었다.“누나, 윤석후와의 소송에서 이겼어!”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박민호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잘됐네. 그럼 이제부터 회사 잘 운영하도록 해.”“응, 알겠어.”박민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누나, 루머들은 신경 쓰지 마. 며칠 있으면 다 잠잠해질 거야.”박민정은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보다는 박민호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게 더 의외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괜찮아. 어차피 신경 안 쓸 거니까.”“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럼 어떡해요? 루머가 퍼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진서연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했다.박민정도 잠시 생각하다가 좋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이렇게 말했다.“일단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자.”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 사건이 터지자 마케팅 5팀 사람들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의 실적도 예전보다 못해졌고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는 듯했다.“민정 씨 말이에요. 우리 팀 매니저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임신 중인 데다가 인터넷에 안 좋은 여론도 너무 많잖아요. 앞으로 우리한테도 피해를 줄 거예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우릴 최현아한테서 구해준 사람이 누군데요. 그럼 최현아 같은 사람 아래에서 일하고 싶어요?”“맞아요, 돈만 벌 수 있으면 됐죠. 사람 성격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래요?”대부분 사람들은 박민정을 지지했다. 그녀가 직속 상사로 되고 나서 그들 월급이 몇 배나 올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다른 부서로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진서연이 이 사실을 박민정에게 전했다.박민정은 화내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서연아, 우리 회사 준비는 어떻게 돼?”“각종 서류는 다 준비됐고 장소도 임대했어요. 이제 출근만 하면 돼요.”진서연이 대답했다.“진지하게 우리만의 회사를 운영할 때가 된 거 같네.”박민정이 말했다.박민정은 호산 그룹 같은 큰 회사의 운영 방식을 파악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큰 회사를 갖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정말요? 너무 좋아요!”진서연은 많이 들떠 보였다.그녀는 해외에서 박민정이 작은 회사들을 운영하는 걸 도와줬었다. 그곳에서는 고위직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보통 직원이었기에 자주 스트레스를 받았다. 박민정 덕분에 버티고 있는 것이었지만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그래. 오늘 저녁은 팀 동료들이랑 먹어. 먹으면서 얘기하면 될 것 같아. 난 사직서 제출하러 갈 거라서.”박민정에게 놓고 말해서 사직은 꽤 간
진서연은 조금 의아해하며 말했다.“누구 차죠? 길을 막고 있는데...”순간, 차 창문이 내려지면서 유남준의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진서연은 유남우인 줄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유 대표님, 안녕하세요.”유남준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려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퇴사한 거야?”그는 진서연과 박민정의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박민정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요?”유남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세 시쯤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퇴근할 때 연락 안 할까 봐.”그리고는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진서연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진 비서님이시죠? 그동안 제 아내를 잘 돌봐줘서 고맙습니다.”예전 같으면 박민정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박민정이 행복해지면 유남준도 행복했기에 그녀가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진서연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은 유남우가 아니라 박민정의 남편이라는 걸 깨달았다.박민정도 의외라는 듯 유남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내가 아니라 전 부인이야, 서연아.”유남준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어, 전 부인.”미소를 짓는 유남준의 모습은 정말 잘생겨 보였다.“가자, 차에 타.”박민정은 진서연에게 함께 차에 타자고 손짓했다.진서연이 함께 타는 상황이었기에 유남준은 두 사람을 도원 별장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게다가 박민정도 혹시나 운전 기사가 운전을 하다가 다른 길로 새기라도 할까봐 계속 창밖을 내다봤으니 말이다.차에 올라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큰 봉지 하나를 꺼내 박민정과 진서연에게 건넸다.“차에서 배고프지 말라고 뭐 좀 많이 샀어. 다 네가 좋아하는 거야.”박민정은 먹을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지만 자제해 가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안 먹어도 돼요.”하지만 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서연은 이미 손을 내밀어 먹을 것을 한가득 챙겼다.“고마워요. 유윤우
“사직했어요.”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앞으로 아이는 시터에게 맡기고 저희는 낮에 열심히 일하면 돼요.”“정말이에요?”설인하의 눈이 빛났다.그녀는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정식으로 일을 시작하면 그녀도 방성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이혼 후, 아이를 방성원에게 뺏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그래요.”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설인하가 유남준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민정 씨, 저 사람은 왜 온 거예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무시하면 돼요.”“알겠어요.”일행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유남준도 따라 들어갔는데 물건을 내려놓은 뒤에도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박민정이 물었다.“언제 갈 거예요?”“오늘은 너무 늦었어.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갈게.”유남준이 뻔뻔하게 말했다.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안 돼요. 불편해요.”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설인하도 덧붙였다.“맞아요. 다 여자들인데 남자가 여기 머무는 건 좀 불편하지 않겠어요?”조금 전 유남준이 건네준 음식을 먹고 선물도 받은 진서연은 불편해진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유남준의 편을 들었다.“집도 꽤 크니 제일 위층에서 혼자 잔다면 저희에게 방해되지 않을 것 같네요.”설인하가 진서연을 흘겨보았다.‘얘는 왜 다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우리끼리는 뭉쳐야 한다는 거 모르나?’진서연이 자기편을 들어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유남준이었지만 그는 바로 답했다.“괜찮아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윤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갈게요.”그의 말에 설인하와 박민정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아버지가 아이를 보겠다는데 더 이상 뭐라 하겠는가.“그럼 그렇게 해요.”박민정은 요리사와 함께 저녁 준비하러 갔다.유남준도 이내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왜 따라왔어요?”“도와주려고 왔지. 임신 중이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유남준이 부드럽게 말했
