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윤소현에게 걸어갔다.“감히 누구에게 ‘아무나’라는 호칭을 쓰는 겁니까?”그녀는 주먹을 쥐었다.윤소현은 고개를 든 채 조롱 가득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여기, 당신들 같은 외부인 말고 또 있나?”화가 치밀어오른 진서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입 조심해!”“내 말투가 원래 이런 걸 어떡해? 당신들이 뭘 어쩔 건데?”뒤이어 윤소현은 문밖의 경비에게 외쳤다.“경비, 누가 이딴 외부인들까지 안에 들이래? 우리 회사 규정 몰라? 아무나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임신 중인 윤소현 때문에 진서연 역시 무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진서연의 팔을 잡으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소현 씨 말이 맞아요. 회사에 아무나 들여서는 안 되죠.”뒤이어 박민정은 진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사람들만 다 부르고 여기 경비 다 빼주세요.”“알겠습니다.”박민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서연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박민정에게는 이제 숙련된 경호원들이 있었고 경호원 한 명이 경비원 두 명보다 강했다.윤소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 회사 보안팀은 왜 건드리는데? 네가 뭔데?”박민정이 민수아에게 눈짓하자 민수아는 곧장 주식 양도 계약서를 꺼냈다.“그야 이분이 박 대표님, 그러니까 이 회사 최대 주주기 때문이죠.”민수아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이 회사 이름도 이젠 YN 그룹이 아니라 XS 그룹의 자회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진짜 외부인은 그쪽들 아닌가요? 제가 기억하기론, 이 회사 윤 대표가 주식을 다 팔았다고 알고 있는데. 주식도 없고, 경영 능력도 없으면서 여기 계속 남아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민수아는 계속해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그리고 윤소현 씨, 당신은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니잖아요.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진서연은 민수아의 말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설인하 역시 민수아의 말에 감탄하며 앞으로 민수아에게서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박민정
YN 그룹 내부.박민정은 고위급 회의를 소집해 회사의 향후 운영에 대해 정리하고 윤석후를 포함한 그의 측근 몇 명도 함께 해고했다.그녀는 80%의 지분을 보유한 동시에 100%의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게다가 윤석후의 측근 외에는 회사 고위층 전부 아무런 이익을 얻은 적이 없었던 터라 그들도 기꺼이 새로운 대표를 맞이했다.회의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되어 있었다.“자, 이제 집에 돌아가서 저녁 준비합시다.”회의할 때의 날카로운 모습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박민정이 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그래요.”모두 회의실을 떠났다.하지만 설인하만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 저 조금만 더 남아서 일을 배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최대한 빠른 독립을 원하는 설인하를 알고 있던 박민정은 그런 그녀를 굳이 막지 않았다.“그래요. 일하다 힘들면 얼른 퇴근하고요.”“네.”설인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그, 은정이 좀 부탁할게요.”“걱정 마요.”진서연이 대답했다.박민정과 민수아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는 베이비시터도 있었고 선생님도 있었던 터라 그저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만 확인하면 되었기 때문에 크게 손이 가는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설인하는 그들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만약 이 여자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바뀌지도 못했을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저녁 준비를 시작하며 유남준에게 간단한 집밥을 차릴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 무렵, 유남준은 회의 중이었다.회의하던 중, 유남준의 휴대폰이 울렸다.회의 중에는 모두가 당연히 휴대폰을 진동도 아닌 무음으로 해놓아야 했다.진동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휴대폰을 꺼놓는 것을 깜빡했을 거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 역시 뒤늦게 박민정이 본인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그는 현재 본인의
“누가 알겠어?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집에 가서 와이프한테 얘기하지 마. 와이프가 알면 대표님 부인 따라 하겠다고 할 거야.”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동의했다.하지만 여성 고위층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그들은 집에 가기도 전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신 오늘도 안 들어오는 거야? 우리 회사 대표님, 몇백억 자산가인데도 당신만큼 바쁘지 않아. 아무리 바빠도 꼭 집에 가서 아내랑 같이 밥 먹고, 아내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행동한다고.”여자의 목소리는 꽤 컸다.회사를 나가기 전 마침 그 말을 듣게 된 유남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다희에게 물었다.“내가 착한 아이같아?”서다희는 눈치가 빨랐다.“당연히 아니죠. 화내지 마세요. 여자들은 과장하는 걸 좋아하잖아요.”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 유남준이 차에 올라 기사에서 빨리 가자고 지시했다.오늘 하루 너무 바쁘게 보낸 유남준은 피곤한 나머지 눈을 감고 미간을 주무르며 휴식을 취했다....여자들은 그냥 과장하는 걸 좋아하잖아박씨 가문 옛 저택에서 박민정이 요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주방에서 돕고 있었다.오늘은 요리사도 필요 없었다.유남준이 돌아왔을 때 주방은 북적북적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다.박윤우도 이미 돌아와 있었다.“쓰레기 아빠, 드디어 돌아왔네요!”그는 유남준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유남준은 허리를 숙여 윤우를 안아 올리고 그 상태로 주방에 들어갔다.유남준의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민수아와 진서연은 주방에서 계속 어색해했다.“민정아, 할 일은 거의 다 끝냈으니 우린 나가서 후식으로 먹을 과일 좀 씻을게.”민수아가 말하자 박민정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그래.”두 사람은 빠르게 주방에서 나가며 유남준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유남준은 어린 윤우를 안고 주방으로 들어와 물었다.“뭐 도와줄 일 없어?”잠시 생각하던 박민정이 답했다.“아까 요리사랑 이모님들 모두 쉬라고 했으니 나중에 설거지 좀 도와줄래요?”“그래.”유남준은 망설
