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이어가며 그녀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재빨리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지하철역 안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설마 잡으러 올 리는 없겠지?지하철을 탔는데도 윤혜인의 마음은 계속 두근거렸다.그녀는 한구운의 또 다른 그 얼굴이 너무 두려웠다.지하철이 곧 역에 도착하고 윤혜인은 군중을 따라 역을 나서 앞사람을 따라 걸었다.지하철역은 단지에서 2천 미터도 채 안 되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아파트 단지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앞사람이 다른 길로 꺾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윤혜인은 문득 불안한 마음에 동네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그때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윤혜인이 가방 안에 있는 늑대 방지 스프레이를 슬쩍 움켜쥐자 등 뒤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도 갑자기 빨라졌다. 그 순간, 윤혜인은 재빨리 몸을 틀어 그 사람을 향해 스프레이를 번쩍 들었다.그러나 그녀를 앞선 그 사람은 마치 그녀를 정신병자처럼 쳐다보는 것이다.그 사람은 정말 순전히 행인일 뿐이었다.윤혜인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스트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혜인아.”가슴이 흠칫 떨려났고 막 발을 옮겨 뛰려는데 남자가 뒤에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남자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청아했다.“혜인아, 난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얌전히 차에 타, 알았지?”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지척에 있는 경비실을 보고 재빨리 언성을 높여 구조요청을 하였다.“살려...”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허리춤에 주삿바늘이 닿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이윽고 한구운이 젊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네가 도망간다면 배 속의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거야.”아이가...한구운이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있다.윤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예요?”“얘기 좀 하고 싶어.”“싫어요.”그러자 한구운이
윤혜인이 급히 해명을 늘어놓았다.“어린 시절 일을 전부 다 기억하는 건 아니라... 죄송해요.”열두 살 때, 그녀는 머리를 한 번 다친 적이 있어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잊었어?”한구운은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하였고 늘 위장하던 웃음기마저 사라져 버렸다.그는 태어날 때부터 미쳐버린 어머니의 구타와 욕설을 전부 참아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정부인이 되지 못한 것을 전부 한구운의 잘못으로 돌려버렸다.그가 너무 늦게 찾아온 탓이라고, 그러니 한구운은 영원히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사생아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그녀는 가족에게 핍박을 받은 후 시골로 피신하여 자포자기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술과 약에 취하여 나날을 보내던 여자는 때때로 곤봉으로 한구운에게 폭행을 가했고 며칠 동안 굶기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마침내 그에게는 어머니에게 반항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 어떤 동요도 느끼지 못했다.그렇게 한구운은 이렇게 음습하게 한평생을 보내리라 생각한다.그녀를 되찾기 전까지 말이다.가장 암울한 시기, 그에게 사탕을 건네준 그 소녀.그런데 당사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윤혜인은 흐릿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추측했다.“혹시 그 남자아이가 당신이에요? 그리고 그 여자애는 나인 것 같고. 맞죠?”그녀는 줄곧 한구운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데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왔다.그런데 한구운이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같은 게 아니라 너 맞아.”한구운은 점점 그 여자아이가 윤혜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 그 펜던트 뿐만 아니라 그녀의 향기, 그녀의 눈까지 모두 기억 속의 ‘그녀'와 똑 닮았기 때문이다.윤혜인은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더더욱 날 해치지 말았어야죠. 우린 친구잖아요.”한구운의 잘생긴 얼굴은 달빛 아래 부드럽고 평온한 기색을 띠고 있었고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혜인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난 너에게 상처
그녀는 도무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선배, 미쳤어요?”그러나 한구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혜인아, 나는 네가 항상 내 옆에 있기를 바래. 나는 이곳의 모든 것을 원하지 않아. 오직 너만을 원해.”“전 싫어요!”윤혜인이 흥분 어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선배, 전 이미 결혼했어요.”그 말 한마디에 한구운의 완벽한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혜인아, 난 네가 결혼했어도 상관없어.”“결혼했었던 게 아니에요. 저 이준혁과 재혼했어요.”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한구운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순식간에 강한 관성이 밀려오자 윤혜인은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려 조수석 가림막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이윽고 한구운이 눈동자를 붉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뭐라고?”윤혜인은 아직도 얼떨떨한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선배, 저 어제 이준혁 씨와 재혼했으니 그 사람이 틀림없이 나를 찾아올 거예요.”순식간에 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한구운의 얼굴에는 온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어두운 그늘만이 남았다.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캐물었다.“왜?”그런 한구운의 모습을 보자니 윤혜인은 문득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그 사람은 내 아이의 아빠예요. 그러니까 준혁 씨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한구운은 순간 싸늘한 표정으로 윤혜인의 턱을 움켜쥐며 추궁했다.“그렇게 너한테 상처를 줬는데, 아이까지 한 명 잃었는데 전부 다 잊었어?”윤혜인의 턱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고 그의 표정은 보기에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난 네가 이 아이를 임신하게 된 건 사고인 줄 알고 따지지 않았는데 감히 이준혁과 재혼해?”윤혜인은 엄청난 고통에 자의식과 상관없이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하지만 한구운은 여전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턱을 쥐어뜯으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너희 여
