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민은 한참을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그녀는 이미 끝없는 분노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침착함을 잃은 지 오래였다!“어서 해치워! 뭐 하는 거야?”“죽이라고! 어서!”그녀는 순간 자신도 끝장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차손녕은 죽었고 클레오도 죽었다.살인마도 죽었고 브라흐마 아샴도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그녀는 이 사람들의 죽음에 분명히 책임을 져야 했다.그렇지 못하면 아마도 앞으로 무성에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지금 김규민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온몸이 분노에 휩싸였고 패왕파 패거리들은 일제히 총구를 돌려 하현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그러나 아무도 감히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그러자 김규민은 서슬 퍼런 얼굴로 계속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전화를 거는 사이 바깥에선 어느덧 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김규민은 오늘 밤 하현과 끝까지 싸울 준비를 단단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현을 죽이고 싶었다.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와 손을 뻗어 김규민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야?”“신고하는 방법 몰라?”“아니면 신고할 마음이 없다는 거야? 내가 해 줘?”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만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하현이 만천우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본 김규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나 김규민은 하현이 만천우를 불러들일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그녀는 계속 군대를 부를 것이고 하현과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하지만 30분도 되지 않아 완전 무장을 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수사관들이 술집에 몰려들어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통제했다.수사관들을 본 영지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팀을 이끄는 사람이 만천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만 씨 가문은 무성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가장 공평하고 공정한 가문으로 정평이 나 있다.수사관들은
만 씨 가문은 어르신부터 아래로는 두 형제까지 모두 관청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관청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이다.이 사건의 피해자인 영 씨 가문이 가만히 관청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가문들이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정신이 번쩍 든 만천우는 얼른 취조실을 나섰다.두 시간 후 만천우는 다시 나타났고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하현, 일이 다 처리되었어요.”하현의 옆에 서서 만천우는 공손하게 사건의 결과를 보고했다.“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였음이 밝혀졌습니다!”“당신은 무죄로 풀려날 것이고 경찰서에서는 당신에게 훌륭한 시민상을 수여할 거라고 하는군요.”만천우의 말에 하현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그럼 다른 사람들은?”“영지루 일행은 피해자이니 당연히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겁니다.”“인도인 일행은 중죄를 저질렀지만 외교적 면책특권이 있기 때문에 잠시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을 뿐 출국은 절대 불가능합니다.”“김규민은 악인을 도왔으니 잠시 억류된 상태로 수사 결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하구요.”“브라흐마 아샴은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긴 하지만 파란 알약을 과다 복용한 탓에 심근경색과 뇌졸중에 걸려 지금은 산송장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그래서 경찰에서는 당분간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고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모든 절차는 법에 따라 이뤄질 거구요.”그동안 있었던 과정을 막힘없이 말하던 만천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법과 규칙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괜찮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적어도 만 씨 가문은 김 씨 가문, 용 씨 가문, 황금궁과 인도인의 세력 때문에 이 일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으니까.”“이런 일이 생길 때면 만 씨 가문은 항상 외로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지.”“그러나 만 씨 가문에 대한 기관의 신뢰
무성경찰서 문밖에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하현이 경찰서에서 걸어 나오자 차문이 열렸다.이어서 아름다운 실루엣이 차에서 나와 환한 미소를 머금고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하현, 당신 드디어 나왔네!”“당신이 못 나오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거야.”영지루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의 신분으로 밀어붙였다면 아마 전화 한 통으로 하현은 무죄 석방되었을 것이다.하지만 때론 신분이 너무 높아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TV나 영화에서 간혹 나쁜 사람들은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손발이 묶이는 이유이기도 하다.결국 어떤 사람들은 법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그래서 처음부터 영지루는 하현을 무죄로 석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문의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녀가 자신의 강력한 신분을 앞세워 하현을 구해내려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모자를 찾아내 외적과 내통한 물증을 찾아내고 재판에 회부했을 것이다.어쨌거나 다행히 하현은 무죄로 풀려났다.무성에는 아직 법과 정의가 통한다는 방증이었다.김규민이 나중에 보석으로 풀려나더라도 잠시 억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법의 승리를 말해 주기 충분한 증거였다.“천만에! 난 정의를 위해 용감히 맞섰고 그 모든 행동은 정당방위였을 뿐이야. 풀려나오지 못하는 게 더 우스는 거 아니야?”하현이 능청스럽게 농담을 하며 영지루의 말을 받았다.“게다가 영지루 당신이 있는데 누가 날 건드릴 수 있겠어?”영지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현, 당신도 아마 내 신분을 알 거야.”“내가 당신을 감싸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어젯밤 당신이 날 구해줬지만 난 당신을 보호할 방법이 없었어. 때로는 나의 이 신분이 짐처럼 느껴져.”하현은 웃으며 손을 뻗어 영지루의 어깨를 툭툭 쳤다.“영지루. 당신의 출생, 지위, 신분은 당신이 법의 정의 아래 떳떳한 행동밖에 할 수 없게 만들었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
