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를 압박하던 하구천의 연극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 일은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으로 넘기며 하문준은 더 이상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하구천도 떠났으니 이 일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될 것으로 보였다.그리고 사여빈 측에서는 대규모의 친위대를 각 방면에 보내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시했다.하현은 어깨를 으쓱한 뒤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눈앞에 펼쳐지는 바다와 푸른 하늘의 조우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하현은 아까 하인이 가져다 놓은 아침을 먹으며 오전 내내 방 안에 앉아 있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하현은 1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방문이 열리자 언제 한복으로 갈아입었는지 말끔한 모습의 사여빈이 눈앞에 서 있었다.“하현, 문주께서 식사나 간단히 하자고 부르시는데 시간이 괜찮으실까요?”눈앞의 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조각처럼 깎아 놓은 얼굴에는 옥처럼 매끈한 빛깔이 반짝거렸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강인하고 다부진 인상이었다.하현은 당난영의 대범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아름답고 고운, 게다가 강인하고 다부진 인상의 여자를 하문준 곁에 비서로 두다니!당난영은 문주 부인의 위치가 불안하지도 않은 것일까?하현이 넋을 잃은 듯 빤히 쳐다보자 사여빈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현, 시간이 괜찮으십니까?”“문주께서 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분명 그녀는 하현의 경력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그가 용문 집법당 당주이든 하 세자든 사여빈 같은 위치의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지난밤과 오늘 아침 일을 겪은 후 사여빈은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콧대 높은 사여빈이 이렇게 공손히 그를 대하며 문주와의 식사 자리에 그를 초대하겠는가?하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하현 같은 사람도 지금 이 순간에는 칭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맛있습니다.”물을 마시던 하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현을 쳐다보았다.“손수 만든 가정식 반찬일 뿐인데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야.”하문준의 말을 듣고 하현은 고심하듯 눈을 약간 움츠린 후 눈앞에 있는 볶은 무에 시선을 던졌다.한 조각 한 조각 무의 크기가 균일했고 대충 세팅한 것 같지만 모든 재료들이 알맞게 배합이 되어 맛을 보기도 전에 눈이 즐거웠다.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정말 솜씨가 좋았다!하문준이 총을 쓰지 않고 칼과 화살 등을 사용하던 때에 아마도 수십 년 동안이나 칼질을 수련했을 것이다.비록 그가 칼잡이 실력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하현은 하문준이 요리한 것을 보고 적어도 그가 전쟁의 신임을 알 수 있었다.하구천처럼 약을 먹고 순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신이 아닌 진정한 전신임에 틀림없었다.하현이 하문준의 실력을 상상하고 있을 때 하문준은 하현을 살며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하현, 자네는 강남 하 세자이자 용문 집법당 당주야.”“젊은 나이에 이런 신분이라면 상당히 높은 자리에 앉은 셈이지.”하현은 하문준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아닙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사람이 너무 겸손하군.”하문준이 사람 좋은 얼굴로 껄껄 웃었다.“사실 어젯밤에서야 자네의 이력을 봤어.”“맨손으로 몇천억 그룹을 만들고 하 씨 가문에 배신당했지만 삼 년 만에 정상을 되찾아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았다지.”“이일해, 하민석도 한가락 하는 인물들인데 자네 발길질에 차여 항성으로 쫓겨왔다더군.”“이일해는 지금도 자네 이름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고 들었어.”“누굴 만나든 기세 좋게 제압하더니 결국 용문 집법당 당주 자리까지 올랐고 말이야.”“미야타 신노스케를 죽이고 텐푸 쥬시로를 물리쳤어.”“어떤 상대가 와도 눈부신 실력으로 모두
하현은 잠시 침묵을 삼킨 뒤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전 줄곧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문주께서는 아직 한창 나이시고 적어도 수십 년은 항도 하 씨 가문을 장악하실 수 있습니다.”“그런데 왜 가문 내부에선 문주님을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인 건가요?”하문준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하현, 역사서 자주 읽나?”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자주 봅니다.”“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이 단정한지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그 사람의 흥망을 알 수 있죠.”“젊은 사람 중엔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즘 젊은이들은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어. 우리 세대와는 달라.”하문준은 잠시 사색에 빠진 듯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역사서를 자주 읽는다니 자네는 왕조의 최고 시절의 세 황제에 대해서도 잘 알겠구만, 그렇지?”