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은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저녁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푹 쉬고 싶은 마음에 무음으로 설정해 놓고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동리아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은 넘게 와 있었다.이렇게까지 전화를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결국 통화가 되지 않자 동리아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동리아의 신분과 역량으로 항성에서 못 찾아낼 사람은 없었다.하현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방문을 열었다.문 앞에 선 동리아는 샤넬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여전히 짧은 헤어스타일이었지만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누구보다 요염하고 섹시하고 이국적인 풍모까지 풍겼다.하현은 눈앞에서 반짝반짝 매력을 풍기고 있는 동리아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동리아, 마침 룸서비스 요청하려던 참이었어. 같이 식사나 해.”하현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음식을 주문했다.오래지 않아 음식이 도착했고 그는 음식을 먹으며 동리아에게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동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하현, 하루 종일 잠만 자다 보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거예요.”“오늘 용문 집법당에서 사람이 왔어요. 제일 앞에 앞장선 사람이 당주 바로 아래 사람인 부당주였어요.”“항성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오늘 오후에 부당주가 직접 우리 항성 관청으로 서한을 들고 왔더라구요. 그 사람이 당신을 만나길 원해요.”하현은 웃으며 말했다.“난 용문 대구 지회장이야. 그들은 왜 나한테 직접 연락하지 않고 당신한테 가서 소란을 피워?”“참, 재미있군!”“당신네 동 씨 집안은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니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잘 알잖아?”동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용전, 용문, 용위, 용옥의 주요 인사들이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니 도저히 그들을 등한시할 수 없었어요.”“내 짐작이긴 하지만 용문 집법당은 이 기회에 우리 동 씨 집안을 철저히
저녁 8시, 항성 중심부 한 오피스텔.이곳은 동 씨 집안 소유로 매년 놀라운 임대료 상승률을 보이고 있는 곳이다.이 오피스텔 꼭대기에는 공중 정원이 있는데 사계절 내내 화려한 꽃과 녹음이 어우러져 있어서 보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을 자랑한다.동 씨 집안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 곳이기도 해서 동리아는 이곳을 약속 장소로 삼았다.이렇게 하면 상대가 어떤 수단을 쓰든 반드시 적절한 맞대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하현은 항성 관청의 업무용 차를 타고 이 오피스텔에 도착한 뒤 예리한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이곳은 밤이 되었는데도 많은 차량들로 붐볐다.도로에는 많은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하현은 눈을 번뜩이며 미소를 지은 뒤 동리아에게 말했다.“동리아, 기가 막힌 입지로군, 돈이 저절로 모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니!”“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냥 우리 집안이 여기서 좀 먹고 살 뿐이에요.”동리아는 깔끔한 검은색 샤넬 드레스를 입었을 뿐인데도 지나가는 남자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남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빨개지며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안타깝게도 동리아는 이 남자들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동리아는 공손한 자세와 상냥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다 왔어요. 오늘 8시 정각에 여기서 공송연을 만나기로 했어요. 늦어도 상관없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쇼핑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층 면세점을 천천히 둘러봐도 되고.”말을 끝내자마자 동리아는 자연스럽게 하현의 팔짱을 끼고는 다정한 한 쌍처럼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동 씨 집안사람들은 동리아의 이런 다정한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저 콧대 높은 아가씨가 언제 저렇게 상냥하고 공손했을까?“면세점은 물론이고 난 쇼핑을 좋아하지 않아.”하현은 담담하게 말하며 오피스텔 안으로 향했다.“공송연이 온다고? 그녀가 감히 내 앞에 다시 나타난다고?”“왜? 다시 나타
