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빠진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다. 이준혁의 입장에서는 약간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목욕할 때부터 그녀는 계속 얌전히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약해진 이준혁은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여기 뭐 묻었어.”이때 무언가 떠오른 윤혜인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그녀는 이준혁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 주동적으로 움직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한없이 수치스럽고 슬픈 것들이었다.‘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날 때도 똑같이 해야 하나?’다행히 아직은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계약이 끝날 때가 되려면 4개월이나 기다려야 했다. 계약이 끝나기 전에 들킨다면 아주 귀찮아질 것이다.윤혜인은 굳이 직접 묻지 않아도 이준혁의 태도가 예상이 갔다. 아이를 낳든 말든 떠나서 그는 절대 그녀에게 아이를 넘겨주지 않을 사람이었다.이 아이는 분명히 그녀의 아이인데, 어떻게 이준혁에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이미 한 번 잃어 본 트라우마와 오늘 밤의 기억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그녀는 임신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결심을 점점 더 굳혔다.그녀는 너무 후회되었다. 애초에 이준혁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이다.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멍청하게 결혼한 탓에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는가?그녀는 우느라 퉁퉁 부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욕망이 가신 다음의 이준혁도 이성을 되찾았다.이준혁은 그녀의 몸에 남은 키스 마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노도 약간은 달래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실망과 두려움이었다.실망은 끝까지 거짓말한 그녀를 향한 것이었고, 두려움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그는 이제 그녀와 떨어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아마도 전자를 선택할 것 같았다.이준혁은 자신의 곁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계속 바라봤다.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허하
윤혜인이 아무리 험한 말을 한대도 이준혁에게는 타격이 없었다. 그는 위로 올라가 그녀를 품에 가둔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계약 결혼인 걸 잊지 않는 것도 좋지만, 이게 결혼이라는 것도 잊지 마. 부부면 부부다운 일도 해야지. 안 그래?”“어떻게 지금도...”화가 났던 윤혜인은 말을 끝까지 하지도 못했다. 오늘 밤의 일이 아직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지는데 말이다.“준혁 씨랑 결혼한 건 내 인생 가장 잘못된 선택이에요.”이 말은 이준혁의 가장 나약한 신경에 바로 꽂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다시는 이런 말 하지 마.”“왜요?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말 하는 것도 안 돼요?”윤혜인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제는 하다 하다 감금까지 한다니 말이다.“얌전히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덤덤한 말투와 달리 싸늘한 눈빛에 공기 속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윤혜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겨우 입을 열었다.“또... 또 뭘 하려는 거예요?”“실수를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이준혁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잃은 모습이었다.“안 돼... 안 돼요...!”윤혜인은 위로 피하다가 침대 머리에 머리를 부딪혔다.탁!이제 더 이상 피할 길은 없었다. 이준혁은 사정없이 몸을 숙여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아픈 동시에 서러웠던 그녀는 이 악문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이준혁은 있는 힘껏 그녀의 몸을 잡았다. 분노는 그의 힘에 완전히 드러났다.“오늘은 말이 안 나올 때까지 해야겠네.”윤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이준혁의 막무가내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는 아니다.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애원했다.“그러지 말고 우리...”이준혁은 그녀에게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고된 시간은 또다시 시작되었다.그는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해가 뜰 때까지 그녀를 몰아붙였다. 너무 피곤했던 그녀는 어느 순간 쓰러져 버렸다.다시 눈을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진찬성이었다. 빨간색 정장은 그의 몸에서 유난히 촌스러워 보였다.소원은 경계적인 눈빛으로 물었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진찬성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그는 사생활이 문란하기로 유명했는데, 한 번은 파트너를 죽인 적도 있다고 했다.진찬성은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내 집에 내가 있는 데 문제 될 건 없지 않나?”점점 가까워지는 진찬성을 보고 소원은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죄송해요, 제가 잘못 찾아왔네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문을 열 수가 없었다.“잘못 오지 않았어.”진찬성은 그녀의 바로 뒤에서 뜨거운 숨결을 불었다. 소름이 돋았던 소원은 몸을 흠칫 떨었다.“그게 무슨 의미예요?”“여기까지 와놓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소원은 주먹을 꽉 쥐면서 평정심을 유지했다.“네, 모르겠어요. 그러니 빨리 문을 열어 주세요.”“풉.”진찬성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어깨에 놓았던 손을 점점 아래로 움직였다.“꼭 설명을 해줘야 알겠어? 우리 매부가 널 나한테 보냈어.”진찬성의 손은 말하는 동시에 소원을 옷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소원은 그의 손을 쳐내더니 멀리 떨어지면서 물었다.“정말로 육경한 씨가 그랬어요?”그녀에게 맞은 손이 아팠던 진찬성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언제까지 설명해 줘야 해? 그래, 내 말 한마디에 육경한이 널 보내주더라.”소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육경한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짓이었기 때문이다.“제 자유는 육경한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당장 문 열어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예요.”소원은 정말 신고할 기세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기도 전에 진찬성이 핸드폰을 쳐냈다. 그러고는 표독한 눈빛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소원은 뒤로 물러났다. 대문으로 도망가기는
