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문득 성혜인과 조용히 서재에서 업무를 보던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 방 안에는 온통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반승제는 회의를 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보면 성혜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차갑고 얌전한 모습으로 서류를 쳐다보고 있었다.반승제는 과거를 되돌려 보고는 심장이 문득 아픈 감을 느껴 저도 모르게 주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아침에 일어난 일에 반승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온 하루 애써 침착한 척했다.성혜인에게 이미 대역으로 놀아났으니 반승제는 더는 낭패를 보고 싶지 않았다.인적이 드문 깊은 밤, 반승제는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보며 심장이 아프기 그지없었다.반승제는 천천히 성혜인의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엎드렸다.성혜인의 의자는 반승제의 의자와 달리 더욱 작았다.성혜인은 차분한 성격이지만 소녀처럼 귀여운 물건들을 좋아했고 심지어 의자 쿠션도 핑크였다.이 의자 쿠션은 성혜인은 인터넷에서 직접 고른 것이다.그러나 반승제는 물건이 너무 늦게 도착할까 봐 심인우에게 직접 백화점에 가서 같은 것으로 사오라고 했고 한 시간도 안 돼 그녀 앞에 나타났다.성혜인은 그날 밤에 바로 사용할 수 있었고 쿠션이 부드럽다고 칭찬하며 반승제에게도 하나 더 사서 쓰라고 말했다.핑크 물건을 반승제가 쓸 리 없었다.반승제는 책상에 엎드렸고 이윽고 호흡이 무거워지면서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방문 밖에서는 하인들이 물건을 모두 버리느라 정신없었다.성혜인은 창문 쪽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고 창문은 열려 있었다.배현우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을 철근 여러 개로 칸막이를 해놓았다.그녀는 밤 바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한 손만 내밀 수 있었다.바람이 살랑 뺨을 스쳤고 성혜인은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아팠다.목구멍이 너무 아팠다.목구멍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성혜인은 짐작했다.설기웅과 배현우의 대화에 의하면 설기웅은 그녀를 언어장애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그 물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성혜인의 목구멍은 말 못 할 정도로 부어올랐다.
그 당시 임지연은 왜 성휘와 결혼했는지 누구도 모른다.임지연의 신분으로는 평범한 사람과 교제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다.하지만 그녀와 성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것 같았고 게다가 임지연의 집은 서천군에 있었고 외삼촌과 같은 가족도 있었다.외삼촌 일가족 모두 돌아가셨지만...성혜인은 갑자기 경직되었다.외삼촌 일가족 모두 돌아가셨다면 지금 이 세상에 임지연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갑자기 생각할수록 두려워졌고 k 씨는 여전히 성혜인을 일깨워 주었다.“당신은 임지연 씨가 선택한 후계자이고 BK 사 미래의 리더예요. 저는 단지 BK 사의 현재의 권력자일 뿐이에요. 당신이 부임하기 전에는 제가 당신의 모든 것을 책임질 것입니다. 혜인 씨가 앞으로 어떤 신분이든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든 저는 현재 BK 사의 규칙에 따라 당신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어요. 성혜인 씨, 당신은 임지연 씨가 당신에게 마련해 준 길을 따라가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반면 그것을 얻기 전에는 또 많은 것을 잃을 거예요.”성혜인의 손은 여전히 철근을 쥐고 있었지만 힘이 약간 풀려있었다.밖에서 배현우의 발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배현우는 방금 성혜인이 손으로 벽을 치는 것을 알고 있었다.“성혜인, 또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거야?”그는 입구에 서서 방 안의 불을 켰다.성혜인은 창가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공기가 된 마냥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배현우는 벽에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답답하기만 했다.성혜인 지금은 말도 못 하는 언어장애인이라서 다가가야만 하는 것을 배현우도 알고 있다.“다음 달에 당신과 약혼하기로 했고 내일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릴 거야. 설기웅이 당신에게 먹인 독약은 그에 해당한 해결 약을 구해줄게. 연구원에 있는 약은 내가 다 장악하고 있으니 독약쯤이야 바로 해결할 수 있어.배현우는 천천히 다가갔고 그녀의 암담한 눈빛을 보고 더욱 초조해 졌다.틀림없이 반승우 때문에 배현우에게 이런 심정을
