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신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대비는 손을 흔들며 말씀했다. “사람을 보내어 그 병사의 신분을 확인하셨네. 안남후의 휘하에 속해 있었으나 진국공 부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소. 진국공과 엮으려 해도 엮을 수는 없을 걸세.”설령 선친의 휘하에 있던 병사라 해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내가 친히 주상께 고하여 공정한 처리를 하시어달라 청하겠소. 안남후도 호국영웅의 여식을 자기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이번에는 경고가 되겠지만, 만일 안남후가 더 많은 공을 세워 진국공부를 대처하게 된다면, 아무도 그가 저지른 황당한 일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부인의 일이 해결되었소. 얼른 대비마마께 인사 올리게.”최안유는 얼른 부인에게 한마디 일러줬다.여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숙여 대비마마께 인사 올렸다. 왕실의 수장이 미천한 자기 일을 처리해 주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다.대비가 말했다.“여봐라, 이들을 주상께 안내하거라. 주상께 최씨 가문 여식이 거리에서 구한 백성이 온대, 이들의 안타까운 사정에 귀를 기울여달라 하거라.”“알겠사옵니다, 대비마마.”상궁이 모녀를 데리고 나갔다.이곳엔 그녀와 대비만 남아 있었다. 대비께서 자기만 따로 남긴 연유를 그녀도 모르는 바 아니다. “낭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이 늙은이가 따로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세자 저하의 일인 줄 아옵니다.”“세자께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들어보았을 것이오. 어의가 오래전에 진단했고 민간에도 소문이 돌고 있으니 모를 리 없을 테지. 어의의 의술이 능숙하나 세자의 병을 고치진 못했소. 낭자의 손에 의선이 만든 해독제가 있다하던데…”최안여는 물었다.“혹 의선에게 저하의 병을 보일 생각이옵니까?”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의선께서 궁중 사람들과 얽히는 것을 꺼리시는 것을 마마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대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오. 몇 년간 의선을 찾으려
최안여의 눈빛이 번쩍였다. ‘내가 따져야 할 가문이 어찌 소씨 가문 사람뿐인가?’“신녀, 실망하게 하지 않겠사옵니다.” “의선의 제자가 언제 회경하는지 아시오?” 대비는 물었다.“이미 왔사옵니다.”그녀의 말에 대비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정말이오?”“신녀, 더는 마마를 속이지 않겠사옵니다. 어릴 적, 의선께서 진국공부에 몇 년간 묶으면서 신녀에게 의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대비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자네가?”대비는 자신의 눈에 비친 갓 스물을 넘긴 처자를 바라보았다.부모와 형제를 여읜 슬픔에 빠져있긴 하나, 그녀의 눈빛만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비는 상황이 점점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의녀 때문에 조강지처를 배반한 안남후가 훗날 의선의 제자를 배반한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날 세자께서 복용한 해독약이…”“네, 신녀가 조제한 것이옵니다. 사부님께서 몇 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약을 오래 보관하면 효능을 잃기에…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부님의 이름으로 저하께 약을 드렸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대비는 사실 왕세자가 입궁하자마자 어의를 불러 해독약의 효능을 알아보라 했다. 어의는 세자께서 복용한 약이 다른 약과 달리 효과가 뛰어났고 허약한 몸에도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어쩌면 이것이 하늘의 뜻일지도… 이 사실을 몰랐으니, 자네의 앞에서 지음 낭자의 의술을 자랑했겠지…”대비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세자 저하를 뵙고 싶사옵니다. 여기 있는 줄로 아옵니다.”“총관의 영민함은 이루 말할 수 없군.”그때, 병풍 뒤에 숨어있던 육경침이 가벼운 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대비마마의 비호를 받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신뢰할 만한 능력을 보여야 하겠지요.”말을 마친 최안여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 것을 부탁했다.육경침은 말없이 옷소매를 걷어 손을 내밀었다.“적어도 한 해, 많게는 두 해 안에... 약효를 다할 것이옵니다.”대비가 고개를
