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침실을 나와 옆에 있는 하인에게 분부했다."욕실을 청소하고, 방을 따로 치워주고, 사람을 보내 하루 세 끼 식사를 준비해줘. 근데 방은 비우지 마.”"네, 알겠습니다.”배현우는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성혜인을 보지 않았다.성혜인은 발소리를 들었지만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그들은 한 지붕 아래 낯선 사람들 같다.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반승제는 여전히 YS그룹의 대표였다. 정말 다행이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잡아당긴 후에 눈이 매우 아프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 너무 슬퍼서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렸다.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을 때,시간이 특히 길게 느껴질 수 있다.그래서 방으로 부축받을 때 그녀는 하인에게 물었다."제 방에 tv를 준비해주시면 안 될까요?”그렇지 않으면 이게 감옥에 그녀를 가두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하인의 얼굴이 난처해졌다."그건 주인님한테 먼저 물어봐야겠어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듬더듬 침대에 누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점심 두 시.네이처 빌리지의 침대에는 아직도 한 사람이 누워 있고, 찌푸린 미간은 그가 악몽을 꾸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러다가 반승제는 순식간에 악몽에서 깼다.성혜인이 사라진 2주 동안 그는 잠만 자면 악몽을 꾸고 그녀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죽는 꿈을 꾸었다.너무 절망적이었던 꿈에서 깨어나 보니 꿈보다 현실이 더 절망적이었다.그는 담담하게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신이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욕실로 가서 다시 한 번 씻고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그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마치 성혜인은 더 이상 그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없는 것 같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서주혁과 온시환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그를 본 온시환이 먼저 바둑판을 내팽개쳤다."승제야,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더 이상 성혜인에게 매달리지 마. 너도 그 여자의 태도를 보았겠지만 그 여자는 반승우를 좋아해서 처음부터 너를 이용한 거야. 이런 여자는 정
온시환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뭐가 이상한지 몰랐다.온시환은 떠나는 반승제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온시환은 돌아서서 아직 소파에 앉아 있는 서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주혁아, 승제가 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 드디어 성혜인의 실체를 다 알아차리고 이제 사업에만 몰두할 생각인가?”서주혁은 대꾸하지 않고 머리를 수그리고는 앞에 있는 바둑판을 계속해서 묵묵히 바라보았다.반승제는 BH 그룹에 도착했고 고위층 인사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처리한 서류를 건네준 뒤 바로 BH그룹의 고위층 인사들을 조직하여 회의를 열었다.배현우는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성혜인을 돌려보낸 후로 줄곧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자리에 앉아 펜을 돌리며 고위층 인사들의 발언을 듣고 있었다.고위층 인사들은 모두 안절부절못했다.오전까지만 해도 반대표가 부축되어 떠나는 것을 보았는데 저녁에 갑자기 회사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는 듯 회의를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위층 인사들은 불똥이 자신한테 튈까 두려워 아무도 감히 반승제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했다.반승제는 회의에서 다소 냉랭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가 제출한 건의는 모두 문제의 핵심에 적중했다.반승제는 몇몇 고위층 인사들을 적절히 비판한 후에야 펜을 내려놓았다.“회의는 이쯤에서 마칠게요. 영업팀 쪽에서는 설기웅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자세한 자료를 작성해 제출하세요.”말을 마친 반승제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다른 사람들은 아직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움직이지도 못했다.회의실 문이 닫히자 그들은 비로소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된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영업팀 쪽에 연락해 빨리 계획을 세우라고 당부했다.반승제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자료를 계속해 처리했다.심인우도 그의 곁에 서서 묵묵히 자료 정리를 도와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심인우는 심지어 반 대표가 틀림없이 일로 자신을 마비시키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성혜
