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엄마는 거짓말 안 해. 윤우랑 약속할게. 아빠랑 다시 잘 지내볼 거야.”유남준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박윤우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앗싸! 신난다. 이제 나한텐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네.”박민정은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아들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그녀는 이때까지 자신에게 좋은 선택지만 선택하며 두 아이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아이들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결국엔 어린아이들이었고 완전한 가정을 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기쁜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박윤우는 갑자기 배가 고파져 박민정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만둣국을 사달라고 부탁했다.그 말에 박민정 역시 별다른 생각 없이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병원을 나서기 전, 민수아 일행에게는 아이에게 아무 문제 없다고 전하며 집에 가서 쉬라는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민수아 일행 역시 그제야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 그거 봐요, 제가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러게요.”...병실 안에서는 유남준이 박윤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윤우야, 아빠한테 말해 봐. 엄마랑 아빠가 다시 잘 지내길 바란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었어?”박민정이 먼저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했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몸 상태가 어느 정도 나아진 듯한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말했다.“아빠, 제가 아빠를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좀 마세요.”“그럼 누굴 위한 건데?”유남준이 물었다.“당연히 엄마를 위해서죠. 엄마가 이때까지 혼자 저랑 형 키우느라 고생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곧 있으면 동생도 태어날 텐데, 동생이 태어나면 그 동생도 엄마가 혼자 돌봐야 하잖아요.”박윤우는 큰 눈으로 유남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멍청한 아빠. 지금 제가 아빠를 도와주는 것도 전부 엄마를 위해서라고요. 우리 엄마 잘 안 챙겨주면 나중에는 제가 아빠 가만
그 말에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박윤우의 병실로 향했다.박윤우는 병실로 함께 들어오는 부모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떻게 된 거야, 아가?”박민정이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박윤우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박민정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저는 또 부모님이 싸우고 저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그럴 리가 없잖아. 엄마랑 아빠는 이미 같이 살기로 약속했어.”박민정이 박윤우를 다독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 말에 박윤우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진짜예요?”“당연히 진짜지. 자, 이제 다시 자자.”아이를 보는 박민정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가득했다.“엄마, 엄마랑 아빠가 윤우 옆에 누워주면 안 돼요?”잠시 망설이던 박윤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씻고 나서 옆에 누울게.”“네!”박윤우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박민정 역시 신난 아이를 보며 기뻤다.유남준을 먼저 씻으라며 욕실로 들여보낸 박민정은 같은 침대 위에 누운 부자의 모습을 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박윤우와 유남준이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박민정은 유남준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박윤우를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쁜 감정이 몰려왔다.그녀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박윤우의 곁에 누웠다.“자, 이제 늦었으니까 얼른 자자.”“네!”박민정은 순순히 대답했다.아이는 눈을 감더니 박민정과 유남준의 손을 하나씩 잡아 자신의 작은 몸 위로 올려놓고는 두 사람에게 손을 마주 잡으라는 말을 했다.결국, 박민정과 유남준은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시간이 흐르자 박윤우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박민정은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유남준의 힘이 너무 강했던 탓에 손이 빠지지 않았다.그녀가
“훨씬 좋아졌어요. 조금 더 있다가 유치원으로 갈 거예요.”박윤우가 대답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퇴원하고 집에서 며칠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엄마가 옆에서 돌봐둘게. 조금만 더 나아진 다음에 가는 게 어떨까?”박윤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오늘 유치원 친구들한테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단 말이에요.”박윤우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고, 그 덕에 유치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박민정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유남준이 나섰다.“애가 가고 싶어 하잖아. 보내주자. 담당의도 지금 상태는 좋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잠시 말을 멈췄던 유남준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그래도 걱정되면 내가 따로 사람 붙여서 지켜보라고 할게.”유남준이 말을 마치고 박윤우 역시 간절한 눈빛을 보내니 박민정도 결국엔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좋아. 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하다 싶으면 바로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해.”“네.”