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으로 가보니 서다희가 손에 커다란 가방 몇 개를 들고 와 있었다.박민정은 어딘가 의아하긴 했지만 경비에게 안으로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안으로 들어선 서다희는 이곳을 유남준의 개인 숙소로만 여기는 건지 유남준의 옷가지들이 담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이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부족하시다면 제가 조금 이따가 더 가져오겠습니다.”“비서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남준 씨는 여기서 하룻밤만 묵기로 했는데요.”유남준이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리라 생각하는 듯한 서다희에게 박민정이 얘기했다.하지만 자신에게 눈짓하는 유남준을 발견한 서다희가 곧장 대답했다.“하지만 제가 옷을 이렇게 갖고 왔는데, 그냥 여기 두는 건 어떨까요?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습니까.”박민정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유남준이 서다희에게 물었다.“가져오라고 한 건?”“다 가져왔습니다.”서다희는 다른 가방에서 파일들을 꺼냈다.“사모님, 이건 대표님께서 갖고 오라고 하셨던 호산 그룹의 예전 경영 자료입니다.“그 자료란 무려 몇 킬로그램은 족히 되어 보이는 두꺼운 문서들이었다.“이건 다 실물 서류고요, 다른 건 다 전자 문서들이라 사모님께 메일로 전송해 드렸습니다.”그 말에 박민정이 놀란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제가 이걸 찾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창업 준비로 퇴사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괜히 부담을 느낄 박민정을 위해 대답했다.“전에 내가 너한테 YN 그룹 맡겼었잖아. 네가 힘들어할까 봐 자료들 다 찾아서 보낸 거야. 필요하면 보고 필요 없으면 버려도 돼.”사실 이 자료들은 모두 유남준이 오랜 시간 동안 노력으로 쌓아온 것들이었고 이때까지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던 자료였다.그리고 박민정은 그런 자료를 거절할 수 없었다.“받아야죠, 고마워요.”전에 받았던 자료들로 큰 도움을 받았던 박민정은 이번 기회를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자료를 받는 박민정을 보며 유남준은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니라는 생
지나치게 해맑은 자신의 아들을 더 상대할 힘도 없었던 박민정이 말했다.“됐으니까 얼른 아침 먹고 학교나 가.”아이가 어느새 학교 갈 나이가 됐다는 사실이 요즘 박민정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아이가 얌전한 편이긴 했지만 육아는 항상 힘든 것이니 말이다.“알겠어요.”박윤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이어서 세 명도 차례대로 나와 아침 식사를 했다.오늘 그녀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새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었다.어제 설인하가 박민정의 회사로 간다는 말을 들은 민수아가 자신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XS 회사의 프런트 데스크 매니저로 입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들은 함께 새 회사로 향했다.새 직장에서의 첫날은 정신없이 바삐 돌아쳤다. 박민정 역시 인터넷에서 떠도는 자신의 루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카페.최현아에게서 박민정이 퇴사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윤소현은 자신이 드디어 그녀를 회사에서 몰아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뿌듯해졌다.“제가 뭐랬어요, 형님. 박민정 같은 사람은 오래 못 버틸 거라고 했잖아요.”한껏 우쭐해진 윤소현이 말했다.최현아도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맞장구쳤다.“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모님 참 대단하시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박민정을 공격하게 한 거야?”그 말에 윤소현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어려울 거 없어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게 누구든 사회적으로 전부 매장해 버릴 수 있으니까요.”이윽고 그녀는 말을 마치며 반 협박 조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형님, 우리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요.”최현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야 당연하지.”하지만 속으로는 새로 등장한 윤소현이라는 경쟁자에 골치가 아파왔다.힘들게 박민정을 몰아냈는데 갑자기 윤소현이라는 걸림돌이 생겨버린 것이다.배후 세력이 엄청난 윤소현은 절대 최현아의 상대가 될 수
“그때의 바움 그룹의 규모는 정말 엄청났지. 우리 회사도 그 시절의 바움 그룹처럼 될 수 있을 거라 믿어.”장명철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박민정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앞으로 여러분 모두가 우리 회사의 창립 주주가 될 겁니다.”잠시 담소를 나눈 후 장명철은 곧장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그 역시 박민정을 겨냥한 온라인 루머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일찌감치 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앞으로 우리 회사도 자체적인 전문 변호팀이 필요할 거야. 그래야 제 3자에게 마음껏 휘둘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장명철이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이 부분 역시 전문가이신 장 변호사님께 맡길게요.”“걱정 마라, 내가 철저히 준비 해두마.”장명철의 믿음직한 모습에 박민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오랜 세월 동안 항상 자신의 가문을 도왔던 장명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대기업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권한을 어느 정도 위임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전체적인 경영관리는 진서연이 맡고 있었고 설인하가 그녀의 밑에서 도와주고 있었으며 민수아는 인사팀에서 일하고 있었다.박민정이 온라인 뉴미디어 회사를 창업하게 된 것 역시 이번 여론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미디어 사업을 시작으로 그녀는 다른 분야에까지 점차 확장할 계획이었다.진서연에게 찾아가 박민정의 근황을 끈질기게 캐물어 새로 설립된 회사에 대해 알게 된 에리는 회사로 축하의 의미를 담은 꽃다발을 보냈다.“민정아, 국내에 이렇게 회사까지 세웠으면서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어?”에리가 서운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정이 너는,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그 말에 박민정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회사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굳이 존재감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서 그랬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얘기해 줄 생각이었단 말이야.”그녀는 대답하면서도 수시로 에리의 뒤쪽을 살폈다.“혹시 따라온 사람은 없었지?”만약
