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꺼져”라는 말조차도 하기가 귀찮아진 듯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마치 서주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서주혁의 머리는 국물로 온통 범벅이 되었고 이마는 맞아서 붉어졌다. 원래 불같은 성격을 지닌 그였지만, 이 순간에는 화를 억누르며 참고 있었다.서주혁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눈에 비친 장하리의 수척해진 모습과 어젯밤 그녀의 뺨을 때렸던 일을 떠올리며 일시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강아지는 여기에 둘게.”서주혁이 막 말을 끝냈을 때, 장하리가 또 한 번 웃었다.“당신의 개랑 함께 꺼져요.”“장하리!”서주혁의 말투가 단호해지며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하지만 그는 장하리의 다음 말에 얼어붙었다.“또 제 뺨을 때리려고요, 서주혁 씨?”서주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은 마치 무언가에 심장을 관통당하는 것 같았다.둔탁한 통증 속에 날카로움이 약간 섞인 그런 느낌이었다.서주혁은 강아지 이동장을 든 채 일시에 무력함이 밀려와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어젯밤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장하리의 행동은 분명 미친 짓이었다. 또한 펄펄 끓는 물을 온시아에게 뿌린 후에 미쳐 날뛰었기에 만약 제재하지 않았다면 장하리가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서주혁은 단지 급한 마음에 그런 행동을 했을 뿐이다.그는 전에도 여자를 때려본 적이 없었다.서주혁은 갑자기 자신에게 반박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주혁의 마음속 장하리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도하고 교활한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었다.서주혁은 심지어 장하리가 서씨 집안에 찾아간 이유가 자신에게 매달리기 위함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 참지 않았었다.어젯밤과 같은 광경 속에서 장하리가 한 말은 정말 사람을 웃기는 소리였다. 온시아가 그녀를 찾아가서 아리를 빼앗아 갔다는 말을 내뱉었을 때 말이다.어릴 때부터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온씨 집안 아가씨인 온시아가 어떻게 상식을 벗어난 그런 일
경찰은 서주혁에게 이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서주혁은 약간 멍해졌다. 이 자리에서, 이 바닥에서 이미 인심의 사악함을 다 보았노라고 자신했다.하지만 자신을 망칠지언정 딸까지 함께 끌어 내리려 하는, 더군다나 이렇게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서주혁은 갑자기 자신이 장하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경찰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서주혁은 장하리가 그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서주혁의 눈에 비친 장하리는 항상 그런 여자였지 않았던가?그러나 이제 서주혁의 인식은 서서히 뒤바뀌고 있었다.온시아가 직접 집에 찾아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장하리는 눈앞에서 자신의 강아지를 빼앗기는 장면을 지켜보며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까?그리고 용기를 내어 서씨 집안을 찾아가 시비를 벌이던 장하리가 이성을 잃고 온시아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사랑하는 사람에게 뺨을 맞고 엉망이 된 모습으로 떠날 때 장하리의 세상은 틀림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서주혁은 평생을 순탄하게 살아왔고, 유독 어린 시절의 그 사건만이 그의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을 뿐이었다. 반면 장하리는 일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이다.서주혁은 갑자기 다시 치솟는 짜증과 함께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다. 어젯밤, 그는 침착한 마음으로 장하리가 제시할 수 있는 증거를 면밀히 살펴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장하리를 대할 때 좀 더 인내심을 가졌어야 했고, 따귀 같은 것은 때리지 말았어야 했다.서주혁은 항상 그 따귀와 함께 무언가 소중한 것이 부서져 버린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것은 필사적으로 주우려고 해도 도무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서주혁은 어떤 여자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어서 줄곧 동정심과 연민으로 여겼다.예를 들어, 그가 오늘 저녁 새로운 강아지를 데리고 장하리를 찾아간 것도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서주혁의 예상대로라면, 장하리는 감격에 겨워 기꺼이 받아들였어야 했다. 무