아무 말 없는 대비 대신, 육경침이 먼저 입을 열었다.“모두가 내 죽음을 기다릴 터인데, 두 해가 지나 완치 소식을 알리면 얼마나 놀랐지...”최안여는 말없이 대비가 건네준 붓을 들어 방서를 써 내려갔다.대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숨은 능력자가 여 있을 줄이야. 소씨 가문의 노부인도 엄청난 방서를 받았겠지.”“원래 심각한 병은 아니었사옵니다. 다만 나이가 많고 겁이 많아 아프다고 과장한 것이옵니다. 이미 오래전에 회복되었음에도 귀한 약재를 구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것이옵니다.”육경침의 얼굴을 살피던 대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세자의 건강은 자네에게 맡기겠소. 의선 제자라는 것은 내 반드시 숨겨주겠네.”“황송하옵니다. 신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그 모녀는 궁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세.”대비가 그녀에게 일러주었다.“할마마마, 어찌 설명하지 않은 것이옵니까? 전하께서 총관에 명하고자 한 것을 왕비마마께서 꾸민 모략 때문에 중단된 것을 말이옵니다.”최안여가 나간 뒤 육경침이 물었다.“이 궁에서 수많은 음모와 계략, 배신과 투기를 봐왔습니다. 정 때문에 가장 관건적인 순간에 가장 방해가 되는 법입니다. 한데, 규수의 눈빛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해서 이것을 단순한 거래로 만들어 수월하게 일할 수 있게 도운 겁니다. 내 마음을 오해할 수도 있지만, 쉽지 않은 삶을 여인을 또다시 정이란 굴레 속에 속박할 순 없으니 이리하는 수밖에요.”“주상께서 진국공에게 못 할 짓을 했지요. 주상의 어미로서 제 역할을 못 한 이 늙은이 잘못입니다. 하여 그의 여식이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편이 되어줄 생각입니다.” “이 방서는 어의에게 전달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육경침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필요한 것은 남기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남겨둘 필요 없겠지요.”오래전, 왕비는 어의 중 하나를 매수해 왕세자의 진맥과 병세를 낱낱이 보고케 하였다. 비록 나서서 음모를 꾸미진 않았지만,
“잘 들어라, 여긴 진국공부다.”단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梁)씨 가문 하인들이 큰소리를 친 상대는 단현이었다. “진국공부? 그 댁 주인은 출가하지 않았소? 그러니 여긴 진국공부가 아니오. 이혼을 했더라도 이곳에 돌아올 이유는 없소. 장군 부인께서 그 댁 낭자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여기로 데려오긴 했으나 그건 옳지 못한 행동이오.”양씨 가문 사람들은 자기가 진국공부의 사람이라도 된 양 행동했다.“소문으론 혼수도 다시 가져와 장부에도 기장하지 않았다지? 진국공부에 돌아왔으면 장군 부인께 마땅히 맡겨야 할 터. 안남후부와 대립한 것도 모자라, 임씨 가문까지 찾아가 소란을 피워? 자신을 사지로 내모는구나.”“혼수 품목 목록을 내 적어줄 테니 부인에게 가져다주겠느냐?”최안여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양씨 가문 하인은 얼어붙었다.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최안여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돌아오셨군요. 쇤네, 주인마님의 명을 받아 장군 부인을 뵈러 왔습니다.”양씨 가문의 다른 하인이 건방지게 말했다. “내 혼수에 대해 먼저 말하자꾸나. 아까까지 큰소리를 치지 않았더냐?”최안여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인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농이 지나치십니다. 쇤네, 말을 하던 중 헛소리가 나온 겁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그래, 너 같은 천것은 죽여 내 눈을 버리는 것 또한 비위가 상할 것 같구나.”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사람을 시켜 하인을 끌어내게 했다. “양씨 가문은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나보구나.”하인이 발버둥 치며 변명하려 했으나, 최안여의 부하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하인의 목에 겨눴다. “아가씨…”겁을 먹은 하인이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오늘 왜 온 것이냐?”최안여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녀를 바라보았다. “부인께서 어제 본가로 오신다 약조하셨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마님께서 이리 보내셨습니다.”“방금 내 부하가 여기가 진국공부라 말하지 않았느냐?”최안여
말을 마친 최안여는 검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하인에게 휘둘렀다.“살려주십시오!”하인은 두려움에 다리의 힘까지 풀렸다.곧이어 퍽 하는 소리나 났다. 최안여는 검날이 아니라 등으로 하인의 얼굴을 후려쳤다.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잘못했습니다. 저희가 경솔한 행동을 하여 아가씨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장군 부인을 생각해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목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하인은 목숨을 구걸했다. “내 인정을 왜 너희 같은 것들을 위해 써야 하느냐?”집 안에 있던 양자옥이 최랑과 함께 걸어 나왔다.그녀는 큰 결심을 한 듯 결연해 보였다.양씨 가문 사람들도 양자옥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는지 살짝 당황했다.“그만 화를 참지 못해 이것들을 처리하려 했습니다. 올케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니겠지요.”양자옥은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처음부터 시누의 집이었으니 저들의 목숨을 가져간다 해도 이 올케가 대신 감당할 것입니다.”“저희는 마님께서 보낸 사람들입니다.”하인이 목소리를 높였다.양자옥이 손에 든 교지로 하인의 얼굴을 두어 번 때리자, 이빨 두 개가 떨어졌다.“랑아, 기억하거라. 앞으로 우리는 양씨 가문과 아무 관계도 아니다. 훗날 양씨 가문이 널 찾아오거든 이리 내쫓으면 되리라.”