하현은 영지루의 진지한 표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보아하니 자신이 그녀의 성의를 거절한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끝에 하현은 마지못해 승낙했다.그러면서 그도 기회를 봐서 뭔가로 답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어쨌든 두 사람은 이제 친구라고 할 수 있으니 당연히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하현은 영지루의 점심 초대에는 완곡히 거절했다.영지루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의 눈빛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하현이 영지루의 생명의 은인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 경호원들은 하현과 영지루의 거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날이 선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영지루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하현은 경호원들의 매서운 시선에는 개의치 않았다.신분이 신분인 이상 영지루는 신변의 보호를 확실히 받아야 했다.어젯밤 일이 있은 후 영지루의 아버지는 영지루가 낯선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게다가 하현도 영지루의 집안의 지나친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다.어쨌든 하현은 지금 병부 대장로의 자리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9대 병부 총교관의 명예에도 미련이 없었다.그는 단지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며 과거 설은아에게 소홀히 대한 것을 메우고 싶을 뿐이다.영지루와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아서 그는 택시도 잡지 않고 그냥 공유 전기차를 몰고 도끼파 본거지가 있는 동네로 돌아왔다.오는 길에 하현은 무성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곰곰이 복기했다.현재 집법당을 장악하는 것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용인서의 몸이 위독하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용 씨 가문에는 세 명의 유력한 후계자가 있었다.하현은 그중 용천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용천오는 용 씨 가문 문주와 용문 문주에 오를 자격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그러나 지금 인도인들은 무성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하현은 정황상 용문대회에서 일단은 1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용문 문주 자리를
하현은 술집에서 일어난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자신이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김 씨 가문이 바로 손을 쓸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것으로 김 씨 가문이 얼마나 이 일에 화가 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김 씨 가문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최고 가문이 타격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게다가 그들은 인도인과 아직 협력할 일이 많은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인도인들에게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이후에 있을 협력에 많은 잡음이 일어날 것이다.이것은 김 씨 가문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 김 씨 가문이 그런 수준이든 뭐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우린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이때 도요타 엘파 뒷좌석 문이 천천히 미끄러졌다.그리고 연미복에 회백색 머리카락을 모두 빗어 넘긴 노인이 천천히 걸어왔다.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젊은이, 당신이 우리 김 씨 가문을 괴롭힌 순간부터 이런 결과가 있을 줄 생각했었어야지.”“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오늘 우리가 여기 온 건 당신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당신을 적당히 다치게 한 뒤 선봉사 사람들한테 넘기려는 거야. 그 이후엔 선봉사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씨 가문이 우리 김 씨 가문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데 우리도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지.”“그러니 우리 김 씨 가문이 스스로 본때를 보여주는 수밖에.”김 씨 가문 집사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 아우라를 풍겼다.방금 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회백색 올백머리를 한 이 남자는 김 집사로 불렸고 김 씨 가문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다.오늘 밤은 하현을 괴롭히는 일을 맡은 모양이었다.하현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김 씨 가문에서는 무학의 성지의 주인을 배출한 집안이었지.”“그런데 결국 아무런 원칙도 없이 인도인의 앞잡이로 전락했군.”“당신네 김 씨 가문이 궁주의 체면을 구
”내가 당신한테 그런 기회를 줄 것 같아?”“어서 이놈을 쳐!”두 남녀가 동시에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으스스한 기운을 뿜어내며 하현에게 달려들었다.하현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날 죽이려는 거야?”“꿈도 야무지군!”말을 마치며 하현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정 그렇다면 뭐. 시간 낭비할 거 없지!”“당신들도 그들처럼 같이 저승길 가든가!”“뭐? 같이 어딜 가? 정말 내가 나서길 바라는 거야?”김 집사가 사납게 웃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들 셋이 해치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그들은 하현을 향해 십여 개의 화살을 쏘았다.하현은 상대방이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숨기고 있는 무기가 꽤나 대단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오히려 몇 걸음 뒤로 살짝 물러섰다.“쾅쾅쾅!”하현의 소매 끝을 살짝 벗어난 화살은 뒤에 있는 화분에 적중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하현이 뒤로 물러나자 세 사람도 함께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세 사람의 몸놀림은 번개처럼 빨랐다.불빛 속에서 하현이 물러서려는 것을 보고 세 사람은 이미 그의 옆으로 달려가 손을 뻗어 하현의 손과 발을 잡으려고 했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젖힌 뒤 빠른 속도로 세 사람의 일격을 피했다.“솩!”하현은 얼른 칼날을 번쩍이며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순간 두 남녀의 안색이 일그러졌다.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얼른 뒤로 물러나 날카로운 칼날을 피했다.그러나 칼날의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몸은 피했으나 그들의 옷이 찢어졌고 몸에도 얕은 칼자국이 생겼다.방금 몇 분 전만 해도 그들은 하현을 단칼에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뒷짐을 지고 관망하던 김 집사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하현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