온시아는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천천히 아래로 스크롤하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온씨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시아야, 너 인터넷에 올라온 소식 봤어? 회사 주가가 또 하락했어. 이번 일은 네가 확실히 지나쳤어. 공개적으로 사과해.”“인터넷에 올라온 욕설만 해도 이미 오백만 개가 넘었어. 지금 주주들도 의견이 분분해. 더 이상 잠자코 있으면 위에서 우리 가문에 조사가 내려올 거야.”온시아는 다리를 감싸고 계속 어깨를 떨었다.“싫어요! 절대 그년한테 사과 못 해요!”문밖에 있던 사람은 이 말을 듣자, 분노가 치밀었다.지금 어떤 상황인데 아직도 애처럼 투정이나 부리다니.“그래. 사과 안 할 거면 온씨 가문에서 널 제명한다고 발표할 거야. 앞으로 너의 개인적인 행위는 온씨 가문과 상관없으니, 알아서 해.”이처럼 큰 가문에 어디 소위 말하는 혈육 간의 정이 존재하던가. 온시아에게는 친오빠가 있었다. 현재 그녀의 일 때문에 친오빠의 가문 내에서의 입지도 영향을 받았다. 온시아의 부모는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고 했다.온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한순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방금 귀국했을 때만 해도 집안 모두가 그녀를 떠받들었다.서주혁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모두가 축하해주더니 한순간 전부 돌아섰다.온시아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래층으로 달려가 보니 온씨 가문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고,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다.온시아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도도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제가 사과할게요. 당장 사과하면 되잖아요.”온씨 가문에서 쫓겨나면 모든 카드가 정지당할 것이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욕하고 있는데 길바닥에 나앉으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계란 세례와 썩은 나뭇잎일 것이다.온시아가 말했지만 현장에 있는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들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어머니의
사람들에 의해 온씨 집안에서 끌려 나갔을 때에도 온시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무릎까지 꿇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 오빠마저 시선을 회피하며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침묵을 지켰다.예전의 아름다웠던 전부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처참한 진실이 드러났다.전에만 해도 온시아는 장하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모두에게 버림받고, 서주혁마저 장하리를 버렸다. 장하리가 아무리 애원해도 서주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도 장하리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온시아 역시 모두에게 철저히 버림받았다.온시아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차에 앉아 한 별장에 왔다.“아가씨, 빨리 짐 챙기세요. 3시간 뒤면 비행기가 이륙할 거예요.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이 말은 운전기사가 온시아에게 한 말이며, 온씨 가문이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온씨 가문은 이 결정을 인터넷에 공표하고 그 유가족에게 20억 원을 배상했다.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비난은 계속되었고, 온씨 가문과 관련된 모든 것이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짐을 모두 정리한 후, 온시아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쏟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어떻게... 잘못했다고요. 장하리를 찾아간 것도, 강아지를 빼앗은 것도 정말 잘못했어요.”하지만 이제 와서 사과해 봤자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눈이 팅팅 부어오른 온시아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주혁을 한 번만 더 만나보고 싶었다.“주혁 씨의 별장으로 데려다주세요. 부탁할게요.”운전기사도 그녀에게 약간 짜증이 났다. 인터넷에 폭로된 영상의 내용이 너무나 심각해서 조금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온시아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온시아는 얼굴이 뜨겁고 아팠다. 그녀의 눈에 운전기사는 하인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에는 이런 하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눈치까지 봐야만 했다. 얼굴이 일그러진 온시
장하리는 온시아가 둘째 날에 출국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유해은은 장하리가 펄쩍 뛰며 기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장하리는 한참 아무런 반응도 없이 창밖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그래.”장하리는 살이 홀쭉 빠져서 턱선이 날카로워 자고 얼굴이 작아졌다.저녁에 잠잘 때 저도 모르게 아리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아리가 어떻게 무지개다리를 건너게 된 걸지 생각하기도 싫었고 생각하면 할수록 무능한 자신이 싫었다.장하리가 걱정된 유해은은 정신과 전문의를 불러주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몸이 안 좋은 것뿐이라 좀 휴식하면 괜찮아질 거예요.”얼마 후 장하리는 집으로 보내졌고 집에는 아리의 사료와 물이 고스란히 그릇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리만 없었다.유해은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장하리는 얼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해은 씨, 며칠 동안 저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됐어요. 저는 집에서 몸조리를 잘할 테니까 먼저 가서 촬영해요.”유해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장하리에게 당부했다.