양자옥은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에게 발길질했다.“내가 장군 부인인 것을 알면서도 너희 주인마님이 이리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을 보니 답이 나오는구나. 출세도 못 한 남자랑 사는 첩이라 그런지, 본처의 도리를 깨우지 못했나 보군. 금일부터, 나 양자옥은 양씨 가문과 아무 사이가 아니다. 만일 양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 시누에게 계속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혈연관계를 배제하고 처리할 것이다.”양자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들까지 데려와 이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양씨 가문의 하인들은 벙쪄서 할 말을 잃었다.‘그간 효를 중시하시던 부인께서 지아비를 잃고 충격을 받은 건가?’“왕대비마마의
하인 중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씨 부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하인들을 구하기 위해 양자옥에게 무릎 꿇고 사죄할 사람이 아니다.“총관, 쇤네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최안여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선택하지 않으면 내가 대신 선택해 주마. 더러운 것들을 우리 진국공부에 계속 둘 순 없다. 당장 너희 마님께 달려가 사죄하러 오시라 전하거라.”하인들은 자신들의 마님을 데려올 자신이 없었다. “쇤네들을 살려주십시오. 저희도 마님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입니다.”그들은 양자옥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양자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본가와 관계를 끊기로 결심했다.“우리 올케가 그래서 너희들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더냐? 너희 마님께 사죄하러 오시라 전해라.”“그것은…”하인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싫다면, 내가 결정을 바꾸겠다.”최안여는 이들에게 어떤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결국 양씨 가문 하인들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뒤 돌아갈 채비를 했다.최안여는 종이를 가져와 큼지막하게 글을 남긴 뒤 방서로 만들어 하인의 손에 쥐여줬다.“양씨 가문의 첩이 뻔뻔하게 진국공부를 능멸하였다.”“장군 부인께서 양씨 가문과 절연할 것이다.”매를 맞은 하인들은 이 방서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높이 치켜들었다.다른 하인들은 몸에 저마다 욕설이 적힌 나무판을 걸었다.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들은 고개를 치켜들 수 없었다.내관이 친절하게 그들을 따라가며 감시했기 때문이다.덕분에 백성들은 방서에 적힌 글귀를 자세히 보게 되었고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오래전 양자옥은 진국공부와 혼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양씨 가문은 첩이었던 여씨의 소생을 양자옥 대신 진국공부에 시집 보내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진국공부는 그 혼사를 거절하였고 여씨는 어쩔 수 없이 양자옥을 시집보냈다.그럼에도 양씨 가문은 진국공부를 들먹이며 자신들을 경도에서 제일 중요한 가문으로 여
양 대감이 역정을 냈다.“그간 정말 헛 키웠구나. 내가 자기한테 뭣을 못 해줬다고 저리 불효를 저지르는지…”“대감, 모르시겠어요? 제가 이 댁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큰 마님께서 저를 무시하셨습니다. 아이도 본 게 있으니…”양 대감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어제 분명 진국공부에 대해 의논하기로 약조했거늘! 말도 없이 안 오는 게 무슨 경우더냐? 이젠 이혼한 시누와 연합하여 자기를 키워진 아비를 배반하는구나.”“아닙니다. 계모이니 위신이 안 설 수밖에요.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인정받아봤자 그 아이에겐 친모를 대신할 수 없는 거겠지요. 저 때문에 대감까지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여씨는 부녀의 사이를 파고들어 끊임없이 흔들었다.“얼마나 대단한지 내 한번 지켜보겠다.”양 대감은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여씨는 그를 달래려는 듯 뒤를 따라갔다.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백성들이 대문 앞으로 모여들었다.여씨는 자기에 관한 비방글을 보고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양 대감은 양자옥이 친정댁과 절연하겠다는 글을 보고 기가 막힌 듯 말했다.“이게 뭣이냐?”양 대감이 호통을 치자, 맨 앞에 있던 하인이 무릎을 꿇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감… 쇤… 쇤네…”“소관이 대감께 설명하지요.”내관이 태연하게 말했다.“뉘신지요?”높은 관직에 있지 않았던 양 대감은 대비의 최측근을 알지 못했다. “대비마마를 곁에서 모시는 내관입니다. 금일 대비마마의 자지를 전하기 위해 진국공부에 갔다가 이 댁 하인들이 장군 부인과 안국총관을 무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지요. 대감께서 믿지 않으실까 봐, 소인이 이리 증언하러 왔습니다.”성질을 내려던 양 대감은 내관의 말에 기가 죽었다.“알아보지 못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소관이…”“예를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소인은 그저 대비마마의 뜻을 전할 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여씨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안국충관이…”내관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비마마께서 진국
