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지키고 있던 소종이 간호사의 말에 넋을 잃었다.육경한은 평소에 몸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폐렴 말고는 다른 질병이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내뱉은 말에 생명이 위급한 상황까지 될 줄은 몰랐다.소종이 멍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물었다.“비서라도 사인이 가능한가요?”간호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사인하면 법적 효력이 생기기 때문에 가족이 사인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대표님은 가족이 없습니다.”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결혼은요?”소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부모님은요?”“돌아가셨습니다.”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겉은 번지르르한 남자가 가족 하나 없다니. 저 정도 외모면 엄청나게 잘생겼는데 결혼을 못 하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왜 대를 남길 생각을 못 했을까?간호사는 차트를 소종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옆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요. 일단 사인하고 친척이나 꼭 와야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다 알리세요.”심부전은 급성질환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간호사도 혹시나 남은 사람들이 후회를 안고 살아갈까 봐 귀띔한 것이었다.수술실 문이 닫혔다. 소종은 손에 든 차트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렸다.간호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꼭 와야 되는 사람이라...소종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문 빌리지.샤워를 마친 소원이 아무렇게나 가운을 걸치고는 맨발로 러그를 밟고 창가로 향했다. 창가엔 갓 개봉한 와인이 놓여 있었다.소원은 와인을 잔에 조금 따랐다. 빨갛게 번지는 와인과 야경이 어우러져 황홀하기 그지없었다.이 도시는 여전히 참 번화했다. 그녀의 거지 같은 삶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웠다.소원은 와인을 한 모금 맛보더니 이내 한잔을 다 비웠다. 미각이 잃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시면 취기가 올라왔다.소원은 편한 환경에 있으면서 의식이 흐릿한 걸 좋아했다. 운이 좋으면 부모님이 아직 살아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그러면 화목했던 장면들이 떠올라 이 거지 같은
소원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소 비서님, 육경한이 이 정도로 말 잘 듣는 사람인 거 알았으면 절대 꿇리지 않았을 거예요.”소종은 소원이 웃는 게 기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소원 씨, 저는 소원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대표님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가족도 없고 서류에 사인할 사람도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대표님이 지금 이 순간 누구를 제일 보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아요.”소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소 비서님, 소 비서님이야말로 내 말뜻을 오해했어요. 내 말은...”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 정도로 말 잘 듣는 줄 알았으면 바로 가서 죽으라고 했죠. 지옥에 가도 시원찮은데 죽으면 오히려 좋죠.”소종은 소원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정도로 육경한을 증오할 줄은 몰랐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소 비서님, 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는지? 무시한다고 매정한 건지?”소종은 반박할 수 없었다.소원의 말이 맞았다. 서로 입장이 다를 뿐이다. 육경한의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그런 육경한이 마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친한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용서는 개뿔 아마 당장이라도 가서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소원은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자꾸 들려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하여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다음부터 내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내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라면 아마 육경한이 죽었다는 소식일 거예요.”뚝하는 소리와 함께 소원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육경한, 그녀에게 온갖 상처란 상처는 다 주고 한이 그룹을 파산하게 만들고 아버지를 핍박해 투신하게 하는 바람에 엄마까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육경한은 소원의 자존심을 짓밟았다.오해라는 한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그런