하현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성이 용 씨라고?”“대하 10대 가문 중 하나인 그 용 씨 가문?”“그래서 좀 일이 복잡해졌어요. 용 씨 가문일 뿐만 아니라 항렬상 용문주와 같은 연배이고 심지어 용문주가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대요.”하현은 동리아의 설명을 듣고 헛웃음을 터뜨렸다.“이것 참 재미있군. 용문주의 일가 형님이 집법당의 부당주라니. 관계 한번 복잡하군.”“하지만 공송연은 이 용문주의 형님뻘 되는 사람을 앞세워 지금 우릴 상대하려 하고 있어.”“그녀는 내가 집법당의 체면을 봐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는 거지. 정말로 이런 상황을 끝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이런 수작부터 멈추어야지.”“그런데 그녀는 굳이 용오정을 항성으로 오게 만들어 용오정의 신분으로 우릴 제압하려 하고 있어!”“아쉽게도 공송연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용오정 같은 인물이 날 제압할 수 있었다면 난 벌써 몇 번이고 죽었을 거야.”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공송연이 그릇이 그리 큰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야.”“용문의 공송연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참.”“정말 별것 아니군.”동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런데 하현, 당신은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해요.”“공송연이 하는 짓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용오정은 일찍부터 항성에서의 인맥이 두터워요.”“용문에서 출세해서 권세를 좀 잡았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한다고요.”“그리고 용문 항도 지부도 있으니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돼요. 항성과 도성은 지리적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으니까요.”“용오정이 체면을 차리지 않고 용문 항도 지부의 인원과 역량을 뽑아 당신을 상대한다면 일이 정말 복잡해져요.”동리아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그렇지만 하현, 당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동 씨 집안이 당신 편에서 든든하게 지원해 줄 테니까.”하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리아야, 너야말로 걱
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노국의 황실을 위해 일을 했다고?”“황실의 공주라고 해도 난 봐 주지 않았어. 그런데 그 밑에서 일하던 신하가 감히 내 면전에서 거만하게 행패를 부리다니. 절대 체면 따위 세워 주지 않을 거야.”말을 마치자마자 하현은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걸어 나왔다.두 사람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있는 공중 정원에 도착했다.이곳은 5,600 평방미터나 되는 면적에 주변은 온통 식물로 둘러싸여 울창함을 자랑했다.가운데 자리에는 200평 정도의 응접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안쪽 벽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사방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전통 문양 가구들이 병풍처럼 쭉 놓여 있었다.근래 보기 드물게 분위기가 아늑하고 고풍스러운 응접실이었다.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인테리어 소품들과 우아한 분위기가 눈을 즐겁게 했다.그러나 원래는 있을 곳에 제자리를 지키며 안정감 있게 들어차 있던 소품과 가구들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값비싼 소파와 테이블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잔 파편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한가운데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옛풍의 옷을 입고 백발 수염을 훈장 삼아 내걸고 있는 네모난 얼굴의 노인이 용오정 같았다.그는 화도 내지 않고 아무런 위세도 부리지 않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다른 한 노인은 서양 턱시도를 입고 눈두덩이 깊게 패어 과도한 주색을 띠고 있었지만 몸은 다부져 보였다.아마도 이 사람은 항독으로 일하면서 제국의 황실을 위해 일했다는 그 장남백일 것이다.그들의 뒤에는 십여 명의 남녀가 서 있었고 선두에 공송연이 서 있었다.이 사람들은 모두 집법당 사람들일 것이다.다들 거만하고 기고만장한 표정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같았다.특히 용오정을 앞세운 공송연의 표정은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이봐, 하현과 동리아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공송연, 우리 지회장님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나온 사람은 장남백이었다.그는 하현과 동리아가 들어왔을 때는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비록 쌍방은 이번이 첫 대면이었지만 장남백이 용오정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발걸음을 한 것이라면 당연히 하현에 관한 정보도 미리 알아봤을 터였다.장남백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하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공송연, 이 분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그 하 지회장 아닌가? 듣자 하니 강남 하 세자라던데 신분이 아주 놀랍군그래!”“당신네 집법당 제자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장남백은 공송연을 나무라는 것 같았으나 말투만 그랬을 뿐 실상은 하현이 들으라고 일부러 슬쩍 도발한 것이었다.하현의 신분이 높다고 말하면서도 존중하려는 마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항성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강남 하 세자, 용문 대구 지회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 대단한 신분이 아닌 것이다.항성에서는 그들이 실세요, 주도권을 쥔 사람들이다.누구라도 자신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허리를 굽신거려야 마땅했다.