이지은은 올해 대학 2학년이어서 줄곧 학교에 머물러 있었기에 작은 트렁크 하나만 들고 왔을 뿐 다른 물건들은 별로 없었다.사치스러운 빌라를 본 이지은은 너무 황홀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고 얌전하게 홀에 서 있었다.반승제 내려가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불렀다.“반승제 씨!”반승제는 그녀의 상자를 한 번 보다가 이지은이 옷을 한 벌 갈아입은 것을 발견했다.신기하게도 이 옷은 성혜인이 고등학교 때 입던 옷과 똑같았고고 이것은 서천군 그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아주 심플한 흰색 티셔츠에 아래는 헐렁한 검은색 바지였고 바지의 끝부분에 빨간 줄무늬가 놓여 있었다.교복을 차려입은 이지은을 본 반승제는 마치 고등학교 때 성혜인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당신, 서천군 사람이었어?”이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쑥스러워했다.“네, 저는 서천군에서 고등학교 다녔어요.”정말 공교로웠다.반승제는 얼굴이 어두워져 이지은은 멍하니 서 있기만 했을 뿐 어느 방에서 지내야 하는지도 묻지 못했다.서천군 어느 고등학교였어?”이지은은 또 사실대로 말했다.역시 성혜인과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대학은?”“제원 대학에서 그림 공부했어요.”반승제는 문득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다.이미 이 여자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다면, 반승제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성혜인을 모방해 그녀에게 접근한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제원 대학에서 그림을 배웠고 서천군 고등학교에 생김새까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반승우는 잠시 흔들렸다.그리고 한참 후에야 말을 건넸다.“심 비서, 지은 씨를 위층으로 안내해 드려요.”심인우도 안방으로 안내할지 다른 방으로 안내할지 망설였다.“대표님, 지은 씨 방은 어디로 할까요?”반승제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데 이지은이 벌써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말했다.“반승제 씨, 조금만 피우세요. 오늘 밤 룸에서 이미 많이 피우셨어요.”이지은은 반승제의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가져갔다.반승제는 순간 이지은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설기웅은 바로 차를 몰고 BH그룹으로 갔지만 반승제는 이미 10분 전에 떠나 새로운 회사의 커팅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설기웅은 차를 돌려 부랴부랴 그곳으로 향했지만 여전히 반승제를 보지 못했다.설기웅은 자신이 농락당한 것을 알고 얼굴이 어두워졌다.반승제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이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은 설인아와 함께 황홀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이 소식을 이미 플로리아 전체에 전달했거든요. 현재 판돈은 이미 300억으로 추가되었어요. 등장하는 사람은 권투의 왕으로 불리는 윤성이라고 하네요. 당신도 그의 체격을 아시죠? 설인아가 그의 손에 넘어가면 이틀도 버티지 못할 거예요.”윤성은 키가 2.5m나 되어 마치 웅장한 산처럼 높고 거대했다.설인아와 같이 연약한 여자가 정말 그가 차지한다면 절대 하룻밤도 못 버틸 것이다.설기웅은 반승제의 인수 사건을 뒤로하고 앉은 자리에서 신속히 플로리아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설기웅은 최대한 빨리 플로리아로 가서 이 모든 것을 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설기웅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반승제의 이런 행동은 설씨 가문의 전체를 완전히 건드리게 되는 셈인데 반승제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미친 짓을 벌리는지 이해가 안 갔다.지하 격투장의 세력은 막강했다.설씨 가문이 정말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해도 누구도 이득이 없을 것이다.설기웅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반승제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반승제는 차가운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 있어요? 설 대표?”“반승제 씨, 이 사건의 결과를 몰라서 이러세요?”반승제의 앞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품에는 이지은, 손끝에는 담배를 짚은 채 웃으며 답했다.“설 대표, 내가 결과를 고려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과 반승우가 꾸미고 있는 일을 정말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반승우는 자신의 친 형님이라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신은 미친 거 아니야?”설기웅은 이런 미치광이는 처음이라 호흡까지 떨렸다.“성혜인을 위해서 이