소원이 힘겨운 듯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그래.”대답하는 목소리는 전보다 확연히 더 무거워졌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누나, 유진이 목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도 잔잔하게 아팠다.한참 지나서야 소원이 매정하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아니.”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소원의 텅 빈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든 위장이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소원은 유진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다.소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힘없이 울기만 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안았지만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임세희와 이진영이 서로 물고 뜯는 영상이 유출되자 아니나 다를까 며칠간 검색어를 독점했다. 안에 든 내용이 너무 화끈했기 때문이다.이진영이 만났던 남자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죄다 유부남이었다. 그중에는 도덕의 한계를 벗어난 인물도 들어있어 팬들은 역겨움을 금치 못했다.이진영의 팬덤은 뿔뿔이 흩어졌고 팬카페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진영 본인도 모든 광고에서 내려지고 말았다.이진영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말고도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내야만 했다. 전에 벌어놓은 돈을 다 쏟아붓는다 해도 모자랐다.이어진 소식은 경찰이 이진영의 남편, 시누 엔터의 장 대표를 성추행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했다는 것이었다.그렇게 사건은 대반전을 이루었다.전에 곽아름이 다니는 유치원을 공격하던 광팬들도 경찰에 연행되었고 다른 팬들도 진심으로 반성하며 인터넷에 사과문을 올렸다.이런 행보에 윤혜인과 그녀의 작업실 ‘달밤’도 검색어에 올랐다.여러 큰 회사에서 협력 의향을 보였기에 업무량이 급증해 윤혜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DS와 장기적으로 협력하던 고객들도 목표를 한국 본연의 미에 방점을 둔 ‘달밤’을 타깃으로 돌렸다.임세희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이사로서 큰 잘못을 저지르다 보니 회사에 대한
전화로도 윤혜인은 원지민의 말투가 매우 오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윤혜인이 내연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순간 윤혜인은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아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원지민이 이준혁의 약혼녀라고? 윤혜인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그럼 전에 쫓아다니면서 했던 말은 다 뭐지? 도대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이 정말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대답했다.“미안해요. 당신이 이준혁 씨 약혼녀인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 다시 전화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윤혜인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사과했다. 잘못한 게 없으니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절대 이준혁과 엮일 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엮이게 된 것도 윤혜인이 아니라 이준혁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녀서 그렇게 된 일이었다.여러 가지 상황으로 비추어 보아도 이준혁은 쓰레기임이 틀림없었다.“윤혜인 씨, 이런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인터넷만 하면 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전에 났던 기사 못 봤나요?”원지민은 일부러 기사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인터넷에서 이준혁과 관련된 기사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지만 인터넷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건 없었기에 조금만 깊이 파보면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에 곧 희소식이 있을 거라는 기사를 찾아낼 수는 있었다.기사가 실제로 있으니 이준혁이 직접 윤혜인에게 해명한다고 해도 원지민은 무서울 게 없었다. 이런 일은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점점 더 이상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그리고 백 퍼센트 거짓말한 건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라도 두 사람은 언젠가 결혼하게 될 것이다.그렇게 오랫동안 계획해 왔고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갑자기 윤혜인이라는 여자가 튀어나온 것이다.임세희가 함정을 잘 파놓았으니 윤혜인을 충분히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윤혜인을 건드리기도 전에 임세희가 먼저 나락으로 가고 말았다.그러니 원지민도 먼저 자신을 드러내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
윤혜인은 갑자기 생각을 바꾼 곽아름이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기분은 원래 빨리 해소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세 사람이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려는데 배남준이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들고 걸어왔다. 포장지에는 공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삼촌!”곽아름이 그쪽으로 달려가 안겼다. 며칠 전 배남준에게 말한 신상 인형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구했을 줄은 몰랐다.배남준은 외출하려는 세 사람을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어디 나가려고?”인형을 받고 신난 곽아름이 먼저 대답했다.“삼촌, 아름이랑 엄마랑 놀이공원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아름이 삼촌이랑 같이 가고 싶어?”배남준이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물었다.“네, 같이 가요! 삼촌.”배남준이 고개를 들어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날 배남준이 윤혜인에게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윤혜인은 지금까지 답을 하지 않았기에 조금 민망한 상태였다. 하여 얼른 이렇게 말했다.“아름아, 삼촌 오늘 바쁘대.”“그래요? 그럼 같이 안 가도 돼요.”곽아름은 딱히 슬퍼하지는 않았다. 사실 곽아름에게 배남준은 곽경천과 같은 존재였다.배남준이 몸을 일으키더니 마른기침하며 말했다.“사실 오늘 나 안 바쁜데.”윤혜인이 멈칫했다.“같이 가도 될까?”배남준이 다시 물었다.최근 몇 년간 학술 연구에만 매진했지 여자에게 먼저 다가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되죠. 근데 아름이가 얌전한 편은 아니라서 혹시나 귀찮게 할까 봐...”“귀찮지 않아. 나는 아름이랑 같이 있는 거 좋아해.”이에 외출은 세 사람에서 네 사람으로 바뀌었다.홍 아줌마도 윤혜인과 배남준을 이어줄 생각이었다. 하여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된 놀이기구는 선뜻 곽아름과 같이 타겠다고 나섰다.윤혜인과 배남준은 밖에서 조용히 곽아름이 노는 걸 지켜봤다.“그날...”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오디오가 겹쳤다.배남준이 부드럽게 말했다.“먼저 말해.”“미안해요. 남준 오빠. 그날 사귄다고 인정한 건 그 사람한테 보여주느라 일부러 그런
