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사직했어요.”박민정이 말을 이었다.“앞으로 아이는 시터에게 맡기고 저희는 낮에 열심히 일하면 돼요.”“정말이에요?”설인하의 눈이 빛났다.그녀는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정식으로 일을 시작하면 그녀도 방성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이혼 후, 아이를 방성원에게 뺏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그래요.”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설인하가 유남준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민정 씨, 저 사람은 왜 온 거예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무시하면 돼요.”“알겠어요.”일행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유남준도 따라 들어갔는데 물건을 내려놓은 뒤에도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박민정이 물었다.“언제 갈 거예요?”“오늘은 너무 늦었어.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갈게.”유남준이 뻔뻔하게 말했다.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안 돼요. 불편해요.”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설인하도 덧붙였다.“맞아요. 다 여자들인데 남자가 여기 머무는 건 좀 불편하지 않겠어요?”조금 전 유남준이 건네준 음식을 먹고 선물도 받은 진서연은 불편해진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유남준의 편을 들었다.“집도 꽤 크니 제일 위층에서 혼자 잔다면 저희에게 방해되지 않을 것 같네요.”설인하가 진서연을 흘겨보았다.‘얘는 왜 다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우리끼리는 뭉쳐야 한다는 거 모르나?’진서연이 자기편을 들어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유남준이었지만 그는 바로 답했다.“괜찮아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윤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갈게요.”그의 말에 설인하와 박민정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아버지가 아이를 보겠다는데 더 이상 뭐라 하겠는가.“그럼 그렇게 해요.”박민정은 요리사와 함께 저녁 준비하러 갔다.유남준도 이내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왜 따라왔어요?”“도와주려고 왔지. 임신 중이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유남준이 부드럽게 말했
진서연은 조금 의아해하며 말했다.“누구 차죠? 길을 막고 있는데...”순간, 차 창문이 내려지면서 유남준의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진서연은 유남우인 줄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유 대표님, 안녕하세요.”유남준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려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퇴사한 거야?”그는 진서연과 박민정의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박민정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요?”유남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세 시쯤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퇴근할 때 연락 안 할까 봐.”그리고는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진서연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진 비서님이시죠? 그동안 제 아내를 잘 돌봐줘서 고맙습니다.”예전 같으면 박민정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박민정이 행복해지면 유남준도 행복했기에 그녀가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진서연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은 유남우가 아니라 박민정의 남편이라는 걸 깨달았다.박민정도 의외라는 듯 유남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아내가 아니라 전 부인이야, 서연아.”유남준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어, 전 부인.”미소를 짓는 유남준의 모습은 정말 잘생겨 보였다.“가자, 차에 타.”박민정은 진서연에게 함께 차에 타자고 손짓했다.진서연이 함께 타는 상황이었기에 유남준은 두 사람을 도원 별장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게다가 박민정도 혹시나 운전 기사가 운전을 하다가 다른 길로 새기라도 할까봐 계속 창밖을 내다봤으니 말이다.차에 올라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큰 봉지 하나를 꺼내 박민정과 진서연에게 건넸다.“차에서 배고프지 말라고 뭐 좀 많이 샀어. 다 네가 좋아하는 거야.”박민정은 먹을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지만 자제해 가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안 먹어도 돼요.”하지만 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서연은 이미 손을 내밀어 먹을 것을 한가득 챙겼다.“고마워요. 유윤우
