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진찬성이었다. 빨간색 정장은 그의 몸에서 유난히 촌스러워 보였다.소원은 경계적인 눈빛으로 물었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진찬성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그는 사생활이 문란하기로 유명했는데, 한 번은 파트너를 죽인 적도 있다고 했다.진찬성은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내 집에 내가 있는 데 문제 될 건 없지 않나?”점점 가까워지는 진찬성을 보고 소원은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죄송해요, 제가 잘못 찾아왔네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문을 열 수가 없었다.“잘못 오지 않았어.”진찬성은 그녀의 바로 뒤에서 뜨거운 숨결을 불었다. 소름이 돋았던 소원은 몸을 흠칫 떨었다.“그게 무슨 의미예요?”“여기까지 와놓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소원은 주먹을 꽉 쥐면서 평정심을 유지했다.“네, 모르겠어요. 그러니 빨리 문을 열어 주세요.”“풉.”진찬성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어깨에 놓았던 손을 점점 아래로 움직였다.“꼭 설명을 해줘야 알겠어? 우리 매부가 널 나한테 보냈어.”진찬성의 손은 말하는 동시에 소원을 옷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소원은 그의 손을 쳐내더니 멀리 떨어지면서 물었다.“정말로 육경한 씨가 그랬어요?”그녀에게 맞은 손이 아팠던 진찬성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언제까지 설명해 줘야 해? 그래, 내 말 한마디에 육경한이 널 보내주더라.”소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육경한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짓이었기 때문이다.“제 자유는 육경한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당장 문 열어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예요.”소원은 정말 신고할 기세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기도 전에 진찬성이 핸드폰을 쳐냈다. 그러고는 표독한 눈빛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소원은 뒤로 물러났다. 대문으로 도망가기는
두피는 찢긴 것처럼 얼얼했고, 피가 난다고 해도 이상해할 것 없었다.“하하하하하...”진찬성은 자기 작품에 만족스러운 듯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벌써 조용해지면 지루한데.”눈물이 앞을 가린 탓에 소원은 진찬성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남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진찬성은 표독한 표정으로 말했다.“좀 반항이라도 해봐.”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더 강한 고통이 이어졌고 소원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후에 가서는 머릿속이 완전히 흐트러졌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사지는 감각을 잃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마리오네트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가 깨문 입술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진찬성은 이제야 변태적인 심리가 만족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랍장 앞에 가서 하얀 알약을 꺼내 먹었다.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그는 약을 먹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시각적 자극을 주는 것으로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약에 완전히 의지해야 했다.소원의 몸매는 정말 죽여줬다. 마른 데도 풍만한 것이 그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잠깐 숨을 고른 그는 바지 벨트를 풀었다. 소원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데도 반항할 힘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토할 것 같았다.그렇게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나 싶을 때 진찬성이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제기랄!”아직 시작하기도 전에 소원의 몸매에 자극받아서 참지 못했던 것이다.그는 주절주절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서랍장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단단히 결심했는지 약을 여덟 알이나 먹었다.리모컨을 누르자 TV에는 조금 전에 장면이 재생되었다. 고통 섞인 비명을 들으면 그는 더 빨리 흥분할 수 있었다.그도 바로 시작하고 싶기는 했지만, 소원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참았다. 아직은 산 사람이 좋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은 영상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소원은 자신이 얻어맞던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입술은 주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온 진아연은 육경한에게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요즘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드레스 보러 가는 길 소종이 전화 왔다. 육경한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았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원래도 차갑던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끼익!곧장 브레이크를 밟은 그는 핸들을 틀어 다른 곳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던 진아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듯 어두웠다.“아!”이때 진아연이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경한 씨, 저 배가 너무 아파요.”육경한은 바로 속도를 늦추며 머리를 돌렸다.“뭐?”진아연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배가 너무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육경한은 차를 세우고 그녀를 길가에 앉혔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소 비서가 널 병원에 데려다 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단호하게 차에 올라타 멀어져갔다. 속도가 하도 빨라서 말릴 새도 없었다.‘나 지금 길바닥에 버려진 거야?’“아아악!”진아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진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한편, 방안에서 영상을 너무 높게 튼 탓에 진찬성은 핸드폰은 진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번에 그는 한참이나 준비하다가 소원을 향해 걸어갔다.잠깐 숨 쉴 틈이 생긴 덕에 소원은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구할 사람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진창성이 더러운 모습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뒤로 넘어지며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찼다.“악! 아악!”무방비한 상태였던 진찬성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소원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의자가 있는 덕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그녀는 의자에 묶인 채로 앞으로 기어가 과도를 잡았