원지민이 걸음을 멈추고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아마 방금 서류를 놓을 때 실수로 건드렸나 봅니다.”이준혁의 얼굴은 차가웠다.“내가 전에 말했듯이 서류를 전달하는 일 같은 건 지민 씨가 직접 전달할 필요 없어요. 부사장이 돼서 그렇게도 할 일이 없다면 그만둬도 좋습니다.”이 말에 사무실 전체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진 듯했다. 숨을 내쉬기조차 어려웠으니 말이다.손가락으로 손바닥을 파고들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원지민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문을 나선 후,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지만 주위의 분위기는 매우 냉랭해져 있었다.그러던 와중 서류를 전달하던 직원이 실수로 그녀와 부딪쳤고 원지민은 즉시 그 직원의 팔을 꽉 잡았다.“눈은 어디에다 뒀어요?”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원지민의 손톱이 팔에 깊이 박히는 바람에 직원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곧이어 직원은 두려움에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항상 온화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오늘은 웬일로 이러시는 거지?’그러나 화를 내는 것도 잠시, 원지민은 이내 손을 떼고 다시 온화하고 단정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됐어요, 다음부터 조심해요.”그녀는 아주 상냥하게 당부하고는 돌아섰다.그 자리에 남은 직원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파일을 전달하고 휴게실에서 소매를 걷어보니, 뚜렷한 다섯 개의 피가 맺힌 손톱자국이 있었다.움직이기만 해도 아파서 직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그때 다른 동료가 들어와서 물었다.“세윤 씨, 이게 뭐야?”뒤이어 자초지종을 말하려다가 세윤은 최근 몇 년간 회사에서의 원지민의 평판과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어차피 내가 말해봐야 믿어줄 사람이 없을 거야... 괜히 일 키우지 말자.’그녀는 팔을 내리며 어물어물 말했다.“벌레에 물렸어요.”한편 차 안에서.원지민은 어딘가로 전화를 건 뒤 냉정하게 말했다.“그 임세희
놀이공원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마지막 퍼레이드 시간에 배남준은 아름이를 어깨에 올려주며 꽃수레를 따라 걸었다.아름이는 너무나 행복해하며, 반짝이는 눈이 초승달처럼 되도록 활짝 웃고 있었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 겪었던 일에 대한 우울함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윤혜인은 아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저녁노을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아, 마치 화장을 한 듯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그녀는 마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에 사랑스러운 아름이와 잘생기고 품위 있는 배남준까지 더해지면, 세 사람이 함께 걷는 길이 곧 멋진 풍경이 되곤 했다.행인들은 연신 그들을 주목하며 부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한 외국인 관광객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관광객은 남자가 의아해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설명했다.“당신들 가족은 제가 본 중 가장 잘생긴 가족이에요, 정말 아름다워요.”그러자 윤혜인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희는 부부가 아니에요.”“그럼 당신들은 무슨 사이인가요?”윤혜인은 짧게 대답했다.“남매 같은 관계예요.”하지만 상황을 이해한 후에도 외국인 관광객은 물러서지 않았다.“사진 찍어드릴까요?배남준은 윤혜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괜찮겠어?”그는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윤혜인이 신경 쓸까 봐 걱정되었다. 사진 찍는 것은 그다지 문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윤혜인은 아름이도 사진을 찍고 싶어 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이윽고 외국인 관광객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몇 번 셔터를 눌렀다. 그 후, 그는 사진을 윤혜인에게 보여주었다.사진은 즉석 사진기였기 때문에 바로 인화되었다.놀랍게도 그 관광객은 사진작가 출신이었고 사진을 아주 잘 찍었다.그는 사진 한 장을 윤혜인에게 주고, 다른 한 장을 배남준에게 건넸다. 배남준이 사진을 건네받으려 할 때 관광객이 물었다.“buddy, 당신은 이 아름다운 여성분의 오빠가 되고 싶지 않죠
