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남양 무도복을 입은 노인이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등장했다.말할 수 없이 소탈하고 담담한 얼굴이었다.그는 두 손을 뒷짐진 채 싸늘한 시선으로 온 장내를 훑으며 말했다.“모두 한 손을 끊고 물러가. 다행히 당신들을 죽이진 않을 것이야.”남양의 전신, 양제명!“양제명?!”백발의 노인을 보자마자 항성에서 온 몇몇 구경꾼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었다.전설의 그 남양 전신?그가 어떻게 여기에?그의 모습을 보니 예전의 전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동남해를 종횡무진 누비던 남양의 전신이 이곳에 나타나다니!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양제명? 남양의 전신?”용오행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아, 이제 생각났어. 당신이 전설의 그 폐인?”“고작 다 죽어가는 폐인을 데리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참, 이건 우리 집법당 일이야. 우리 용문의 일이고. 그런데 외부인이 이렇게 나서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당장 꺼져! 그렇지 않으면 바로 용당주가 나서서 북쪽의 법이 어떤지 톡톡히 알려줄 테니까!”집법당 정예들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그들의 눈에 백발의 노인은 아무리 전신이었어도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한 손을 끓고 물러가라고?무슨 자격으로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거야?꿈이라도 꾸고 있는 모양이지?양제명은 어릿광대들의 말장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현은 중요한 순간에 양제명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줄은 몰랐다.하지만 지금은 고마움을 표할 상황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사송란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얼른 앞으로 나섰다.“양 어르신, 오랜만입니다.”“이곳은 우리 오매 도관이 관할하는 곳입니다. 아무래도 어르신이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지금 우리
텐푸 다이토는 남양국 사람들을 아예 무시했다.비록 양제명이 남양의 전신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텐푸 다이토의 눈엔 지금 이 늙은이는 자신보다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양제명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검을 내려놓은 십 년 동안 사람들은 남양 전신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어버린 모양이지.”“뭐라고?”말을 마치며 양제명은 한 발 내디뎠다.하룻밤 푹 쉰 뒤 그는 이미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순간 섬나라의 전신이나 음류 검객보다 훨씬 막강한 기운이 사람들의 심장을 움찔하게 만들었다.사방의 바닥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름이 쫙 돋았고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헉!”그때 허공에 떠 있던 섬나라 음양사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섬나라 음양사는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양제명의 기세에 눌려 그 자리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몸이 되었다.닌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흠칫 놀라며 몸을 공중으로 도약했으나 힘도 써 보지도 못하고 바로 땅바닥에 부딪히며 피를 토했다.순간 텐푸 다이토 일행은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텐푸 다이토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무릎을 꿇고 싶어서 꿇은 게 아니라 양제명이 십 년 동안 쌓아온 기세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이것은 도저히 감당할 만한 수준의 무력이 아니었다.무적!최강이었다!텐푸 다이토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용오행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양제명에게 직접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 나니 입이 바짝바짝 말라 할 말을 잃었다.사송란 일행들도 사색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입을 가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도무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방금 하현이 음모와 술수를 써서 미야타 신노스케를 죽였다.그녀들은 받아
”아, 죄송합니다. 전신!”텐푸 다이토가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섬나라 음류 체면을 봐서라도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당장 꺼져! 당장 꺼져! 어서!”텐푸 다이토는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는 십 년 동안 누워 있었던 양제명이 종이호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직접 대면하고 보니 그는 전쟁의 신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는 걸 알게 되었다.신당류에서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만이 양제명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스스로 양제명과 대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며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지는 꼴이었다.텐푸 다이토는 방자하고 오만하게 굴긴 했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이제 와서 빌기엔 좀 늦은 거 아닌가?”