박윤우가 두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물었다.“약속하신 거예요?”박민정이 마침 주방에서 나오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박윤우가 거짓말을 했다.“아빠가 이모들 부르라고 하셨어요.”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유남준이 있는 식사 자리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약간 어색해 보였다.그 와중에 박윤우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열심히 유남준에게 말을 걸며 그가 최근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면서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박민정은 그런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다.아이에게는 여전히 아빠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자신을 자책하며 앞으로는 아이가 아빠와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드디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민수아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하나둘씩 핑계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이제 거실에는 유남준, 박민정, 박윤우 세 사람만 남았다.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민정아, 이건 내가 모두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나중에 대신 전해줘. 난 먼저 가볼게.”유남준이 말하며 박윤우를 바라보았다.박윤우도 유남준의 시선을 바로 눈치챘다.유남준이 떠나려 하자 박윤우는 달려가 그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아빠, 왜 가요? 저랑 엄마가 화나게 했어요? 아니면 이제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박윤우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완벽한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유남준은 난처한 척하며 답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왜 가요? 왜 우리를 두고 가야 하는데요? 가족끼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박민정이 급히 다가와 말했다.“박윤우, 전에 얘기했잖아. 지금 우리 집에는 이모들이 함께 살고 있어서 불편하다고.”“뭐가 불편하다는 거예요? 집이 이렇게 큰데! 아빠랑 엄마는 한방 쓰면 되잖아요.”박윤우는 이제 더 이상 그런 핑계에 넘어가지 않았다.이 집은 평범한 집이
박민정이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윤우가 아니었다면 남준 씨를 머물게 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알아서 잘 행동하세요. 소파에서 주무세요.”유남준은 그녀가 지난번 일로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알았어. 소파에서 잘게.”그는 단번에 답했다.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가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그러나 유남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박민정의 방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낮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던 탓인지 박민정은 평소보다 깊이 잠들지 못했다.한밤중,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며 잠꼬대했다.“꺼져. 꺼지라고...”잠에 들지 못했던 유남준은 박민정의 소리를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다행히 방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유남준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민정아, 왜 그래?”박민정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살려줘, 살려줘...”악몽 속에서 박민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나같이 그녀를 괴롭히고 질책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박민정은 자신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유남준의 손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손길 같았고, 그녀는 간신히 잡은 유일한 구원의 손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나 여기 있어.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민정은 자신의 잠꼬대 소리에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자신 곁에 서서 손을 잡은 유남준을 발견한 그녀는 놀라 급히 손을 빼내면서 이전과 같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나가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여기서 잘게.”박민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밖에서 자기로 얘기 마쳤잖아요.”“바닥에 이불을 깔고 네 옆에서 잘게. 네가 다시 악몽이라도 꾸면 가까이에서 도와줄 수 있으니까.”유남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박민정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조금 전