놀이공원에서의 즐거운 시간도 막을 내렸고 피곤했던 아름이는 배남준의 어깨에 기대어 깊이 잠들었다.공원을 나서는 사람들로 붐비는 가운데, 배남준은 한 손으로 아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등을 살짝 받쳐주며 사람들이 밀치지 않도록 보호했다.주차장에 도착하자, 홍 아줌마가 아름이를 받아안고 배남준은 차를 찾으러 갔다.곧이어 그의 세심한 행동을 모두 눈여겨본 홍 아줌마가 윤혜인에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남준 씨가 아가씨를 참 좋아하는 것 같네요. 사람도 점잖고 아름이에게도 잘해주고... 정말 한번 잘 생각해봐요.”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아주머니가 잘못 보신 거예요. 남준 오빠는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그러자 홍 아줌마가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제가 잘못 봤다고요?”“네. 차 왔네요, 타세요.”윤혜인은 차 문을 열어 홍 아줌마가 먼저 타도록 했다.얼마 후 집에 도착해서 홍 아줌마는 잠든 아름이를 안고 먼저 들어갔다.윤혜인은 예의 바르게 차 옆에 서서 배남준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차량의 후미등이 사라진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윤혜인의 앞으로 갑자기 눈부신 전조등이 켜졌다.뒤이어 그녀의 시선에는 이준혁이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본능적으로 돌아서서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의 긴 다리와 빠른 몸놀림을 피할 수 없었다.이준혁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그리고 순식간에 윤혜인의 몸은 가볍게 남자의 품에 안겼다.“이거 놔요!”그의 행동에 극도로 혐오감을 느끼는 듯 윤혜인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약혼자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정말 역겹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남자의 강력한 힘 앞에 윤혜인의 저항은 마치 독수리를 상대하는 병아리처럼 무력했다.더 이상 저항할 수 없자, 그녀는 이준혁의 품에 안겨 그를 차고 물고 때리며 안간힘을 썼다.그러나 남자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녀를 차에 태우고 문을 잠갔다.“아가
육경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창백했고 입술 색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종은 육경한이 문 쪽을 보며 멍때리는 걸 발견했다. 육경한이 멍때리는 건 아주 드문 장면이었기에 소종은 순간 그런 육경한이 마음이 아팠지만 육경한이 실망할까 봐 어색하게 부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어제 병원에 같이 왔다가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 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집에 가서 쉬는 게 맞을 것 같더라고요.”소종의 말은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흐릿한 게 맥이 없었다. 그래도 소종은 음울해 보이는 육경한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대표님, 소원 씨 그래도 많이 감사해하더라고요. 그때 그 산길에서도 목숨 걸고 대표님을 끌어올린 걸 보면...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됐어. 너 나가.”육경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원이 어떤 태도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10번, 100번을 더 구해도 소원은 전혀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소원이 육경한에 대한 원한은 육경한을 깊숙한 지옥에 빠트려도 모자랄 정도의 그런 원한이었다.게다가 산길에서 만약 소원이 육경한을 알아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소원이 육경한을 해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살려야 하는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소원은 늘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육경한을 죽일 듯이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한 육경한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을 테고 육경한을 살리면 그런 자신이 밉겠지만 살리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소원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육경한은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이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엮일 때마다 서로 힘들어했지만 육경한은 소원을 아직 놓아주기
그렇다는 건 서현재가 더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으면 행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일단은 다시 계획을 짜보기로 다짐하고는 소종과 함께 차에 올랐다.차에는 함께 따라온 의사가 육경한에게 간단한 구급 조치를 하고 있었다.육경한은 의사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소종까지 그럴 수는 없었기에 가정 주치의를 불러 같이 왔다. 의사는 육경한의 상처를 처치해 주며 지혈했지만 빨갛게 물든 셔츠가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소종이 나지막한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소원을 노려봤다. 가는 길에 적어도 백번은 소원을 째려보더니 뭔가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하자 응급 의사가 허둥지둥 달려와 육경한을 데리고 들어가며 상처를 확인했다. 새로운 상처가 새로 난 상처와 겹쳐 너무 흉측해 의사가 놀란 나머지 신고할 뻔했지만 소종이 제때 해석하며 산에서 입원했던 증명과 사건 기사를 의사에게 보여준 덕분에 의사는 비로소 신고할 생각을 버리고 육경한을 응급실로 데려갔다.소종은 마음이 답답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른 의사에게 소원도 검사해달라고 했지만 소원이 거절했다.“나는 됐어요. 지금 바로 돌아가 봐야 해요.”소원이 말했다.“어딜 돌아간다는 거예요?”소종이 경계하며 말했다.“서씨 가문에 제 발로 죽으로 들어가려고요?”소종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젠장, 애초에 당신을 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대표님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당신이 다시 서진태에게 잡히면 정말 서진태 손에 죽을지도 몰라요.”소원이 그런 소종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하지만 내가 죽으러 가든 아니든 소종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소종은 도무지 소원이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그때 소원이 한마디 덧붙였다.“육경한 깨어나면 고마워하지는 않을 거라고 얘기해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전에 저지른 일들이 잊히는 것도 아니고 원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니니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라고요.