양제명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한 걸음 내디뎠다.“촤랑!”바닥의 자갈들이 무섭게 튀어나왔다.“퍽퍽퍽!”섬나라 음류 고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피바다를 이루었다.이 광경을 본 사송란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었다.남양의 전신은 전해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개미 몇 마리 죽이는 것처럼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텐푸 다이토는 온몸이 저릿저릿해졌고 눈꺼풀은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지금에서야 그는 깨달았다.오늘 여기서 양제명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 된다는 것을.순간 구원을 바라는 듯한 그의 시선이 용오행과 사송란에게 향했다.용오행은 못 본 척 그의 시선을 피했다.사송란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자신이 오늘 여기 온 목적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갔다.“양 어르신, 우리 오매 도관의 체면을 좀 세워 주십시오!”“섬나라와 우리 대하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왕래가 잦고 친밀한 사이입니다. 섬나라의 미움을 산다는 것은 우리 대하의
”퍽!”양제명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은 텐푸 다이토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린 뒤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돌아가서 텐푸 쥬시로에게 전해. 오늘부터 하현 이 사람 곁에는 양 아무개가 지키고 서 있다고!”“하현을 건드리는 건 바로 날 건드리는 일이라고!”“알아들었어?”텐푸 다이토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둥지둥 떠났다.그는 양제명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어서 가서 텐푸 쥬시로에게 이 사실을 고하라는 것이었다.그가 바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양제명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하현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는 돌아가서 아버지와 상의하면 된다.그는 아버지인 텐푸 쥬시로가 반드시 자신을 대신해 이 설욕을 갚아줄 거라고 믿었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텐푸 다이토는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피맺힌 원한이여! 잠시 기다려라! 반드시 갚아주고 말리라!섬나라 사람들이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난 뒤 용문 도관 입구에는 또 다른 무리들이 나타났다.용전 항도 지부 사람들, 남양파 사람들, 그리고 용문 항도 지회 사람들이었다.최영하, 양유훤, 동리아, 강옥연 등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었다.하현이 무사한 것을 본 그녀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만 그녀들은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가 오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모두 상류층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녀들은 하현 같은 인물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말하자면 그들은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어색하고 껄끄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본 하현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섬나라 검객들을 상대할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오싹한 감정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하현의 주변으로 여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이를 본 용오행과 사송란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용오행과 사송란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양제명의 등장으로 하현은 뒤로 물러
”오매 도관에서 왔다고 함부로 날뛰다니!”“하늘은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사송란은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양 어르신,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이 일은 어르신과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어르신은 전쟁의 신입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남양국의 전신입니다!”“우리 대하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아니잖아요?”양제명은 담담히 말했다.“당신들이 개를 때려잡든 사람을 잡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하지만 하현을 모욕하고 괴롭히는 건 내가 절대 가만 놔둘 수 없어!”사송란은 이를 악물고 양제명의 말을 받았다.“대하의 대의를 위해서 하는 일에 어르신이 끼어들겠다고요?”“정말 우리 오매 도관, 나아가 우리 대하와 맞서겠다는 거예요?”“사송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양제명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당신처럼 외부와 결탁해서 자신의 나라를 욕보이게 하려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오매 도관과 대하를 입에 올리는 거야?”“여기서 그런 말 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무학 성지 사람들은 같은 대하인에게는 끊임없이 총칼을 들이대고 탄압하더니 외부에는 허리가 끊어져라 굽신거리고 있어!”“유라시아 전투에서 당신네 대하 총교관은 혁혁한 공을 세웠어. 그리고 대하를 세계 민족 반열에 우뚝 올려놓았지!”“그런데 당신들은 대하인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망신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어?”“오매 도관이 어찌 당신 같은 제자를 원하겠는가 말이야?!”“만약 남양국 사람이었다면 내 벌써 당신을 죽였을 거야!”사송란은 눈을 부라리며 성을 냈다.“우리 대하가 어떤 행동을 할지 남양인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없어요!”“어르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구요!”양제명은 이 말을 듣고 헛웃음을 터뜨렸다.더 이상 사송란과 입씨름을 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인 듯했다.이때 하현이 앞으로 나서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송란, 양 어르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럼 내가