박민정이 몸을 일으켜 앉더니 물었다.“그래서요?”더는 그녀를 속이고 싶지 않았던 유남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난 네가 나랑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너라면 나랑 꽤 괜찮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박민정의 가문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유남준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수많은 고민들을 해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박민호의 결혼식에서 약속을 어겨 상류층의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린 지금, 그는 자신의 속에 쌓인 모든 화를 박민정에게 쏟아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혹시라도 박민정이 괜한 오해를 할 것을 염려한 유남준이 뒤늦게 덧붙였다.“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거야.”갑작스러운 유남준의 고백에 박민정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네, 네. 알겠으니까 이제 자요.”“너는? 정말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하지만 유남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대답을 할 수 없었던 박민정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 유남준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뉴스 기사 같은 건 내가 다 잘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왜 안 물어요?”박민정은 일부러 유남준을 떠보듯 물었다.“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다 처리할 거야.”유남준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더는 말을 이어나갈 마음이 없어진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잠을 청했다.혼자 바닥에서 자게 된 유남준은 잠에 들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수시로 박민정에게 향했다. 잠에 든 여성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에서 울리자 유남준은 결국 참지 모사고 몸을 일으켜 박민정을 품에 안았다.박민정을 품에 안은 유남준은 그제야 자신을 괴롭히던 고민들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다.창밖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뜨거운 열기에 박민정은 잠에서 깨어났다. 요즘 일교차가
“안 중요하다고요?”진서연은 더욱 서러워졌다.“어디가 안 중요해요? 난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당장 대답해 봐요. 날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체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그녀의 손에 쥐어진 정민기의 옷이 구겨질 정도였다. 정민기는 눈빛을 잠시 깔며 살짝 짜증이 섞인 기색을 보였다.“안 좋아해요.”그는 한때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진서연 역시 과거의 약혼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가 다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진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가득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정말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이제 나가줄래요?”정민기의 냉정한 한마디에 진서연은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왜 처음에 나랑 연애를 시작했어요?”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 연애를 하면 꼭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요? 사귀기 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우리는 안 맞아요.”정민기는 단호하게 말을 끝맺고 방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에리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나로는 부족해요?”“네?”그 한마디에 진서연의 인내심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정민기에게 날렸다.사실, 정민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꽂혔다.“그, 그게... 왜 안 피한 거예요?”그녀의 주먹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손을 내린 순간, 정민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로 짙푸른 멍이 퍼지는 것이 보였다.정민기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제 됐어요?”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진서연은 더 이상 버텨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래요. 이제 알겠어요. 지금 당장 떠
“보스, 역시 대기업은 우리 같은 작은 회사와는 차원이 다르네요. 아까 대단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진서연이 감탄하며 말했고 박민정도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그러게, 앞으로 배울 것도 많겠어.”“네, 근데 오늘 윤소현이 망신당한 건 정말 통쾌했어요.”진서연은 윤소현의 잘난 체하는 태도가 정말 싫었다.박민정은 그녀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후, 오늘 회의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윤소현이 며칠 사이에 회사에 단행한 개혁이 예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회사의 모든 인사 배치가 그녀의 손을 거쳤다.이를 본 박민정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정리했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진서연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서연아, 이제 그만 쉬어.”“저 가기 싫어요.”진서연은 자신이 머무는 곳을 떠올리는 순간, 정민기와 함께 있는 것이 떠올라 가기가 싫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는데 오직 일에 몰두할 때만이 모든 걸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그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정민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보스, 저 요즘 민기 씨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요.”진서연이 훌쩍이며 말했다.“울고 싶을 정도로 속이 막막해요.”박민정이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며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괜찮아. 언젠가 너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하지만 그 말에 진서연은 오히려 더 속상해졌다.“보스도 민기 씨가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죠?”박민정이 순간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그런데도 절 좋아했다면 왜 저랑 헤어졌겠어요?”진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기 씨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게 맞는 것 같아요.”박민정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실연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한편 옆에서 조용히 있던 유남준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벌써 밤 11시였다.‘얘는 상황 파악도