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오늘 그들이 상대해야 할 사람이라는 걸 들은 용오정은 시선을 들어 올려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에 대해서는 공송연에게서 보고도 받았고 직접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그러나 실제로 눈앞에서 직접 그를 대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옷차림이나 기질, 모두 너무나 평범했다.하구천 같은 인물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이런 평범한 모습의 하현이 어떻게 공송연의 면전에서 무카이 일가를 일거에 죽였는지 용오정으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다.용오정은 생각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공송연, 어서 우리 하 지회장에게 사과해.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 지회장을 화나게 해서야 쓰나. 하 지회장이 발끈해서 손이라도 쓴다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 늙은이도 늙어서 자네를 지켜줄 수 없어!”“용당
장남백은 자신이 나서면 용오정이 진정할 거라 생각했다.항성에서의 자신의 위세와 인맥, 그리고 용오정의 권력을 합치면 하현 하나쯤 밟아 죽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어쨌든 죽일 때 죽이더라도 중요한 일부터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동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네, 두 어르신. 진정하세요. 우리 동 씨 집안사람들 일부러 부르셨는데 싸우려고 부르신 건 아니잖아요?”“우선 얘기부터 나누는 게 어떨까요?”동리아까지 거들고 나서자 용오정의 노여움이 점차 누그러졌다.하지만 여전히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하 씨, 자네 오늘 운 한번 억세게 좋은 날이군. 장 어르신이 이렇게까지 말하고 동리아도 거드니 내가 하는 수없이 참는 걸세.”“그렇지 않았으면 당장 뺨이라도 때려서 자네의 그 불손한 버르장머리를 고쳤을 것이야!”“요 몇 년 동안 내 손에 죽어 나간 젊은이가 어디 한 둘인 줄 알아?”말을 하면서 용오정은 자신의 거무스름한 오른손 손바닥을 보여주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자, 이제 그만하시죠!”“용 씨 성을 가진 어르신,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하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아냥거렸다.“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없으면 가 보겠어요.”“아직 배가 다 안 차서 얼른 야식 먹으러 나가야 하니까!”“저 자식이!”한 무리의 집법당 제자들이 모두 화가 나서 눈을 부릅뗬다.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사람을 여럿 봤지만 이렇게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 놈은 본 적이 없었다.이런 행동은 용오정의 체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다.“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용오정은 애써 노여움을 억누르고 공송연을 비롯한 집법당 제자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그리고 나서 그는 차가운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하현, 당신이 용문 대구 지회장의 이름을 믿고 항성과 도성에서 행패를 부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괴롭히고 다닌다고 들었
”난 무카이 마키가 자네를 죽일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결국 자네가 용문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제압한 뒤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살해했지!”“하 씨, 정말 뻔뻔하군!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상대 몰래 기습적으로 치다니!”용오정은 하현을 가리키며 노발대발했다.하현은 용오정의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공송연을 힐끔 쳐다보았다.공송연과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집법당 제자들은 하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들을 노려보자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공송연은 옹오정 일행을 모셔오기 위해 분명 일부 진실을 숨긴 것임에 틀림없었다.예를 들어 하현이 무카이 가족을 일망타진했던 일은 일부러 숨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하현이 화려한 발재간으로 무카이 집안사람들을 죽였다.무카이 마키를 포함해 무카이 일가가 그 자리에서 바로 저세상으로 갔다.물론 공송연은 이러한 사실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하현이 용문의 이름으로 무카이 집안을 제압한 뒤 얍삽한 수를 써서 무카이 집안을 쳤다고 말했을 것임이 분명하다.만약 그렇지 않고 하현이 무카이 집안사람들을 일망타진한 사실을 용오정이 알았다면 감히 나서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부당주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무카이 일가는 할복자살한 것입니다. 그 용기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섬나라 천황도 그들의 용기를 추켜세울 거라고 했습니다!”하현은 내심 상대를 놀리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이것은 이미 항성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섬나라 대사관 측에서도 이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부당주님,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면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항성 사람들을 다 고소하면 됩니다!”