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를 압박하던 하구천의 연극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 일은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으로 넘기며 하문준은 더 이상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하구천도 떠났으니 이 일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될 것으로 보였다.그리고 사여빈 측에서는 대규모의 친위대를 각 방면에 보내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시했다.하현은 어깨를 으쓱한 뒤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눈앞에 펼쳐지는 바다와 푸른 하늘의 조우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하현은 아까 하인이 가져다 놓은 아침을 먹으며 오전 내내 방 안에 앉아 있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하현은 1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방문이 열리자 언제 한복으로 갈아입었는지 말끔한 모습의 사여빈이 눈앞에 서 있었다.“하현, 문주께서 식사나 간단히 하자고 부르시는데 시간이 괜찮으실까요?”눈앞의 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조각처럼 깎아 놓은 얼굴에는 옥처럼 매끈한 빛깔이 반짝거렸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강인하고 다부진 인상이었다.하현은 당난영의 대범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아름답고 고운, 게다가 강인하고 다부진 인상의 여자를 하문준 곁에 비서로 두다니!당난영은 문주 부인의 위치가 불안하지도 않은 것일까?하현이 넋을 잃은 듯 빤히 쳐다보자 사여빈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현, 시간이 괜찮으십니까?”“문주께서 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분명 그녀는 하현의 경력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그가 용문 집법당 당주이든 하 세자든 사여빈 같은 위치의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지난밤과 오늘 아침 일을 겪은 후 사여빈은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콧대 높은 사여빈이 이렇게 공손히 그를 대하며 문주와의 식사 자리에 그를 초대하겠는가?하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하현 같은 사람도 지금 이 순간에는 칭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맛있습니다.”물을 마시던 하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현을 쳐다보았다.“손수 만든 가정식 반찬일 뿐인데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야.”하문준의 말을 듣고 하현은 고심하듯 눈을 약간 움츠린 후 눈앞에 있는 볶은 무에 시선을 던졌다.한 조각 한 조각 무의 크기가 균일했고 대충 세팅한 것 같지만 모든 재료들이 알맞게 배합이 되어 맛을 보기도 전에 눈이 즐거웠다.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정말 솜씨가 좋았다!하문준이 총을 쓰지 않고 칼과 화살 등을 사용하던 때에 아마도 수십 년 동안이나 칼질을 수련했을 것이다.비록 그가 칼잡이 실력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하현은 하문준이 요리한 것을 보고 적어도 그가 전쟁의 신임을 알 수 있었다.하구천처럼 약을 먹고 순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신이 아닌 진정한 전신임에 틀림없었다.하현이 하문준의 실력을 상상하고 있을 때 하문준은 하현을 살며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하현, 자네는 강남 하 세자이자 용문 집법당 당주야.”“젊은 나이에 이런 신분이라면 상당히 높은 자리에 앉은 셈이지.”하현은 하문준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아닙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사람이 너무 겸손하군.”하문준이 사람 좋은 얼굴로 껄껄 웃었다.“사실 어젯밤에서야 자네의 이력을 봤어.”“맨손으로 몇천억 그룹을 만들고 하 씨 가문에 배신당했지만 삼 년 만에 정상을 되찾아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았다지.”“이일해, 하민석도 한가락 하는 인물들인데 자네 발길질에 차여 항성으로 쫓겨왔다더군.”“이일해는 지금도 자네 이름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고 들었어.”“누굴 만나든 기세 좋게 제압하더니 결국 용문 집법당 당주 자리까지 올랐고 말이야.”“미야타 신노스케를 죽이고 텐푸 쥬시로를 물리쳤어.”“어떤 상대가 와도 눈부신 실력으로 모두
하현은 잠시 침묵을 삼킨 뒤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전 줄곧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문주께서는 아직 한창 나이시고 적어도 수십 년은 항도 하 씨 가문을 장악하실 수 있습니다.”“그런데 왜 가문 내부에선 문주님을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인 건가요?”하문준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하현, 역사서 자주 읽나?”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자주 봅니다.”“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이 단정한지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그 사람의 흥망을 알 수 있죠.”“젊은 사람 중엔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즘 젊은이들은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어. 우리 세대와는 달라.”하문준은 잠시 사색에 빠진 듯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역사서를 자주 읽는다니 자네는 왕조의 최고 시절의 세 황제에 대해서도 잘 알겠구만, 그렇지?”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왕조를 개국하신 분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고.”“나머지 두 분에 대해 말해 보자고.”“옹황제는 그 시대에 참 현명한 군주였어. 그러나 건황제의 어리석음이 왕조의 마지막 기운을 다 소진해 버렸지.”“하지만 옹황제는 재위한 지 겨우 13년 밖에 되지 않았어.”“건황제는 60년이나 재위했지.”“왜 그런지 아는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맑으면 그를 따르는 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치가 철저한 군주는 자신의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빼낼 수가 없는 것이죠.”“밑에 있는 사람이 그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게 당연합니다.”“어리석은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보통이지만 아랫사람은 물을 흐리고 물고기를 잡아서 끊임없이 이익을 챙길 수가 있으니까요.”“그래서 아랫사람들은 어리석은 군주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바랍니다.”“안타깝게도 아랫사람들은 현명한 군주만이 나라를 부강하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이해