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왕조를 개국하신 분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고.”“나머지 두 분에 대해 말해 보자고.”“옹황제는 그 시대에 참 현명한 군주였어. 그러나 건황제의 어리석음이 왕조의 마지막 기운을 다 소진해 버렸지.”“하지만 옹황제는 재위한 지 겨우 13년 밖에 되지 않았어.”“건황제는 60년이나 재위했지.”“왜 그런지 아는가?”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맑으면 그를 따르는 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치가 철저한 군주는 자신의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빼낼 수가 없는 것이죠.”“밑에 있는 사람이 그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게 당연합니다.”“어리석은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보통이지만 아랫사람은 물을 흐리고 물고기를 잡아서 끊임없이 이익을 챙길 수가 있으니까요.”“그래서 아랫사람들은 어리석은 군주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바랍니다.”“안타깝게도 아랫사람들은 현명한 군주만이 나라를 부강하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이해
”저 말씀이십니까?”하문준의 말을 들은 하현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가 이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문주께서는 정말로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면 절 시험하시는 거예요?”하문준은 흥미로워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말로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어떻고 또 시험하는 거면 어떤가?”하현은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말로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라면 조심스럽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상황을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비로소 원하는 걸 손에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다만 이 길을 선택할 시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거예요.”“물론 문주께서는 도량도 넓으시고 역량도 출중하시니 가문 전체를 제압해 나가신다면 무엇을 하시든 잘 될 겁니다.”“꼭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하겠는가?”“그렇지 않으면 바로 세울 수 없단 말인가?”“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지내느니 뼈아픈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단숨에 곪은 곳을 도려내는 것이 낫겠는가?”하문준은 혼잣말을 하듯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하문준에게 있어 하구천과 그를 따르는 일행들은 가문에 있어서 곪을 대로 곪은 암적 존재였다.이들을 없애려고 한다면 아마 항도 하 씨 가문 자체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고 가문이 멸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곪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항도 하 씨 가문은 지리멸렬하게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처참한 몰골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하문준도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온 일이었다.오늘 하현이 두말 않고 단호히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마도 결심을 내리지 못한 하문준을 깨우치려고 한 것일 테다.곪은 상처를 안고 연명하기보단 죽도록 아픈 고통이 따르더라도 단번에 결단을 내는 것이 낫다.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각오로 몰아붙여야 새로 일어서는 것이다.“그럼 만약 내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면 자네는 날 도와주시겠는가?”하문준의 예리한 눈이
가든 별장을 떠나는 하현의 얼굴이 냉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는 자신이 한 말이 하문준을 적잖은 충격에 빠뜨렸을 거라는 걸 잘 안다.아마 하문준은 하수진을 자신의 자리에 앉힐지에 대한 고민조차 한 적이 없을 것이다.이제 하현이 하수진을 거론했으니 하문준이 마음만 먹는다면 노부인의 생신날 큰일을 벌일 수도 있다.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의 생신날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하현은 당난영을 찾아가 초대장이라도 받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어찌 되었건 그런 큰 사건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하현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차 번호가 없는 도요타 엘파 한 대가 그의 곁에 멈춰 섰다.뒤이어 뒷문이 열리며 제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자가 싸늘한 표정으로 내렸다.그녀의 손에는 여러 각도에서 찍은 하현의 사진이 담긴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그녀는 사진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현을 바라보며 확인한 후에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맞죠?”“항도 하 씨 가문 셋째 어르신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어서 차에 올라타시죠.”“셋째 어르신?”하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옷자락에 꾸깃꾸깃한 주름이 져 있는 걸 보니 이미 여기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줄곧 하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셋째 어르신이 누구죠?”냉담한 표정의 여자는 천천히 하현에게 다가와 말했다.“당연히 항도 하 씨 가문 하문천 어르신이죠!”“하문천? 항도 하 씨 가문 셋째 아들?”“하구봉의 아버지?”하현은 매우 의아해하며 말을 이었다.“그가 설마 날 죽이려는 건 아닐 테고 도대체 왜 날 보자는 겁니까?”“아니지, 설마 날 죽이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 겁니까?”제복을 입은 여자는 침착하고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조용히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을 뿐이라고 전하셨습니다.”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잔치에는 즐거운 잔치가 없고 모임