“S.M그룹의 연예인이 아니면 반복적으로 신분 확인 후 업주의 허락을 받고 들여보내라고 관리실에 얘기해 뒀어요.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장하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네. 알겠어요.”장하리의 웃음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보다 더 슬퍼 보였다.유해은이 떠난 후, 장하리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낯설게만 느껴졌다.몸이 아직 낫지 않은 장하리는 집에서 쉬어야 했다.장하리는 침대에 누워 폰을 봤다. 서주혁의 게시물을 본 장하리는 서주혁이 그녀한테 걸었던 차단을 푼 것을 발견했다.그전까지 장하리는 서주혁의 게시물을 하나도 볼 수 없었고 서주혁도 게시물을 잘 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서주혁은 글과 함께 하얀 강아지 사진을 게시했다.[강아지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요?]30분 전에 올린 게시물에 장하리와 서주혁의 친구인 온시환과 협력업체 몇 곳에서 그에게 댓글을 달아 조언을 해주었다.그중
아리카.성혜인은 줄곧 인터넷에 접속해 국내의 소식을 접했다. 인터넷에 온시아의 욕으로 도배된 것을 본 후에야 성혜인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장하리한테 전화해 봤자 미안하다고 사과할 게 뻔해서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지금 누구도 선뜻 장하리한테 연락하지 못했다. 모두 장하리가 혼자 조용히 쉴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었다.성혜인은 눈이 시려서 눈을 비비적대며 컴퓨터를 내려놓았다.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여자는 성혜인에게 말했다.“임신했으니 되도록 전자제품을 멀리하세요.”성혜인은 이내 욕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고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붉은 핏줄이 서려 있었다.반승제가 아무런 소식도 없자 성혜인은 한 주일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다. 한밤중에 악몽을 꾸다 놀라서 깨나는 경우가 빈번했다.국내 여론을 잠재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성혜인은 피로가 밀려왔다.그 뒤, 또 하루를 기다렸지만 반승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성혜인은 먼저 설우현한테 연락해 혹시 발견한 단서가 없는지 물었다.“아직 발견된 건 없어. 혜인아. 너무 급해하지 마. 연구기지의 구조가 워낙 복잡해서 당분간 걔네와 연락이 닿긴 힘들 거야.”“구금성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거예요?”성혜인은 나하늘이 아직도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꺼린다고 예측했다.구금성 얘기만 나오면 설우현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전처럼 똑같아. 접촉만 하면 소리 지르기 바쁘고 도저히 소통이 안 돼. 작업팀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지만 지하실이 너무 교묘하게 설계된 탓에 몇 개월은 걸려야 할 것 같아.”얘기를 들은 성혜인은 마음이 무거워져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반승제가 아무리 걱정되어도 성혜인은 호텔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한편 연구기지에서 반승제는 몇 날을 거쳐 드디어 구금성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아직 설기웅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최용호와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어느새 어두워진 저녁, 반승제는 또 약물을 한 움큼
젊은 남성은 잔뜩 들떠서 사라를 바라보았다.“박사님 진세운한테 불만이라도 있나 봐요? 진세운은 저희가 다음 타자로 올려보낼 사람인데 말이죠.”사라는 계속 시험관을 만지작거리며 무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딱히 제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에요.”임원들은 모두 사라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반승제는 사라의 맞은편에 서서 스크린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임원들의 회의실은 그들이 있는 곳과 다른 구역에 있는 것 같았다. 인테리어도 다르고 연구 기지와 완전히 다른 색의 페인트를 했다.가장 큰 의문점은 임원들의 뒷배경은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한참이 지나도록 그 뒷배경을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연구기지 내부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관찰했다.자세히 관찰한 끝에 임원들이 연구기지에도 칸다에도 없을 거라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연구 기지에서 7명의 임원의 신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임원이기에 마스크를 쓰며 신분을 숨겨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혹은 임원들끼리도 서로의 신분을 모른 채 비즈니스만 하고 있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었다.반승제는 손 한쪽을 부들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그가 만약 임원중 한 명이었다면 절대 혼자 아리카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아리카에 오면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최근 플로리아 지역에 큰 회의가 자주 열려 여러 나라의 임원들이 참여했기에 이때만큼 절호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이 몇 명의 임원들이 현재 플로리아에 있을 것이다.임원 중 유일하게 얼굴을 내놓은 젊은 남자는 아마 다른 나라에서 직위가 비교적 낮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반승제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사라는 이미 회의를 끝마치고 조용히 계속 연구에 몰두했다.반승제는 손에 든 시약을 무심코 바라보며 아마도 그들의