”하현, 이 건방진 놈!”“우리 오매 도관은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모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사송란의 얼굴이 분노로 타올랐다.“당신은 비겁하게 요리조리 몸이나 피하고 온갖 음모와 계략에 의지해 미야타 신노스케 일행을 죽였어!”“그게 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야?”“무적이라도 된 것 같아?”“언젠가 당신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섬나라 전신을 격파할 때까지 기다려 줄게. 그때 다시 찾아와!”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사송란, 당신 머리에 총 맞았어?”“피하지는 말고 맞서기만 해라? 누가 그런 규칙을 만들었어?”“피할 수 있는 게 능력이 아니라고 누가 그랬냐고?”“당신의 이론대로라면 섬나라 사람들은 누가 이마에 총을 들이대어도 피하면 안 되겠네, 안 그래?”“그런데 그들도 피했어. 그럼 그들도 음모와 계략에 의지한 건가?”“당신은 이런 말을 함으로써 당신 자신의 지능을 깎아내리고 싶은 거야, 아니면 섬나라 사람들의 지능을 깎아내리고 싶은 거야?”“당신은 오매 도관 전수자야. 오매 도관의 가장 기본적인 천하무공이 뭐야? 아무리 견고한 것도 다 부술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빠르면 부수지 못한다는 이치도 잘 알 텐데.”“속도는 무학의 기본이야. 피할 수 있는 것도 무공의 한 방법이고 난 그 방법에 탁월한 것뿐이야.”“그런데 어째서 나의 그런 재주를 자꾸 깎아내리려 하지?”“무술을 배운 지 한두 해가 아닐 텐데 그것도 몰라? 무술을 개한테 배운 거야?”“그게 당신들이 오매 도관을 대표하는 수준이라면 돌아가서 오매 도관 간판을 부숴 버리는 게 나아!”“창피하지도 않아?”하현은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거침없이 오매 도관을 비꼬았다.“물론 당신이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잘 알아!”“만약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얼른 언론을 찾아 나를 폭로해. 인터넷에서 댓글 부대를 동원해 날 공격하고 모함할 수도 있어!”“기다릴게!”“하지만 3일 안에 오매 도관에서 적절한
”하 씨. 두고 봐!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우리 집법당은 반드시 돌아올 거니까!”“장로회가 이 일을 알면 당신은 이제 끝장이야!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딱 기다려!”한 무리의 집법당 정예들은 떠나려는 발걸음을 돌아세워 끝까지 분통을 털어놓았다.눈을 가늘게 뜬 채 이 사람들을 보고 있던 하현의 얼굴에 스산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하현은 한 발짝 내디디며 용오행 앞에 다가서서 뺨을 후려갈겼다.“찰싹!”용오행은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일격을 당했다.비명을 지르며 눈알을 부라리던 그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내가 가도 된다고 말했어?”하현은 두 손을 뒷짐진 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용오행은 화가 나서 이를 갈며 일어섰다.“하 씨. 당신이 뭐라도 된 줄 알아?”“양제명이 당신을 지지한다고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야?”“똑똑히 들어!”“지금은 양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더 이상 따지지 않는 것뿐이야!”“정말로 내가 작정하고 당신한테 덤빈다면 감당할 수 있겠어?”“찰싹!”하현은 또 한 걸음 내딛더니 다시 용오행의 뺨을 후려갈기고는 단호하게 말했다.“잘 들어. 당신 같은 헐랭이가 덤빈다면 난 백이면 백 다 이길 자신 있어!”“뭐? 이 자식이!”용오행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하현, 당신이 아무리 용문 서른여섯 지회장 중 한 명이라 하더라도 집법당 규칙도 무시하고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면 무사하지 못할 거야. 뒷감당할 수 있겠어?”“집법당 규칙?”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당신이 집법당 당주로서 이렇게 규칙을 따지니 나도 한 마디 하지!”“문규에 따르면 집법당 당주의 신분으로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나쁜 짓을 범하는 것도 모자라 외부와 내통해 이유 없이 용문 지회장을 잡아 가두는 일은 죽어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하는 짓이야!”“모두 다 중죄에 해당한다고! 알아?”하현은 휴지를 꺼내 손가락을 닦으며 계속 말을 이