“다 끝난 얘기를 가지고 자꾸 왈가왈부해 봐야 무슨 소용있습니까?”“자네!”용오정은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현이란 놈은 능력도 역량도 출중할 뿐만 아니라 말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하현이 섬나라 대사관까지 들먹이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말을 마치며 용오정은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그의 부하 몇 명이 한달음에 앞으로 나왔다.모두들 손에 번쩍이는 칼을 들고나와 잡아먹을 듯 하현을 노려보았다.순간 동리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그러나 하현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부당주님, 지회장 자리는 용문주가 저에게 직접 준 것이니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섬나라 사람들에게 가서 사죄하라구요? 그게 가능한 얘기 같습니까?”“내가 뭣 때문에 섬나라 사람들에게 사죄를 해야 합니까?”“뭐라고? 저놈이 아직도 잘난 척을 해?”용오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현, 잘 들어. 다른 사람을 시켜 자네 다리를 분질러 놓으라고 한 적 없네. 섬나라 사람들한테 가서 사죄만 하면 된다는데 뭐? 용문주의 체면을 봐서 그 정도로 끝내려고 했는데 지금 뭐라는 거야?”“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어?”“내가 지금 나이를 먹어서 이 정도로 끝나는 줄 알아. 젊은 시절의 나였다면 자넨 지금 이미 머리가 나가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야!”순간 용오정은 언제라도 일어서서 하현을 때려죽일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하 지회장, 당주는 용문 내부에서도 덕망과 권위가 높아. 그가 이렇게까지 한 건 충분히 자네의 체면을 고려한 거라고 볼 수 있어!”장남백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세상 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당주가 화를 내면 자네는 끝장이야!”“지회장 자리를 내놓는 것은 물론이고 사지가 부러진 채 섬나라에 가서 사죄를 해도 모자를 거야!”“자네 가족, 조상들 모두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고!”“당주는 용문을 등에 업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용 씨 가문 사람이라는 걸 자네는 똑똑히 알아야 할 거야!”말을 마친 장남백은 소파에 편안히 기대며 완고하게 말했다.“어서 지회장 자리를 내놓게.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지 마!”이때 공송연이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어서 지회장 영패를 내놓고
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설은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정말 해결할 수 있어?”설은아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응. 할 수 있어.”해결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하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다.이번이야말로 하현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알았어. 해결할 수 있으면 됐어.”하현도 설은아가 허투루 말을 하는 가벼운 입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결이 잘 안 되면 억지로 버티지 말고 꼭 말해. 내가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볼게.”하현의 말을 듣고 이시운은 더욱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보아하니 데릴사위가 말주변이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허세 부리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붕!”바로 그때 사람이 드문 도로에 번호판 없는 승합차 여러 대가 포르쉐 앞에 나타났다.뒤이어 승합차 몇 대가 나타나 하현 일행을 태운 포르쉐를 에워쌌다.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길이 없는 설은아와 이시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착!”이때 문이 열렸고 러닝셔츠를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손에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걸어 나왔다.그때 승합차 한 대의 문이 스르르 열리며 우민은과 이국흥 두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이 개자식들!”설은아는 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다니!”하현은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겪어 봐서 그저 냉담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이시운은 이런 광경이 처음이라 온몸을 부르르 떨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제 어떻게 해요?”“어서 신고해!”설은아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내가 가서 시간을 벌어 볼 테니까!”“그래도 내가 대구 정 씨 가문 사람이니까!”“날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들도 모르진 않을 거야.”“그러니 날 함부로 하진 못 하겠지!”“하현, 당신은 차 안에 있어.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괜히 나와서 일 크게 만들지 말고!”설은아는 상대가