정민기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민수아와 진서연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연은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자르고 있었는데 쑥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반면 민수아는 대범하게 인사를 건넸다.“민기 씨, 오늘 저희랑 같이 밥 먹고 갈 거죠?”정민기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오늘은 민정 씨 만나러 잠깐 온 거예요.”그는 진서연을 한 번 힐끗 보았다.진서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민수아는 주방을 가리켰다.“민정이는 주방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세요.”“네. 감사합니다.”정민기는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요리에 집중하고 있던 박민정은 안 그래도 청력이 약한 편이라 정민기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박윤우는 정민기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말했다.“아저씨 오셨어요! 저번에 가르쳐 주신 거 저 벌써 다 배웠어요. 언제 새로운 기술 가르쳐 주실 거예요?”유남준은 박윤우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남자는 당당한 자세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정민기는 유남준을 보지 않고 박윤우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네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새로운 기술 가르쳐 줄게.”“네! 좋아요!”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제야 유남준은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정민기는 손을 맞잡으며 악수했다.“민정 씨 찾으러 왔어요.”“여보!”유남준은 뒤돌아 요리하던 박민정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다른 사람이 못 들을까 봐 일부러 크게 부르는 듯했다.잠시 멈칫한 박민정이 정신을 차리고 의아한 시선으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지금 뭐라고 불렀어요?”유남준은 그녀에게 혼날까 봐 얼버무리며 말했다.“정민기 씨가 당신 찾는데?”“아, 알았어요. 이거 좀 대신 볶아줘요. 야채는 나중에 넣고 소금 조금 넣고 불을 끄면 돼요.”“알았어.”유남준은 흔쾌히 답했고 박민정은 손을 닦고 정민기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박민정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남준은 뒤에서 계속 그녀를 힐끔거리느라 팬에 있는 요리가 타고 있는 것도
“제 부하가 발견했습니다. 염혜란을 찾은 곳은 여기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속이었어요.”정민기가 답했다.“발견 당시 염혜란은 온몸에 상처투성이였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어요.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병원에 먼저 입원시켰습니다. 의사가 얘기하길 조금만 늦었으면 숨졌을 거라고 하더군요.”그 이야기를 들은 박민정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의사가 언제 깨어날 수 있다고는 얘기해주던가요?”정민기가 고개를 저었다.“한 달 안에 깨어나지 못하면 평생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지난달에 생긴 상처겠죠?”“네.”“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걸까요?”정민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제 부하가 발견했을 때 염헤란 씨는 산속에서 야생 풀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녀가 생존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 보러 가고 싶어요.”“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정민기가 답하자 박민정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이 일을 함미현 씨에게 얘기하는 건 어떨까요?”“함미현 씨는 염혜란 씨의 친딸이니 예상대로라면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권력과 돈을 위해 어머니를 해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박민정도 그 가능성에 대해 염두에 둔 적 있었다.‘하지만 함미현이 염혜란을 해친 게 아니라면?’“염혜란을 확실히 보호할 수 있나요?”“물론이죠.”정민기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그러면 됐어요. 나중에 돌아가서 함미현이랑 얘기해 볼게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오늘은 여기서 같이 밥 먹어요. 많이 준비했어요. 매번 밖에서 먹는 것도 질리기도 하고 건강에도 좋지 않잖아요.”원래 거절하려던 정민기는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답했다.“알겠습니다.”박민정은 그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박윤
“식사하세요.”기분이 훨씬 나아진 진서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모두 함께 식사를 시작했지만 민수아는 어쩐지 혼자 낙오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박민정은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었고 정민기는 진서연과 함께 앉아 있는데 자신은 혼자였으니 말이다.박윤우는 민수아의 불편함을 눈치챘는지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수아 이모, 저기 앉으니까 너무 좁아서 그런데 이모랑 같이 앉아도 될까요?”“물론이지.”민수아는 박윤우가 정말 눈치도 빠르고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나중에 이런 이쁜 아이 낳아야지.’모두 함께 식사했지만 민수아와 박윤우가 있는 쪽을 제외한 다른 두 자리는 어딘가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민정아, 많이 먹어.”유남준은 정민기 앞에서 일부러 박민정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눈이 보이지 않을 때 그가 가장 걱정했던 사람은 정민기였다.두 사람은 매일 붙어 있었고 나름 괜찮은 남자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유남준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 정민기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박민정은 이상한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타버린 요리를 보고는 일부러 한 젓가락 집어주었다.