설인아는 독기 품은 눈빛으로 성혜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엔디가 방문을 열면서 등을 켰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성혜인은 요즘 청각이 굉장히 예민해져 발소리만 들어도 이 사람이 배현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누구세요?"그녀는 이불을 젖히고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설인아와 엔디는 모두 침대 옆의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지만 성혜인의 눈빛은 그들은 향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설인아는 살짝 놀라더니 갑자기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어머나, 성혜인 씨 설마 눈이 먼 건 아니죠? 설마 나한테 머리 맞아서 그런 건 아니겠죠? 참 정말 불쌍하네요.”그녀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고는 살며시 다가가 성혜인의 바로 앞에서 손을 들어 휘저었다.성혜인은 정말 아무것도 안 보였다.엔디도 성혜인의 눈이 실명한 것을 몰랐기에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설인아는 눈이 먼 성혜인이 자기에게 위협되지 못할 것 이라는 생각에 맘속으로 한없이 기뻐했다.설인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혜인의 따귀를 한 대 후련하게 때렸다.성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아 상대방이 어떤 수를 쓸지 전혀 알 수 없었다.성혜인은 얼굴을 호되게 얻어맞았고 설인아의 득의양양한 목소리가 들렸다.“성혜인 씨, 정말 폐인이 되었네요. 혜인 씨 눈은 제가 보이지 않게 만들었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어요. 저의 큰 오빠와 작은 오빠가 저를 보호해 주거든요. 게다가 반승우 씨도 제가 여기 온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들여보낸 걸 보면 혜인 씨를 괴롭혀도 된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참 불쌍해요. 당신은 반승우 씨를 택했지만 그는 당신을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설인아는 성혜인의 눈을 멀게 만든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큰 성취감이 들었다.설인아는 성혜인이 다른 남자도 유혹하지 못하게 눈뿐만 아니라 그녀의 얼굴도 가만 놔두려 하지 않았다.“성혜인 씨, 저는 당신의 눈을 멀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얼굴까지 망가뜨릴 예정이에요. 천한 당신이 앞으로
설인아는 한이 서린 눈빛으로 긴 단검을 손에 들고 다가갔다.성혜인의 옆에 다가선 후 소리를 질렀다.“죽어! 아무도 내 삶을 망쳐 놓을 순 없어!”성혜인은 바람이 살랑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아플줄 알았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따스한 무언가가 그녀의 뺨에 떨어졌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피였다. 바닥에 피가 흘러내렸다.성혜인 위쪽에서 설인아의 손에 든 칼은 이미 엔디의 목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핏물은 칼날을 따라 성혜인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엔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인아를 쳐다봤다.설인아는 놀라서 손에 쥔 칼을 내려놓으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섰다.예전에는 설인아가 누구를 상대하고 싶었을 때 모두 엔디에게 맡겼지만 이번에 그녀가 상대하려는 것은 엔디이기 때문에 직접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엔디가 정말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이번 일은 설인아가 일찍부터 계획한 것이다.설인아는 아무도 믿지 않고 자신만 믿고 있었다.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죽어야만 그녀가 설씨 가문 아가씨라는 신분을 지킬 수 있었다.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설인아는 놀라서 몸을 바르르 떨었고 게다가 곧이어 엔디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설인아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았는데 그의 콧속은 온통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로로 가득했다.눈살을 찌푸리던 성혜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는데 순간 비명이 들렸다.“성혜인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죽이지 마세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지금 설인아는 정말 놀랐고 그녀의 얼굴에도 피 몇 방울이 묻어있었다.그녀가 칼을 엔디의 목을 찔렀을 때 실수로 얼굴에 튄 것이다.설인아는 놀란 나머지 두 다리에 힘이 빠져 땅에 풀썩 주저앉았고 이내 다시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리고 설인아는 뒤로 물러나면서 구걸하는 척했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성혜인은 자신의 옆에 누군가 누워 있는 것을 느꼈다.성혜인은