김경자는 책상을 힘껏 두드리며 화풀이했다.“예전에 진작 익사시킬걸!”인제 와서 아무런 말해도 다 소용없는 짓이다.모든 사람의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중 누군가가 건의했다.“우리 BH 그룹이나 네이처 빌리지에 가서 문을 막는 건 어때요? 일단 반승제를 만나는 것이 중요해요.”그런데 이들이 어디를 가든지 반승제가 없다는 소리만 할 뿐 누구도 반승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같은 시간, 반승제는 스카이웨어에 앉아 있었다. 이 룸에는 다른 가문의 도련님들이 많이 있었고 그중 어떤 이는 이미 가문의 상속인으로 되었고 또 어떤 이는 곧 가문의 상속인이 될 사람들이다.제원이라는 이 바닥에서도 항상 등급이 매겨져 있다.반승제와 서주혁, 진세운은 모두 최고 등급에 속했다.그동안 사람들은 반승제가 성혜인을 위해 BH 그룹을 포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승제에 대한 태도가 미묘했다.그러나 지금 하루 만에 반승제는 설씨 가문의 지사를 인수하고 김씨 가문의 지분 25%를 삼킨 것이다. 김씨 가문과 반씨 가문은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반승제가 손을 쓴 것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했다.그제야 사람들은 과거의 반승제가 힘을 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일단 반승제가 마음만 먹으면 재원의 세력은 이미 다시 줄을 섰을 것이다.지금 룸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져 가고 있다.모든 사람이 반승제의 휴대폰 화면이 계속 켜져 있는 것을 본 모든 사람은 틀림없이 김씨 가문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반승제는 받지 않았고 대신 이지은을 품에 껴안았다.“지은아, 어때? 다음에는 어느 회사를 인수했으면 좋겠어?”이지은은 반승제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바로 그 회사를 인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지은은 점심시간에 명품 가방을 여러 개 받았다.이지은은 반승제와 장난삼아 이 회사도 반승제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을 뿐인데 바로 인수할 줄은 몰랐다.집행력이 이 정도로 강하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보며 이지은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만족
룸 안의 사람들은 함부로 추측하지도 묻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채 방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반승제와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반승제가 지금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서주혁은 반승제가 이지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지은을 바라보는 반승제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없었기 때문이다.반승제가 성혜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추측하지 않아도 뻔했다.반승제는 이지은을 사랑하지 않는다.하지만 이지은을 품에 안았을 때 반승제의 눈빛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마치 반승제가 자신이 안고 있는 사람이 성혜인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서주혁은 조용히 술을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7시, 반승제는 화인 그룹 지분을 40%나 인수하여 화인 그룹의 신임 대표가 되었다.제원의 언론 전체가 이 일을 보도하고 있었고 심지어 많은 언론이 화인 그룹의 신임 대표를 보기 위해 화인 그룹의 회사 앞으로 달려갔다.김씨 집안의 거의 모든 사람은 오늘 드디어 반승제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살길을 열어달라고 사정하려는 속셈인 것이다.그런데 아침 8시부터 점심 12시까지 꼬박 4시간 동안 기다렸는데도 반승제는 오지 않았다.중간에 김경자까지 반승제 이 불초한 자식을 만나기 위해 로비로 왔었다.하지만 반승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언론에서는 현장에서 김씨 가족의 어두워진 얼굴만 찍었고 반승제의 현재 행방에 대해 모두 아주 많이 궁금해하고 있었다.하지만 언론도 감히 반승제에 대한 부정적인 방송을 함부로 보도하지 못했다.자신의 불찰로 인해 다니고 있던 회사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반승제가 화인 그룹을 인수하면 멈출 줄 알았는데 친 할머니 쪽 화인 그룹까지도 파괴하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다음날 오전 1시, BH 그룹은 또 FORD 브랜드를 인수할 계획을 발표했다.FORD 브랜드 그