“야채 많이 먹어야 건강해져요.”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타버린 요리를 먹었다.“그래.”한 입 먹은 유남준은 단순히 탄 것만 아니라 지나치게 달다는 사실도 알아챘다.설탕을 소금으로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유남준은 묵묵히 야채를 삼키며 미소 지었다.소금과 설탕을 구분 못 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박민정과 정민기가 함께 나갔다는 사실에 정신을 놓은 탓에 둘을 헷갈린 것이다.“맛있어요?”조금 전 한입 먼저 먹어본 박민정은 요리의 맛을 알고 있었다.‘거의 다 완성된 요리를 데우기만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유남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맛있네.”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긴장했다.‘저게 맛있다고?’다들 한입씩 맛본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맛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맛있으면 많이 먹어
정민기가 말을 이었다.“박민정 씨에 대한 제 감정은 유 대표님께서 생각하는 사랑 같은 게 아닙니다. 단지 친구로 생각할 뿐이에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유 대표님께서는 제 뒷조사를 하셨겠죠. 저는 너무 많은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박민정은 친구로만 대할 거예요.”“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유남준은 정민기의 표정을 보며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다.남자끼리만 있는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여겼다.“제가 오해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유남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정민기는 유남준의 손을 맞잡았고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적대감은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자 밖으로 나와 그를 찾았다.그가 정민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그쪽으로 다가가자 유남준도 마침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정민기 씨와 무슨 얘기 한 거예요?”박민정이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저 당신과 아이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했을 뿐이야.”박민정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캐묻는다고 해서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아 말을 아꼈다.“그래요. 오늘 밤 볼일 있어서 잠시 나가야 해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집에서 윤우 좀 봐줘요.”“그래.”유남준은 흔쾌히 승낙했다.이미 윤우를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된 유남준은 박민정이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박민정은 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간단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차에 앉은 그녀는 함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민정 씨가 어쩐 일이에요?”두 사람은 이전 윤소현의 결혼 준비 문제로 연락처를 교환한 적이 있었다.“미현 씨, 양어머니를 찾았어요. 시간 괜찮으시다면 함께 만나러 가볼래요?”박민정이 물었다.정씨 가문에서 쉬고 있던 함미현은 그 얘기를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찾았다고요? 지금 어디 계세요?”“전화
“함미현한테 사람 붙여서 누구랑 어디 가서 뭐 하는지 알아봐.”함미현은 윤소현 수중에 있는 중요한 카드였기에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전화를 끊은 윤소현은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한편 함미현이 밖으로 나오자 박민정의 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차 문을 열고 올라탄 그녀는 자신이 이미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민정 씨,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함미현의 눈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며칠 동안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자 그녀는 점점 나쁜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그 모습을 본 박민정은 그녀가 현재 상황을 모른다고 판단했다.“직접 보면 알게 될 겁니다.”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민기는 뒤에서 따라오는 차를 발견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두 분은 안절벨트 꽉 매세요. 따라오는 차가 있네요.”“네?”함미현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누가 우리를 따라와요?”정민기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그는 혼잡한 도로 속에서 민첩하게 차들을 피해 가며 빠르게 움직였고 10분도 되지 않아 뒤따라오던 차량을 따돌렸다.미리 대비했던 박민정이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차량으로 인해 울렁거리는 속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함미현 역시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말했다.“너무 빨리 달린 거 아니에요?”“이미 따돌렸습니다.”정민기의 대답에 함미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박민정은 자세를 바로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의심스러운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정민기에게 물었다.“그 차는 언제부터 따라온 거예요?”“함미현 씨가 차에 탄 직후부터요.”함미현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그럼 저를 따라온 거란 말인가요?”정민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함미현은 불안해하며 백미러를 통해 뒤를 계속 확인했다.“누가 저를 따라온 거죠? 설마 정수미일까요?”박민정은 그녀가 정수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그녀 스스로가 정수미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