진찬성은 대부분 안 좋은 일로 이곳에 온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호원을 대동해야 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별장 밖의 경호원이 있던 것은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위층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그녀는 시간 낭비할 것 없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로 출입문을 막았다. 곧이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두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던 진찬성은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리에 앉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X발 지금이 노크할 때야?! 당장 들어와!”소원은 너덜너덜한 천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피를 흘리는 채로 웅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아주 처참했다.이 기회를 빌려 소원은 긴급 전화를 걸려고 했다. 다행히 긴급 전화는 잠금을 해제하지 않고서도 걸 수 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소를 말했다. 별장이 시내에서 떨어진 탓에 경찰은 30분 후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이때 핸드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깜짝 놀란 그녀는 핸드폰을 아예 부숴버렸다. 입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쁜 사람... 다 나쁜 사람이야... 믿으면 안 돼...”퍽! 퍽! 퍽!밖에서 경호원은 문을 부술 기세로 발길질을 했다. 이미 힘이 풀린 소원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만 하염없이 떨어댔다.귀를 찌르는 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에 빠진 채 과도를 들고 구석에 몸을 숨겼다. 눈물은 이미 앞을 가렸고, 경찰이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쾅!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지고 경호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먼저 진찬성 쪽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진찬성은 곡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천을 뱉어낸 다음에는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년을 다른 데로 옮겨. 곧 경찰이 도착할 테니까 그 전에 청소도 해줘.”소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경호원은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출입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경보음을 듣고 달
육경한의 눈빛은 아주 예리했고 보이는 감정이라고는 냉정함 밖에 없었다.소원은 순간 호흡을 멈추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진찬성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말했다.“매부, 저년을 차에 태우고 빨리 도망가요. 안 그러면 귀찮아질 거예요.”육경한은 그녀의 너덜너덜한 옷과 진찬성의 피로 얼룩진 다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그녀를 확 안아 올리더니 자신이 데려온 사람에게 지시했다.“여기 청소해요.”소원은 눈앞이 흐릿했고 온몸이 다 바들바들 떨렸다. 육경한은 진실을 감추려 하고 있었고, 그녀의 억울함도 풀 수 없게 되었다.진찬성의 말로 추정했을 때 피해자는 그녀 한 명뿐이 아닌 것 같았다. 순간 어디에서 온 용기인지 그녀는 육경한의 턱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습...”육경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녀는 이 틈을 타서 그의 그곳을 찼다.“윽...”그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소원은 그의 주머니에서 조금 전 빼앗긴 과도를 다시 꺼내 들고 진찬성을 향해 달려들었다.“죽여버릴 거야!”그녀의 눈빛에 겁먹은 진찬성은 화들짝 놀랐다.“악! 아악!”그는 원래 경호원을 끌어와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괜히 버둥거리다가 소원의 바로 앞에 엎어지고 말았다.칼은 결국 그의 어깨에 꽂혔다.“아아아!”그는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댔다.원래 찌르려고 했던 목을 찌르지 못한 소원은 칼을 뽑더니 다시 한번 휘둘렀다.“야! 이 미친년아!”진찬성은 오줌을 흘리며 겨우 칼을 피했다. 소원은 그를 죽이려고 결심했는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다리를 다친 진찬성은 달릴 수 없었다. 소원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처럼 기어서 도망가야 했다.그는 경호원은 향해 소리를 질렀다.“너희들 가만히 서서 뭐 해?!”두 명의 경호원은 이제야 정신 차리고 광기 서린 소원을 붙잡았다.이때 별장 앞에는 검은색 차가 멈춰 섰다.“오빠! 오빠!”차에서 내려온 진아연은 피투성이가 된 진찬성을 보