여씨는 하인들을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너희가 고생 많구나. 일도 제대로 못 한 주제에, 이젠 내가 직접 사죄까지 해야 하는구나.”여씨의 싸늘한 미소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서늘하게 했다.여씨의 잔인한 수법을 알고 있던 하인들은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뒀다. “낯 뜨겁게 하지 말고 당장 그 나무판부터 내리거라.”한편, 태후의 내관이 진국공부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왕의 교지를 전달하기 위해 또 다른 내관이 진국공부를 찾아왔다.“장군 부인과 안국총관을 뵙습니다.”대비의 책봉은 금세 궁 안에 널리 퍼졌다.“오 내관, 오셨군요.”양자옥이 황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어명을 알리러 왔습니다. 강씨 모녀는 소인과 함께 가셔야겠습니다.”오 내관이 정중히 말했다.최안여의 도움으로 주상전하까지 알현한 강씨는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씨 모녀를 괴롭히던 시모와 전장에서 돌아온 서방은 두 사람을 삶 속에서 도려내고 다른 여인과 새 가정을 차리려 했다.“잘됐소. 비열하고 악랄한 남자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직접 겪게 하시오.”양자옥은 강씨에게 말했다.오 공공은 말없이 미소를 지은 뒤, 강씨 모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걱정 마시오. 부인은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시오.”최안여의 말에 강씨 모녀는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린 뒤, 오 내관을 따라갔다.주상은 아랫사람을 시켜 강씨의 남편이 안남후 휘하의 병사인 것과 그가 전장에서 어떤 공도 세우지 못한 평범한 병사인 것, 운 좋게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뒤, 지아비를 잃은 오랜 친구부터 찾아간 것, 열 살 된 딸아이까지 외면한 사실까지 파악하게 했다. 백성의 자질구레한 일에 주상께서 직접 나서는 것은 과한 처사였다.하지만 강씨 부인의 일에 최안여와 왕세자 그리고 대비전까지 엵혀 있었기에 더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강씨 부인의 남편은 병부에서 제적당한 뒤, 형으로 곤장이 내려졌다. 그리고 강씨 부인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여인은
기럭 아범은 소량이 폭발 직전인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혼례일인 것을 되새기며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안내하게.”소량은 이를 악물고 한 마디 내뱉았다.기럭 아범은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두 가문에게 몹시 중요한 날이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을 시 책임을 묻는 것은 안남후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 길도 이미 다른 점포로 인해 여인들이 줄지어 있었다.이 점포도 최안여의 것으로, 여기선 옷감과 옷을 파는 점포였다. 역시나 반값에 팔고 있었다.억눌렀던 소량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계속 가거라.”소량이 서늘하게 명령했다.기럭 아범이 다급하게 말했다.“전부 여인들이오. 충돌한다면 누군가는 다칠 것이오. 혼삿날 피를 보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니…”소량이 싸늘하게 말했다. “다른 길에는 최안여의 점포가 없을 것 같으냐?”소량은 최안여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기럭 아범은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편, 흥겹기만 하던 임씨 가문은 혼란스러워졌다.“시간이 다 되었거늘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요?”온씨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임지원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서 있었다.“사람을 보내 알아보거라.”임지원은 수하를 보내 알아보게 했다.“어머님, 염려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겨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저랑 혼례 하겠다는 진심은 변함없을 겁니다.”다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으나, 사실은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온씨가 손에 쥔 손수건을 꽉 잡으며 임지원에게 말했다.“대감, 사람을 보내 알아보세요.”온 태사와 해씨 부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안남후부에서 여까지 얼마나 멀다고 이리 오래 걸리는 게냐? 아무 거리나 골라서 오면 될 것을, 좋아하는 것을 하나 택해서 오겠다느냐?”온 태사의 말에 뼈가 있었다.“외조부님, 안남후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길을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국공부의 앞으로 돌아오느라 늦나 봅니다.”임지음도 마음이 초조했지만 어떻게든 소량을 옹호했다.