항도 하 씨 가문 셋째 아들, 하문천.하문천은 응접실로 들어오자마자 하현에게 눈길을 돌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맞지? 아주 요즘 대단하던 걸.”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손에 있던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어르신, 농담도 잘 하십니다.”“나 같은 인물이 감히 어르신 앞에서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과분한 평가십니다.”하문천의 눈매가 살짝 들썩이는 걸 보니 아마도 그는 하현이 이렇게 당당하게 되받아칠 줄은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그러자 하문천은 안색을 가다듬은 뒤 하현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젊은 나이에 강남 하 세자가 될 만하군.”“용문 내부에서도 아주 쉽게 높은 자리에 올랐다지?”“난 적어도 당신 나이에 그렇게 높은 자리엔 못 올라갔어.”“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아주 독보적이야.”“심지어 내 불효자보다도 당신이 한 수 위였으니까!”불효자라는 세 글자에 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당신에 관해선 아주 많은 소문을 들었어.”하문천은 차가운 얼굴의 여자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당신이 그날 미야타 신노스케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남양의 전신 양제명이 당신의 뒤를 받쳐주었기 때문이었지. 그 기세로 미야타 검객을 제압한 것이고.”“텐푸 쥬시로도 당신 앞에서 기도 못 펴고 물러났어. 알고 보니 양제명도 그 자리에 있었다더군.”“그래서 난 궁금했지. 양제명이 뒤를 받치고 있어서 그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대담하게 행동했기 때문인지 알고 싶었어.”‘대담하게'라는 말을 내뱉을 때 하문준의 눈빛이 예리하게 하현을 쏘아보았다.그는 마치 하현의 모든 마음과 비책을 꿰뚫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어르신은 고위층에 계신 분이고 가지지 못할 것도, 하지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시니 한번 맞춰 보시
”왜 그렇습니까? 아, 오늘 어르신이 특별히 가르침을 주시려고 날 부른 겁니까?”“그리고 날더러 가만히 쭈그리고 있으라고 하려고요?”하현의 가시 돋친 말에 하문천은 소파에 허리를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내륙에서 온 병왕이 남양인을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뛴다!하문천은 재빨리 하현을 파악했고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곧바로 응접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경호원들이 각자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하문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오늘 내가 오라고 한 것은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야.”“난 서로 윈윈하기를 바라. 모두들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서로 만족하는 결과를 얻기만 하면 돼.”말을 하는 도중 하문천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경호원 중 한 명이 앞에 놓인 나무 쟁반의 붉은 천을 들추었다.그 위에는 많이 부식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무학 성지에서 내려오는 수련집이야. 비록 반 권뿐이지만 당신이 돌파구를 마련하여 전신의 경지에 오르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이 물건은 우리가 만난 기념으로 내 선의를 대변해 당신에게 주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말고 받아.”하문천이 말을 마치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무 쟁반을 하현 앞에 놓았다.하현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앞에 놓은 물건을 바라보았다.하문천의 큰 구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더니!항도 하 씨 가문이 5대 문벌 중 최하위라고 해도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귀한 물건을 보게 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하현이 웃으며 감탄했다.그러자 하문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 모두 윈윈하는 일이라고.”그가 다시 손을 흔들자 다른 경호원이 두 번째 나무 쟁반을 가져와 붉은 천을 들추었다.이번에는 빨