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박민정과 유남준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박민정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유치원에 도착하자 박윤우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당부까지 했다.“엄마, 아빠. 두 분 꼭 사이좋게 지내셔야 해요. 싸우지 말고요, 알겠죠?”“알겠어.”박민정은 박예찬만 잔소리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박윤우도 만만치 않은 잔소리꾼이었다.“그래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그리고 아빠, 아빠는 엄마 잘 챙겨주시고요!”박윤우가 덧붙였다.“그래.”유남준은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박윤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차에서 내렸다.유치원까지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박민정은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곁에 있던 유남준이 참다못해 말을 걸었다.“너희 회사로 갈까?”그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대답했다.“네.”그녀는 회사 주소를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유남준의 운전기사가 내비게이션을 통해 회사까지 가는 길을 찍었고
하지만 유남준은 꾹 참아야 했다. 지금 둘만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회사 건물 앞으로 도착하자 박민정은 차에서 내려 유남준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마침 택배를 받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단 민수아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이런 일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가 물었다.“민정아, 유 대표가 너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야?”박민정은 그 질문에 딱히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러면서 민수아가 품에 한가득 안고 있는 서류들을 바라보며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이건 다 뭐야?”“계약서.”민수아가 간단한 대답에 이어 말을 덧붙였다.“참, 인하 씨가 오늘 오전에 법원 갈 거니까 반차 낸다고 전해달래.”“정말 간 거야? 성원 씨가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어?”박민정 역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모르겠어. 오늘 아침에 전화 와서 봤더니 이혼하자고 그러더래.”“그래?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법원 앞.아침 일찍부터 미리 도착해있던 설인하는 혹시라도 방성원이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워 초조하게 마음 졸이고 있었다.그녀는 수시로 시계를 확인하며 안절부절못했다.“벌써 한 시간이 다 지나가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그녀는 몰랐겠지만 근처에 주차된 검은 벤틀리 안에 앉아 있던 남자는 굳은 얼굴로 설인하를 지켜보고 있었다.방성원의 곁에는 김인우가 앉아 있었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리자 짜증이 난 김인우가 물었다.“야, 방성원.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어. 대체 언제까지 기다릴 건데?”그 두 사람 역시 설인하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지만 방성원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해서 법원 앞의 설인하를 지켜보기만 했다.방성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어젯밤부터 방성원에게 끌려 술을 마신 데다가 오늘 아침까지 법원까지 함께 끌려와 짜증이 나 있었다.“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방성원은 냉랭한 시선으로 김인우를 쳐다보며
역시 이젠 자신만의 단단한 날개가 생긴 건데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택시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방성원은 운전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한편, 설인하가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동료들은 설인하를 발견하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그이가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다음에 다시 보재요. 이혼은 다음에 하자고 그러더라고요.”“이게 말이 돼요? 자기가 먼저 오늘 보자고 했던 거면서?”진서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민수아 역시 턱을 괴멸 말했다.“제 생각엔 그 사람, 이혼하기 싫은 것 같은데요.”“설마요? 이혼하기 싫었으면 그렇게까지 말투가 싸늘하지 않았을걸요.”세 사람은 남자의 속마음을 탐구하듯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남자의 마음도 꽤 복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그 순간, 설인하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 민정 씨 지금 유남준 씨랑 화해한 거 맞죠?”박민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요?”“혹시 남준 씨한테 성원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물어봐 줄 수 있어요?”설인하가 말했다.다른 두 사람도 박민정을 바라보며 기대에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박민정은 그에 거절하기 어려운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요, 물어볼게요. 요즘 저랑 남준 씨가 두원 별장으로 이사 가야 할지도 몰라요. 윤우랑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네? 이사 간다고요?”깜짝 놀란 설인하가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이사 가지 말고, 우리랑 계속 같이 살면 안 돼요?”“계속 본가에 살면 불편할까 봐 그래요.”박민정은 친구들이 불편해할까 걱정되어 이사를 고려한 것이었다.사실 그녀 역시 지금의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꽤 즐거웠다.설인하는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아니요, 전혀 안 불편해요. 집이 이렇게나 큰데 유 대표 한 명