“그럼 어떡해요? 루머가 퍼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진서연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했다.박민정도 잠시 생각하다가 좋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이렇게 말했다.“일단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자.”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 사건이 터지자 마케팅 5팀 사람들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의 실적도 예전보다 못해졌고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는 듯했다.“민정 씨 말이에요. 우리 팀 매니저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임신 중인 데다가 인터넷에 안 좋은 여론도 너무 많잖아요. 앞으로 우리한테도 피해를 줄 거예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우릴 최현아한테서 구해준 사람이 누군데요. 그럼 최현아 같은 사람 아래에서 일하고 싶어요?”“맞아요, 돈만 벌 수 있으면 됐죠. 사람 성격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래요?”대부분 사람들은 박민정을 지지했다. 그녀가 직속 상사로 되고 나서 그들 월급이 몇 배나 올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다른 부서로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진서연이 이 사실을 박민정에게 전했다.박민정은 화내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서연아, 우리 회사 준비는 어떻게 돼?”“각종 서류는 다 준비됐고 장소도 임대했어요. 이제 출근만 하면 돼요.”진서연이 대답했다.“진지하게 우리만의 회사를 운영할 때가 된 거 같네.”박민정이 말했다.박민정은 호산 그룹 같은 큰 회사의 운영 방식을 파악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큰 회사를 갖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정말요? 너무 좋아요!”진서연은 많이 들떠 보였다.그녀는 해외에서 박민정이 작은 회사들을 운영하는 걸 도와줬었다. 그곳에서는 고위직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보통 직원이었기에 자주 스트레스를 받았다. 박민정 덕분에 버티고 있는 것이었지만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그래. 오늘 저녁은 팀 동료들이랑 먹어. 먹으면서 얘기하면 될 것 같아. 난 사직서 제출하러 갈 거라서.”박민정에게 놓고 말해서 사직은 꽤 간
유남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봤어. 기자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 것 같아.”“그러니까요. 민정 씨는 남우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간 것뿐인데 그렇게 엉뚱한 기사를 쓰다뇨...”윤소현이 말했다.이에 유남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사진에 뚜렷하게 찍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어? 민정이가 날 병원에 데려다줬다는 거 말이야.”윤소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홍 비서가 말해준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윤소현의 말을 듣고 유남우는 그녀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모르는 척했다.“알겠어. 그럼 나 이만 쉬러 갈게.”“네.”윤소현은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계속 찾아봤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말이다.하지만 윤소현과 달리 모함을 당한 박민정이 되려 꿀잠을 자고 있었다.박민정은 예전에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정신적 건강도 신체적 건강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은 이미 진서연에게 맡겨서 처리하라고 했으니 그저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들 때문에 슬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윤소현의 의도대로 되는 셈이니 말이다.다음 날, 박민정은 박민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박민호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었다.“누나, 윤석후와의 소송에서 이겼어!”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박민호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잘됐네. 그럼 이제부터 회사 잘 운영하도록 해.”“응, 알겠어.”박민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누나, 루머들은 신경 쓰지 마. 며칠 있으면 다 잠잠해질 거야.”박민정은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보다는 박민호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게 더 의외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괜찮아. 어차피 신경 안 쓸 거니까.”“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
박민정은 이렇게 어린 두 아이가 벌써 자기 일을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러자 박윤우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엄마. 나랑 형은 엄마 아들이니까 엄마를 보호해야 해.”이 말을 듣고 박민정은 웃었다.입구에서 세 여자는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아이를 낳는 게 무서웠는데 예찬이와 윤우를 보니 아이를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진서연이 말했다. 설인하는 자신의 딸을 안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정말 천사 같은 아이들이에요. 내 딸도 빨리 컸으면 좋겠어요.”민수아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박민정과 윤우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다들 왜 왔어?”