설은아는 이시운을 데리고 포르쉐에 올라탔고 하현을 조수석에 앉혔다.액셀을 밟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아침에 대출받느라 바빴고 점심때는 직원들 월급 해결하고 회사 일도 다 처리했어. 이제 아무 문제없어.”“자, 이제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 봐, 아직도 아무 말 안 할 거야?”하현이 웃으며 말했다.“무슨 일?”“당신과 나천우의 일.”설은아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이 나천우와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어차피 하현도 성공한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천우가 어떻게 그처럼 그를 깍듯하게 모실 수 있냐는 것이다.하현을 위해 나천우는 은행 고위직 두 명을 바로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곧바로 이천억이란 거금을 대출해 주었다.하현은 금정에 온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나천우는 은둔가 나 씨 가문 사람인데 어떻게 그가 하현에게 이렇게 극진한 대우를 할 수 있는가?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현이 나천우를 안다는 말을 듣고 이시운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웃었다.나천우가 설은아의 미모에 흑심을 품고 하현의 체면을 세워 준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하현은 우쭐대고 있는 건가?참, 같잖은 꼴이라니!하현은 설은아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간파한 뒤 입을 열었다.“나천우가 나한테 마침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었거든.”“무슨 부탁? 중요한 일이야?”설은아는 호기심에 눈빛이 반짝반짝거렸다.“나천우 같은 사람이 웬만한 일로 부행장과 부장을 해고하지는 않았을 거야.”이 말을 듣고 이시운은 깜짝 놀라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이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단지 데릴사위인 하현이 주제도 모르고 설칠 뿐이라고 생각했다.“날 속일 생각하지 마. 도대체 어떻게 나천우의 신임을 얻게 된 거야
”참, 여기 사인 좀 해 줘.”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나천우는 발걸음을 옮기려던 하한을 붙잡았다.그는 재빨리 옆방으로 가서 서류철을 가져와 하현에게 사인하라고 했다.하현이 서류를 받아들고 힐끔 쳐다보다가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렸다.“이게 뭐예요?”“작은 거지만 내가 준비했어. 거절하면 안 돼!”말을 하면서 나천우는 직접 하현의 손을 잡고 지장을 찍은 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까지 쳤다.하현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형님, 도대체 이게 뭐예요?”나천우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당신 형수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고 나서 일으킨 회사야. 금정개발이라고 집을 짓고 파는 부동산업이지.”“이제 당신 형수는 아이를 낳는 데 전념해야 하니 이 땅과 회사 일에 쏟을 시간이 없어.”“이걸 팔거나 혹은 다른 사람한테 좌지우지하는 것도 보기 불편할 거야. 혼수나 다름없는 거였으니까.”“이제 당신 손에 넘어갔으니 아마 당신 형수도 분명 기뻐할 거야.”“지금부터 당신은 주식을 90% 가진 금정개발 대주주이며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진 사람이야!”“나머지 10%는 우리 부부의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셈으로 치자고.”“회사가 크지는 않아. 직원도 100명 남짓이고.”“회사에서 최근 몇 필지를 분양받아 개발하려고 사전 준비 작업을 하고 있어!”“하현, 마음에 드는 땅이 있거나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하니까 이자는 꼬박꼬박 내야 해. 하지만 우대금리로 잘 해줄게.”말을 마치며 나천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속으로 부자들은 역시 스케일이 다른 건가 잠시 생각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부동산 개발 회사가 보너스라니!이렇게 되면 자신이 금정 제일 부동산 개발업자가 되는 게 아닌가?만약 최희정이 이 사실을 안다면 피를 토하며 분노를 뿜을 것이다.하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이것이 나천우 부부의 호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만
하현은 나천우에게 담요를 가져와 임단의 몸에 덮어 주라고 일렀다.그다음 그녀를 푹 쉬게 해 두고 조용히 나천우에게 따라나오라고 했다.바깥으로 나온 나천우는 하현을 깍듯이 대하며 옆에 있는 응접실로 데리고 와서 허리를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하현, 이제 다 해결된 거죠?”“우리 아이를 극락으로 잘 보내 준 거죠?”그의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감이 가득했다.하현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나천우를 쳐다본 뒤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 사장님,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믿습니까?”나천우는 적잖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하현, 세상에 귀신이 없다면 방금 그 말은 도대체...”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나 사장님, 아침에 제가 한 말 기억하세요?”“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합니다.”“사모님은 사실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에 마음에 응어리가 졌던 것뿐입니다.”“그래서 사모님의 몸은 일종의 가임신 상태에 빠진 거죠.”“이런 상황에서는 두 분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하지만 방금 제가 사모님 앞에서 보인 모습 때문에 사모님은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겁니다. 