윤소현은 아버지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아버지나 알아서 하세요. 이번에 박민호랑 했던 소송도 지셨으면서. 배상금 내는 것도 빠듯한데, 제발 비서랑 놀아나지 좀 마시고 일에 집중하세요.”윤소현의 말에도 윤석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소현아, 난 아직 네가 있잖니. 나중에 수미가 죽으면 걔 재산은 너한테 넘어갈 거고, 그럼 그 돈이 내 돈 아니겠어?”윤소현은 윤석후에게 눈을 흘겼다. 정수미가 죽는다면 윤석후는 또 얼마나 오래 살까?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저도 요즘 쉽지 않아요. 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정수미가 본인 친딸이라고 데려온 함미현한테만 신경 쓰느라 요즘 저한테는 관심도 없거든요.”“아, 맞아. 그 함미현 말이지?”윤석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잔인해지기 시작했다.“딸, 뭘 하든 확실하게 해야 해. 네가 직접 못 하겠다면 이 아비가 사람 구해서 그 여자 처리할게.”그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윤소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왜?”“어차피 그 여자, 정수미 친딸도 아니거든요. 가짜 딸이에요.”윤소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윤석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왜 수미한테 그 얘길 해주지 않는 거야?”“아버지가 뭘 알아요? 지금 얘기한다면 정수미는 진짜 친딸을 찾겠다고 또 혈안이 되겠죠. 저는 정수미가 죽기 직전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때 얘기할 생각이에요.”그때가 되면 정수미도 윤소현에게 미안함을 느낄 것이고 다시 친딸을 찾아 유산을 물려줄 시간도 없으리라 생각했다.그 말에 윤석후는 큰 웃음을 터뜨리며 딸의 어깨를 두드렸다.“역시 내 딸이야. 아주 똑똑해!”그들의 대화가 계속되던 중, 윤석후의 비서가 문을 두드리더니 안으로 들어섰다.“석후 씨, 대표님께서 도착하셨어요.”윤소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비서를 노려보았다.“여기 회사예요. 어딜 감히 아빠 이름을 불러요? 부끄럽지도 않아요?”비서는 그녀의
진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윤소현에게 걸어갔다.“감히 누구에게 ‘아무나’라는 호칭을 쓰는 겁니까?”그녀는 주먹을 쥐었다.윤소현은 고개를 든 채 조롱 가득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여기, 당신들 같은 외부인 말고 또 있나?”화가 치밀어오른 진서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입 조심해!”“내 말투가 원래 이런 걸 어떡해? 당신들이 뭘 어쩔 건데?”뒤이어 윤소현은 문밖의 경비에게 외쳤다.“경비, 누가 이딴 외부인들까지 안에 들이래? 우리 회사 규정 몰라? 아무나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임신 중인 윤소현 때문에 진서연 역시 무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진서연의 팔을 잡으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소현 씨 말이 맞아요. 회사에 아무나 들여서는 안 되죠.”뒤이어 박민정은 진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사람들만 다 부르고 여기 경비 다 빼주세요.”“알겠습니다.”박민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서연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박민정에게는 이제 숙련된 경호원들이 있었고 경호원 한 명이 경비원 두 명보다 강했다.윤소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 회사 보안팀은 왜 건드리는데? 네가 뭔데?”박민정이 민수아에게 눈짓하자 민수아는 곧장 주식 양도 계약서를 꺼냈다.“그야 이분이 박 대표님, 그러니까 이 회사 최대 주주기 때문이죠.”민수아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이 회사 이름도 이젠 YN 그룹이 아니라 XS 그룹의 자회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진짜 외부인은 그쪽들 아닌가요? 제가 기억하기론, 이 회사 윤 대표가 주식을 다 팔았다고 알고 있는데. 주식도 없고, 경영 능력도 없으면서 여기 계속 남아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민수아는 계속해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그리고 윤소현 씨, 당신은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니잖아요.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진서연은 민수아의 말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설인하 역시 민수아의 말에 감탄하며 앞으로 민수아에게서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박민정
YN 그룹 내부.박민정은 고위급 회의를 소집해 회사의 향후 운영에 대해 정리하고 윤석후를 포함한 그의 측근 몇 명도 함께 해고했다.그녀는 80%의 지분을 보유한 동시에 100%의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게다가 윤석후의 측근 외에는 회사 고위층 전부 아무런 이익을 얻은 적이 없었던 터라 그들도 기꺼이 새로운 대표를 맞이했다.회의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되어 있었다.“자, 이제 집에 돌아가서 저녁 준비합시다.”회의할 때의 날카로운 모습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박민정이 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그래요.”모두 회의실을 떠났다.하지만 설인하만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 저 조금만 더 남아서 일을 배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최대한 빠른 독립을 원하는 설인하를 알고 있던 박민정은 그런 그녀를 굳이 막지 않았다.“그래요. 일하다 힘들면 얼른 퇴근하고요.”“네.”설인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그, 은정이 좀 부탁할게요.”“걱정 마요.”진서연이 대답했다.박민정과 민수아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는 베이비시터도 있었고 선생님도 있었던 터라 그저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만 확인하면 되었기 때문에 크게 손이 가는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설인하는 그들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만약 이 여자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바뀌지도 못했을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저녁 준비를 시작하며 유남준에게 간단한 집밥을 차릴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 무렵, 유남준은 회의 중이었다.회의하던 중, 유남준의 휴대폰이 울렸다.회의 중에는 모두가 당연히 휴대폰을 진동도 아닌 무음으로 해놓아야 했다.진동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휴대폰을 꺼놓는 것을 깜빡했을 거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기 시작했다.