”풀썩!”용오행은 온몸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바닥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보아하니 당신의 후원자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용문 집법당의 당주로서 오늘부터 나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어.”“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단 얘기지.”말이 끝나자마자 하현은 오른손을 뻗어 무표정한 얼굴로 용오행의 목을 졸랐다.온전히 사체를 보전하는 것이 용오행에 대한 하현의 마지막 호의였다....용오행은 항성을 장악하려고 친히 항성에 왕림했다.섬나라 음류는 복수를 자처하며 당당하게 항성에 발을 들였다.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은 마치 떠나버린 밤배처럼 흔적도 남지 않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용히 막을 내렸다.용문 집법당을 장악한 하현은 명령을 받고 집법당 내부 조직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비록 그는 항성에 있었지만 전화 한 통으로 용문 대구 지회에 있는 심복들이 모두 집법당으로 들어가 그를 도왔다.다만 집법당의 모든 기관들을 물갈이하고 인수하는 것은 철저히 기밀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했다.용문 대구 지회 쪽에서는 왕화천이 드디어 실권을 잡았다.하지만 왕화천은 자신이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대구 쪽에는 하현이 집법당에게 미움을 샀다는 소식만 전해졌다.그러자 하현에 대한 특별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용문 대구 사람들 대부분이 왕화천에게 아첨하기 바빴다....하현이 사람들을 보내 집법당 인수에 여념이 없던 그때 빅토리아 항 근처 사무실에서는 사송란이 원망 가득 서린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손에 든 자료를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에 내리치고는 맞은편에 앉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구천에게 시선을 돌렸다.“무슨 근거로 날!?”“아니, 무슨 근거로 용오행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냐고?!”“섬나라 검객, 용문 집법당주, 무학의 성지가 다 함께 나섰는데도
30분 후, 하현의 일행과 양호남의 일행이 양 씨 가문 장원의 대청에 모였다.양 씨 가문 장원은 산과 물을 따라 지어져 있었으며 남양 지역 특색의 건축 양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하의 강남 스타일과 북유럽의 건축양식이 잘 어우러져 건축가의 웅장한 이상과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 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은 이미 위태로워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대청홀은 200평방미터 가까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귀한 침향목 의자가 놓여 있었다.양옆에는 황화목으로 만든 의자가 늘어져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하현 일행이 자리를 잡자마자 뒤쪽에서 일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대여섯 명의 남녀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둘러싸고 걸어 나왔다.이 노부인은 몸집이 약간 작고 등이 구부러져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전체적으로 매우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꼿꼿하게 날이 서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외부인인 하현에게 떨어졌다.마치 예리한 침으로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라 하현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은 양 씨 가문 안주인이자 양제명의 아내였다.곧이어 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자손들이 나타났다.그들은 모두 구석에 서서 기웃거렸다.다만 하현과 양유훤 두 사람을 바라볼 때는 눈에서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 몇 명은 양유훤이 머리가 나쁘거나 안목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입을 삐죽거렸다.하현처럼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다니!그녀들은 양 씨 가문은 절대 양유훤이 데려온 저 남자를 데릴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들의 고귀한 가풍이 더럽혀지면 안 될 일이다!“할머니!”양호남, 양신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노부인은 이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의자에 가서 앉았다.그런 다음
하현은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성격상 이런 굴욕적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양유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날 위협하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양호남 일행에게 차가운 눈빛을 떨어뜨렸다.양 씨 가문 사람들이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만약 자신이 떠났더라면 양유훤 혼자 저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렸을지도 모른다.하현의 눈빛을 본 양호남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뭘 봐? 우리 집안의 손해가 이렇게 막대한데 대가를 치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연한 거야!”“양호남의 수법이 다소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잘못은 양유훤이 한 거야!”염소 수염을 한 양 씨 가문 어른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우리 양 씨 가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아!”“어렵게 페낭 무맹과의 협력을 이뤄냈는데 양유훤 때문에 망치게 생겼어!”“난 방금 전까지도 양유훤을 살짝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어!”“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는 거리낌 없이 사람을 때렸어!”“이런 남자를 선택하다니 앞으로 양유훤이 어떻게 되겠어?”“아주 개념 없는 연놈들이야!”“우리는 어서 양유훤을 양 씨 가문에서 출가시켜 다시는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못하게 해야 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양유훤은 눈살을 찌푸렸다.자신 때문에 페낭 무맹의 납품권이 사라지게 된 것에는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수혁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하고 양제명을 독살하려 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호남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수백억의 납품권을 위해서.”“집안사람을 강제로 시집보내고.”“그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독살하려 했어.”“양 씨 가문은 정말 단결력이 강하고 우애도 깊군.”“뭐라고!”양호남의 안색이 살짝 변하며 흠칫했다.“할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니?!”“우린 사람을 보내 할아버지를 돌보게 했을 뿐이
