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눈썹을 만지며 말했다.“지금 바로 BK 사에서 당신들 임원을 찾을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작업반장은 다급하게 가슴을 툭툭 치며 이에 응했다.성혜인은 그들과 더 이상 얘기할 기분이 아니어서 바로 BK사로 갔다.BK사 쪽은 이미 작업반장의 전화를 받아 BK사 대표도 지금 매우 불안해했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직접 뽑은 실내 디자이너고 BK사는 이 일로 서천군의 시공을 따냈다. 만약 이번에 성혜인의 불만을 사면 서천군 프로젝트는 물 건너가는 거나 마찬가지다.다급한 BK사 대표의 이마는 온통 땀 범벅이었고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소연했다.“저 인부들은 도대체 시공을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이런 잘못을 저질러. 만약 반 대표님이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우리 시공팀은 분명 전문적이지 않다는 불명예를 떠안을 거야.”“대표님, 그 인부는 나이가 조금 있고 집에 일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이미 퇴직금을 챙겨드리고 해고했고 또 그 인부도 지금 죄송해하고 있습니다.”일이 이 지경까지 되어 지금 와서 책임 추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성혜인이 더 이상 이 일을 크게 안 만들게 할지이다.대표는 또 다른 임원과 이 일에 대해 회의하자 이들에게 물을 따라주던 어린 임원이 이를 다 듣고 눈빛이 반짝였다.이 임원은 서민규의 사람으로 가장 비위를 잘 맞추며 학력이 낮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서민규는 전문대 출신으로 대학이 자주 서민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이 임원은 유도현으로, 나오자마자 자기 사무실로 가 혼자 고민했다. 성혜인을 아는 인맥을 찾을 수 있는지 만약 회사가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우면 승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고민했다.이 자리에 벌써 삼 년 동안 있으면서 승진의 기미가 하나도 안 보였다. 평소에 남들 비위 맞추며 이런저런 허드렛일도 많이 했다. 아마 큰 게 한방 필요한 것 같다.“나 대신해서 페니와 누가 관계가 좋은지 알아보고 좋은 말 좀
서민규는 전화를 끊고 의기양양해하며 유도현을 바라봤다.유도현은 아직도 전부 믿지 않았다.“어디서 페니와 닮은 사람을 데리고 오는 거 아니야? 어떻게 페니를 알 수가 있어?”자기가 페니의 남편이라는 말이 서민규의 입 밖에 나올뻔했지만 어쨌든 가짜 결혼이고 그 사실이 밝혀지면 창피하기 때문에 꾹 참고 자랑하지 않았다.유도현은 서민규를 이리저리 보며 아까보다는 훨씬 좋은 태도를 보였다.“그럼 이렇게 하자. 페니가 이 일을 크게 안 벌이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바로 월급을 2배로 올려줄게. 지금 170만 원 받지? 이번 일 성공시키면 340으로 올려줄게.”서민규가 비록 학력이 남들보다 좋지는 않지만, 사실 일하는 능력은 좋았다. 그런데 유도현이 계속 괴롭히는 바람에 이 회사에 오래 있었어도 월급이 오르지 않았다.직장 내에서 동기들의 월급을 묻는 것은 금기이기 때문에 비록 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받는지는 잘 모르지만 자기가 아마 가장 적게 받고 있을 것이다.같이 하소연을 하는 임원도 이미 200만 원 정도까지 올랐다.유도현은 서민규가 대답하지 않자,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이만큼이나 올려 줬는데 싫어? 밖에 나가서 조금만 알아봐도 전문대 졸업생이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없을걸.”서민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유도현을 한참 욕을 한 뒤 고개를 들었다.“유 팀장님,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가서 페니한테 말해보겠습니다.”유도현은 곧바로 복도를 나섰고 엘리베이터에서 BK사 대표를 마주쳤다. 대표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가득했고 옆에 있는 비서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반 대표가 갑자기 와서 좀 보겠대? 이따가 페니도 도착하는데 둘이 마주치게 되면 페니가 굳이 찾아가서 보고하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다 알게 될 거야.”대표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 그러나 국내에서 반승제와 같이 협력하고 싶은 회사가 너무 많아 이번 프로젝트가 물 건너가면 양사가 협력한 사실이 이미 밖에 알려졌기 때문에 BK사는 분명 놀림거리가 된다.반짝거리는 눈으
이마가 땀으로 범벅이 된 서민규는 월급 때문에 팀장 앞에서 큰소리치고 나중에 대표 앞에서도 잘 보이려고 계속 큰소리쳤던 것이 지금 너무 후회스러웠다.만약 이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유도현이 더욱 못살게 굴 것이 뻔했다.“페니 씨, 전 BK사를 대표해서 온 게 아니라 상부 지시를 받고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할지 알려는 것뿐이에요. 지금 대표님이 다른 손님을 배웅 중이어서 지금 바로 페니 씨를 마중 나오지 못하셔요. 그래서 제가 자진해서 페니 씨를 알고 있다고 말했어요. 미안해요.”서민규는 아까보다는 더욱 솔직한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다 꺼냈다.서민규는 친절하게 일어나서 데스크로 가 차와 간식을 가져왔다. “30분 정도 뒤에 대표님 지금 일정이 끝날 거예요. 그때 저랑 대표님 뵈러 가요.”서민규가 이렇게까지 말했고 심지어 신예준의 친구인데, 지금 강민아와 신예준이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어 성혜인도 일을 크게 만들기가 조금 그랬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왜냐하면 서민규랑 어떤 얘기를 나눠야 할지 몰라 시간이 비는 틈을 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기존 설계도를 새로 수정하고 있었다.기둥을 없애면 조명도 바꾸어야 한다. 성혜인은 집중하며 인상을 쓴 채로 기존의 설계도를 계속 수정했다.서민규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으며 성혜인의 찻잔이 빈 것을 보고 조용히 새로운 물을 부어 줬다.성혜인은 한번 집중하면 시간을 보지 않아 30분이 금방 지나갔다.반승제 쪽도 이미 일이 끝나 BK사 임원과 BH그룹 임원이 모두 로비로 내려왔다.반승제와 BK사 대표는 맨 앞에서 걸어 반승제는 멀리 창 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성혜인은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고 옆에 있는 남자는 찻잔의 물을 붓고 있었다.남자와 여자는 서로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상하리만큼 사이가 좋아 보였다.반승제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시선을 다시 돌리고 계속 문으로 조용히 걸어갔다.BK사 대표는 발걸음이 잠시 멈췄던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냉기가 돈다고 생각했다.BK사