죽은 아이가 좋은 것으로 갔다는 안도감이 사모님의 마음을 위로한 거죠.”“마지막으로 사모님의 몸에 숨을 불어넣어 사산했을 때 감염되었던 약간의 풍한을 제거했어요.”“이제 사모님은 멀쩡한 사람입니다.”“두 분이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거죠.”하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내가 사장님한테 이렇게 다 털어놓고 말씀드리는 건 사장님이 문화인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거예요.”“하지만 사모님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 일은 아마 사장님과 나 사이의 비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아이를 무사히 출산한 뒤에 말씀드려도 늦지 않습니다.”“나중에 두 분이 날 너무 사기꾼으로 몰아붙이지나 마세요. 하하.”하현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을 마친 후 하현은 얼른 종이와 붓을 꺼내 그 위에다 뭔가를 쭉 쓴 뒤 담담하게 말했다.“나 사장님,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 물건들을 빨리 준비해 달라고 이르세요.”“이 물건들은 부인의 체내에 음흉한 기운을 모두 뽑아줄 겁니다.”“그렇게 해야 완전히 문제가 해결됩니다.”“음흉한 기운이 다 제거된다면 두 분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예요.”나천우는 종이에 적힌 물건들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맙습니다. 바로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순간 나천우의 마음속엔 하현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올랐다.나천우는 하현이 엄청난 돈이나 물질적인 것을 터무니없이 요구할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었다.그런데 하현이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단칼에 승낙할 줄은 몰랐다.그래서 나천우는 하현을 완전히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잠시 후 나천우의 측근들은 하현이 지시한 물건을 모두 준비해 왔다.닭 피 한 그릇과 종이돈 한 묶음, 종이돈을 태우는 양동이.이를 본 임단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하현,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하현은 테이블을 가리켰다.“부인, 죄송하지만 여기 누우시고 배가 보이게 옷을 살짝 위로 올려 주세요.”하현의 말에 임단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이어 그녀는 코트를 벗은 뒤 셔츠를 살짝 걷어 올려 새하얀 아랫배를 드러낸 채 테이블 위에 누었다.나천우는 이 광경을 보며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현, 이건...”하현이 천천히 나천우에게 설명했다.“부인은 뱃속에서 아이가 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음흉한 기운이 여기 가득 들어 있습니다.”“예로부터 뱃속에서 죽은 아기는 엄마의 품을 떠나기 싫어 그 영혼이 떠돈다고 합니다.”“그래서 두 분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죠.”“오늘 저는 죽은 아이의 영혼을 잘 달래서 보내주려는 거고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와 임단은 동시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벌린 입을
하현은 냉랭하게 말했다.“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습니다.”“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나한테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만 들으면 됩니다.”“나머진 당신이 알아서 하면 되죠.”“난 아무 이견도 달지 않을 테니까요.”하현의 말은 마치 이 모든 것이 그와 무관한 일처럼 가볍게 들렸다.그러나 가볍게 들리는 그 말속에 숨어 있는 어조는 서늘한 기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원래 하현이 어떻게 망신을 당하나 구경이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알을 땅바닥으로 떨구었다.결국 그의 어조로 보아하니 그가 가볍게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우민은과 이국흥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나천우는 하현을 향해 빙긋 웃으며 허리를 곧게 펴고 시선을 뒤로 돌렸다.그의 눈빛 속에 찬바람이 가득 휘몰아쳤다.우민은과 이국흥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왔고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아 그대로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일어서세요!”나천우는 폭풍 전야의 고요한 태풍의 눈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단지 손가락을 까닥이며 경호원에게 쇠 파이프를 건네받아 직접 두 사람의 다리를 한쪽씩 부러뜨렸다.그리고 나서 활을 들고 두 사람의 손바닥을 향해 활을 쏘았다.“휙!”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두 사람이 손바닥이 떨구어지자 나천우는 두 사람을 문 바깥으로 걷어차며 말했다.“잘 들어. 다시는 당신들 두 얼굴을 금정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아.”“감히 이 두 사람을 거두는 자는 나 나천우에게 도전하는 거라 생각할 거야!”“사람들을 교외로 내쫓아 스스로 빌어먹고 살게 해!”...10분 만에 설은아가 그토록 골머리를 앓던 이천억 대출이 순조롭게 실행되었다.무이자일 뿐만 아니라 담보 물건도 없이 진행되었다.다만 각종 수속이 복잡해서 설은아는 VIP실에 남아 서류 처리를 해야 했다.나천우는 하현을 깍듯이 모시고 행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