유남준 역시 뒤늦게 박민정이 본인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그는 현재 본인의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회사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고객을 위해 차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이 그녀는 박민정의 자리로 가서 그녀가 마시던 물컵에 무언가를 몰래 넣었다.차를 준비하고 돌아온 박민정은 별 의심 없이 물을 마신 뒤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주영리는 여유롭게 말했다.“민정 씨, 잠시만 기다려요. 곧 다른 고객들이 올 거예요. 혹시 민정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알겠습니다.”박민정은 주영리의 지시를 거절하기 어려워 자리로 돌아와 기다리기로 했다.그 사이 주영리는 회사 입구로 내려가 최 사장을 맞이했다.“최 사장님,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가 밝은 미소로 맞았다.최 사장은 그녀 뒤를 둘러보며 물었다.“민정 씨는? 준비됐다더니?”주영리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아직 위층에 있어요. 아직 신입이라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곧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호텔도 이미 준비해뒀어요. 근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곳으로요.”최 사장의 얼굴에 즉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역시 주 비서야.”“별말씀을요.” 주영리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위층에서는 박민정이 물을 마신 뒤 갑자기 극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생각하며 고객이 오기 전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였다.잠시 후 주영리와 최 사장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든 박민정을 발견했고 주영리는 최 사장에게 조용히 손짓하며 그녀를 데리고 내려가 차에 태웠다.반쯤 깨어난 박민정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눈을 뜨려고 애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들었다.“어떻게 이렇게 깊이 자는 거지?”“깊이 안 자면 사장님께서 어떻게 즐기실 수 있겠어요?” 주영리는 웃으며 대답했는데 그 말에는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수의 쾌감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박민정에게 자신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박민정은 소파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 통증이 한결 나아진 것을 느꼈다.간단히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 통증을 다스린 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전화를 여러 번 했고 문자도 몇 개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박민정은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금세 연결되었다.“민정아, 왜 이제야 전화를 받아?” 유남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미안해요. 어제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어요. 전화 소리를 못 들었네요.”박민정은 어제 다리가 아팠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그제야 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괜찮아. 아무 일 없으면 됐어. 나 오늘 저녁 비행기로 돌아갈 거야.”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급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일에 더 집중해요.”자신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었다.“일이 중요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도 중요해.” 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말고 저녁에 보자.”“알겠어요.”박민정은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박민정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는데 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오빠가 오면 이걸 보고 또 걱정하겠지.’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상처 부위에 숨을 불어넣었다.“빨리 나아야 할 텐데.”그렇게 그녀는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은 뒤 절뚝거리며 회사에 갔다.한편, 유남우는 해외 출장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윤소현은 끝까지 그를 붙잡아두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며칠 전 누군가 유남우에게 보낸 메시지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 탓인지 그녀는 출국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유남우를 따라가게 했다.“남우 씨를 잘 감시하세요. 특히 남우 씨 곁에 있는 여자들, 그게 누구든 보고하세요. 알겠죠?” 윤소현은 전화기 너머로 단호히 말했다.“네. 걱정 마세요.”“좋아요.”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해외 회사.박민정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보니 책상 위에 작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박민정은 매니저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매니저님, 이게 농담인가요? 만약 회사가 직원들에게 고객 접대를 의무로 여기고 그런 자리에서 신체 접촉까지 용인한다면 저는 이런 회사에 남을 생각이 없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단호히 자리를 떠났다.매니저는 황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민정이 이렇게 단호하고 고집스러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한편 최 사장은 박민정이 떠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뭐야? 그냥 가버린 거야?”매니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신입이라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불러 같이 술자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하지만 최 사장은 테이블 주위의 다른 여직원들을 훑어보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소리야? 아무나 데려와서 우리를 대충 넘어가려는 거야?”매니저는 난처해졌다. 이미 박민정이 돌아올 리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미모가 뛰어난 주영리를 향해 손짓했다.