박민정은 그제야 그녀들을 보고 들어와서 앉으라고 했다.“그냥 윤우가 왜 보스를 방으로 몰래 데려갔는지 궁금해서요.”진서연이 대답했다.다들 이렇게 철이 들고 착한 아들을 둔 박민정을 부러워했다.소문은 더 퍼져갔다. 전에 윤소현은 많은 사람을 매수해 박민정을 욕하라고 시켰는데 도리어 자기의 발등을 찢는 셈으로 되었다. 점점 많은 사람이 이 일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윤우의 팬은 만만치 않았다. 각종 헛소문의 기사 아래 댓글을 달았다.윤소현은 너무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진작 알았더라면 그녀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헛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서 도리어 역작용을 했다. 하필이면 이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소현 씨, 우리 회사의 많은 계정이 고소당했어요.”“고소당했다고요? 누가 한 건데요?”“일부분은 박민정이 했고요. 그리고...”비서는 의아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IM 그룹 홍보팀인 것 같아요.”“IM 그룹이 우리를 왜 고소하는데요?”윤소현은 박민정이 고소하는 것은 전혀 무섭지 않지만, IM 그룹은 무서웠다. 유씨 가문의 적지 않은 사업이 IM 그룹에 넘어갔고 윤씨 가문도 크게 당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속 연예인 에리와 관련돼서 그런
“이분이 예찬이 엄마인가?”다들 궁금해서 물었다.박윤우는 다시 스크린 앞에 앉아 또박또박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여러분께 우리 엄마와 아빠를 소개하려고 합니다.”계속 윤우를 좋아해 왔던 사람들은 무척 기대했다.박민정은 윤우한테 끌려와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예...찬이의 엄마입니다.”팬들은 윤우를 예찬이로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생긴 게 똑같은 쌍둥이여서 팬들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팬 중에는 단번에 박민정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박민정 아니야? 유남준의 아내 말이야. 아니, 이젠 전처라고 해야 하나?”“이 사람이 예찬이 엄마라고? 근데 예찬이는 아무리 봐도 그냥 한국인 같은데?”“박민정은 외국인이랑 아이를 낳았다고 하지 않았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잖아?”오늘 다들 큰 구경거리를 보게 된 셈이다. 라이브를 보고 있는 팬들은 자기가 팔로워 한 아이가 박민정의 아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리고 박윤우가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 누나들, 그리고 이모님들, 내가 외국인 아들이 아니라는 걸 꼭 밝혀주세요. 우리 엄마는 이분이고 아빠는 유남준이에요. 내가 엄마가 외국인이랑 낳은 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에요.”화를 낼 법도 모르는 윤우가 귀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마음이 약해진 팬들은 헛소문을 내는 사람들을 비난했다.“우리 귀염둥이 억울했겠네. 어쩜 그리 나쁜 사람이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의 출생으로 장난치는 군, 너무하잖아.”“박민정과 유남준의 아들이구나. 어쩐지 잘생겼더라.”“전에 라이브 할 때 박민정을 봤었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예찬이 엄마였구나.”“예찬아, 속상해하지 마. 우리가 꼭 너의 편이 돼서 나서줄게.”윤우의 팬들은 대부분 젊은 아가씨랑 이모들이어서 전투력이 만만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이브에서의 일이 실시간검색에 떴다. 박민정이 외국인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완전히 루머다. 거의 이런 타이틀의 검색어였다. 이 검색어로 검색하면 박예찬은 박민정과 유
“괜찮아. 고마워.”박민정은 에리가 부축하려는 것을 거절했다.진서연은 이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스타 님, 우리 보스랑 스캔들도 났는데 좀 조심해. 우리 보스 난처하게 하지 말고 말이야.”그녀는 말하면서 박민정의 의자에 폭신한 쿠션을 놓아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며 걸어가 앉았다.“에리랑 그런 장난치지 마. 누군가가 나쁜 마음먹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잖아.”“알았네요.” 진서연은 바로 대답했다.에리는 박민정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속이 속이 아니었다.박민정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리야, 너도 빨리 앉아. 주문해야지.”박민정은 전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그래.”세 사람은 가정식 요리를 시켰다.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진서연은 참지 못하고 에리한테 물었다. “에리야, 너 여자친구 있어?”에리는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물어본 건데. 내가 실례했나?”진서연이 물었다.에리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실례까지야. 민정이는 알잖아. 내가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광고 촬영을 했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그렇구나.”이 대답을 들은 진서연은 희망을 잃은 표정이었다.“왜?”에리가 의아해서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너랑 우리 보스 스캔들이 떠돌고 있잖아. 네가 애인이나 부인이 있으면 공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진서연은 에리랑 솔직하게 얘기했다. 에리가 스타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박민정 덕분이다.진서연은 박민정이 도움이 필요할 때 에리가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에리는 처음에 박민정이 자신의 연애 상황이 알고 싶어서 진서연을 시켜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한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이런 이유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그는 섭섭한 마음에 물었다. “아니면 내가 가짜 여자친구를 만들까?”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 “아니야. 없으면 없는 거지. 다른 방법을