‘뭘 축하한다는 거야?’진세운은 옛날부터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배지를 지금은 손을 뻗어 만질 수 없었다.오히려 진백운은 배지를 가지고 놀다가 정중하게 진세운의 품에 던졌다.진세운은 갑자기 돌덩이가 가슴에 얹힌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그때 무언가가 굳게 닫힌 철창 사이를 뚫고 나왔다.진세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가슴팍으로 떨어진 배지를 내려다보며 진백운을 밀어냈다.진백운은 조심스럽게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갔다.문이 닫히고 진세운은 문득 짜증이 몰려왔다. 이윽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다시 진세운을 뒤덮었다.진세운은 심호흡 깊게 하고 담배 한 대를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밖에서 갑자기 큰 고함이 들려왔다.그 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진세운은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홀에 가서 상황을 살폈다.그가 도착했을 때 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8번 실험체가 누군가에 의해 풀려나와 총성이 귀를 울려댔다.총성과 함께 흰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홀을 자욱하게 뒤덮었다.홀 안의 연구원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혹시라도 저 살인 무기의 눈에 띄어서 살이 갈기갈기 찢길까 봐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살인 무기는 연구원을 가장 싫어했다. 그의 손에서 죽어 나간 연구원만 최소 10명이었다.유리 벽의 보호에서 벗어난 연구원은 살인 무기의 눈에는 땅거미가 따로 없었다.어떤 이들은 필사적으로 다른 곳으로 도망쳐보려 했지만 이미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사람들 사이에 숨어 함께 도망가려던 반승제는 갑자기 최용호의 목소리를 들었다.“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실험체를 가둬둔 작은 방마다 디지털 도어락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살인 무기들은 주먹 한 번으로 도어락을 부수고 짐승처럼 달려들었다.반승제는 눈이 반짝이더니 8번 실험체에게 다가갔다.실험체가 최용호를 밀치자 그는 몇 발짝 뒤로 밀려났다. 최용호는 단 한 번도 힘이 이렇게 센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실험체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성혜인은 설계도를 한 장 집어 들며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이 디자인에 저작권 있나요? 제가 사고 싶어요. 직접 디자인한 거죠?”갓 돌이 지난 쌍둥이를 데리고 성혜인은 플로리아로 부모님을 뵈러 왔다.이번에 반승제도 함께 동행했지만 설씨 가문에서 설서율과 반진율을 돌보고 있어서 함께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설연주가 대답하려는 찰나 주변에서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나, 이게 누구야? 우리 재주꾼 진연주 아니야?”설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김현서의 절친, 류소영이 눈에 들어왔다.류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옆에 있던 선반을 발로 툭 차며 거들먹거렸다.“너 여기서 매일 재주를 팔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이는 거야?”성혜인은 류소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류소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성혜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얘가 전에 표절한 거 모르세요? 우리 학교에 소문이 다 퍼져서 아무도 얘 디자인 같은 건 안 사요. 학교 이미지에도 먹칠했으니 말 다 했죠.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데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제대로 된 디자이너 찾아보세요.”설연주는 이미 일어서서 류소영의 오만한 표정을 보며 손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렸다.류소영은 순간 당황했다. 예전에는 늘 김현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연주를 괴롭혀 왔기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설연주가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설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표절하지 않았어.”그러자 류소영이 냉소를 흘렸다.“표절도 모자라 교수님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었잖아. 학교에서 네가 한 짓을 다들 알고 있을걸? 정말 역겨워!”성혜인은 이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 소문 많던 설연주였다.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성혜인은 설연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꽤 잘 만든 작품이었다.“이거 당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 맞죠?