박민정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하지만 우리 회사는 지금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매니저도 없고...”박민정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에리가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매니저라면 저기 있지 않나?”에리의 매니저는 국내외를 포함해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절대 그의 매니지먼트를 받을 수 없었다.애초에 매니저 역시 에리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맡았다.그전까지만 해도 에리가 유명해지는 순간 곧장 새로운 신인을 발굴해 데뷔시킬 예정이었다.하지만 에리와 친구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면서 이제는 다른 신인을 맡지 않게 되었다.문밖에 서 있던 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걸어 들어와 입을 열었다.“괜찮으시다면 제가 에리와 신인 연예인분들의 매니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역시 우리 형님 최고!”에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칭찬이라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에리가 IM과의 계약 해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은 박 대표가 알아서 처리해 주셔야 할 거예요.”매니저 안석현이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 말에 에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놈의 IM.”IM의 악명이라면 박민정 역시 수십 번도 넘게 들어왔지만 친한 친구까지 그 회사와 엮여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세요.”박민정이 물었다.매니저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순간, 에리가 급히 안현석의 앞을 막으며 다급한 말투로 대답했다.“아, 그냥 속은 것뿐이야. 별일 아니니까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별일 아니긴,위약금만 4천억인데.”“4천억!”옆에서 듣고 있던 진서연도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정도 금액이라면 일반인들에게는 평생을 벌어도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무슨 위약금이 그렇게나 많아요?”진서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이라고 해도 이렇게 높은 위약금이
“서연아, 네가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에리한테 상황 설명 좀 해줘.”“알겠습니다.”진서연은 흔쾌히 박민정의 말에 대답했다.한편, 회사 밖으로 나온 에리는 박민정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다며 안석현에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형, 제발 좀. 왜 민정이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겠어? 내가 그깟 돈 때문에 돈 많은 여자 하나 잡아서 내연남 노릇이나 하고 민정이랑 남편 사이 갈라놨다고 오해할 게 뻔한데.”그 말을 듣는 안석현은 어딘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에리가 몰래 박민정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부터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일인데 말이다.“알았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하지만 안석현은 어쩔 수 없이 에리를 위해 어영부영 넘어가야만 했다.그 말에 에리도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가고 있는 모든 부동산 전부 처분해 줘, 국내외 포함해서. 최대한 빨리 부탁해.”그는 하루빨리 IM과의 계약을 끝내고 얼른 박민정의 회사로 들어가고 싶었다.안석현은 에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당부의 말은 잊지 않았다.“네가 가진 부동산 다 팔아도 최대 2천억이야. 남은 금액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해.”에리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자식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리 방법이 없었던 탓에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에리가 금방 유명해졌을 무렵, 그는 부모님께 용돈도 자주 챙겨드리곤 했다.그러니 에리 역시 부모님께 부탁만 하면 손쉽게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그 큰돈은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냐? 혹시 인터넷에서 떠돌던 그 유부녀한테 갖다 바치려는 거야?”“아버지, 지금 무슨 헛소릴 하시는 거예요?”“내가 헛소릴 한다고? 뉴스에서 다 봤다. 네가 애까지 딸린 여자 만나고 다닌다는 거.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애인 하나 똑바로 못 사귀어서 하필이면 결혼한 유부녀를 찾아? 난 너 그렇게 사는 꼴 절대 못 본다. 그렇게 돈이 궁하면 그 여자한테서 받아내
“정수미 씨 여동생분 연락처는 있나요?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직접 얘기해 보죠.”유남준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연우는 별말 없이 곧장 연락처를 찾아 유남준에게 건넸다....몇 시간 후.온라인에서의 여론이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민정에 대해 비판적이던 언론사와 미디어에서 앞다투어 사과문을 올리기 시작했다.한편, 병원에서 임신 검사를 받던 윤소현은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여론의 흐름에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곧장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모, 대체 무슨 일이에요?”“소현아,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은 건드렸어. 자칫했다간 내가 너 대신 큰 화를 입을 뻔했단 말이다.”윤소현을 아꼈던 이모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지킬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라뇨?”윤소현이 계속해서 캐물었지만 이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마디만 남겼다.“너도 이쯤 했으면 분이 풀렸을 테고, 박민정도 이번 일로 배우는 게 있었을 테니까 그만하자.”“하지만...”“됐어, 더 이상 토 달지 마.”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전화를 끊어버린 고모에 윤소현의 화는 더욱 쌓여만 갔다.윤소현과 함께 병원에 와준 함미현 역시 병실 안을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소현 씨, 의사 선생님께서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너무 화내진 마세요.”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윤소현의 화를 자극했던 것인지 함미현을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나도 화내기 싫어. 그런데 박민정을 그냥 이대로 놔줘야 한다잖아. 내가 어떻게 그걸 두고만 보는데!”그 말에 함미현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을 본 윤소현의 화가 더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요즘 따라 정수미가 함미현만 챙기며 동하와 함께 있겠다는 명분으로 자신과 함께 병원에 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더욱 분통이 터졌다.그녀는 근처에 있던 베개를 집어 함미현에게 집어 던졌다.하필이면 그 순간, 병실 문을 열고