“주 비서,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주영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했던 것은 완전히 잊은 듯 얼굴 가득한 부끄러운 미소를 띠고 매니저 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세요, 매니저님?”매니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장님들께 술자리 접대를 좀 부탁할게. 특히 최 사장님께 신경 좀 써주면 좋겠어.”주영리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능숙하게 사장들에게 아첨하며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고 사장들의 불쾌한 손길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최 사장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최 사장은 주영리에게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주 비서, 아까 무대에서 춤췄던 신입, 그 사람과 친한가?” 최 사장이 이렇게 묻자 주영리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원래는 별로 친하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최 사장의 눈빛을 보고 곧 말을 바꿨다.“같은 부서 동료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부하직원이기도
주영리는 그 순간 무용 선생님에게 뺨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선생님 뒤에는 매니저 남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억울함을 꾹 삼키며 모든 잘못을 무대 위에 있는 박민정에게 돌렸다.‘좋아, 아주 좋아!’‘네가 날 이렇게 몰래 괴롭히다니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주영리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다짐했다.한편, 박민정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무용 선생님이 자신을 위해 주영리에게 억울한 일을 시켰다는 것도, 그녀가 몇 날 며칠을 공연을 위해 헛수고했다는 것도 알 리 없었다.무대 위에서 박민정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우아하고 고혹적인 춤사위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사장들이 많았다.“저 주연 무용수는 누구야? 정말 예쁘게 생겼네. 몸매도 완벽하고.”“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이름은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술을 따르던 매니저가 재빨리 대답했다.“오호, 공연 끝나면 우리 테이블로 와서 같이 밥 먹으라고 해.”한 사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매니저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알겠습니다. 공연 끝나면 바로 데려오겠습니다.”춤은 금세 끝났고 박민정은 고통을 꾹 참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하지만 매니저가 그녀를 붙잡았다.“박 비서, 몇몇 사장님들이 박 비서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하셨어. 그분들과 식사를 같이 해.”매니저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지만 박민정은 그의 진짜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죄송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게 편합니다. 게다가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실수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하지만 매니저는 물러서지 않았다.“걱정 마. 박 비서는 예쁘니까 뭔가 잘못 말해도 사장님들이 화낼 일 없을 거야. 오히려 더 좋아하시겠지.”그러면서 음성을 낮춰 말을 덧붙였다.“만약 이번에 잘하면 복귀 후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야. 보너스도 넉넉히 챙겨줄 거고.”매니저는 박민정을 억
“왜요?” 주영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주연 무용수를 다시 맡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필요 없다니.“더 잘 추는 사람을 찾았거든.” 무용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사실 선생님은 박민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이 말이 주영리의 분노를 더욱 부추겨 이후 박민정이 큰일을 당할 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주영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무대에 오를 거야. 보면 알겠지만 정말 주 비서가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이더라.” 무용 선생님은 담담하게 말했다.주영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지금껏 동료들에게 자신이 주연 무용수로 공연한다고 떠벌렸는데 이게 모두 헛소리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도대체 누가 그녀를 대신하게 됐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호텔 밖에서는 고급 차들이 하나둘씩 도착하며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차에서 내렸다.박민정의 회사 사장인 제임스는 특별히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은은한 고급스러움을 자랑하는 한 대의 링컨 차량이 천천히 호텔로 들어섰다.이를 본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고 그는 직접 차량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유 대표님.”차에서 내린 사람은 유남준이었다. 그는 제임스와 간단히 악수를 나눴다.“유 대표님,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전용 룸을 준비해뒀습니다. 함께 가시죠.”“좋습니다.”제임스는 유남준을 모시고 2층의 특별실로 향했다.이를 지켜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젊은 외국 남성에게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저 사람 누구야? 사장님이 저렇게 친절한 건 처음 보는데?”“몇 년 전 협력 파트너라고 하던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래.” 누군가가 대답했다.“외모도 멋지네. 설마 대기업 대표일 줄이야.”직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그때 박민정이 그들 앞을 지나며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고 무심코 유남준이 사라져간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곧 시야에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