윤혜인의 고운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놀라움이 가득했다.미친놈.이 남자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미쳐버렸다.그녀는 아랫배를 꼭 감싼 채 경계 어린 눈빛으로 한구운을 경고했다.“한구운, 내 아이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마. 내 아이가 있어야 내가 있어.”그러자 한구운이 담담하게 답했다.“난 네가 그를 기억하는 게 싫어. 그러니 이 기억은 내가 지워줄게.”윤혜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하지만 그녀는 감히 그의 말을 의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구운이라면 정말 그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안 돼!절대 그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한구운이 다시 차를 돌려 출발하려 하자 윤혜인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악! 아파. 배가 너무 아파. 빨리 차 세워요.”그러자 한구운은 마치 그녀의 말 속의 진위를 고찰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했다.“선배, 저... 아파요... 죽는 건 아닐까요...”윤혜인은 시트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는데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윽고 그녀는 손을 내밀어 적극적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는데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마치 애교처럼 들리기도 했다.“선배...”부드럽고 찰진 목소리에 한구운은 잠시 멍해져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아파?”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어디 보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은 갑자기 센터 콘솔의 향수병을 들고 한구운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구운의 관자놀이가 깨지면서 새빨간 피가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윤혜인은 재빨리 기회를 틈타 손을 뻗어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고 안전벨트를 잡아당긴 뒤 미친 듯이 문을 당겼다.그런데 다음 순간 등 뒤의 한구운이 곧바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겼다.“악.”윤혜인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한구운은 싸늘한 눈빛과 함께 온통 피투성이인 얼굴을 하고 있어 감정이 없는 가면을 쓴듯한 착각이 들었다. “혜인
차는 앞으로 수백 미터나 밀려났다. 파란 차의 미친 듯한 움직임에 윤혜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퍽!한구운의 등은 유리에 부딪혔다. 윤혜인은 의자에 묶여 있는 덕에, 그리고 한구운이 앞에 있는 덕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앞으로 날아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뒤에 있던 차는 잠깐 멈춰 있다가 금세 다시 무서운 엔진 소리를 냈다.부릉!듣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소리였다. 윤혜인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파란색 차는 다시 돌진하지 않고 엔진 소리만 시끄럽게 났다. 일종의 경고인 듯했다. 한구운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다친 채로 운전석에 가서 엑셀을 힘껏 밟았다.부릉!차는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갔다. 파란색 차도 금세 따라왔다.남자는 화려한 기술로 한구운의 앞에 가서는 억지로 차를 세우게 했다. 하지만 한구운은 차를 세우기는커녕 아까 당했던 것처럼 힘껏 파란색 차를 향해 돌진 했다.파란색 차는 진작 예상한 듯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렇게 둘은 아무도 양보하지 않고 신경전을 벌였다.잔뜩 겁먹은 윤혜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 우리 일단 차에서 내리자, 응?”한구운은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널 쉽게 넘기지 않을 거야.”파란색 차 안의 사람이 누군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윤혜인은 상대가 진짜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아닐 것이라고 위안하기는 했지만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두 차량은 아직도 서로 마주 붙은 채 신경전을 벌였다. 귀를 찌르는 엔진 소리에 그녀는 숨 막히도록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얼굴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이때 파란색 차가 먼저 양보하고 길을 비켜줬다. 한구운의 차는 시끄럽게 앞서 나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던 윤혜인은 울면서 외쳤다.“오빠, 차 세워! 세우라고!”한구운 어두운 눈빛으로 지금도 따라오는 파란색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이준혁은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피투성이가 된 한구운은 자기 몸으로 윤혜인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의 몸은 철근에 찔리고 깔려 너덜너덜해졌는데도 말이다.윤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준혁은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고 약간의 찰과상만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옷을 붉게 물든 핏자국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한구운이 자신을 희생해서 그녀를 지켜줬다는 걸 깨달았다.