“안 중요하다고요?”진서연은 더욱 서러워졌다.“어디가 안 중요해요? 난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당장 대답해 봐요. 날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체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그녀의 손에 쥐어진 정민기의 옷이 구겨질 정도였다. 정민기는 눈빛을 잠시 깔며 살짝 짜증이 섞인 기색을 보였다.“안 좋아해요.”그는 한때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진서연 역시 과거의 약혼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가 다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진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가득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정말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이제 나가줄래요?”정민기의 냉정한 한마디에 진서연은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왜 처음에 나랑 연애를 시작했어요?”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 연애를 하면 꼭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요? 사귀기 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우리는 안 맞아요.”정민기는 단호하게 말을 끝맺고 방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에리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나로는 부족해요?”“네?”그 한마디에 진서연의 인내심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정민기에게 날렸다.사실, 정민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꽂혔다.“그, 그게... 왜 안 피한 거예요?”그녀의 주먹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손을 내린 순간, 정민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로 짙푸른 멍이 퍼지는 것이 보였다.정민기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제 됐어요?”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진서연은 더 이상 버텨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그래요. 이제 알겠어요. 지금 당장 떠
“보스, 역시 대기업은 우리 같은 작은 회사와는 차원이 다르네요. 아까 대단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진서연이 감탄하며 말했고 박민정도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그러게, 앞으로 배울 것도 많겠어.”“네, 근데 오늘 윤소현이 망신당한 건 정말 통쾌했어요.”진서연은 윤소현의 잘난 체하는 태도가 정말 싫었다.박민정은 그녀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후, 오늘 회의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윤소현이 며칠 사이에 회사에 단행한 개혁이 예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회사의 모든 인사 배치가 그녀의 손을 거쳤다.이를 본 박민정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정리했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진서연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서연아, 이제 그만 쉬어.”“저 가기 싫어요.”진서연은 자신이 머무는 곳을 떠올리는 순간, 정민기와 함께 있는 것이 떠올라 가기가 싫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는데 오직 일에 몰두할 때만이 모든 걸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그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정민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보스, 저 요즘 민기 씨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요.”진서연이 훌쩍이며 말했다.“울고 싶을 정도로 속이 막막해요.”박민정이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며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괜찮아. 언젠가 너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하지만 그 말에 진서연은 오히려 더 속상해졌다.“보스도 민기 씨가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죠?”박민정이 순간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그런데도 절 좋아했다면 왜 저랑 헤어졌겠어요?”진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기 씨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게 맞는 것 같아요.”박민정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실연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한편 옆에서 조용히 있던 유남준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벌써 밤 11시였다.‘얘는 상황 파악도
“소현아, 무슨 일이니?”정수미는 윤소현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윤소현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엄마, 왜 민정이를 회사에 들이신 거예요? 게다가 회사의 모든 업무를 민정이에게 맡기다니요?”“그야 당연한 일이지. 앞으로 민정이가 회사를 맡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잘 도와주도록 해라.”정수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소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장 따지고 싶었지만 다행히 윤석후가 그녀를 말렸다.윤소현은 간신히 감정을 다잡고 목소리를 낮췄다.“엄마, 저도 이해해요. 민정이가 엄마의 친딸이니 회사를 물려주시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지금 민정이는 회사 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잖아요. 이런 식으로 대표 자리에 앉으면 직원들이 납득하지 않을 거예요.”“그래서 배우게 하려고 회사에 들인 거다. 걱정 마라, 이미 내부 직원들에게 다 얘기해 뒀으니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거야.”정수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네가 못마땅한 건 아니겠지?”그 말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겨우 입을 떼었다.“그, 그럴 리가요.”“그럼 됐다. 이제 내 몸도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앞으로 민정이를 잘 도와줘라.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는데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목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저 늙은 여우, 너무하잖아! 이제 친딸이 생겼다고 나 같은 양녀 따위는 완전히 내팽개치는 거야? 게다가 내가 그 애를 돕게 만들다니! 웃기고 있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지 그래?”윤석후가 그녀를 얼른 끌어당겨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소현아, 진정해. 정수미 저 늙은 여자가 얼마나 더 살겠냐?”윤석후가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여태껏 회사 사정을 전혀 몰랐던 애송이가 하루아침에 대표가 됐다고 해 봐. 정수미가 죽고 나면 우리가 그 애를 쥐락펴락하는 건 식은 죽 먹기