”저 말씀이십니까?”하문준의 말을 들은 하현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가 이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문주께서는 정말로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면 절 시험하시는 거예요?”하문준은 흥미로워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말로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어떻고 또 시험하는 거면 어떤가?”하현은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말로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라면 조심스럽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상황을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비로소 원하는 걸 손에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다만 이 길을 선택할 시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거예요.”“물론 문주께서는 도량도 넓으시고 역량도 출중하시니 가문 전체를 제압해 나가신다면 무엇을 하시든 잘 될 겁니다.”“꼭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하겠는가?”“그렇지 않으면 바로 세울 수 없단 말인가?”“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지내느니 뼈아픈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단숨에 곪은 곳을 도려내는 것이 낫겠는가?”하문준은 혼잣말을 하듯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하문준에게 있어 하구천과 그를 따르는 일행들은 가문에 있어서 곪을 대로 곪은 암적 존재였다.이들을 없애려고 한다면 아마 항도 하 씨 가문 자체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고 가문이 멸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곪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항도 하 씨 가문은 지리멸렬하게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처참한 몰골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하문준도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온 일이었다.오늘 하현이 두말 않고 단호히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마도 결심을 내리지 못한 하문준을 깨우치려고 한 것일 테다.곪은 상처를 안고 연명하기보단 죽도록 아픈 고통이 따르더라도 단번에 결단을 내는 것이 낫다.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각오로 몰아붙여야 새로 일어서는 것이다.“그럼 만약 내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면 자네는 날 도와주시겠는가?”하문준의 예리한 눈이
가든 별장을 떠나는 하현의 얼굴이 냉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는 자신이 한 말이 하문준을 적잖은 충격에 빠뜨렸을 거라는 걸 잘 안다.아마 하문준은 하수진을 자신의 자리에 앉힐지에 대한 고민조차 한 적이 없을 것이다.이제 하현이 하수진을 거론했으니 하문준이 마음만 먹는다면 노부인의 생신날 큰일을 벌일 수도 있다.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의 생신날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하현은 당난영을 찾아가 초대장이라도 받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어찌 되었건 그런 큰 사건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하현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차 번호가 없는 도요타 엘파 한 대가 그의 곁에 멈춰 섰다.뒤이어 뒷문이 열리며 제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자가 싸늘한 표정으로 내렸다.그녀의 손에는 여러 각도에서 찍은 하현의 사진이 담긴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그녀는 사진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현을 바라보며 확인한 후에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맞죠?”“항도 하 씨 가문 셋째 어르신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어서 차에 올라타시죠.”“셋째 어르신?”하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옷자락에 꾸깃꾸깃한 주름이 져 있는 걸 보니 이미 여기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줄곧 하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셋째 어르신이 누구죠?”냉담한 표정의 여자는 천천히 하현에게 다가와 말했다.“당연히 항도 하 씨 가문 하문천 어르신이죠!”“하문천? 항도 하 씨 가문 셋째 아들?”“하구봉의 아버지?”하현은 매우 의아해하며 말을 이었다.“그가 설마 날 죽이려는 건 아닐 테고 도대체 왜 날 보자는 겁니까?”“아니지, 설마 날 죽이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 겁니까?”제복을 입은 여자는 침착하고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조용히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을 뿐이라고 전하셨습니다.”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잔치에는 즐거운 잔치가 없고 모임