서진태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소 비서, 소원 씨가 우리 집 액세서리를 훔친 건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이렇게 데려가면 안 되죠.”“어르신, 후과는 생각해 보셨어요?”소종은 육경한을 꽤 오래 따라다녔기에 표정을 굳히면 육경한의 모습이 살짝 보였고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진태는 살짝 겁이 났지만 소종은 하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만약 육경한의 비서가 아니면 이렇게 눈길을 줄 일도 없이 바로 혼내주고 내쫓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침착한 척했다.“어르신, 저는 일개 서민일 뿐이라 어르신이 무슨 꿍꿍이를 펼치려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 대표님은 아니에요. 우리 대표님 앞에서 그런 얕은수를 썼다고 생각해 보세요,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소종이 차갑게 웃으며 말하자 서진태가 화들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육경한은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 누구보다 총명할뿐더러 수단도 좋았다.오늘은 소원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서진태는 얼른 기회를 잡았다.“소 비서, 오해에요. 우리가 소원 씨를 남긴 건 다 좋은 뜻이 있어서 그래요.”서진태가 억지로 웃자 얼굴에 잡힌 주름은 파리를 잡아도 될 만큼 깊었다.“그저 이 일을 확실하게 조사해서 소원 씨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거예요. 얼마나 큰일인데 소원 씨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할 수는 없잖아요.”짬밥은 무시하지 못한다고 서진태가 한 말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참 잘했다.소종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서진태가 뭔가를 꾸민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정확히 뭘 꾸미는지 몰라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건 기억하고 차갑게 웃었다.“어르신, 그 말은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직접 하세요.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 사람이 결혼했다 해도 하고 싶은 대로 막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직 우리 대표님을 몰라도 한참 모르네.”소종의 말에 서진태의 얼굴이 잿빛이 되더니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눈알이 뒤집힐 뻔했다. 비서
분풀이를 마친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눈이 멀어나. 감히 우리 대표님을 때려? 짐승 같은 것들, 내가 오늘 너희들 혼내주지 않으면 소종이 아니라 잡종이다.”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소종이었다.그때 소원의 옆으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보니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대표님.”소종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육경한을 부축했다. 육경한은 지금 꼴이 많이 처참했는데 하얀 셔츠는 피로 물들었고 전에 차 사고로 다친 상처가 지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덧난 데다가 소원 대신에 몽둥이까지 맞아 다 터지고 말았다.차 사고를 겪으면서 피를 많이 잃었는데 여기서 또 피를 흘리는 바람에 얇은 입술은 무서울 만큼 창백했고 극도로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육경한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몰라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보디가드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그대로 쓰러질 줄 알았는데 육경한이 갑자기 튀어나와 대신 막아준 것이다.소종이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소원 씨 때문에 또 이렇게 다쳤네요. 대표님은 정말 소원 씨와 엮어서 좋은 일이 없어요.”소종이 이렇게 말하더니 허리를 숙여 육경한을 업으려 했지만 정신을 잃은 육경한은 소종에게 잘 업히지도 못했다. 이에 소종이 소원을 힐끔 째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좀 도와주면 안 돼요? 대표님이 소원 씨를 몇 번이나 구했는데, 피도 눈물도 없어요?”소원이 멈칫하더니 허둥지둥 육경한을 소종의 등에 업혔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서진태가 소종의 등에 업힌 육경한을 보더니 놀란 듯 연기하며 말했다.“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어르신, 제 앞에서는 연기하지 않아도 돼요.”소종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소 비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통 못 알아듣겠는데.”서진태가 얼굴을 굳히자 위엄은 여전했다.“허허.”소종이 콧방귀를 뀌었다.“제 기억으로는 대표님이 절대 이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죠? 이 정도로 굵은 몽둥이를 가져왔다는