차가 미친 듯이 질주할 때 그녀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한구운이 자기 몸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한구운이 의자를 뒤로 당겼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두 사람 다 철근에 관통됐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를 납치한 범인이 목숨 걸고 그녀를 지켰다. 이걸 미워해야 하는지, 고마워해야 하는지 헷갈렸다.그녀는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고 이준혁을 바라보며 애원했다.“오빠 좀 살려줘요... 제발...”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군다나 한구운은 그녀를 다치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이준혁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윤혜인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던 모습은 낙인처럼 가슴에 찍혔다.그는 앞으로 가서 확인했다. 창백한 안색의 한구운은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신고부터 했다.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는 한구운을 절대 건드릴 수 없었다.손가락을 굽힌 그는 한구운이 호흡은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이때 한구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하... 봤어요? 혜인이... 날 위해 울고 있어요... 혜인이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다고요...”한구운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을 마친 다음에는 피까지 토해냈다. 마치 마지막 힘을 짜낸 것처럼 그는 머리를 들어 이준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다.그 순간
남자의 냉정함에 윤혜인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잠시 후 그녀는 차에서 내리려고 버둥거렸지만 이준혁이 말려 섰다.그는 윤혜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차가운 시선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그렇게 떨어지기 싫어?”그의 시선에 겁먹은 윤혜인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난 그냥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둘 수 없을 뿐이에요.”이 세상에서는 매 순간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저 사람이 낯선 사람이었다고 해도 이럴 거야?”이준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다 저 새끼가...!”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바다가 사이 두고 있는 것 같았다.윤혜인이 다시 한번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이준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겹겹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안 돼!”윤혜인은 비명을 지르며 옷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준혁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속옷만 남을 때까지 벗겨졌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싼 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준혁 씨 미쳤어요?!”이준혁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하나 남은 속옷까지 찢어냈다. 결국 그녀의 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준혁 씨... 빨리... 옷 돌려줘요...”이준혁은 적나라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그 눈빛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랐다.그녀는 물기 머금은 표정으로 애원했다.“돌려줘요...”이준혁은 차 창문을 열고 옷을 내던졌다. 한구운의 피가 묻은 옷은 보기만 해도 미칠 것만 같았다.“차에서 내리고 싶다며?”그는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악문 모습은 무언가 참고 있는 것 같았다.“가!”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윤혜인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옷을 전부
윤혜인은 이런 말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지금의 이준혁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밖에서 구급차와 소방차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윤혜인도 이제야 시름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준혁을 바라보더니 조금 전의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그렇다면 계약 해지해요.”서로 싫어하는 사람끼리 얼굴을 마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해지...?”이준혁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구운이 윤혜인을 끌어안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난폭하게 윤혜인의 턱을 잡더니 매정한 칼같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옷자락을 꽉 잡았다.가슴도 아프고, 폐도 아프고... 그저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안 아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문현미에게서 모진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말이다.윤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입만 열지 않으면 눈물 참을 자신이 있었다. 이준혁 앞에서는 더 이상 눈물 한 방울 흘리기 싫었다.이준혁은 시선을 거뒀다. 창밖에서 한구운이 구급차에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표정하게 시동을 걸었다.어둠을 가르며 운전하다가 차는 스카이 별장 앞에 세워졌다. 낯설고도 익숙한 곳을 보고 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나 집에 돌아갈래요.”이준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여기가 네 집이야.”그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무서울 정도로 담담했다. 그래서 윤혜인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적어도 저 혼자 걸어가게 해줘요.”이준혁의 시선에는 냉기가 맴돌았다. 그는 그녀를 확 들어 올리더니 침실에 가자마자 욕조에 내려놓았다.물을 채우는 사이 그는 또다시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아플 정도로 살을 팍팍 문질렀다.윤혜인은 공허한 눈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