항도 하 씨 가문 셋째 아들, 하문천.하문천은 응접실로 들어오자마자 하현에게 눈길을 돌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맞지? 아주 요즘 대단하던 걸.”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손에 있던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어르신, 농담도 잘 하십니다.”“나 같은 인물이 감히 어르신 앞에서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과분한 평가십니다.”하문천의 눈매가 살짝 들썩이는 걸 보니 아마도 그는 하현이 이렇게 당당하게 되받아칠 줄은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그러자 하문천은 안색을 가다듬은 뒤 하현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젊은 나이에 강남 하 세자가 될 만하군.”“용문 내부에서도 아주 쉽게 높은 자리에 올랐다지?”“난 적어도 당신 나이에 그렇게 높은 자리엔 못 올라갔어.”“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아주 독보적이야.”“심지어 내 불효자보다도 당신이 한 수 위였으니까!”불효자라는 세 글자에 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당신에 관해선 아주 많은 소문을 들었어.”하문천은 차가운 얼굴의 여자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당신이 그날 미야타 신노스케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남양의 전신 양제명이 당신의 뒤를 받쳐주었기 때문이었지. 그 기세로 미야타 검객을 제압한 것이고.”“텐푸 쥬시로도 당신 앞에서 기도 못 펴고 물러났어. 알고 보니 양제명도 그 자리에 있었다더군.”“그래서 난 궁금했지. 양제명이 뒤를 받치고 있어서 그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대담하게 행동했기 때문인지 알고 싶었어.”‘대담하게'라는 말을 내뱉을 때 하문준의 눈빛이 예리하게 하현을 쏘아보았다.그는 마치 하현의 모든 마음과 비책을 꿰뚫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어르신은 고위층에 계신 분이고 가지지 못할 것도, 하지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시니 한번 맞춰 보시
”왜 그렇습니까? 아, 오늘 어르신이 특별히 가르침을 주시려고 날 부른 겁니까?”“그리고 날더러 가만히 쭈그리고 있으라고 하려고요?”하현의 가시 돋친 말에 하문천은 소파에 허리를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내륙에서 온 병왕이 남양인을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뛴다!하문천은 재빨리 하현을 파악했고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곧바로 응접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경호원들이 각자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하문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오늘 내가 오라고 한 것은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야.”“난 서로 윈윈하기를 바라. 모두들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서로 만족하는 결과를 얻기만 하면 돼.”말을 하는 도중 하문천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경호원 중 한 명이 앞에 놓인 나무 쟁반의 붉은 천을 들추었다.그 위에는 많이 부식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무학 성지에서 내려오는 수련집이야. 비록 반 권뿐이지만 당신이 돌파구를 마련하여 전신의 경지에 오르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이 물건은 우리가 만난 기념으로 내 선의를 대변해 당신에게 주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말고 받아.”하문천이 말을 마치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무 쟁반을 하현 앞에 놓았다.하현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앞에 놓은 물건을 바라보았다.하문천의 큰 구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더니!항도 하 씨 가문이 5대 문벌 중 최하위라고 해도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귀한 물건을 보게 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하현이 웃으며 감탄했다.그러자 하문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 모두 윈윈하는 일이라고.”그가 다시 손을 흔들자 다른 경호원이 두 번째 나무 쟁반을 가져와 붉은 천을 들추었다.이번에는 빨
요약하자면 하문천은 당난영 사건으로 인해 하구봉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하구천이 문주를 압박하는 데 실패하자 하문천은 칼을 쓸 준비를 했다.“하현, 나도 알아. 이렇게 하면 당신이 당난영 앞에서 난감한 처지가 된다는 걸.”“하지만 당신의 눈앞에 전쟁의 신이 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어. 그리고 당신은 나 하문천과 끈끈한 우정을 나눈 사이가 되는 거야.”“당신이 딱 한마디만 해 주면 돼. 그것뿐이야!”“기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아!”하현은 하문천의 제안에는 답하지 않고 웃으며 마지막 나무 쟁반을 바라보았다.“그럼 저 마지막 쟁반에는 또 뭐가 있는 겁니까?”“뭐가 들어 있는 거죠?”가장 중요한 물건과 비장의 카드는 항상 마지막을 장식한다.그래서 하현은 하문천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 또 자신에게는 무엇을 요구할지 궁금했다.“지분 양도 계약서. 10건이야.”하문천은 마지막 쟁반을 하현 앞에 놓았다.“이 지분은 항성에서 가장 큰 10개 상장회사에서 나온 거야. 이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곧바로 항성에서 최고로 영향력 있는 인물의 반열에 오르는 거야.”“항성 S5가 되는 거지!”하현은 박수를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큰손은 다르시군요!”“이 주식을 모두 합치면 수천억은 족히 될 것 같은데요.”“그런데 이렇게 많은 걸 받으면 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정말 가늠도 안 되는군요.”“간단해.”하문천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내 수중에는 십 년 전 그 일에 대한 증거가 있어.”“그 증거로 나 하문천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 항도 하 씨 가문 모두가 십 년 전 그 일에 개입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그러나 그 증거는 절대 내 손에서 흘러나가선 안 돼.”“난 그 증거가 당신 손을 통해 흘러나가서 합당한 방법으로 하문준과 당난영의 눈앞에 드러나기를 바라네!”“이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당신은 명실상부 항성 S5가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