소량은 풍채가 좋은 말을 타고 안남후부에서 떠났다. 며칠 동안 아프다며 난리를 치던 노부인은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자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그에게 당부했다.“안남후, 색시를 데리고 돌아올 때, 반드시 진국공부 앞으로 지나야 한다. 그 댁 여인에게 안남후부의 화려한 혼례를 보여줘야 한다. 몰락해 가는 진국공부에서 부군과 가족을 잃은 두 여인이 너의 혼례를 지켜볼 것이다.”소량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최안여에 대한 불만과 적대심이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조모님, 제가 그자들의 자존심을 짓밟겠습니다.”임지음이 소씨 가문에 들어오면, 소량도 온씨 가문의 외손서가 된다. 온 태사와 온 재신께서 과거의 일 때문에 그를 탐탁지 않아 했으나, 임지음을 봐서 소량에게 신경을 써줄 것이다.“가거라.”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영친 행렬이 북을 울리며 흥겹게 나아갔지만, 길에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다. 이 시각이면 임씨 가문으로 향하는 대로에는 백성들로 가득해야 했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 가문의 일로 큰 소란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궁금해서라도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길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앞에서 가고 있던 기럭 아범도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안남후, 전방에 길이 막혔소.”“왜지?”안남후가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군악대의 북소리도 그쳤다. “백성들이 앞에 너무 몰려서 길을 내기 어렵소.”기럭 아범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 듯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영친 행렬인데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단 말인가?”“인원이 워낙 많아…”기럭 아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은자 좀 주고 길을 지켜달라 하게. 저들 때문에 시간 낭비할 수 없소.”소량이 한발 물러섰다.기럭 아범은 머뭇거리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하지만 백성들이 워낙 많기도 했고 한 점포에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제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점포요?”소량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기쁜 혼삿날, 혼례가 끝나면 최씨 가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
소설령은 오라버니의 말에 대꾸하며 임천과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소씨 가문에서 의도적으로 몸을 사리는 바람에, 사흘 동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어느덧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 혼례 당일 되었다.소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혼례 준비로 북적였다. 소량에 대한 소문이 어떻든 간에, 그가 이끌었던 병사들은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했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도 온씨 가문의 눈치를 보며 참석했다.임씨 가문에는 온겨례뿐만 아니라, 기분에 따라 조정에 나가는 온 태사도 참석했다.재신과 태사께서 여식의 혼례에 참석해 주자, 임지원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비록 딸의 명성을 잃긴 했으나, 시댁에서 체면을 차리긴 좋았다.“장인어른, 처남, 안으로 드시지요. 지음이가 두 분이 오신 걸 알게 되면 엉엉 울지도 모릅니다.”“좋은 날 울면 안 되지, 우리 이만 갈까요?”온겨례가 진지한 얼굴로 묻자 임지원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온씨가 거들었다.“오라버니, 좋은 날 농이 지나치십니다. 조카가 숙부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가게 할 거예요?”끔찍이 아끼는 누이가 이리 부탁을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었다.“농이다. 부모님 두 분 다 오셨으니, 오늘은 내 말에 힘이 없겠구나.”온 태사의 부인. 해씨가 온겨례를 살짝 쳤다.“아드님 농 때문에 아범이 긴장했잖소.”임지원은 간신히 긴장을 풀었다.“어머님, 처남 농을 듣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간만에 하는 농인데, 그냥 봐주세요.”온 태사는 진중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자네 사위가 안남후가 됐다지? 평소엔 자네가 위엄이 있게 행동하게. 우리 가문의 외손녀를 데려간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아야 하네. 어쨌든 이혼한 남자잖소.”해씨는 두 사람이 얘기를 하는 틈을 타, 자기 딸에게 말했다. “남자끼리 얘기 나누라 하고 우린 지음이한테 가자꾸나.”