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휘청거리는 유도현을 바라봤다. BK사에서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 아직도 인상이 남아있었다. 저번에 만날 때도 서민규를 욕하고 있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그 자식 도대체 페니랑 어떤 사이인 거야? 감히 여자 힘을 빌려 내 팀장 자리를 빼앗아? 그 자식 조만간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나는 BK사에서 나와도 갈 곳이 많다고. 그 자식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죽여버릴 거야!”“둘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 진짜 더러운 사람들이라니까!”‘서민규가 팀장 자리를 빼앗아?’반승제는 BK사에 함께 있던 서민규와 성혜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본인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이 와중에 남편 직장까지 신경 쓴 모양이다.‘뭐, 내 알 바는 아니지.’반승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도현 힐끗 보고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유도현은 오늘 부자 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고급 술집에 와 봤다. 이곳에는 재벌 2세가 아주 많았고, 서울에서 꽤 잘나가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윤단미도 마찬가지다.오늘 같은 술집에서 윤단미와 지인들이 환영회를 열었다. 명성이 꽤 좋은 편인 윤단미는 성격이 서글서글해,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서수연도 그중 하나였다.서수연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윤단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단미 언니, 왜 이제야 돌아왔어요! 언니가 돌아오고 나서야 제원에 빛이 도네요!”윤단미는 서수연에게 붙잡혀 중간에 가서 앉았다.환영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반승제가 대외적으로 발표한 유일한 여자친구이기 때문이다.윤단미가 제원으로 돌아온 이상 이번 달 안에 반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들 잘 보이려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반승제와 가깝게 지내기는 어렵지만 윤단미는 아니지 않던가.반승제는 외국에서 지낸 3년 동안 여러 금융 중심지에서 명성을 날렸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을 젊은 반승제가
윤단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곁에 앉아 있던 윤선미가 윤단민의 표정을 보고 참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네이처 빌리지의 실내 디자이너가 내가 말했던 그 사람이야. 형부랑 과하게 가깝게 지내는 게 아무래도 꼬시려는 것 같아. 조심해.”윤단미는 반승제에 대한 믿음이 아주 두터웠다. 소매 단추 사건 이후로는 자신의 위치에도 자신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실내 디자이너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이때 곁에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갑자기 물었다.“네 환영회에 반 대표님은 왜 안 와?”윤단미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넘기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방금 통화했는데 곧 도착한대.”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반승제와 온시환이 함께 걸어들어왔다. 온시환은 자신이 챙겨온 선물 상자를 윤단미에게 건넸다.“오랜만이야, 이건 귀국 축하 선물.”윤단미는 뭘 이런 것까지 준비했냐는 얼굴로 선물 상자를 받아 들더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반승제는 깔끔한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금방 일을 끝내고 왔는지 정장 외투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났다. 그가 작은 액세서리 상자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윤단미는 미소를 지었다.“승제야, 너까지 선물을 준비할 필요는 없는데...”반승제가 준비한 선물을 힐끗 본 온시환은 눈썹을 튕겼다. 작은 선물 상자 속에 담긴 건 재벌 집 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브랜드의 목걸이였는데, 가격이 한 400억 정도 되었다.돈은 무뚝뚝한 반승제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얼마를 쓰든 놀라울 건 없었다. 게다가 이 목걸이는 심인우를 시켜서 가장 비싼 것으로 산 게 분명했다. 온시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만나자마자 400억짜리 선물이라니, 두 사람 여전하구나.”자신이 가장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윤
반승제는 고개를 들어 신이한을 바라봤다. 윤단미를 대하는 신이한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직감이 뛰어난 반승제라고 해도 도대체 무엇이 이상한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찌 됐든 덕분에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게 생겼으니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룸 안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화젯거리를 찾아냈다. 그중 대부분이 업계에서 떠도는 소문이었다. 윤단미는 한결같이 단아한 미소로 반승제의 곁에 앉아있었다. 표정은 변치 않았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이 반승제의 부인에게 본때를 보여줄 딱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윤단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백연서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때 서로 눈꼴 시려하는 존재였다. 윤씨 집안이 성에 차지 않았던 백연서에게 반승제와 만나는 윤단미는 꼴불견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반승제의 현 부인보다는 그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아주머니, 승제 부인 전화번호 알아요? 