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아이의 말에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가자, 얼른 병원 가보자.”하지만 박윤우는 도리어 박민정의 손을 붙잡더니 말했다.“병원 안 갈래요. 아빠 보고 싶은데, 아빠 어디 있어요?”박민정은 아이의 모습에 이내 박윤우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내 아이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박윤우,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뭔지 알기나 해?”엄마의 화난 모습을 마주한 박윤우는 이내 얼굴이 하얘진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엄마...”“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다니까, 사람이라도 불러서 너만 아빠한테 보내면 되겠네?”홀로 두 아이를 이렇게까지 키워냈건만 아직도 유남준만 찾으며 꾀병까지 부려대는 아이의 모습에 박민정은 기가 찼다.화가 난듯한 엄마의 모습에 박윤우도 더 이상 꾀병을 부리지 않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붙잡았다.“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화내지 마세요. 아빠한테 안 갈게요.”사실 박윤우는 아빠보다 엄마인 박민정이 훨씬 좋았다.“엄마...”박민정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박윤우의 병이 얼만 심각한 병인지 잘 알고 있던 그녀는 더더욱 이런 장난을 용납할 수 없었다.“엄마, 정말 잘못했어요.”안쓰러워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설인하가 박윤우를 변호해주기 시작했다.“민정 씨, 그만 하세요. 아직 어린 애잖아요.”“인하 씨는 신경 꺼요. 얘가 이런 적이 한두 번 이여야 말이죠. 양치기 소년처럼 이런 거짓말이 계속됐다가 나중에 진짜 큰일이 났을 때, 제가 아이의 말을 안 믿게 될지도 몰라요.”박민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계속해서 꾀병만 부리다 보면 나중에 정말 병이 났을 때 아무도 박윤우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박윤우, 아빠 보고 싶으면 다음부턴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 꾀병 부리면서 엄마 놀라게 하지 말고. 알겠어?”같은 엄마로서 설인하고 역시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할 때 엄마가 어떤 고통을 감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아픈 아이를 두고 있는 엄마라면 다
“네.”박윤우는 박민정을 꼭 끌어안은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민정은 곧장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빠르게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던 그는 장난스럽고도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유남준의 농담을 받아줄 기력이 없었던 박민정은 다급함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윤우 병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아요. 얼른 병원으로 와주세요, 빨리요.”그 말을 들은 유남준의 목소리가 단번에 진지해졌다.“걱정하지 마. 금방 갈게.”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곧장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어 진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소아청소년과 의사와 유전병이나 백혈병 전문가를 불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그 후, 그는 운전기사도 부르지 않고 직접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복도에서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박민정이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런 상황을 여러 번이나 겪었음에도 아이의 병이 재발할 때마다 박민정은 죽을 만큼 두려웠다.만약 박윤우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겨버린다면 박민정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의 곁에 함께 있던 진서연이 그녀를 위로했다.“보스,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민수아도 뒤이어 입을 열었다.“맞아, 아무 일 없을 거야.”설인하도 거들었다.“바로 병원에 데려왔으니까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박민정은 자신을 걱정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 애써 눈물을 훔치며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네, 알겠어요.”“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박민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하지만 세 사람은 여전히 더욱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다행히 그때, 유남준과 김인우가 때마침 의료진들을 데리고 병원에 도착했다.김인우는 아무 말 없이 옷을 갈아입고 의료진들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그리고 박민정의 곁으로 다가온 유남준은 몸을 숙여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민수아 일행은 유남준이 도착한 것을 보자
박민정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엄마는 거짓말 안 해. 윤우랑 약속할게. 아빠랑 다시 잘 지내볼 거야.”유남준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박윤우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앗싸! 신난다. 이제 나한텐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네.”박민정은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아들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그녀는 이때까지 자신에게 좋은 선택지만 선택하며 두 아이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아이들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결국엔 어린아이들이었고 완전한 가정을 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기쁜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박윤우는 갑자기 배가 고파져 박민정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만둣국을 사달라고 부탁했다.그 말에 박민정 역시 별다른 생각 없이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병원을 나서기 전, 민수아 일행에게는 아이에게 아무 문제 없다고 전하며 집에 가서 쉬라는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민수아 일행 역시 그제야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 그거 봐요, 제가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러게요.”...병실 안에서는 유남준이 박윤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윤우야, 아빠한테 말해 봐. 엄마랑 아빠가 다시 잘 지내길 바란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었어?”박민정이 먼저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했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몸 상태가 어느 정도 나아진 듯한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말했다.“아빠, 제가 아빠를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좀 마세요.”“그럼 누굴 위한 건데?”유남준이 물었다.“당연히 엄마를 위해서죠. 엄마가 이때까지 혼자 저랑 형 키우느라 고생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곧 있으면 동생도 태어날 텐데, 동생이 태어나면 그 동생도 엄마가 혼자 돌봐야 하잖아요.”박윤우는 큰 눈으로 유남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멍청한 아빠. 지금 제가 아빠를 도와주는 것도 전부 엄마를 위해서라고요. 우리 엄마 잘 안 챙겨주면 나중에는 제가 아빠 가만