북해 세 호랑이 중 왼쪽에 서 있던 남자는 사납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김 씨 가문의 일에 오지랖 떠는 건 봐 줄 수가 없어!”만천우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순간 그는 한 걸음 내디디며 칼날을 휘둘렀다.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칼날은 번개처럼 날렵했다.그러자 옆에서 입을 열려던 남자는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다.칼날이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그는 만천우가 휘두르는 칼이 그다지 빠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칼날이 만천우보다 훨씬 느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도대체 왜일까?만천우의 칼날은 실제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간단히 말해 만천우의 칼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남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그가 이를 악물고 손을 흔들자 소매 속에서 화살이 날아갔다.사람들은 이제 만천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원래 같았으면 천지가 무너질 것 같은 광경이 펼쳐져야 했는데 갑자기 남자는 온몸을 움찔하더니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그의 가슴에서는 혈흔이 번지며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단칼에 격파한 것이다!이런 무시무시한 실력은 듣도 보지도 못했다.쓰러진 남자를 바라보던 만천우는 왼손 검지를 뻗어 당도의 칼끝을 쓱 그으며 말했다.“하현, 참 가소롭네요.”“은퇴 후 몇 년 동안이나 손을 쓰지 않았더니 이런 사람들 눈에는 내가 손쓸 능력조차 없어 보였나 봅니다.”“정말 집안 망신이 아닐 수 없어요.”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망신은 무슨 망신! 당신 칼끝은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 보이는구만 뭘. 보아하니 내가 몇 년 동안 가르친 것을 하나도 잊지 않은 것 같군.”“하현, 과찬이십니다.”만천우는 총교관의 칭찬 한마디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개자식! 감히 내 형제를 건드리다니!
”뭐? 정체를 밝히라고?”“마치 내 정체를 밝히면 당신들이 복수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벌써 몇 번이나 죽었을 거야.”만천우는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만천우의 칼날에 남은 십여 명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희번덕이며 만천우를 노려보았다.그들의 손에는 모두 안전장치가 풀린 총이 들려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이상하리만큼 총이 무겁게 느껴졌다.하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그가 은퇴했을 때 만천우도 은퇴를 선택했었는데 그때 만천우는 아직 전신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그런데 오늘 보니 만천우는 어느 정도 전신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분명 만천우는 은퇴 후에도 열심히 칼솜씨를 연마한 것이 틀림없었다.만천우의 현란한 칼솜씨를 보고 하현은 너무나 흡족했다.스스로 손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누가 이렇게 잘난 척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만 서장님이셨군!”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김 집사는 마침내 사복 차림의 만천우를 알아보았다.“무성경찰서장이 된 만천우가 칼솜씨가 좋다는 소문은 들었지.”“그런데 난 늘 그렇게 생각했지.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가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고.”“하지만 오늘 보니 과연 듣던 대로군!”김 집사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비록 만천우를 알아보긴 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김 씨 가문이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대상은 강한 외지인들이었다.만천우 같은 사람은 실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의 가문은 무성에 있다.이런 상황에서 만천우는 절대로 김 씨 가문을 상대로 싸움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절대로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김 집사가 전면으로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그런데 만 서장, 당신이 이놈과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이렇게 나서는 거야?”“당신이 비호할 만한 가치가 있어?”“이렇게 하면 우리 김 씨 가문과 당신 가문이 철저
”여수혁?”하현은 여음채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그가 이 병원 대주주인 동시에 당신의 뒷배라고?”“그래! 알고 나니 이제야 겁이 나?”“무서운 줄 알면 이제 무릎 꿇고 내 신발 밑창을 핥아!”“그리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여수혁도 당신한테 살길을 열어줄지도 모르지!”“그렇지 않으면 당신 오늘 재수 없을 줄 알아!”여음채는 경멸하는 기색을 한껏 드러내었다.하현이 남양 무맹과 여수혁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전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했다.강옥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여수혁은 남양 무맹주가 총애하는 제자야.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의 부문주라서 건드리기가 쉽지 않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어릿광대일 뿐이야.”“뭐? 어릿광대?”하현의 말에 여음채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그런 용기를 줬는지 모르겠군! 흥!”“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이 사람은 페낭 무맹의 부맹주 아들이야!”“이 사람은 페낭 무맹 장로가 아주 아끼는 제자라구!”“게다가 남양 무맹이 페낭 무맹에 파견한 제자라고!”