“인아야 괜찮아?”설기웅은 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설인아를 안아줬다.설인아 정말 놀랐다. 머릿속에는 온통 엔디의 눈빛뿐이었다.엔디는 며칠 동안 자신에게 부드럽게 키스하던 여자에게 살해 당할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날카로운 칼날이 엔디의 목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엔디는 그녀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죽기 전 엔디의 눈빛은 믿을 수 없는 눈빛이었으나 미움은 없었다.설인아가 엔디를 죽이는 속도가 원망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오빠, 깜짝 놀랐어요. 성혜인 그 미친 여자가 정말 미쳤나 봐요. 다시는 보기 싫어요. 우리 빨리 집으로 가요.” 예전에 설인아가 자신의 신분을 몰랐을 때 그녀는 꿈에조차도 제원에 남기를 원했고 성혜인을 난처하게 했고 곤란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어렴풋이 성혜인의 신분을 짐작한 설인아는 설기웅이 성혜인을 싫어하길 바라며 심지어 죽이고 싶었다.지금 설인아가 연약하고 가련한 척하며 겁에 질린 모습은 정말로 설기웅을 힘들게 하고 걱정하게 했다.“겁내지 마. 괜찮아, 큰 오빠가 여기 있잖아.”설인아는 설기웅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설기웅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다독이면서 한편으로 배현우를 바라보았다.“성혜인 씨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에요?”이 상황을 보면 설기웅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설기웅은 어차피 반승제와 사이가 틀어졌기에 반승제의 복수가 두렵지 않았다.배현우는 먼저 위층으로 향했다.엔디의 시체가 아직 방안에 누워있었고 곳곳에 핏자국이 가득했다.그러나 성혜인의 몸은 깨끗했다.그녀는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욕실에서 나와 침대 쪽을 유의하여 그쪽을 피해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지금 그녀는 창가 옆에 있는 소파에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배현우는 사람을 시켜 시체를 밖으로 내보내고 하인을 시켜 바닥의 핏자국을 닦게 하고는 소독하라고 지시했다.성혜인은 줄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창밖을 내다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분명 성혜인은 아무것도
물을 다 쏟아부은 설기웅은 성혜인 몸에서 손을 떼며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곧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설기웅은 설인아를 아래층 소파에 내려놓았다.설인아는 이내 잠들었고 잠든 사이에도 울고 있는 설인아를 보면서 설기웅은 그녀가 오늘 밤에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걱정만 가득했다.설기웅은 설인아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배현우는 별장 문을 나서는 설기웅을 보고 있자니 짜증만 났다.왠지 모르게 배현우는 설인아와 같은 여자를 싫어했고 심지어 설인아가 엔디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성혜인은 사람을 너무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배현우도 그녀를 싫어했다.하지만 배현우는 성혜인이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혜인은 지금 반승제와 사이가 틀어져 모든 일에 담담해 졌기 때문에 스스로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배현우는 대개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는 설기웅의 복수를 막지 않았다.그녀를 언어장애인으로 만들어 영원히 울지도 날지도 못하는 새로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반승제는 오늘 밤 플로리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지만 비행기에 탑승할 때쯤에 후회하기 시작했다.반승제가 올라탄 차는 끝내 방향을 바꾸어 다시 네이처 빌리지로 향했다.겨울이와 흰둥이는 멀리서부터 달려와 반승제를 향해 짖기 시작했다.특히 겨울은 유난히 그를 반겼다.반승제 거처에서 자기가 인기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일부러 몇 미터 거리를 두고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흰둥이는 대담하게 자기 몸을 반승제의 발끝에 대고 비비적거렸다.반승제는 심인우의 손에서 장갑을 건네받아 끼고는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겨울은 반승제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리를 더 크게 질렀다.자기 주인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지 생각하는 듯했다.이번 성혜인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은 동거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매번 일이 좋아지려고 할 때마다 순식간에 상황은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혜인 씨는 다시 다시 오지 않을 거야.”성혜인은