“소현아, 무슨 일이니?”정수미는 윤소현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윤소현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엄마, 왜 민정이를 회사에 들이신 거예요? 게다가 회사의 모든 업무를 민정이에게 맡기다니요?”“그야 당연한 일이지. 앞으로 민정이가 회사를 맡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잘 도와주도록 해라.”정수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소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장 따지고 싶었지만 다행히 윤석후가 그녀를 말렸다.윤소현은 간신히 감정을 다잡고 목소리를 낮췄다.“엄마, 저도 이해해요. 민정이가 엄마의 친딸이니 회사를 물려주시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지금 민정이는 회사 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잖아요. 이런 식으로 대표 자리에 앉으면 직원들이 납득하지 않을 거예요.”“그래서 배우게 하려고 회사에 들인 거다. 걱정 마라, 이미 내부 직원들에게 다 얘기해 뒀으니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거야.”정수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네가 못마땅한 건 아니겠지?”그 말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겨우 입을 떼었다.“그, 그럴 리가요.”“그럼 됐다. 이제 내 몸도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앞으로 민정이를 잘 도와줘라.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는데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목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저 늙은 여우, 너무하잖아! 이제 친딸이 생겼다고 나 같은 양녀 따위는 완전히 내팽개치는 거야? 게다가 내가 그 애를 돕게 만들다니! 웃기고 있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지 그래?”윤석후가 그녀를 얼른 끌어당겨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소현아, 진정해. 정수미 저 늙은 여자가 얼마나 더 살겠냐?”윤석후가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여태껏 회사 사정을 전혀 몰랐던 애송이가 하루아침에 대표가 됐다고 해 봐. 정수미가 죽고 나면 우리가 그 애를 쥐락펴락하는 건 식은 죽 먹기
“그래.”윤석후는 윤소현을 따라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막상 내려가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수많은 고위 임원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은 다름 아닌 박민정이었다.그녀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정수미와 꼭 닮아 있었다.정호철은 그녀를 보자마자 마치 젊은 시절의 정수미를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대표님.”그가 공손히 인사하자 뒤따르던 임원들도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대표님”이에 박민정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별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이제 막 오셨으니 우선 위층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정호철이 말했다.“좋아요.”박민정은 정호철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그녀는 예상치 못한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윤소현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윤소현은 박민정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길을 막아섰다.“박민정,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이어 그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정호철을 노려보았다.“아저씨! 설마 이 사람이 아저씨가 말한 신임 대표라는 거예요?”“그래요.” 정호철이 단호하게 대답했고 순간 윤소현의 머릿속은 텅 빈 듯 멍해졌다.“말도 안 돼! 겨우 저런 보잘것없는 촌뜨기가 무슨 자격으로 회사를 맡아요?”그러나 이번에도 정호철은 단호했고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작은 아가씨는 정 대표님의 친딸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 대표님께서 직접 이분을 지엔의 대표로 임명하셨습니다.”이 두 마디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윤소현의 가슴을 짓눌렀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박민정을 노려보았다.“박민정,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왜 엄마가 너한테 회사를 맡긴 거지?”하지만 박민정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할 뿐이었다.그러나 윤소현은 포
박민정은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뭘 봐야 하죠?”“지금은 몸과 정신을 잘 추슬러야 해. 내일 출근해서 회의 도중 졸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를 확고히 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그의 말을 듣자 박민정도 슬슬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쉬러 갈게요. 당신도 일찍 자요.”“응.”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유남준은 노트북을 꺼주고 휴대폰을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민정이가 지엔에 출근해. 혹시라도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지엔 그룹 안에도 유남준의 사람이 있었다....윤소현은 최근 들어 더욱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병원에서 몇 차례나 아이의 위독 통보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한편, 그녀는 아버지 윤석후를 회사로 들여보냈고 부녀가 함께 회사를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수미는 이미 박민정을 새 총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넘길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이 물건들은 전부 대표님이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정말 다 버리시겠습니까? 만약 대표님이 회복되신다면 찾으실 텐데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소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창고에 쌓아 두면 되겠네.”“하지만...”“하지만은 무슨. 지금 회사 관리는 내가 하고 있어. 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그녀는 단호히 말했고 그때 윤석후가 들어왔다.“딸, 내 사무실은 옆방으로 하면 되겠군.”그가 가리킨 곳은 정호철의 사무실이었다.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호철과 함께 고위 임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호철은 어제 박민정과 만났던 지라 상황을 잘 파악하