“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딜 가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뿐만 아니라 실력도 비할 데 없어!”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예닐곱 명이 걸어와 소리치며 하현을 향해 멸시하는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야, 너 오늘 큰일 났어!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우리가 당신 목숨뿐만 아니라 가죽까지 싹 벗겨버릴 거거든! 하하하!”이 사람들은 하현이 무슨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원하는 대로 칼질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험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은 더욱 경멸하는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 같은 외지인이 감히 그들 같은 거물들한테 입을 놀리다니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하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외지인 관광객 주제에 너무 오만하고 포악하지 않는가?진 반장이 이미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려는데 여전히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려고 하다니, 이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진 반장은 얼굴을 가리고 일어나 하현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어 진 반장은 순간 분노했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젊은이,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니야?”“퍽!”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또다시 뺨을 때리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대단하게 나한테 큰소리쳤다는 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도리도 잘 안다는 뜻 아니셨나?”“이렇게 간단한 이치도 몰라?”진 반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생각 같아서는 하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는 소리 없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잘못했어!”그는 하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구봉이 전화를 건 정종화 총경이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감히 이런 상황에서 어찌 그가 하현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상대방의 사과를 들은 후에야 하현은 앞으로 나와 그의 오른쪽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진 반장은 그의 무리들을 데리고 쏜살같이 꽁무니를 뺐다.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들은 하현이 진 반장을 내쫓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진 반장 일행이 꽁무니를 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 반장의 얼굴까지 때렸다.“내가 당신을 얕잡아 본 것 같군. 당신이 이렇게 큰 뒷배를 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진 반장이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여음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를 흘렸다.“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당신 뒤에 얼마나 큰 거물이 있든 간에!”“페낭 병원의 뒷배가 훨씬 강할 거야!”“날 건드려?! 흥! 두고 봐! 당신은 죽
선두에 선 남자를 보자 여음채는 안색이 환해졌다.그리고 나서 얼른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진 반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바로 저 자식이에요. 저 자식은 우리가 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때린다고 호도하고 있어요.”“게다가 내 아랫배까지 걷어찼다구요!”“저놈을 반드시 감옥에 가둬 주세요. 그 안에서 제대로 반성할 수 있게요.”여음채는 하현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부일민 일행도 모두 큰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하현이 억지를 부린다고 한마디씩 보탰다.“뭐? 감히 병원에서 원장님을 때려요?”“대낮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법도 뭣도 없답니까?”진 형사는 하현의 얼굴을 주시했고 곧바로 그가 남양인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그러자 얼굴이 싸늘하게 바뀌며 비아냥거렸다.“이봐, 어서 저놈을 데려가! 모질게 심문해! 지독하게 조사해!”“감히 반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법으로 다스려!”하현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진 형사를 쳐다보았다.“당신은 어쨌든 형사반 반장이면 경찰서를 대표해서 일을 해야죠.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일을 어떻게 하든 당신 같은 사람이 날 가르칠 건 아니지!”“당신이 먼저 사람을 치고 법을 어겼어. 그러니 법 집행자로서 당신을 연행하는 건 당연한 거야!”“물론 당신도 저항하는 길을 택할 수 있어!”“하지만 저항한 결과는 내가 당신을 한 방에 죽이는 거야!”진 반장은 언성을 높였고 눈을 부릅뜨고 하현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하현은 손을 들어 진 반장의 오른손을 막은 뒤 담담하게 하구봉을 쳐다보며 말했다.“전화 걸어.”하구봉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하현이 말하는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건너편에 냉랭한 목소리가 전해오자 하구봉은 핸드폰을 진 반장에게 건네주었다.“당신의 직속 상사가 전화를 받아
하현은 여음채의 말을 듣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페낭은 정말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이렇게 공공연하게 정경유착이 만연할 줄이야!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여음채는 순간 하현이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여음채는 다시 의기양양한 기운을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하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왜? 무서워?”“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봐줄 수도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구.”“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기다리는 건 억세게 불행한 일들뿐일 거야!”말을 하는 동안 여음채는 부일민에게 손짓을 하며 다른 의료진과 경호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하현 일행을 겹겹이 에워쌌다.기세등등하게 하현 일행을 노려보고 있는 그들 무리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사나운 모습이었다.