김현서는 설강민의 옆에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긴 설강민도 마찬가지였다. 창피한 것인지 설강민은 옆에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층으로 끌려가며 김현서는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설강민!”“설강민, 너 정말 내가 이대로 쫓겨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설연주와 엮이면서 김현서는 단 한 번도 설연주를 상대로 져본 적이 없었다. 김현서에게 있어 설연주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한편, 설강민은 복잡한 얼굴로 계속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모두 설강민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탓에 김현서를 구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각, 설연주는 이미 그녀의 방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외부의 소란 따위 그녀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설강민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어쩌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이지만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설강민의 뇌를 완전히 지배해버렸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설강민은 설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들, 무슨 일이야?”“아버지가 설연주에게 권한이 준거예요? 지금 별장 안의 하인들이 모두 설연주의 말만 듣고 있어요. 아버지, 앞으로 이 집의 물건은 여전히 제 것이에요. 설연주는 그저 남일 뿐이라고요.”설강민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설준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비록 설준석 본인도 양아치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지만 최소한 설준석은 전체적인 상황과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아들은 기본적인 눈치도 볼 줄 모를 줄이야.“설강민, 설연주는 네 동생이야. 김현서야말로 남이라고. 팔꿈치는 안으로 굽어야지. 너 다시 한번 더 그딴 짓거리 하면 내가 정말 네 카드 다 끊어버릴 줄 알아. 김현서 그 여자가 너와 사귀어주는 이유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아?”설강민은 순간 말
설연주는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두운 눈빛은 쉽사리 감출 수가 없었다. 설강민이 나쁜 놈인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설연주에게는 거의 밑바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설씨 가문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진즉 찌꺼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것이다.그런데 누가 또 환생시켜 주겠는가?결국, 인생은 운이었다.설준석이 떠나고 설연주는 다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막 침대 위에 누웠는데 저 멀리 김현서의 목소리가 또다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보아하니 오늘도 찾아온 모양이다.관계를 끝마치고 김현서는 또다시 설연주의 방문 앞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예전이었다면 절대 상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설연주는 방문을 열고 냉담하게 씩씩거리는 김현서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김현서가 팔짱을 끼며 설연주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나 지금 배고파. 빨리 요리해줘.”“네가 직접 해.”“이 년이!”화가 치밀어 오른 김현서가 손을 들어 올려 설연주의 뺨을 향해 내려쳤지만 그 손길은 설연주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이윽고 설연주는 발을 들어 올려 김현서의 배를 거세게 가격했다. 힘이 얼마나 센 것인지 김현서는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반 미터 정도 날아가 버렸다.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김현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과거 순순히 뺨을 맞고 개 짖는 흉내를 내라면 그대로 따라 하던 진연주는 어디 갔단 말인가?‘감히 나한테 손을 대?’“너 죽고 싶어? 어디 감히 나한테 발길질이야!”혼쭐을 내주기 위해 김현서는 다급히 바닥에서 기어올랐지만 설연주는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짝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란 설강민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자신의 침실에서 달려 나와 물었다.“무슨 일이야?”“흑흑흑, 강민 씨, 저 천박한 년이 감히 나한테 손찌검을 했어.”설강민이 나타나자마자 김현서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그에게
설연주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준석 역시 이미 집에 들어와 있었다.웬일로 멀쩡하게 차려입은 설준석은 설연주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연주야, 네 설의종 삼촌이 방금 전화를 주셨는데 주식 양도 건은 일주일 안에 처리될 거라고 하시더구나.”곧이어 설연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준비된 진수성찬을 보고 마침내 설준석이 갑자기 그녀에게 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냈다.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설준석은 설연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식탁 앞에 직접 앉혀주었다.“앉아, 어서 앉아. 넌 앞으로 이 큰돈을 어떻게 쓸 예정이니?”설준석의 물음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나약한 기색이 역력해졌다.“저, 제가 직접 이 돈을 기획해도 될까요? 하지만 현서 언니가 이 돈은 언니가 갖고 싶다고 했거든요.”김현서의 존재라면 설준석 역시 대충 알고 있다. 설강민의 오래된 여자친구이고 가끔 별장에서 부딪힌 적도 있었다. 깊게 알아보지 않아도 욕심이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설준석 본인도 비록 쓸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의 목적에 대해서라면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런데 설연주의 말까지 들으니 설준석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아직 시집도 오지 않은 남이 감히 설씨 가문의 지분을 탐내? 어림도 없지.“김현서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든?”“네. 어젯밤에 별장에 왔는데 엄청 흉악한 어투로 절 협박했어요. 아버지, 언니가 절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떡하죠?”“김현서 쟤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그런 말을 해? 