제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백연서는 한때 반승제는 윤단미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여자와 만났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윤단미와 타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반승제에게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를 소개해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서 예전과 다르게 무미건조하게 전화번호만 보내줬다.윤단미는 번호를 보자마자 피식 웃더니, 남들이 눈치 못 챘다는 것을 확인하고 몰래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승제가 취했어요. 위치를 보냈으니 데리러 와요.」같은 시각, 성혜인은 네이처 빌리지의 디자인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디자이너 담당의 설계도는 BK사 덕에 편의를 본 것과 별개로 중요한 것이었기에 신경을 써야 했다.성혜인이 피곤에 찌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 휴대폰이 짧게 올렸다. 예상 밖의 사람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었다.문자를 보낸 사람은 SY그룹의 임원인 김양훈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성휘와 함께 한 창업 멤
몇 시간 전, 퇴근한 김양훈은 성휘를 만나러 가려고 했다. 얼마 전 통화하며 성휘가 건강 문제로 병원 살이도 했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치료를 그만둔 것 같아 걱정되던 참이었다.비록 삼 년 전 성혜인 때문에 성씨 집안과 거리가 생기기는 했지만, 김양훈 여전히 SY그룹에 남아 있었다. 복지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아 퇴직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김양훈은 결재받아야 하는 서류와 함께 성휘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번에 간 김에 허진이 성휘를 대신해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불편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아직 40대밖에 안 된 비서 나부랭이인 허진보다 자신이 성휘와 가장 오래된 사이였으니 말이다.이 시간의 임원층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성휘의 사무실 문이 열려 있는 곳을 보고 김양훈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이때 소윤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성휘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자리를 내어준 덕분에 소윤도 가끔 회사로 출근하고는 한다. 실질적인 권한은 없지만 그래도 임원 회의에서 의견은 내놓을 수 있는 정도였다.사무실 안의 소윤은 평소 현모양처의 자태는 어디로 갔는지 낯부끄러운 소리만 낼 뿐이었다.“아아~ 진아, 너무 좋아. 더 빨리.”“죽어가는 늙은이에 비해 역시 젊은 게 다르지? 회사가 우리한테 넘어오고 나면 꼭 별장을 사줄게.”“한이가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곧 우리 손에 넘어오게 될 거야. 네가 해라고 했던 일도 전부하고 있어. 진아...”허진은 피식 웃으며 작게 욕설을 내뱉더니 움직임을 계속했다.문밖에 서 있던 김양훈은 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성휘의 사무실에서 그의 아내와 비서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김양훈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곁에 세워져 있던 걸레를 넘어뜨리며 기척을 냈다. 쾌감에 휩싸인 소윤은 당연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나마 이성을 잡고 있던 허진이 예리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누구야?”허진은 후다닥 바지를 입고 밖
의사의 말을 들은 순간, 성혜인의 머릿속은 윙하고 울렸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 가는 순간이었다. 불과 40분 전에 문자를 받고 달려와 봤더니 시체만 남아 있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술집은 바로 폐쇄당하고 경찰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김양훈이 안으로 들어간 이후의 CCTV 영상은 이미 지워진 상태였다. 경찰은 결국 김양훈 본인의 과음을 이유로 삼고 피살의 가능성을 배제했다.이런 술집은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문 채취가 아예 불가능했다. 일일이 채취하는 것은 수천 명을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지문 위에 지문이 덮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시간이 말도 안 되게 오래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술집의 보안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다.병원 복도로 나온 성혜인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얼마 후 김양훈의 가족들이 도착했고 병원 복도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최근 따라 병원에 자주 다녔던 성혜인은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누르며 김양훈이 생전 자신에게 보낸 문자를 바라봤다. 조금 전 경찰 측에 넘겨 조사를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성혜인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술집으로 돌아갔다. 증거가 없기는 했지만 일단 사람이 죽었으니, 주변에는 폴리스 라인이 있었다. 유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빼도 박도 못하고 갇히게 되었다.그렇다고 해서 경찰들이 조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의사도 알코올중독이라고 한 마당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김양훈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연락한 적 있는 사람인 성혜인은 사망 시간에 술집 밖에 있었으니 역시 혐의가 없었다.술집에서 헤매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다. 성혜인은 술집 사장에게 CCTV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경찰 조사를 받느라 긴장한 사장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은 듣지 못했다. 현장에는 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밖으로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