이 광경을 본 여음채는 더욱 득의만만해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봐, 이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어서 사과하고 내 신발 밑창을 개처럼 깨끗이 핥아!”“그렇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부터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야!”강옥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하구봉은 콧방귀를 뀌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주위의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현에게 다가올 불운을 생각하며 탄식했다.아무리 거세게 싸운다고 해도 경찰관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설마 하현 일행은 법이라도 어기려는 건가?하현은 냉담한 얼굴로 여음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내가 감옥에 갈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어떻게 이익만 챙기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거야?”“멀쩡한 병원이 사기꾼 소굴이 되어 관광객을 속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군.”“당신들 오늘 잘 만났어. 당신들은 이제 좋은 날 끝났어.”“이 병원, 망하게 해 줄게.”하현의 말을 들은 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그녀들은 허
잠시 후 넋이 나간 듯 멍하던 여음채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 감히 날 걷어차?”“내 엄마가 누군지 알아?”“당신은 누구야? 의료 윤리를 저버린 원장 아니야?”하현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때린 건 당신이야.”“뭐?”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현의 목소리와 행동에 여음채는 화가 치밀어 올라 하현을 가리키며 호통쳤다.“모두 저놈을 죽여!”“일이 터지면 내가 다 수습할 거야!”그녀의 말에 수십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납게 웃으며 하현을 에워쌌다.강옥연은 이런 막무가내 인사를 본 적이 없었다.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강옥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조심해!”그녀의 말을 들은 부일민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우리 원장님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살아남지 못해!”예쁘장한 간호사들은 앳된 얼굴로 눈을 흘기며 거들었다.“흥! 조심해 봤자 소용없어! 죽어야 해!”주위를 둘러보던 환자와 의료진들도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하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여음채의 인품이 별로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영향력과 인맥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이 페낭 병원에서 누가 감히 그녀한테 대들 수 있겠는가?아무 물정 모르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하필 여음채를 건드리다니!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이때 선두에 선 경호원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하현에게 다가왔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까딱 꺾으며 광분한 사냥개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놈아!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워?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어디다 둔 거야?”“퍽!”“앗!”경호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현은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휘둘러 그를 내동댕이쳤다.맨 앞에 있던 경호원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기절하고 말았다.기절했어?!이 광경을 보고 놀
앞뒤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음채의 모습에 강옥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뭐가 모욕이에요?”“당신들은 환자를 구하고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데 환자를 구하기는커녕 무슨 스타가 나타났다고 부리나케 쫓아다니지 않았냐구요?!”“응급실에 30분씩이나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보증금은 돌려주지 못하겠다니요?”“당신들 같은 병원이 무슨 의료 윤리 의식이 있겠어요?”“병원이 아니라 사기 소굴이에요!”강옥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식약청에 고소할 거예요!”하현은 침착한 눈빛으로 여음채의 표정을 살피다가 하구봉에게 원가령의 안전을 보호하라는 손짓을 했다.아마도 강옥연의 강경함에 여음채는 일을 처리하기가 좀 곤란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여음채는 눈빛이 서늘해지더니 달려오는 수십 명의 경비원들에게 하현 일행을 포위하라고 손짓하며 지시했다.이어 그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으며 다가와 말했다.“우리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고 잘못을 하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 그리고 내 신발 밑창을 깨끗이 핥아. 그뿐만 아니라 우리 부일민 의사에게 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이 일은 이대로 덮어 두겠어!”“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칠흑 같은 남양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1년 반 동안 안에서 통곡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게 될 거라고!”분명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여음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능수능란했다.어떤 외국인이라도 감히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이런 꼴을 당했을 것이다.부일민 일행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린 채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큰소리 뻥뻥 치더니 하현이 아주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페낭 거물도 아닌데 감히 페낭 병원에 와서 행패를 부려?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는 거지!강옥연은 한기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은 아주 법도 뭣도