“그래.”윤석후는 윤소현을 따라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막상 내려가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수많은 고위 임원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은 다름 아닌 박민정이었다.그녀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정수미와 꼭 닮아 있었다.정호철은 그녀를 보자마자 마치 젊은 시절의 정수미를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대표님.”그가 공손히 인사하자 뒤따르던 임원들도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대표님”이에 박민정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별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이제 막 오셨으니 우선 위층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정호철이 말했다.“좋아요.”박민정은 정호철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그녀는 예상치 못한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윤소현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윤소현은 박민정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길을 막아섰다.“박민정,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이어 그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정호철을 노려보았다.“아저씨! 설마 이 사람이 아저씨가 말한 신임 대표라는 거예요?”“그래요.” 정호철이 단호하게 대답했고 순간 윤소현의 머릿속은 텅 빈 듯 멍해졌다.“말도 안 돼! 겨우 저런 보잘것없는 촌뜨기가 무슨 자격으로 회사를 맡아요?”그러나 이번에도 정호철은 단호했고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작은 아가씨는 정 대표님의 친딸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 대표님께서 직접 이분을 지엔의 대표로 임명하셨습니다.”이 두 마디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윤소현의 가슴을 짓눌렀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박민정을 노려보았다.“박민정,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왜 엄마가 너한테 회사를 맡긴 거지?”하지만 박민정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할 뿐이었다.그러나 윤소현은 포
박민정은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뭘 봐야 하죠?”“지금은 몸과 정신을 잘 추슬러야 해. 내일 출근해서 회의 도중 졸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를 확고히 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그의 말을 듣자 박민정도 슬슬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쉬러 갈게요. 당신도 일찍 자요.”“응.”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유남준은 노트북을 꺼주고 휴대폰을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민정이가 지엔에 출근해. 혹시라도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지엔 그룹 안에도 유남준의 사람이 있었다....윤소현은 최근 들어 더욱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병원에서 몇 차례나 아이의 위독 통보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한편, 그녀는 아버지 윤석후를 회사로 들여보냈고 부녀가 함께 회사를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수미는 이미 박민정을 새 총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넘길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이 물건들은 전부 대표님이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정말 다 버리시겠습니까? 만약 대표님이 회복되신다면 찾으실 텐데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소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창고에 쌓아 두면 되겠네.”“하지만...”“하지만은 무슨. 지금 회사 관리는 내가 하고 있어. 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그녀는 단호히 말했고 그때 윤석후가 들어왔다.“딸, 내 사무실은 옆방으로 하면 되겠군.”그가 가리킨 곳은 정호철의 사무실이었다.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호철과 함께 고위 임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호철은 어제 박민정과 만났던 지라 상황을 잘 파악하
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좋아. 한번 해볼게.”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키워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정수미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응.”결정을 내린 후 박민정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연지석은 그녀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일을 맡아보겠다고 전했다.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오후에 병원으로 먼저 들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박민정은 모두 받아들였다.그녀는 유남준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왜 그래?”박민정은 그제야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유남준은 이 일이 제법 의외였다. 하지만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회사를 맡기려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박민정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놀라웠다.박민정은 덧붙였다.“지석이가 그러더라고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후, 유남준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연지석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정수미의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던 주주들까지 급히 병원을 찾을 정도였다.비서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작은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에 계신 분들은 모두 지엔 그룹의 주주들과 고위 임원들입니다. 대표님께서 미리 만나보라고 하셨어요.”정수미가 미리 이들을 불러놓은 듯했다. 나이 지긋한 주주들과 임원들은 그녀를 보고 모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작은 아가씨.”박민정이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수