두피는 찢긴 것처럼 얼얼했고, 피가 난다고 해도 이상해할 것 없었다.“하하하하하...”진찬성은 자기 작품에 만족스러운 듯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벌써 조용해지면 지루한데.”눈물이 앞을 가린 탓에 소원은 진찬성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남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진찬성은 표독한 표정으로 말했다.“좀 반항이라도 해봐.”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더 강한 고통이 이어졌고 소원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후에 가서는 머릿속이 완전히 흐트러졌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사지는 감각을 잃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마리오네트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가 깨문 입술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진찬성은 이제야 변태적인 심리가 만족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랍장 앞에 가서 하얀 알약을 꺼내 먹었다.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그는 약을 먹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시각적 자극을 주는 것으로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약에 완전히 의지해야 했다.소원의 몸매는 정말 죽여줬다. 마른 데도 풍만한 것이 그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잠깐 숨을 고른 그는 바지 벨트를 풀었다. 소원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데도 반항할 힘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토할 것 같았다.그렇게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나 싶을 때 진찬성이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제기랄!”아직 시작하기도 전에 소원의 몸매에 자극받아서 참지 못했던 것이다.그는 주절주절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서랍장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단단히 결심했는지 약을 여덟 알이나 먹었다.리모컨을 누르자 TV에는 조금 전에 장면이 재생되었다. 고통 섞인 비명을 들으면 그는 더 빨리 흥분할 수 있었다.그도 바로 시작하고 싶기는 했지만, 소원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참았다. 아직은 산 사람이 좋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은 영상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소원은 자신이 얻어맞던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입술은 주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온 진아연은 육경한에게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요즘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드레스 보러 가는 길 소종이 전화 왔다. 육경한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았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원래도 차갑던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끼익!곧장 브레이크를 밟은 그는 핸들을 틀어 다른 곳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던 진아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듯 어두웠다.“아!”이때 진아연이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경한 씨, 저 배가 너무 아파요.”육경한은 바로 속도를 늦추며 머리를 돌렸다.“뭐?”진아연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배가 너무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육경한은 차를 세우고 그녀를 길가에 앉혔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소 비서가 널 병원에 데려다 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단호하게 차에 올라타 멀어져갔다. 속도가 하도 빨라서 말릴 새도 없었다.‘나 지금 길바닥에 버려진 거야?’“아아악!”진아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진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한편, 방안에서 영상을 너무 높게 튼 탓에 진찬성은 핸드폰은 진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번에 그는 한참이나 준비하다가 소원을 향해 걸어갔다.잠깐 숨 쉴 틈이 생긴 덕에 소원은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구할 사람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진창성이 더러운 모습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뒤로 넘어지며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찼다.“악! 아악!”무방비한 상태였던 진찬성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소원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의자가 있는 덕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그녀는 의자에 묶인 채로 앞으로 기어가 과도를 잡았