온씨는 그녀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씨의 뒤에는 온씨 가문의 서녀(庶女), 온여상이 있었다.“어머님, 올케랑 두 조카들은 왜 안 보입니까?”온씨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늘 점잖고 우아하던 양씨의 기품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모녀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제 발로 찾아와 분풀이 상대가 되어준 두 사람 덕분에 최안여는 기분이 한결 좋았다.그녀는 육경침이 전해준 취선각의 찬들을 꺼내며 최랑을 불렀다.요 며칠 말을 잘 들었기에 주는 상이라고 했다.양자옥은 매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최안여가 자기를 지켜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우리 가문만큼은 내가 처리해야 해. 다음엔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한편, 양씨와 소설령은 집에 가자마자 소량에게 알렸다.“왜 찾아갔습니까?”바로 최안여부터 비난할 줄 알았던 소량이 의외의 질문을 했다.“노부인의 설연을 구하기 위해 약포에 많은 사람을 보냈으나 안남후부라는 연유로 거절했소. 아무도 우리에게 팔지 않겠다고 하더군.”양씨는 전처럼 자애롭고 온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소자가 방벚을 찾아보겠습니다. 혼인 전까지 다시는 최안여에게 시비 걸지 마세요.”혼례 준비로 바빴던 그는 요 며칠 조정에도 나지 않았다. 온씨 가문이 아직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온겨례는 두 사람의 혼례에 참석하겠다고 말은 했으나, 그것은 온전히 조카 임지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전에는 최안여가 있었기에 설연을 언제든지 노부인에게 줄 수 있었지만, 최안여가 없는 지금 안남후부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노부인의 약을 끊을 순 없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단 며칠 사이에 소량은 명예를 잃고, 처가의 압박과 가족들의 난동, 조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소량은 이미 지쳤다.이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지만 최안여 없이 자기 혼자 처리 못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어미는 안남후가 최근 매우 지쳐있는 것을 아오. 아드님이 고집을 지나치게 부린 탓도 있소. 이 세상은 남자에게 관대하기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새로운가 이야깃거리생길 것이고 우리도 자연스레 묻힐 것이오.”양씨가 소량을 위안했다.“어머님의 말씀,
“마님은 항상 온화하고 무해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척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네요. 덕분에 사람들은 저를 독하고 계산적인 사람으로 여기니, 소씨 가문의 명성은 회복하겠네요.”“이건 지혜롭지 못한 수단입니다. 안남후의 모친께서 자기보다 어린 여인를 이겨보겠다고 수작 부리는 게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양씨의 속내를 꿰뚫는 최안여 때문에 양씨는 공든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시모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우리 어머님은 너보다 연장자다!”소설령은 촌수로 최안여를 압박하려 했다.“우리 집에서 먹고 잔 주제에 무슨 염치도 없니? 감히 우리 어머님을 모욕해?”소설령은 자기가 내세운 이유가 매우 타당하다고 여겼다.최안여는 이미 예상을 한 듯 비릿하게 웃었다.“소씨 가문 사람들도 우리 아버님과 오라버니를 욕보였잖아? 난 그저 모두 앞에서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소씨 가문 사람 중에 우리 집안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더냐? 누구 덕에 그간 평탄한 삶을 영위했는데, 안남후는 아버님과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전공을 세우고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날 배반했다.” “내 비록 짐승만도 못한 너희를 상대하고 있다만, 내게 소총이 있었다면 당장 너희부터 쏴 죽였을 거다. 안남후와 이혼한 순간부터 소씨 가문과 인연도 끝났다. 설연은 고사하고 멸문하는 소씨 가문을 구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 해도,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맞습니다!”“우린 총관을 지지합니다!”소설령이 이를 꽉 물었다.“우리 가문의 생사가 네 손에 달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니 꿈 깨거라.”최안여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썩 꺼지지 않겠느냐? 설연을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냐? 사돈댁이 설연도 못 구할 정도로 가난하더냐? 임씨 가문 첫째 아드님과 혼인하기 위해 계속 임지음의 비위를 맞출 건지 제대로 고민해보거라.” 몸을 부들부들 떠는 소설령을 양씨가 황급히 진정시켰다. “얘야, 그만두어라… 안국총관께 무례를 범하면 안 된다.”최안여는 양씨에게 한마디 했다.“마