응급실에 있던 원가령은 아직도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원래 같았으면 벌써 위를 씻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었지만 의료진은 그녀를 병상에 눕혀만 놓고 방치한 것이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원가령의 위를 몇 번 누른 다음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하구봉에게 쓰레기통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원가령은 술을 모두 토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강옥연에게 응급실의 소독약으로 간단하게 원가령의 상처 부위만 소독한 뒤 휠체어를 구해 원가령을 실었다.그리고 하현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남양 말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분명 경비원들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구봉에게 눈빛을 보냈고 하구봉은 지체 없이 한 걸음 내디디며 한 발로 세게 문을 걷어찼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응급실 문이 벌컥 열렸다.예닐곱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뛰어들려다가 튕겨나가는 부일민과 부딪혀 난장판이 되었다.비슷한 시각 복도 끝 쪽에서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는 여자가 맨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몸매가 유려했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걸어왔다.앳된 간호사 몇 명은 이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 중년 여자는 페낭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이 센 원장, 여음채였기 때문이다.여음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우리 병원에서 소란을 피워? 눈도 없어?”“원장님, 외지 사람들이 와서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우리가 의술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사람을 때리고 응급실 문을 발로 차고 있어요.”“우리는 모두 들어가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환자를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합니다!”“이건 아주 우릴 무시하는 거죠!”넘어져 있던 부일민은 여음채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하현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고자질
부일민은 더욱 냉소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앞에서 귀에 거슬리는 그런 말은 해도 되지만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한번 지불한 돈은 환불되지 않아요.”“사람이야 얼마든 데려가도 되지만 보증금 천만 원은 돌려주지 않습니다!”“그럼 어서 물러가세요!”“여기서 방해하지 말구요!”의사의 오만방자한 말에 강옥연은 얼굴이 싸늘해졌다.“살리기는커녕 환불도 안 된다구요?!”“내가 당신들 고소할 거예요!”“고소?!”부일민은 여간호사 몇 명과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떤 사람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강옥연이 고소라는 말을 꺼내도 그녀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분명했다.어차피 페낭 병원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소? 그래 하세요!”부일민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벽에 붙은 전화번호를 가리켰다.“국민신문고, 식약처, 경찰서, 등등, 전화번호들이 여기 다 있으니까!”“아무데나 전화해서 아무나 불러 보세요!”“사람을 불러서 날 고소해 보세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대하 촌놈들이 감히 우리 남양 땅에 와서 거드름을 피우며 위세를 부리고 있어?! 흥!”“당신들이 전화를 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부일민은 한껏 코웃음을 쳤다.그들은 이미 관광객들을 등쳐먹는 데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관광객이 신고해도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당신들 제정신이에요!”강옥연은 눈을 부라렸다.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때 하현이 앞으로 나와 강옥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강옥연, 어쨌든 당신은 용문 사람인데 어떻게 기본적인 도리도 몰라?”“뭐라고?”강옥연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도무지 하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그냥 얼굴을 두들겨 맞아야 알아듣지.”
황천화 일행을 해결하고 하현은 강옥연에게 전화를 한 뒤 택시를 타고 페낭 병원으로 향했다.페낭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가 호화로웠다.거리마다 홍보 간판이 걸려 있는 병원다웠다.다만 의술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고 보감 그룹 병원에 속하며 페낭 현지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보통은 관광객을 속이고 사기를 쳐서 이익을 남기는 병원이었다.그리고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기를 당해도 신고할 길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하현은 오는 길에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강옥연도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병원에 가게 된 것을 그녀의 잘못만이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하현과 하구봉은 곧바로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 복도에서 강옥연을 찾았다.“하현.”하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강옥연은 급히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긴 했지만...”강옥연이 말끝을 흐렸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응급실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대여섯 명의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중 두세 명은 외상을 입고 낮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그러나 응급실 안에는 의료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내가 원가령을 데리고 왔을 때 의료진은 어떤 유명 연예인이 다쳐서 나간다고 했어.”“이곳의 한 인플루언서 스타가 영화를 찍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급하게 응급실 의료진이 갔어!”“곧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보증금 천만 원을 먼저 내라고 했어.”“그래서 보증금을 내고 30분째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도 안 와...”강옥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하현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보감 그룹 산하 병원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가 다른 의료진을 찾아보려고 하자 강옥연이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하현, 내가 가서 재촉해 볼게.”강옥연은 혼자서 달려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