김현서 그 여자는 아직 시집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연주야, 겁먹지 마. 이 일은 내가 반드시 잘 처리해둘게.”그 순간, 설연주는 공포에 삼켜진 얼굴을 하고는 설준석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했다.“아버지, 제가 아버님께 말했다는 것을 알면 기필코 또 저를 찾아와 못살게 굴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집에 계시지 않으니 아무도 저를 지켜줄 수 없어요.”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좋은 사람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설우현은 그대로 거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샌가 설연주의 장난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하지만 더 이상 설연주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셨다.그렇게 설우현이 별장을 떠난 후에야 설연주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뜨고 눈앞에 드리워진 꽃밭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유리 꽃밭은 온통 잘 핀 꽃들로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다는데 바람둥이라서 그런지 설우현은 이러한 낭만적인 놀이를 잘하는 편이었다.이윽고 설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살펴보았다.핸드폰 화면에는 온통 그녀를 저주하는 김현서의 욕지거리와 그녀가 보낸 잠자리 사진이었다.대학교 시절 설강민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김현서는 설강민과의 잠자리 사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물론 잠자리 장면이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자고 있거나 두 사람의 팔이 드러난 사진 등 관계 후에 찍은 사진임이 명확했다.처음엔 차단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단을 하면 꼭 김현서에 의해 잡혀버렸다.설연주에게 김현서는 악랄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친구들 옆에서 김현서는 대범하고 밝은 여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사람이라면 반에서 절대 잘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설연주는 늘 김현서의 가장 큰 적이었다.사진만 슬쩍 확인한 설연주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옆에 환히 핀 꽃 한 다발을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꽃냄새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김현서를 연상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을 살짝 꺾으면 연약한 꽃은 힘없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부러지고 약간의 즙만 손바닥에 남을 뿐이었다.묵묵히 손가락을 바라보던 설연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가 정승후한테 연락했어요?”“네, 연락했습니다.”“그럼 다음에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날 때, 두 사람의 영상을 설강민에게 보내줘요. 물론 학교 카페에도 보내세요.”“
컴퓨터에 머물러 있던 설우현의 손길이 멈칫했다.‘이 세상에 아직도 커피를 마셔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하지만 설연주는 워낙 뻔뻔하고 속임수에 능하니 설우현은 그녀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겼다.한편, 설연주는 배가 고팠는지 손에 든 과일을 다 먹고 손가락까지 깨끗하게 빨았다.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는 설연주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 한 장을 뽑아 설연주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설씨 가문이 너 굶겼어? 왜 그렇게 먹어?”설우현의 질책에 설연주는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잠자코 휴지를 주워들어 손가락 사이에 묻은 과즙을 닦아냈다.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설연주에 설우현은 또다시 혹여나 말이 심하진 않았는지 반성하기 시작했다.비록 지금은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부족한 것 없겠지만 과거에는 틀림없이 배를 굶주리며 나날을 보내왔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식권을 모아두었으니 그 이후로는 틀림없이 잘 먹고 잘살았을 테지.그리고 김현서와 설강민의 그 같잖은 괴롭힘 수단이라면 정말 볼품없었다.설우현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높은 세력을 누비며 살아왔는지라 일반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하여 그에게는 볼품없는 괴롭힘 수단이었지만 김현서와 설강민의 괴롭힘은 일반인 한 명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설연주가 계속하여 침묵을 지켰다.마침내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인지 설우현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과일 접시를 그녀에게 넘겨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먹어. 누가 먹지 말래?”그러자 설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설우현의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과일을 하나 더 집어 들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는 늘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면 혼자 반성하더라고요. 도덕 기준이 상당히 높나 봐요.”어색하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곧이어 설우현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일부러 그랬어?”그러자 설연주는 혼자 추측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이른 아침부터 또다시 화가