최안여의 직설적인 질문에 소설령은 듣기 불쾌했다.“안국총관까지 된 사람이 언행을 조심하는 게 어떠시오?”양씨는 소설령를 핑계 삼아 다시 연기를 했다.“설령아, 싸우지 말거라. 우린 그럴 자격이 없다. 우리 집안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잖니? 만일 약포에서 안남후부에 설연만 팔아준다면, 총관이 약포에 팔라는 명령만 내리면 너희 조모님은 연명할 수 있다. 어떤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참아야만 하느니라.”양자옥은 양씨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래서 최안여를 자기 뒤에 숨긴 뒤 양씨에게 맞섰다.“이보게, 자네는 어찌 그리 뻔뻔하시오? 우리 시누는 자기 혼수로 안남후부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약포에서 약을 안남후부에 공급하지 않는 것은 점포 주인이 안남후부와 거래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왜 우리 시누에게 뭐라 하시오?”양씨는 그 말에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말했다.“장군 부인의 질책에 반박할 수 없소. 소씨 가문이 잘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오.”순순히 인정하는 양씨 때문에 양자옥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최안여는 양씨 같은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다.“소씨 가문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부인의 병을 돌봤습니다. 그때부터 노부인께서 자기 며느리는 한 번도 자기를 간호한 적 없다며, 입으로만 걱정한다며 한탄했습니다.”“그런데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는 것은 안남후의 혼사일 전에 상을 먼저 치를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까? 뱃속의 아이도 신분 없는 아이로 태어날까 두려운 겁니까?”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는 최안여 때문에 살짝 당황했다.“난… 사실대로 말하마. 노부인의 병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생활에 영황을 끼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한다.”“좋은 날 노부인께서 혼자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할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양씨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아니다…”“마님, 노부인께서 다리가 불편하여 처음엔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밤새 다리를 주무르며 찜질을 한 것입니다.
최안여는 대문 앞으로 걸어가 양자옥 곁에 나란히 섰다.양씨는 최안여를 발견하고 매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안남후 잘못이 크다. 하지만 노부인께서 연세가 많으시고, 너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병이 호전되었잖니? 어르신께서 병 치료 제대로 못 받으면 너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니?”양씨는 소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낮추며 명백한 잘못을 한 소량도 비판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최안여에게 통하지 않았다. “마님 말씀이 옳습니다. 궁에 들어가 전하께 이혼하겠다고 청한 것도 노부인께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단호하게 불만이 있으면 궁에 들어 전하를 찾으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기세등등하시던 분이 어찌 편찮으실 수 있겠어요?”양씨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안남후에게 화나 난 것을 알고 있다. 그날 노부인께서 말을 심하게 한 것 때문에 네가 화가 난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땐 너도 진국공 부자의 상을 치르느라 바빴고 우리도 네게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안남후에게 솔직히 말하고 상의해 보라 전했거늘…”양씨는 자기 아들에게 속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임씨 가문에 명확한 뜻을 밝히겠다는 안남후를 말리지 못해 네게 상처를 줬다. 내가 대신 미안하다. 교지가 내려온 마당에 우리가 뭣을 할 수 있겠니? 안남후에게 화가 났으나 전하를 찾아가 명을 거둬달라고 할 순 없잖니?”“네가 이리 열성적인 줄은 몰랐다. 우리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장 집을 나갈 줄이야. 그 뒤에 발생한 일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했다…”최안여는 말 없이 양씨의 말을 들었다.양씨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현혹할지 보고 싶었다.최안여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양씨는 자신감을 가졌다.“왜 모든 약포에서 설연 공급을 중지한 것이니? 그러면 안 된다. 노부인께서 설연으로 연명하셨는데 모든 약포에서 네 허락 없인 안남후부에 절대 안 팔겠다고 하더구나. 노부인께서