정수미의 말이 끝나자 박민정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비서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박민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곧바로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는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자신이 없어요.”그러나 정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그냥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생각하면 돼.”“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차라리 윤소현 씨에게 맡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민정이 다시 말했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박민정이 선뜻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정수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에 동생에게 배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민정아, 내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솔직히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나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줄 수 없니?”“소현이는 회사를 경영할 사람이 아니야. 만약 그 애에게 회사를 넘긴다면 지엔 그룹은 끝장날 거야.”“그리고 생각해 봐. 넌 내 친딸이야. 당연히 네가 회사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수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자신의 회사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이 거대한 지엔 그룹을 책임질 수 있을까?“안 돼요. 저는 정말 감당할 수 없어요. 만약 소현 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차라리 전문적인 경영인을 고용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다시 설득했다.“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직접 경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를 도와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네가 나한테 보고하고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어때?”“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서 직접 나설 수도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친딸인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단다.”그 말에 박민정의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래.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거라. 생각이 정리되면 내게 연락해 줘.”그렇게 말한 후, 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
지엔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윤소현이 정수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사실 정수미의 건강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지엔 그룹은 당연히 윤소현의 것이 될 터였다.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병원에서 요양 중인 정수미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윤소현은 회사를 접수하는 한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하나씩 내몰았다. 특히 정수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오래된 간부들은 모두 그녀 손에 의해 잘렸다.며칠 전 유남준이 풀어준 정호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지엔 그룹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면서도 정호철는 그곳에 대한 미련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그는 요즘 병원 근처를 자주 찾아와 멀리서 조용히 정수미를 지켜보곤 했다.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그런 그를 정수미의 비서가 발견했다.“정 매니저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혹시 대표님을 뵈러 오셨나요?”순간 정호철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우연히.”그러나 그의 어설픈 변명이 정수미 곁에서 잔뼈가 굵은 비서를 속일 리 없었다.비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마침 지나가신 김에 들어가 보시죠. 대표님께서 병원에만 계시느라 몹시 지루해하셨거든요.”그렇게 정호철은 반쯤 떠밀리듯 정수미의 병실로 들어서게 되었다.병실에는 약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거북한 냄새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정수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대표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신 겁니까?”정호철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저 평소처럼 앓다가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정수미는 그런 그의 반응이 오히려 우습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이전부터 이랬어. 별일 아니야.”그러면서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지금 시간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