정수미에게 크게 혼이 난 윤소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역시 친딸이 나타나니 이제 자신 같은 양녀는 이제 중요성을 잃은 것이다.함미현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수미는 자신을 도와 박민정을 상대해 주고 있었건만 이제는 도리어 박민정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엄마는 지금 너무 함미현 편만 들고 있잖아요. 미현이 쟤 사실은...”윤소현은 순간 말을 멈췄다.만약 정수미에게 함미현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했다간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찾아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땐 윤소현 본인이 위험해진다.“미현이가 뭐?”정수미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니에요. 그냥 제가 그렇게 느낀다고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엄마 옆에 있었던 사람은 전데 미현이가 나타나니까 이제 제가 싫어지신 거잖아요. 그리고 오늘 저는 임신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온 거고요. 이미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한데 엄마까지 이렇게 절 몰아세우시면...”말을 마친 윤소현은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그렇게 나가는 윤소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수미는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건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미현아,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니?”함미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엄마, 차라리 언니한테 직접 전화해서 얘기해 보시는 건 어때요?”“됐어.”정수미는 언제까지 윤소현을 버릇없이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본인도 늙고 병드는 날이 올 테니 말이다.“검사 결과는 어때?”“다 정상이래요.”“그럼 됐네.”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한편,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쯤이 되자 박민정 역시 여론의 흐름이 뒤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했다.어제 진서연에게 맡겼던 증거들은 이미 온라인에 게재되어 있었고, 누리꾼들은 한목소리로 무책임한 언론사들을 비난하고 있었다.“앞으로는 뭐든 잘 알아보고 판단해야겠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들 다 믿으면 안 된다니까.”“맞
방성원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요즘 들어 스팸 전화가 사기 전화 같은 것도 많긴 했지만 혹시라도 설인하에게서 걸려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수신 버튼을 누른 것이다.그리고 이번만큼은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방성원!”박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온 설인하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그녀는 살면서 처음으로 월급도 받았고, 그 돈으로 새로운 휴대폰도 구매했다.방성원은 벅차오르는 마음에 목이 메어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런 방성원의 모습을 모르는 설인하는 그저 전화가 똑바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방성원, 안 들려? 나 설인하야.”“... 들, 들려. 그래도 전화는 해줬구나.”방성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설인하도 정말 매정한 여자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으니.전화를 받은 방성원은 설인하가 직장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항복을 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그녀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내가 이렇게 전화를 안 하면, 너랑 이혼을 어떻게 하겠어?”그 말에 방성원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뭐라고?”“이혼하자고! 못 들었어?”설인하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을 이어갔다.“난 이제 직장도 얻었고 은정이도 혼자 잘 키울 수 있게 됐으니까 네가 필요 없어졌어.”필요 없어졌어!설인하의 마지막 한 마디는 송곳이 되어 방성원의 마음을 아프게 쿡쿡 찔렀다.그는 점점 메어오는 목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그런 방성원의 웃음소리는 오히려 설인하에게 공포감만 심어주었다.“왜 웃어? 이혼하자는 말이 그렇게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법원 가서 이혼 절차 밟자. 요즘엔 이혼 숙려 기간도 있다고 하니까 내일 가서 서류 제출하면 다음 달 이맘때쯤에 이혼 증빙 받을 수 있겠네.”설인하는 방성원과 헤어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설인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에서는 분노에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
유남준은 유남우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유남우, 나한테 설명할 건 없나?”유남우는 여기에 유남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러니 어젯밤, 박민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유남준이란 말인가?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두 사람의 외모가 이렇게 똑같은데, 왜 유남우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민정아, 먼저 가서 쉬어. 내가 조금 있다가 갈게.”“알겠어요.”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남준은 단호히 말했다.“안 돼. 민정이는 아무데도 못 가.”겨우 다시 찾은 박민정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이 말을 들은 유남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옆 방에서 잠깐 쉬고 있어.”“좋아요.” 박민정은 유남우의 말대로 옆 방으로 이동했다.그녀가 떠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유남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민정이가 실종된 게 네가 한 짓이었어?”이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남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민정이는 원래부터 내 사람이었어.”이 뻔뻔스러운 말에 유남준은 주먹을 쥐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그 질문에 유남우는 오히려 비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기억에서 지우는 법이지.”이어 그는 도발하듯 말했다.“형, 충고 하나 할게. 형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붙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어.”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그 말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게 맞겠지. 민정이는 내 아내야. 우리에겐 네 명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 인생이나 책임져!”그러나 유남우는 비웃으며 대꾸했다.“나랑 윤소현은 애초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우린 결혼증명서도 없어. 그리고 그 애? 하하, 그건 내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