집사가 대답했다.“소원 씨는 지금 대기실에 갇혀 있습니다.”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톡톡히 손봐주고 던져버려.”서진태는 독벌레가 진귀하지만 않으면 존재 자체가 화근인 소원에게도 한 마리 넣어 뇌를 남김없이 모조리 잠식당하길 바랐다. 엮이면 재수 없는 여자라 이가 바득바득 갈렸지만 다행히 몸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번 기회에 쌍으로 지옥에나 보내버릴 생각이었다.상황이 종료되자 서진태가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대기실.소원은 여기 갇힌 후로 도무지 나갈 방법이 없었고 서현재가 한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영혼을 뺏긴 사람 같았고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고민하는데 대기실 문이 다시 열렸고 까무잡잡한 보디가드 두 명이 들어오더니 몽둥이를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원이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뭐 하긴 뭐해? 위쪽 지시를 받고 너 혼내주러 온 거지.”“이거 불법인 거 알아, 몰라.”소원이 매섭게 쏘아붙였다.몽둥이를 잡은 기세를 봐서는 소원을 때려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서진태는 보면 볼수록 음침하고 교활한 노인네였다.“우린 그냥 명령을 받고 결혼식에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을 혼내줬을 뿐이야.”보디가드가 한마디 덧붙였다.“결혼식에서 20억짜리 액세서리가 사라졌는데 그 범인이 너야. 지금은 잡힌 거고.”보디가드가 이렇게 말하며 액세서리 몇 개를 바닥에 던졌다.서진태는 소원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것 같았다. 소원은 바닥에 떨어진 액세서리를 보며 넋을 잃었다.“나 아니야. 나는 훔친 적 없어. 이건 모함이야.”보디가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말했다.“인증도 있고 물증도 있는데 네가 아니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보디가드는 그저 서진태가 시키는 대로 죄명을 소원에게 덮어씌우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앞으로 그 누구도
그 터전은 무당 일가의 집이었기에 채벌이 시작되면 더는 지금처럼 영기가 가득 찬 곳을 찾아 독벌레를 기르기 힘들었고 그렇게 되면 무당 일가가 몰락하고 대를 잇지 못하게 된다.독벌레를 만들려면 무당 일가인 그들이 첫 번째 숙주가 되어야 했고 유충을 몸에 넣고 천천히 부화해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까지 만들면 특수한 약초로 독벌레를 유인해서 빼내야 했다.독벌레가 몸에서 나오면 세상에서 가장 맑은 호숫가로 데려가 안개와 이슬, 그리고 하늘에서 내린 비를 양분으로 일정한 크기까지 자라나야만 단향 단지에 넣어 다른 용도에 쓰일 수 있었다.게다가 여자가 들고 있는 단지에 담긴 독벌레는 이미 40년이나 산 독벌레였기에 독성이 상상 이상으로 더 독했다. 하지만 이내 서진태가 큰소리로 보디가드를 불렀고 보디가드가 노인네를 당장 밖으로 끌어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주저하자 서진태가 주름 잡힌 얼굴로 음침하게 웃으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월생이라고 했나? 약속한 걸 모르면 안 되는 거 알지? 아니면 너도 너희 사부님도 무사히 서울을 떠나지는 못할 거야.”서진태는 노골적으로 무당 월생을 협박하고 있었다.월생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젊은이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묵념했다.‘미안해요. 당신 가족들이 당신을 죽이려 드는데 저도 달리 방법이 없네요.’월생이 손을 우산 모양으로 오므리자 작은 단지에서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더니 월생의 손에 앉았고 월생이 그 손을 남자의 눈에 올려놓았다. 5초쯤 지나 월생이 손을 떼자 하얀 벌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서진태가 약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이러면 벌레가 들어간다고?”월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독벌레가 뇌로 들어가는 방법은 안구밖에 없습니다. 독벌레의 몸통은 안구의 모양에 따라 종잇장처럼 얇아져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게 됩니다. 의학용 감마선을 쏘아봐도 사람의 신경처럼 보이기 때문에 절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서진태가 반신반의하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서현재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서현재의 상태를 확인하고 맥을 짚어보더니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네를 보며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노인네가 이를 듣고는 고개를 젓더니 손을 흔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답했다.서진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사부님 말씀으로는 약을 너무 과다하게 사용해서 나온 합병증이라고 합니다. 뇌에 부하가 걸리는 바람에 약간만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머릿속에 두 가지 목소리가 싸우게 될 거예요. 이렇게 쓰러진 것도 다 몸이 좋아서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면 이미 뇌사 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어요.”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이 결혼은 어떻게든 완성해야 하니 방법은 알아서 생각해.”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어르신, 지금으로서는 독벌레를 내려서 깨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몸을 많이 축내는 방법이라 매우 위험합니다. 독벌레는 사람의 뇌를 갉아 먹고 사는 거라 도련님...”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말끝을 흐렸지만 다들 서현재가 살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진태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현재의 사활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직 외국으로 빼돌리지 못한 자산이 있는데 그 자산을 성공적으로 빼돌리려면 한국에 대신 죄를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했다.서현재가 죽어도 괜찮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죽으면 서진태가 공들여 짜놓은 판이 다 무용지물이 되게 된다. 이 판을 위해 서진태는 육씨 가문을 끌어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육경한이 서진태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면 육연주가 아무리 죽고 못 산다 해도 절대 육연주를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압력을 넣으며 육씨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밀어붙인 게 오히려 서진태에겐 도움이 되었다.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다고 서진태는 능구렁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 잠깐 고민하던 서진태가 이렇게 말했다.“독벌레든 뭐든