요약하자면 하문천은 당난영 사건으로 인해 하구봉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하구천이 문주를 압박하는 데 실패하자 하문천은 칼을 쓸 준비를 했다.“하현, 나도 알아. 이렇게 하면 당신이 당난영 앞에서 난감한 처지가 된다는 걸.”“하지만 당신의 눈앞에 전쟁의 신이 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어. 그리고 당신은 나 하문천과 끈끈한 우정을 나눈 사이가 되는 거야.”“당신이 딱 한마디만 해 주면 돼. 그것뿐이야!”“기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아!”하현은 하문천의 제안에는 답하지 않고 웃으며 마지막 나무 쟁반을 바라보았다.“그럼 저 마지막 쟁반에는 또 뭐가 있는 겁니까?”“뭐가 들어 있는 거죠?”가장 중요한 물건과 비장의 카드는 항상 마지막을 장식한다.그래서 하현은 하문천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 또 자신에게는 무엇을 요구할지 궁금했다.“지분 양도 계약서. 10건이야.”하문천은 마지막 쟁반을 하현 앞에 놓았다.“이 지분은 항성에서 가장 큰 10개 상장회사에서 나온 거야. 이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곧바로 항성에서 최고로 영향력 있는 인물의 반열에 오르는 거야.”“항성 S5가 되는 거지!”하현은 박수를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큰손은 다르시군요!”“이 주식을 모두 합치면 수천억은 족히 될 것 같은데요.”“그런데 이렇게 많은 걸 받으면 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정말 가늠도 안 되는군요.”“간단해.”하문천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내 수중에는 십 년 전 그 일에 대한 증거가 있어.”“그 증거로 나 하문천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 항도 하 씨 가문 모두가 십 년 전 그 일에 개입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그러나 그 증거는 절대 내 손에서 흘러나가선 안 돼.”“난 그 증거가 당신 손을 통해 흘러나가서 합당한 방법으로 하문준과 당난영의 눈앞에 드러나기를 바라네!”“이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당신은 명실상부 항성 S5가
30분 후, 하현의 일행과 양호남의 일행이 양 씨 가문 장원의 대청에 모였다.양 씨 가문 장원은 산과 물을 따라 지어져 있었으며 남양 지역 특색의 건축 양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하의 강남 스타일과 북유럽의 건축양식이 잘 어우러져 건축가의 웅장한 이상과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 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은 이미 위태로워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대청홀은 200평방미터 가까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귀한 침향목 의자가 놓여 있었다.양옆에는 황화목으로 만든 의자가 늘어져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하현 일행이 자리를 잡자마자 뒤쪽에서 일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대여섯 명의 남녀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둘러싸고 걸어 나왔다.이 노부인은 몸집이 약간 작고 등이 구부러져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전체적으로 매우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꼿꼿하게 날이 서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외부인인 하현에게 떨어졌다.마치 예리한 침으로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라 하현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은 양 씨 가문 안주인이자 양제명의 아내였다.곧이어 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자손들이 나타났다.그들은 모두 구석에 서서 기웃거렸다.다만 하현과 양유훤 두 사람을 바라볼 때는 눈에서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 몇 명은 양유훤이 머리가 나쁘거나 안목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입을 삐죽거렸다.하현처럼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다니!그녀들은 양 씨 가문은 절대 양유훤이 데려온 저 남자를 데릴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들의 고귀한 가풍이 더럽혀지면 안 될 일이다!“할머니!”양호남, 양신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노부인은 이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의자에 가서 앉았다.그런 다음
하현은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성격상 이런 굴욕적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양유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날 위협하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양호남 일행에게 차가운 눈빛을 떨어뜨렸다.양 씨 가문 사람들이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만약 자신이 떠났더라면 양유훤 혼자 저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렸을지도 모른다.하현의 눈빛을 본 양호남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뭘 봐? 우리 집안의 손해가 이렇게 막대한데 대가를 치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연한 거야!”“양호남의 수법이 다소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잘못은 양유훤이 한 거야!”염소 수염을 한 양 씨 가문 어른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우리 양 씨 가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아!”“어렵게 페낭 무맹과의 협력을 이뤄냈는데 양유훤 때문에 망치게 생겼어!”“난 방금 전까지도 양유훤을 살짝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어!”“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는 거리낌 없이 사람을 때렸어!”“이런 남자를 선택하다니 앞으로 양유훤이 어떻게 되겠어?”“아주 개념 없는 연놈들이야!”“우리는 어서 양유훤을 양 씨 가문에서 출가시켜 다시는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못하게 해야 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양유훤은 눈살을 찌푸렸다.자신 때문에 페낭 무맹의 납품권이 사라지게 된 것에는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수혁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하고 양제명을 독살하려 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호남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수백억의 납품권을 위해서.”“집안사람을 강제로 시집보내고.”“그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독살하려 했어.”“양 씨 가문은 정말 단결력이 강하고 우애도 깊군.”“뭐라고!”양호남의 안색이 살짝 변하며 흠칫했다.“할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니?!”“우린 사람을 보내 할아버지를 돌보게 했을 뿐이