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좋아. 한번 해볼게.”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키워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정수미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응.”결정을 내린 후 박민정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연지석은 그녀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일을 맡아보겠다고 전했다.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오후에 병원으로 먼저 들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박민정은 모두 받아들였다.그녀는 유남준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왜 그래?”박민정은 그제야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유남준은 이 일이 제법 의외였다. 하지만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회사를 맡기려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박민정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놀라웠다.박민정은 덧붙였다.“지석이가 그러더라고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후, 유남준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연지석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정수미의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던 주주들까지 급히 병원을 찾을 정도였다.비서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작은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에 계신 분들은 모두 지엔 그룹의 주주들과 고위 임원들입니다. 대표님께서 미리 만나보라고 하셨어요.”정수미가 미리 이들을 불러놓은 듯했다. 나이 지긋한 주주들과 임원들은 그녀를 보고 모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작은 아가씨.”박민정이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수
정수미의 말이 끝나자 박민정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비서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박민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곧바로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는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자신이 없어요.”그러나 정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그냥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생각하면 돼.”“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차라리 윤소현 씨에게 맡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민정이 다시 말했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박민정이 선뜻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정수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에 동생에게 배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민정아, 내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솔직히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나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줄 수 없니?”“소현이는 회사를 경영할 사람이 아니야. 만약 그 애에게 회사를 넘긴다면 지엔 그룹은 끝장날 거야.”“그리고 생각해 봐. 넌 내 친딸이야. 당연히 네가 회사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수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자신의 회사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이 거대한 지엔 그룹을 책임질 수 있을까?“안 돼요. 저는 정말 감당할 수 없어요. 만약 소현 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차라리 전문적인 경영인을 고용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다시 설득했다.“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직접 경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를 도와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네가 나한테 보고하고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어때?”“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서 직접 나설 수도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친딸인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단다.”그 말에 박민정의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래.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거라. 생각이 정리되면 내게 연락해 줘.”그렇게 말한 후, 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
지엔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윤소현이 정수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사실 정수미의 건강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지엔 그룹은 당연히 윤소현의 것이 될 터였다.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병원에서 요양 중인 정수미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윤소현은 회사를 접수하는 한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하나씩 내몰았다. 특히 정수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오래된 간부들은 모두 그녀 손에 의해 잘렸다.며칠 전 유남준이 풀어준 정호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지엔 그룹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면서도 정호철는 그곳에 대한 미련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그는 요즘 병원 근처를 자주 찾아와 멀리서 조용히 정수미를 지켜보곤 했다.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그런 그를 정수미의 비서가 발견했다.“정 매니저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혹시 대표님을 뵈러 오셨나요?”순간 정호철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우연히.”그러나 그의 어설픈 변명이 정수미 곁에서 잔뼈가 굵은 비서를 속일 리 없었다.비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마침 지나가신 김에 들어가 보시죠. 대표님께서 병원에만 계시느라 몹시 지루해하셨거든요.”그렇게 정호철은 반쯤 떠밀리듯 정수미의 병실로 들어서게 되었다.병실에는 약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거북한 냄새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정수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대표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신 겁니까?”정호철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저 평소처럼 앓다가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정수미는 그런 그의 반응이 오히려 우습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이전부터 이랬어. 별일 아니야.”그러면서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지금 시간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