그 말에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박윤우의 병실로 향했다.박윤우는 병실로 함께 들어오는 부모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떻게 된 거야, 아가?”박민정이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박윤우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박민정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저는 또 부모님이 싸우고 저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그럴 리가 없잖아. 엄마랑 아빠는 이미 같이 살기로 약속했어.”박민정이 박윤우를 다독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 말에 박윤우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진짜예요?”“당연히 진짜지. 자, 이제 다시 자자.”아이를 보는 박민정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가득했다.“엄마, 엄마랑 아빠가 윤우 옆에 누워주면 안 돼요?”잠시 망설이던 박윤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씻고 나서 옆에 누울게.”“네!”박윤우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박민정 역시 신난 아이를 보며 기뻤다.유남준을 먼저 씻으라며 욕실로 들여보낸 박민정은 같은 침대 위에 누운 부자의 모습을 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박윤우와 유남준이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박민정은 유남준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박윤우를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쁜 감정이 몰려왔다.그녀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박윤우의 곁에 누웠다.“자, 이제 늦었으니까 얼른 자자.”“네!”박민정은 순순히 대답했다.아이는 눈을 감더니 박민정과 유남준의 손을 하나씩 잡아 자신의 작은 몸 위로 올려놓고는 두 사람에게 손을 마주 잡으라는 말을 했다.결국, 박민정과 유남준은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시간이 흐르자 박윤우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박민정은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유남준의 힘이 너무 강했던 탓에 손이 빠지지 않았다.그녀가
“훨씬 좋아졌어요. 조금 더 있다가 유치원으로 갈 거예요.”박윤우가 대답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퇴원하고 집에서 며칠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엄마가 옆에서 돌봐둘게. 조금만 더 나아진 다음에 가는 게 어떨까?”박윤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오늘 유치원 친구들한테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단 말이에요.”박윤우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고, 그 덕에 유치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박민정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유남준이 나섰다.“애가 가고 싶어 하잖아. 보내주자. 담당의도 지금 상태는 좋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잠시 말을 멈췄던 유남준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그래도 걱정되면 내가 따로 사람 붙여서 지켜보라고 할게.”유남준이 말을 마치고 박윤우 역시 간절한 눈빛을 보내니 박민정도 결국엔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좋아. 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하다 싶으면 바로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해.”“네.”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박민정과 유남준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박민정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유치원에 도착하자 박윤우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당부까지 했다.“엄마, 아빠. 두 분 꼭 사이좋게 지내셔야 해요. 싸우지 말고요, 알겠죠?”“알겠어.”박민정은 박예찬만 잔소리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박윤우도 만만치 않은 잔소리꾼이었다.“그래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그리고 아빠, 아빠는 엄마 잘 챙겨주시고요!”박윤우가 덧붙였다.“그래.”유남준은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박윤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차에서 내렸다.유치원까지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박민정은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곁에 있던 유남준이 참다못해 말을 걸었다.“너희 회사로 갈까?”그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대답했다.“네.”그녀는 회사 주소를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유남준의 운전기사가 내비게이션을 통해 회사까지 가는 길을 찍었고
하지만 유남준은 꾹 참아야 했다. 지금 둘만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회사 건물 앞으로 도착하자 박민정은 차에서 내려 유남준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마침 택배를 받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단 민수아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이런 일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가 물었다.“민정아, 유 대표가 너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야?”박민정은 그 질문에 딱히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러면서 민수아가 품에 한가득 안고 있는 서류들을 바라보며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이건 다 뭐야?”“계약서.”민수아가 간단한 대답에 이어 말을 덧붙였다.“참, 인하 씨가 오늘 오전에 법원 갈 거니까 반차 낸다고 전해달래.”“정말 간 거야? 성원 씨가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어?”박민정 역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모르겠어. 오늘 아침에 전화 와서 봤더니 이혼하자고 그러더래.”“그래?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법원 앞.아침 일찍부터 미리 도착해있던 설인하는 혹시라도 방성원이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워 초조하게 마음 졸이고 있었다.그녀는 수시로 시계를 확인하며 안절부절못했다.“벌써 한 시간이 다 지나가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그녀는 몰랐겠지만 근처에 주차된 검은 벤틀리 안에 앉아 있던 남자는 굳은 얼굴로 설인하를 지켜보고 있었다.방성원의 곁에는 김인우가 앉아 있었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리자 짜증이 난 김인우가 물었다.“야, 방성원.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어. 대체 언제까지 기다릴 건데?”그 두 사람 역시 설인하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지만 방성원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해서 법원 앞의 설인하를 지켜보기만 했다.방성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어젯밤부터 방성원에게 끌려 술을 마신 데다가 오늘 아침까지 법원까지 함께 끌려와 짜증이 나 있었다.“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방성원은 냉랭한 시선으로 김인우를 쳐다보며