양유훤을 다독인 후 하현은 양호남에게 냉담한 시선을 떨어뜨렸다.이제야 하현은 양유훤이 왜 자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천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라도 하현이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개자식! 어디서 튀어나온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우릴 때려?”이때 양신이가 정신을 차리며 얼굴을 가린 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죽여버릴 거야!”“당신 같은 연놈들은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 평생을 고통스럽게 썩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구!”“아하, 당신이 양유훤이 말한 그 남자 맞지?”양호남도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나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이 개자식아! 여자는 수치도 모르고 남자는 제멋대로구만! 짐승만도 못한 것들!”양호남은 하현을 죽이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하현의 행동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 알고 있어서 그저 하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됐어! 이 개 같은 연놈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관청에 보고하고 그들을 끌어내면 돼!”머리를 풀어헤친 양신이도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렀다.“내가 저 연놈들을 가만히 두면 성을 갈겠어!”“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하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양유훤의 몸에 몇 개의 혈을 짚으며 그녀의 상처와 통증을 완화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유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동안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그녀는 원래 하현이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현이 이미 이곳에 나타났으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하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어젯밤에 양유훤이 당신 같은 뻔뻔한 남자를 위해 여수혁을 다치게 했어!”“오늘 아침, 여수혁의 아버지이자 페낭 무맹의 부맹주이신 여영창 어르신이 우리 양 씨 가문을 찾
”개자식!”자신의 여동생이 뺨을 맞고 날아가는 것을 본 양호남은 욕설을 퍼부으며 반사적으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매서운 표정으로 양호남의 목을 조른 뒤 그의 머리를 눌러 가장자리에 있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찧어 버렸다.양호남은 저절로 절을 하는 꼴이 되었고 ‘퍽'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찻잔이 그대로 으스러졌다.양호남의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하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호남을 발로 차 내동댕이쳐서 날려버렸다.한쪽에 서 있던 양 씨 가족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때 그중 한 명이 의자를 들쳐업고 하현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손바닥을 날려 그를 내동댕이쳤고 뒤이어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손바닥을 날려 쓰러뜨렸다.이 모든 것이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사람들과 그들의 경호원들이 얼굴이 붓고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어이, 젊은이, 당신이 어떤 경력이 있든 어떤 묘수가 있든 간에!”“이곳은 양 씨 가문 땅이야!”“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이라구!”“개나 소나 다 마음대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구!”전통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셋째 집안 어른이 나서서 의젓한 표정으로 하현을 호통쳤다.“우리 사람을 때리고 다치게 하다니! 도대체 당신 눈엔 법도 뭣도 안 보이는 거야?”“이 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셋째 집안 어른의 잔소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손바닥을 휘갈겼다.“양호남 무리들이 손찌검을 할 때는 왜 제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는 법 운운하시겠다?”“지금 뛰쳐나와서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현의 말에 이번에는 수염을 기다랗게 기른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양호남은 뻔뻔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안사람들을 혼내려 했을 뿐, 그 방법이 좀 과격하다고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