허심은 약곡에게 속삭였다.“모든 물건을… 반값에… 사람들이 많겠지.”약곡은 최안여가 체면 때문에 억지로 화를 참는 성격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앞으로 여기서 만나지. 치료 시일은 그대 말에 따르겠소.”“시야가 훤하고 번잡한 시내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네요.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사실 왕세자도 임지음의 혼삿날 어떤 소동이 일어날지 궁금했다.“의관의 말에 따르지.”“총관께서 집안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본 왕이 찬거리를 미리 준비하게 했으니 영공 저하와 장군 부인께 가져다주시오.”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에게 왕세자가 한마디 더 했다.단청과 단주는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취선각의 음식은 외부로 판매되지 않을뿐더러 절대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없었다.“저하, 감사하옵니다.”“독 안 들었으니 염려 말고 드시게. 필경 본 왕은 총관의 뛰어난 의술이 필요하지 않소?”“저하를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그는 한마디 덧붙였다.“안남후의 노부인께서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하더군. 설연이라는 약재를 찾아다닌다고 들었소. 그 댁 부인이 진국공부로 갔을 것이오.”최안여가 흠칫 놀라 물었다.“진국공부를 찾아가면 누가 약재라도 준답니까?”“한때는 그 집안 며느리였으니, 그 댁 부인의 성정과 목적은 나보다 총관이 더 잘 알듯 싶네만.”육경침은 말을 아꼈다.최안여는 한시가 급했다. 소씨 가문이 지위를 들먹이며 진국공부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 같았다. 단청과 단주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씩씩거렸다.“어찌 이리 뻔뻔하단 말입니까? 온 대하에 소문이 다 났을 텐데 무슨 염치로 거길 찾아간답니까?”“인간도 아닌 자들이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거겠지요.”단주는 그나마 이성적인 편이었다.소매까지 걷어 올린 단청은 당장에라도 진국공부로 뛰어가 싸울 기세였다.“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진국공부에서 교양 있게 행동하란 가르침만 안 받았어도 그날 제가 가만 안 있었습니다. 제대로 혼내줬을 겁니다.”단청의 씩씩거리는 모습에 단주가 웃음을 터트렸
“간만에 오셨는데 이 늙은이랑 담소 좀 나누다 가세요.”“…네.”대비는 두 사람을 위해 마차 두 대를 준비해 줬다. 최안여는 육경침을 만나러 가야 했다.“올케, 먼저 돌아가세요. 다른 일 좀 보고 갈게요.”“네, 조심하세요.”사실 양자옥도 집에 혼자 두고 온 최랑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아무도 없는 틈에 양씨 가문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면 하인들도 막지 못할 것이다. 최안여를 태운 마차는 대비가 말했던 주점, 취선각에 도착했다. 보기만 해도 기품이 넘치는 주점은 손님도 가려 받는 것 같았다. 거칠고 천박한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육경침은 2층에서 여유로운 얼굴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허심과 약곡이 긴장된 얼굴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육경침은 그녀가 준 방서대로 약을 지어 먹은 뒤로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그것을 직접 목격한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진행했으면 한다.“저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위층으로 올라온 최안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허심과 약곡은 최안여를 보자마자 내심 반가워하며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의 수상한 눈빛에 단청과 단주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기 주인을 보호했다.“송구합니다, 저희… 저희는 그런 의도가…”허심이 말을 더듬거리며 변명했다.“괜찮소. 궁에 들어 인사를 드리던 중에 이상한 분과 마주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하였습니다.”육경침은 팔꿈치를 자연스레 식탁에 올려놓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번이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이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최안여는 진맥부터 했다.“오랜 투병으로 장기 손상이 심각하옵니다. 전에 드린 방서는 증상을 완화하나 저하의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순 없습니다. 모든 증상을 종합해 보면, 저하께서 오랫동안 중독에 노출된 것으로 예상되옵니다.”“오늘도 방서와 해독약 두 알을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저하께서 빌려주신 호심단은 한 알 더 보태어 총 두 알을 갚겠습니다.”단청은 옷소매에서 약병 두 개를 꺼내어 약곡에게 건넸다. 육경침이 천천히 입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