화면에 뜬 것은 다름이 아닌 이 블로거의 스캔들이었다.동시에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갖는다든지, 팬을 무시하고 팬들을 욕하는 것에 관한 스캔들이었다.원래 이 블로거를 응원하던 팬들도 안티로 되어 이 블로거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계정으로 라이브를 보고 있던 블로거는 이것을 보고 빠르게 댓글을 달며 해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든 흑역사와 스캔들이 폭로되었다.선생님이 예찬이보고 컴퓨터를 그만 하라고 말리지 않았으면 블로거의 모든 것이 밝혀질 판이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본 계정에 로그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계정 아래는 온통 악플로 쏟아졌다.3분도 안 돼서 몰래 사귀던 팬 여자친구들이 다 헤어지자고 찾아와 그의 스캔들을 까발리기 시작했다.그제야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샀다는 것을 알았다.회사 상사에게 연락했을 때, 그의 계정은 이미 정지되었다.이 일을 안 상사는 그 블로거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차가웠다. “너 이런 사람이었어? 백만 팔로워나 되는 계정을 네 손으로 망쳤구나. 기다리고 있어. 곧 회사 변호사 서한을 보낼 거야.”이 헛소문을 퍼뜨린 블로거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는 더없이 후회했다.이 블로거가 이렇게 됐는데도 트래픽과 명성을 얻기 위해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다른 블로거들을 깨우지 못했다.박예찬은 유치원 선생님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가르치는 수업을 들으며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수업이 끝나고 조하랑이 그를 데리러 왔다.“하랑 이모, 뉴스 봤어?”그가 물었다.조하랑은 화가 나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당연히 봤지. 다들 진짜 너무하네.”박예찬은 컴퓨터를 꺼내 열어봤다. 헛소문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가 처리하던 블로거의 계정이 정지된 것을 보았다.“이것은 모두 헛소문이야. 윤우보고 해명하라고 할 거니까 이모가 저녁에 좀 도와줘.”“그래.”조하랑은 박예찬을 아이로 여기지 않고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어떻게 도와줘야
박민정은 그녀의 꿍꿍이를 꿰뚫고 있었다. 사람은 이익을 따지는 동물이다. 최현아 역시 그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박민정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를 찾아가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은 반드시 그녀 혼자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소현이 이렇게 나오니 박민정도 방법이 없었다.기사를 본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증거도 없는 뜬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박민정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고 결혼하기 전에 남자친구를 얼마나 많이 사귀었는지 비슷한 것 말이다. 결혼하고 해외에 나갔는데 해외에서도 남자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심지어 외국인과 아이도 낳았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이 널리 퍼질수록 많은 사람이 이를 사실로 믿고 박민정을 나무랐다. “어머, 어쩜 이리 파렴치한 여자가 있다고. 외국인이 그렇게 좋으면 귀국하지 말 것이지.”“그러니까. 난 이런 사람이 제일 싫어.”“유남준은 지금 되게 슬프겠지? 너무 불쌍해.”진서연은 이 악플들을 보고 어이없어했다.“정말 역겹네요.”근데 박민정은 개의치 않았다. “악플 그만 봐. 신경 안 써도 돼.”이 일은 점점 더 커져서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끔 보는 박예찬도 알게 되었다.“이런!”박예찬은 감히 자기 엄마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그 악플러들을 보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컴퓨터를 해킹했다. 하지만 박예찬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그저 소문을 심하게 퍼뜨리는 악플러와 언론사밖에 처리하지 못했다.그는 박윤우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남들이 우리 아빠가 외국인이래.”박윤우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서 한참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의아해했다.“누가 그래?”“인터넷에 많은 사람이 그러던데? 오늘 밤 돌아가서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공개해.”박예찬이 말했다.박윤우는 바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왜 외국인의 아이가 되었는지 영문을 몰라고 하였다. 이건 자기 엄마를 모함하는 것인 걸 알아차린 박윤우는 그들이 참으로 나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