서주혁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바로 반승제의 맞은편에 앉았다.“항구 쪽 백현문의 물건들은 네가 사람 시켜 막은 거야? 백현문이 누구랑 협력하고 있는지 넌 몰라서 그래?”원씨 가문은 제원의 명문가들과는 달리 예전부터 깨끗하지 못해 일반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원씨의 가문은 암시장에서 지위가 매우 높은 데다 선을 잘 지켜왔다.지난 20여 년 동안 선 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윗사람들도 눈감아 주었다.윗사람들은 손을 쓰기 어려운 일이면 원씨 가문이 대신 나서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온씨 가문의 가장 큰 물건들을 가로막았기에 지금은 백씨와 온씨의 가문 모두 이 일에 연루되었다.반승제가 계속 이런 식으로 사방에 적을 만든다면 일단 여러 세력이 연합하여 반승제를 공격한다면 그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서주혁은 반승제가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자포자기로 재원 전체를 끌어들여 같이 미치려 하는 것이었다.“승제야, 원씨 가문에서 이미 나를 찾아왔었어. 우리처럼 밝은 곳에 있는 가문들은 그들과 절대 얽혀서는 안 돼. 내가 중간에서 조정할 수 있을 때 빨리 온씨 가문의 그 물건들을 풀어줘. 그렇지 않는다면 일이 더 커지게 될 거야.”반씨 가문은 윗사람들과 관계도 좋고 게다가 반기훈도 윗사람 중 한 명이었다.반승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반기훈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반기훈은 앞으로도 원씨 가문과 여러 차례 협력해야 하기 때문이다.백씨 가문의 그 미친 백현문도 최근에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반승제가 결정적인 시기에 두 가문을 모두 건드린 것이었다.그야말로 멸망을 자초하는 행동이다.서주혁은 한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승우형이 성혜인을 빼앗은 일에 대해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난 이해해.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진행하면 제원 전체가 뒤죽박죽될 게 분명해.”반승제는 긴 손가락 끝으로 쥐고 있던 패를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래서?”그의 눈빛은 움직임이 없었고 심지어 이성
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고 룸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떠나기 전 반승제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독한 여자가 있는 줄 알았다면 평생 사랑이란 걸 다치지도 않았을 거야.”이 말을 할 때 조차도 그는 목이 타들어 가는 듯이 너무 아팠다.반승제가 문을 홱 열었더니 입구에 조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조현도 여기에 초대받아서 놀러 온 것이다.마침 그녀의 친구들도 방금 룸에 앉아있었다.조현은 좀 늦게 왔는데도 반승제와 마주칠 줄은 몰랐다.“반승제.”조현은 반승제를 부르며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안에는 서주혁만 서 있었다.반승제는 조현에 대한 인상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이내 차갑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 나갔다.조현은 몇 초 망설이다가 결국 반승제를 불러 세웠다.조현은 반승제를 손으로 잡고 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반승제 씨, 한 번만 말할게요.”조현은 말하기 전에 카메라가 있는지 둘러보더니 그제야 신속하게 한마디 덧붙였다.“승제 씨가 스카이웨어 카메라를 뒤지던 날제가 혜인 씨를 봤어요. 웨이터 옷을 입고 누군가를 피하는 것 같았어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녀가 실명했다는 점이에요. 그날 저는 총으로 위협받아 감히 이 소식을 전하러 올 수가 없었어요.”단숨에 말을 마친 조현은 가슴을 두드리며 스스로 진정시켰다.“오늘 밤 저를 못 본 걸로 하죠. 저도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성혜인에게 거칠게 굴고 심지어 그녀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먹였어요.”반승제는 손에 끼고 있던 담배를 저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뜨렸고 미간을 찌푸렸다.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보이지 않는다고요?”“네, 그때 복도에서 저와 부딪혔는데 혜인 씨가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부축해서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손버릇이 사나운 사람들이 와서 혜인 씨에게 무언가를 먹였어요. 정말 사실이에요.”조현은 말을 전달하고는 이내 룸에서 빠져나갔다.성혜인에게 무언가를 먹이던 그 사람들은 아직도 조현을 위협하고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