방에 돌아와 막 잠이 든 설연주는 곧바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버렸다.먼저 김현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설강민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그러나 몸을 한 번 뒤척일 뿐 설연주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자 김현서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더욱 언성을 높여 신음소리를 흘려보냈다.관계가 끝나고 김현서는 일부러 설연주의 방을 찾아갔지만 방문은 꽁꽁 잠겨있어 문고리를 비틀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화가 난 김현서는 이내 언성을 높이고 쾅쾅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설연주, 당장 나와!”하지만 진즉 시끄러운 방 안에서 잠에 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김현서가 바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설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설씨 저택에 입주한 이 한 달은 설연주가 살면서 가장 편안하게 잠을 잔 시간이다. 적어도 옆집 이웃이 한밤중에 그녀의 집에 쳐들어올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고, 좁은 화장실에 숨어서 경찰에 신고할 필요도 없고, 입을 가리고 몰래 눈물을 훔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편에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분명 설연주가 먼저 꼬셨으니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며 그녀를 나무랐다.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 적어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문을 두드리고 발로 걷어차도 꼭 잠긴 방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화가 난 김현서는 씩씩거리며 옷을 여미고 설강민을 바라보았다.“천박한 년 주제에 다 컸네? 이제 우리 말도 무시해?”과거의 진연주는 개 짖는 흉내를 내라고 시키면 말없이 따르곤 했었다.그런데 지금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아?하지만 씩씩거리고 있는 김현서와 달리 설강민은 오히려 하품하며 김현서를 꼭 끌어안았다.“현서야, 오늘은 너무 늦었다. 일단 자자.”“그래, 오늘은 먼저 자고 내일 아침 다시 혼내 주지.”다음 날 아침 6시, 설우현이 계단을 내려오는데 도우미가 그에게 다가와 누군가 대문 앞에 앉아있다고 말해주었
설연주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피곤한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차 안은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고 설우현은 또다시 음악을 틀었다.이윽고 그들이 탄 자동차는 설준석이 사는 별장에 멈춰 섰고 설우현은 고개를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짙은 화장 아래, 짙은 피곤함이 몰려왔다.원래라면 큰소리를 내어 설연주를 깨었을 테지만 무슨 일인지 설우현은 손을 뻗다가도 다시 움츠러들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나서야 설연주는 잠에서 깨어났다.시간을 확인한 설연주는 이내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이내 설연주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설우현도 더 이상 이곳에 더 머물지 않고 바로 차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같은 시각, 김현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핸들을 꼭 잡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오랫동안 설우현의 뒤를 밟으며 언젠가는 손을 쓸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지만 설우현이 갑자기 카지노에 찾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김현서는 회원권이 없기에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설우현이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지만 이번에는 설연주 그 천박한 년이 설우현의 뒤를 따라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파도처럼 몰려오는 질투심에 삼켜진 김현서는 당장이라도 핸들을 부러뜨리고 싶을 지경이었다.한편, 왜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냐며 그녀를 재촉하는 설강민의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지만 현재 김현서의 머릿속은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다.게다가 방금 그들이 탄 자동차는 별장에 도착하고도 30분 동안 바깥에 멈추어 서 있었다. ‘두 사람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사람 친척 아니었나?’김현서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남자를 꼬셨으니 설연주라면 분명 이런 짓도 할 수 있다.김현서는 여전히 설우현과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어려운데 진연주는 이미 설우현의 조수석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정말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
방금 도착했다는 설우현의 말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설연주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제 가시는 건가요? 저 오빠 차 타고 가도 돼요?”설우현은 묵묵히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옆 휴지통에 버릴 뿐 설연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러자 설연주는 넉살 좋게 따라오며 설우현의 뒤에 서서 고개를 내밀었다.“오빠, 설마 나더러 택시를 타고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죠? 카지노 여기 택시 잡기 어려워요.”설우현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과거는 의심일 뿐이었다면 현재 설연주에 대한 설우현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번져갔다.설연주는 단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신분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뿐이고 설씨 가문은 아주 좋은 이용수단이었을 뿐이다.왜 두 번의 친자확인에서 모두 통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보아하니 진연주는 진짜 설연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자신의 자동차 옆으로 다가간 설우현은 가엾게 밖에 서 있는 설연주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화가 나 버럭 언성을 높였다.“제니?”순간 움찔한 설연주는 이내 머쓱한 듯 코끝을 긁적였다.“그건 그냥 아르바이트하기 위한 가명일 뿐이에요. 게다가 오빠도 밖에서는 날 여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잖아요. 모르는 척하는 게 오빠한테도 좋을 거예요.”그 말에 설우현은 피식 냉소를 터뜨리며 말없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설연주도 얼른 뻔뻔하게 설우현을 따라 조수석에 앉았다.“뒷좌석으로 꺼져. 조수석은 내 여자친구 자리야.”그러나 설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맸다.“오빠는 여자친구도 많잖아요. 그럼 이 자리에 앉아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뭐하러 굳이 그런 걸 신경 써요. 그래도 불편하다면 그냥 저를 여자친구라고 생각하세요.”그 순간, 핸들을 잡은 설우현의 손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어떻게 이토록 뻔뻔한 여자가 존재할 수가 있는 거지?더 이상 말을 하기도 귀찮았던 설우현은 바로 액셀을 밟고 출발했다.잠시 후, 차 안의 고요함이 불편해진 설우현이 음악을 틀었다.뜻밖에도 설연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