장미는 전화 건너편에서 살며시 웃었다.“알았어. 전에 메일을 보냈었는데 지금까지 체크하지 않은 걸 보고 지금 너한테 전화하고 있는 거야. 설 회장님이 잃어버린 딸이 제원에 있을 가능성이 커 보여.” “응.”반승제는 전화를 끊은 후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너무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반승제는 머리가 아플 뿐이다.하지만 반승제의 몸은 태엽에 감긴 듯 머리가 아팠고 그외에는 상태가 멀쩡했다.그는 스카이웨어에 가서 온시환이 말한 그 신상을 보았다.스카이웨어 여자들의 질은 매우 높았고 마침 온시환 옆에도 한 명 앉아 있었다.반승제가 의자에 앉자마자 흰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소녀가 그의 옆에 앉았고 소녀의 청순한 외모에 머리를 뒤로 하나 묶었고 눈빛도 맑았다.“반 대표님, 드세요.”소녀가 머리를 돌려 부드럽게 그를 바라볼 때 반승제는 곧 몸이 굳어졌다.이 소녀는 생김새와 분위기 모두 성혜인하고 너무 닮은 것이다.하지만 소녀는 고등학교 때의 성혜인과 더 비슷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반승제는 고택에서 할아버지가 소장하신 성혜인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그때 성혜인은 흰색 반소매를 입었고 머리를 뒤로 하나 묶은 채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수능 끝나고 학교에서 찍은 것으로 보였다.그 사진은 성혜인이 유일한 고등학교 사진일 수도 있어서 반승제가 몰래 소장했기에 아무도 몰랐다.지금 이 소녀를 보고 그는 순간적으로 고등학교 시절의 성혜인을 보는 것 같았다.깔끔하고 부드럽고 웃는 모습도 너무 예뻤다.그러나 반승제는 고등학교 때 성혜인을 전혀 몰랐다.성혜인을 아는 사람은 반승우였다.하지만 반승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성혜인의 마음속에는 반승우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반승제가 BH 그룹을 포기하고 성혜인을 플로리아로 데려가려고 해도 그녀에게는 반승제가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했다.‘어찌 나의 감정과 존엄을 모두 짓밟는 잔인한 여자가 있을 수 있는지...’“반 대표님, 기분이 안 좋으세요?”여자는 오늘 이곳에
반승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지은은 놀랐고 이내 얌전하게 그의 품에 기댔다.“반 대표님, 포도 드실래요?”이지은의 말투는 부드럽고 맑았다.설우현은 여성분의 애틋한 목소리를 듣고 순간 그의 옆에 여자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설우현은 욱했고 성혜인 대신 화가 났다.“벌써 다른 여자가 생겼어요? 성혜인을 사랑했던 거 아니에요?”반승제는 손끝으로 이지은의 턱을 톡 쳤고 냉랭한 눈빛으로 답했다.“이젠 싫어졌어요. 더 말 잘 듣는 애로 바꿨거든요.”설우현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했다.“그래서 좋아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저번에 성혜인 때문에 하마터면 나와 큰 형님을 죽일 뻔했잖아요. 반승제 씨, 마음이 너무 빨리 변한 거 아니에요?”반승제는 대답했지 않았다.반승제의 마음이 변하는 속도가 과연 빠를까?성혜인보다 빠르지는 않았다.그녀는 반승제와 만나서 협상할 때 마저도 반승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반승제가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말이다.반승제는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했지만 성혜인은 듣지도 않고 그에게 모진 말만 했다. 반승제는 목구멍에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더 차갑게 말했다.“네, 빠르긴 한데 성혜인만큼 빠르지 않을걸요.”반승제는 전화를 끊고 바로 이지은을 꼭 껴안았다.이지은은 처음엔 마음이 달콤했지만 점점 그녀의 허리에 힘이 점점 들어갔고 이윽고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고 단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승제와 더 가까이 있었다.온시환은 반승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옆에 있는 여자와 농담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승제에게 주의를 주었다.“마음에 들면 지은 씨를 네이처 빌리지로 데려가는 거 어때? 위로도 해주고 좋잖아. 네이처 빌리지에 있는 그 물건들은 버릴 때도 되지 않았어?”“맞아, 버릴 때가 되었어.”예전에 성혜인과 동거할 때 그녀의 물건을 방안에 가득 넣었다.반승제의 옷장에는 성혜인의 물건이 절반이나 차지했었는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경이 되었다.품에 안긴 이지은은 그 틈을 타 고개를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