역시 이젠 자신만의 단단한 날개가 생긴 건데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택시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방성원은 운전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한편, 설인하가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동료들은 설인하를 발견하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그이가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다음에 다시 보재요. 이혼은 다음에 하자고 그러더라고요.”“이게 말이 돼요? 자기가 먼저 오늘 보자고 했던 거면서?”진서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민수아 역시 턱을 괴멸 말했다.“제 생각엔 그 사람, 이혼하기 싫은 것 같은데요.”“설마요? 이혼하기 싫었으면 그렇게까지 말투가 싸늘하지 않았을걸요.”세 사람은 남자의 속마음을 탐구하듯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남자의 마음도 꽤 복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그 순간, 설인하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 민정 씨 지금 유남준 씨랑 화해한 거 맞죠?”박민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요?”“혹시 남준 씨한테 성원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물어봐 줄 수 있어요?”설인하가 말했다.다른 두 사람도 박민정을 바라보며 기대에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박민정은 그에 거절하기 어려운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요, 물어볼게요. 요즘 저랑 남준 씨가 두원 별장으로 이사 가야 할지도 몰라요. 윤우랑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네? 이사 간다고요?”깜짝 놀란 설인하가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이사 가지 말고, 우리랑 계속 같이 살면 안 돼요?”“계속 본가에 살면 불편할까 봐 그래요.”박민정은 친구들이 불편해할까 걱정되어 이사를 고려한 것이었다.사실 그녀 역시 지금의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꽤 즐거웠다.설인하는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아니요, 전혀 안 불편해요. 집이 이렇게나 큰데 유 대표 한 명
윤소현은 아버지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아버지나 알아서 하세요. 이번에 박민호랑 했던 소송도 지셨으면서. 배상금 내는 것도 빠듯한데, 제발 비서랑 놀아나지 좀 마시고 일에 집중하세요.”윤소현의 말에도 윤석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소현아, 난 아직 네가 있잖니. 나중에 수미가 죽으면 걔 재산은 너한테 넘어갈 거고, 그럼 그 돈이 내 돈 아니겠어?”윤소현은 윤석후에게 눈을 흘겼다. 정수미가 죽는다면 윤석후는 또 얼마나 오래 살까?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저도 요즘 쉽지 않아요. 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정수미가 본인 친딸이라고 데려온 함미현한테만 신경 쓰느라 요즘 저한테는 관심도 없거든요.”“아, 맞아. 그 함미현 말이지?”윤석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잔인해지기 시작했다.“딸, 뭘 하든 확실하게 해야 해. 네가 직접 못 하겠다면 이 아비가 사람 구해서 그 여자 처리할게.”그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윤소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왜?”“어차피 그 여자, 정수미 친딸도 아니거든요. 가짜 딸이에요.”윤소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윤석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왜 수미한테 그 얘길 해주지 않는 거야?”“아버지가 뭘 알아요? 지금 얘기한다면 정수미는 진짜 친딸을 찾겠다고 또 혈안이 되겠죠. 저는 정수미가 죽기 직전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때 얘기할 생각이에요.”그때가 되면 정수미도 윤소현에게 미안함을 느낄 것이고 다시 친딸을 찾아 유산을 물려줄 시간도 없으리라 생각했다.그 말에 윤석후는 큰 웃음을 터뜨리며 딸의 어깨를 두드렸다.“역시 내 딸이야. 아주 똑똑해!”그들의 대화가 계속되던 중, 윤석후의 비서가 문을 두드리더니 안으로 들어섰다.“석후 씨, 대표님께서 도착하셨어요.”윤소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비서를 노려보았다.“여기 회사예요. 어딜 감히 아빠 이름을 불러요? 부끄럽지도 않아요?”비서는 그녀의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
유남준은 유남우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유남우, 나한테 설명할 건 없나?”유남우는 여기에 유남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러니 어젯밤, 박민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유남준이란 말인가?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두 사람의 외모가 이렇게 똑같은데, 왜 유남우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민정아, 먼저 가서 쉬어. 내가 조금 있다가 갈게.”“알겠어요.”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남준은 단호히 말했다.“안 돼. 민정이는 아무데도 못 가.”겨우 다시 찾은 박민정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이 말을 들은 유남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옆 방에서 잠깐 쉬고 있어.”“좋아요.” 박민정은 유남우의 말대로 옆 방으로 이동했다.그녀가 떠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유남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민정이가 실종된 게 네가 한 짓이었어?”이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남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민정이는 원래부터 내 사람이었어.”이 뻔뻔스러운 말에 유남준은 주먹을 쥐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그 질문에 유남우는 오히려 비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기억에서 지우는 법이지.”이어 그는 도발하듯 말했다.“형, 충고 하나 할게. 형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붙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어.”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그 말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게 맞겠지. 민정이는 내 아내야. 우리에겐 네 명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 인생이나 책임져!”그러나 유남우는 비웃으며 대꾸했다.“나랑 윤소현은 애초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우린 결혼증명서도 없어. 그리고 그 애? 하하, 그건 내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