“뭔데?”“진찬성이 내 영상을 찍었어. 그 영상 완전히 지워줘.”소원은 영상을 지우기보다는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육경한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지우는 게 나았다. 진찬성에게 남겨봤자 안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좋아.”육경한은 빠르게 허락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밧줄을 풀어줬다. 소원이 잠깐 힘을 푼 사이 그는 그녀의 피 묻은 셔츠까지 벗겼다.“야!”소원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막았다.“뭐 하는 거야?”육경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 옷을 입고 경찰을 만날 생각인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셔츠를 던져줬고, 소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걸쳐 입었다. 진찬성에게 맞은 곳은 아직도 얼얼하게 아팠다.그녀가 셔츠 단추를 잠글 때 육경한은 그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당황한 듯 몸을 돌렸고, 정갈한 차림으로 다시 돌아섰을 때 육경한도 셔츠를 바꿔 입은 것을 발견했다.소원의 과도는 아주 작았다. 그 정도의 칼에 찔린 상처는 딱히 처치할 필요도 없었다. 육경한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본적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부끄럼을 타고 그래?”육경한은 잘 웃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소를 보인다고 해도 차갑게 느껴졌다. 그게 또 매력 포인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소름이 돋은 소원은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후 얼굴에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육경한이 차량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꺼내 얼굴의 부기를 빼주려고 했던 것이다.차가운 캔이 얼굴에 스치는 동작은 아주 부드러웠다. 평소의 육경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그게 어색했던 소원은 직접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뒤로 넘기며 예리한 눈빛을 보냈다.“그날 밤 내가 한 말, 다 들었지?”소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육경한은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피식 웃었다.“모르는 척하겠다는 건가?”그날 병실에서 육경한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치가 떨리는 말을 했
육경한은 손을 뻗어 소원의 잔머리를 넘겨줬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나도 알고 싶어.”소원의 미소는 그대로 얼굴에 얼어붙었다. 입술이 하도 심하게 떨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반대로 육경한은 기분 좋은 듯 피식 웃었다. 시선은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돌리는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지난번 구치소에서 여자들은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증명으로 했다. 비록 제때 잇기는 했지만 흉터가 하도 선명해서 이렇게 가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부모가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잠시 후 육경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줄게.”분명히 원하는 일인데도 소원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진찬성이 벌받는 날까지 살아있어야 할 텐...”그녀가 말을 마저 하기도 전에 눈앞에 어두워졌다. 차가운 입술은 닿기만 하고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육경한은 웃음기가 서린 눈빛으로 물었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소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토록 누군가의 머리를 열어서 생각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은 또 처음이었다.‘도대체 어느 단어에서 질투라고 착각한 건지? 역겨줘.’소원은 미친 듯이 입술을 문질렀다. 동작은 입술의 껍질을 벗겨내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었다.순간 육경한의 안색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자기 몸에 대고 거리를 좁혔다.이번에 그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과감하게 치아를 뚫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픈 듯 신음을 낼 때까지 내몰았다.소원은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반항해 봤자 그는 간지럽기만 했다.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욕망은 위험한 신호처럼 밀려왔다. 소원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미친놈! 약혼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러고 싶을까? 지금 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잖아.’이때 육경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화면에는 ‘아연’이라는 두 글자가 떴다.육경한이 잠시 일어난 틈을 타서 그녀는 정확히 그의 상
소원은 육경한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가 아니다. 이런 말을 듣고 설렐 일도 없었다. 짐승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역겹기만 할 뿐이다.그가 말을 끝내기 바쁘게 진아연이 찾아왔다.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그녀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진아연은 창문을 통해 소원을 노려봤다.소원이 들은 것은 대부분 사과를 요구한다는 말이었다. 진아연은 소원에게 사과를 듣고 싶어 했다. 소원이 사과할 리 없다는 것은 육경한도 알았다. 그래서 적당히 그녀를 달래 차에 태웠다.경찰이 도착한 다음 소원은 남자친구와 싸우다가 신고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찰은 소원의 말을 듣고 별장을 검사하고는 그냥 거짓 신고는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떠나갔다.소원은 소종의 차를 타고 떠났다. 두 대의 차가 엇갈리는 순간 육경한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시선에 소원은 소름이 돋았다. 육경한이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이제는 추측도 못 할 것 같았다. 육경한이 아는 의사가 흉부외과 전문의만 아니었어도 진작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10일 후에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한가요?][그럼요.]소원은 이제야 시름을 놓고 메시지를 지웠다. 육경한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절대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빠른 시일 내로 부모님을 모시고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윤혜인은 아직도 별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를 감금한 장본인인 이준혁은 다섯 날이나 나타나지 않았다.도우미는 바뀌지 않았다. 도우미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빌리려고 했지만,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논 것밖에 없는 덕에 건강은 나름 좋아졌다.갇혀 있는 시간이 오래 되자 그녀는 창문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