진찬성은 대부분 안 좋은 일로 이곳에 온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호원을 대동해야 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별장 밖의 경호원이 있던 것은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위층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그녀는 시간 낭비할 것 없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로 출입문을 막았다. 곧이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두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던 진찬성은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리에 앉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X발 지금이 노크할 때야?! 당장 들어와!”소원은 너덜너덜한 천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피를 흘리는 채로 웅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아주 처참했다.이 기회를 빌려 소원은 긴급 전화를 걸려고 했다. 다행히 긴급 전화는 잠금을 해제하지 않고서도 걸 수 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소를 말했다. 별장이 시내에서 떨어진 탓에 경찰은 30분 후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이때 핸드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깜짝 놀란 그녀는 핸드폰을 아예 부숴버렸다. 입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쁜 사람... 다 나쁜 사람이야... 믿으면 안 돼...”퍽! 퍽! 퍽!밖에서 경호원은 문을 부술 기세로 발길질을 했다. 이미 힘이 풀린 소원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만 하염없이 떨어댔다.귀를 찌르는 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에 빠진 채 과도를 들고 구석에 몸을 숨겼다. 눈물은 이미 앞을 가렸고, 경찰이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쾅!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지고 경호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먼저 진찬성 쪽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진찬성은 곡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천을 뱉어낸 다음에는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년을 다른 데로 옮겨. 곧 경찰이 도착할 테니까 그 전에 청소도 해줘.”소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경호원은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출입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경보음을 듣고 달
육경한의 눈빛은 아주 예리했고 보이는 감정이라고는 냉정함 밖에 없었다.소원은 순간 호흡을 멈추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진찬성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말했다.“매부, 저년을 차에 태우고 빨리 도망가요. 안 그러면 귀찮아질 거예요.”육경한은 그녀의 너덜너덜한 옷과 진찬성의 피로 얼룩진 다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그녀를 확 안아 올리더니 자신이 데려온 사람에게 지시했다.“여기 청소해요.”소원은 눈앞이 흐릿했고 온몸이 다 바들바들 떨렸다. 육경한은 진실을 감추려 하고 있었고, 그녀의 억울함도 풀 수 없게 되었다.진찬성의 말로 추정했을 때 피해자는 그녀 한 명뿐이 아닌 것 같았다. 순간 어디에서 온 용기인지 그녀는 육경한의 턱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습...”육경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녀는 이 틈을 타서 그의 그곳을 찼다.“윽...”그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소원은 그의 주머니에서 조금 전 빼앗긴 과도를 다시 꺼내 들고 진찬성을 향해 달려들었다.“죽여버릴 거야!”그녀의 눈빛에 겁먹은 진찬성은 화들짝 놀랐다.“악! 아악!”그는 원래 경호원을 끌어와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괜히 버둥거리다가 소원의 바로 앞에 엎어지고 말았다.칼은 결국 그의 어깨에 꽂혔다.“아아아!”그는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댔다.원래 찌르려고 했던 목을 찌르지 못한 소원은 칼을 뽑더니 다시 한번 휘둘렀다.“야! 이 미친년아!”진찬성은 오줌을 흘리며 겨우 칼을 피했다. 소원은 그를 죽이려고 결심했는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다리를 다친 진찬성은 달릴 수 없었다. 소원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처럼 기어서 도망가야 했다.그는 경호원은 향해 소리를 질렀다.“너희들 가만히 서서 뭐 해?!”두 명의 경호원은 이제야 정신 차리고 광기 서린 소원을 붙잡았다.이때 별장 앞에는 검은색 차가 멈춰 섰다.“오빠! 오빠!”차에서 내려온 진아연은 피투성이가 된 진찬성을 보
“뭔데?”“진찬성이 내 영상을 찍었어. 그 영상 완전히 지워줘.”소원은 영상을 지우기보다는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육경한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지우는 게 나았다. 진찬성에게 남겨봤자 안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좋아.”육경한은 빠르게 허락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밧줄을 풀어줬다. 소원이 잠깐 힘을 푼 사이 그는 그녀의 피 묻은 셔츠까지 벗겼다.“야!”소원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막았다.“뭐 하는 거야?”육경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 옷을 입고 경찰을 만날 생각인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셔츠를 던져줬고, 소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걸쳐 입었다. 진찬성에게 맞은 곳은 아직도 얼얼하게 아팠다.그녀가 셔츠 단추를 잠글 때 육경한은 그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당황한 듯 몸을 돌렸고, 정갈한 차림으로 다시 돌아섰을 때 육경한도 셔츠를 바꿔 입은 것을 발견했다.소원의 과도는 아주 작았다. 그 정도의 칼에 찔린 상처는 딱히 처치할 필요도 없었다. 육경한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본적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부끄럼을 타고 그래?”육경한은 잘 웃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소를 보인다고 해도 차갑게 느껴졌다. 그게 또 매력 포인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소름이 돋은 소원은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후 얼굴에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육경한이 차량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꺼내 얼굴의 부기를 빼주려고 했던 것이다.차가운 캔이 얼굴에 스치는 동작은 아주 부드러웠다. 평소의 육경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그게 어색했던 소원은 직접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뒤로 넘기며 예리한 눈빛을 보냈다.“그날 밤 내가 한 말, 다 들었지?”소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육경한은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피식 웃었다.“모르는 척하겠다는 건가?”그날 병실에서 육경한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치가 떨리는 말을 했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