사회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신랑분, 큰 소리로 대답해 주세요.”서현재가 입술을 뻐끔거렸다.“저...”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돼.”서현재가 멈칫하더니 의문에 찬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고 하객들도 일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소원이 버진 로드로 올라가더니 남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현재야, 이 결혼 하면 안 돼.”북적북적.하객들이 수군거리며 갑자기 나타나 결혼식을 중단시킨 여자를 놀라워했다.서현재는 멍한 표정으로 웨이터 복장을 한 여자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왜, 왜 똑같은 얼굴이지?’소원이 서현재의 팔을 잡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현재야, 우리가 한 약속 잊었어? 네가 결혼할 사람은 나야.”현재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서현재의 머리를 강타했고 서현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게 산산이 조각났다. 과거의 조각들이 너무 하나씩 이어지며 파도처럼 몰아쳤다.“누나, 나랑 결혼해 주면 안 돼요?”“누나, 나 누나 좋아해요. 대답 안 해준다 해도 계속 기다릴 거예요.”“누나, 나 드디어 누나랑 사귀는 거예요?”“소원 누나, 누나.”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육연주가 먼저 반응하고는 소원의 귀싸대기를 날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저 미친년 당장 끌어내.”보디가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다른 건장한 남성을 불러 소원을 끌어내려 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소원은 서현재의 팔을 꼭 잡으며 말했다.“현재야, 너는 육연주 사랑하지 않아. 날 믿어. 너는 육연주 사랑한 적 없어. 육연주랑 결혼하면 너 후회할 거야. 서씨 가문은 너를 이용해서. 아악.”머리채가 잡힌 소원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까만 옷을 입은 한 무리의 보디가드가 달려오더니 머리채를 잡는 사람 따로, 목덜미를 잡는 사람 따로, 팔과 다리를 잡는 사람 따로, 그리고 소원의 입을 막고 들어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잠깐만요.”서현재가 갑자기 보디가드를 불러세웠
소원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윙 해졌다. 아니, 소원이 속은 게 아니라 서씨 가문이 너무 교활했고 혹시나 누군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캔디를 줍던 소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다 줍지도 않고 어딜 가는 거예요?”화가 잔뜩 난 웨이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지금 바로 매니저님 찾아가서 덤벙거리기만 하는 당신을 자르라고 할 거예요.”결혼식 현장.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공동으로 준비한 결혼식이었기에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도 많았다.사회자의 열정적인 소개와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육연주가 친인척의 손을 잡고 서서히 등장했다.버진 로드의 끝에는 빨간 벨벳 턱시도를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신랑이 보였다. 기다란 체구와 꼿꼿한 자세가 신랑을 더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게 했다.육연주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서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그렇게 신랑 앞까지 걸어간 육연주의 친인척이 육연주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줬지만 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은 육연주의 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회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귀띔했다.“신랑분, 신부님 손을 잡아주세요.”사회자의 귀띔에도 서현재가 움직이지 않자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혹시 신랑은 결혼하기 싫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근데 신부가 약간 막무가내래. 성격이 오만하면서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서씨 가문 도련님이 후회한 게 아닌가 싶다.”“하기 싫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미리 파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성질부리면 양가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허허. 억지로 결혼시킨 결과라고 봐야지...”“근데 신랑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어디가?”“예전에 신랑을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말이 좋아 멍하지 서현재는 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