양유훤을 다독인 후 하현은 양호남에게 냉담한 시선을 떨어뜨렸다.이제야 하현은 양유훤이 왜 자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천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라도 하현이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개자식! 어디서 튀어나온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우릴 때려?”이때 양신이가 정신을 차리며 얼굴을 가린 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죽여버릴 거야!”“당신 같은 연놈들은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 평생을 고통스럽게 썩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구!”“아하, 당신이 양유훤이 말한 그 남자 맞지?”양호남도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나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이 개자식아! 여자는 수치도 모르고 남자는 제멋대로구만! 짐승만도 못한 것들!”양호남은 하현을 죽이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하현의 행동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 알고 있어서 그저 하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됐어! 이 개 같은 연놈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관청에 보고하고 그들을 끌어내면 돼!”머리를 풀어헤친 양신이도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렀다.“내가 저 연놈들을 가만히 두면 성을 갈겠어!”“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하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양유훤의 몸에 몇 개의 혈을 짚으며 그녀의 상처와 통증을 완화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유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동안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그녀는 원래 하현이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현이 이미 이곳에 나타났으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하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어젯밤에 양유훤이 당신 같은 뻔뻔한 남자를 위해 여수혁을 다치게 했어!”“오늘 아침, 여수혁의 아버지이자 페낭 무맹의 부맹주이신 여영창 어르신이 우리 양 씨 가문을 찾
”개자식!”자신의 여동생이 뺨을 맞고 날아가는 것을 본 양호남은 욕설을 퍼부으며 반사적으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매서운 표정으로 양호남의 목을 조른 뒤 그의 머리를 눌러 가장자리에 있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찧어 버렸다.양호남은 저절로 절을 하는 꼴이 되었고 ‘퍽'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찻잔이 그대로 으스러졌다.양호남의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하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호남을 발로 차 내동댕이쳐서 날려버렸다.한쪽에 서 있던 양 씨 가족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때 그중 한 명이 의자를 들쳐업고 하현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손바닥을 날려 그를 내동댕이쳤고 뒤이어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손바닥을 날려 쓰러뜨렸다.이 모든 것이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사람들과 그들의 경호원들이 얼굴이 붓고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어이, 젊은이, 당신이 어떤 경력이 있든 어떤 묘수가 있든 간에!”“이곳은 양 씨 가문 땅이야!”“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이라구!”“개나 소나 다 마음대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구!”전통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셋째 집안 어른이 나서서 의젓한 표정으로 하현을 호통쳤다.“우리 사람을 때리고 다치게 하다니! 도대체 당신 눈엔 법도 뭣도 안 보이는 거야?”“이 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셋째 집안 어른의 잔소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손바닥을 휘갈겼다.“양호남 무리들이 손찌검을 할 때는 왜 제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는 법 운운하시겠다?”“지금 뛰쳐나와서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현의 말에 이번에는 수염을 기다랗게 기른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양호남은 뻔뻔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안사람들을 혼내려 했을 뿐, 그 방법이 좀 과격하다고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