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도무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선배, 미쳤어요?”그러나 한구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혜인아, 나는 네가 항상 내 옆에 있기를 바래. 나는 이곳의 모든 것을 원하지 않아. 오직 너만을 원해.”“전 싫어요!”윤혜인이 흥분 어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선배, 전 이미 결혼했어요.”그 말 한마디에 한구운의 완벽한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혜인아, 난 네가 결혼했어도 상관없어.”“결혼했었던 게 아니에요. 저 이준혁과 재혼했어요.”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한구운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순식간에 강한 관성이 밀려오자 윤혜인은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려 조수석 가림막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이윽고 한구운이 눈동자를 붉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뭐라고?”윤혜인은 아직도 얼떨떨한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선배, 저 어제 이준혁 씨와 재혼했으니 그 사람이 틀림없이 나를 찾아올 거예요.”순식간에 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한구운의 얼굴에는 온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어두운 그늘만이 남았다.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캐물었다.“왜?”그런 한구운의 모습을 보자니 윤혜인은 문득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그 사람은 내 아이의 아빠예요. 그러니까 준혁 씨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한구운은 순간 싸늘한 표정으로 윤혜인의 턱을 움켜쥐며 추궁했다.“그렇게 너한테 상처를 줬는데, 아이까지 한 명 잃었는데 전부 다 잊었어?”윤혜인의 턱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고 그의 표정은 보기에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난 네가 이 아이를 임신하게 된 건 사고인 줄 알고 따지지 않았는데 감히 이준혁과 재혼해?”윤혜인은 엄청난 고통에 자의식과 상관없이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하지만 한구운은 여전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턱을 쥐어뜯으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너희 여
윤혜인의 고운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놀라움이 가득했다.미친놈.이 남자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미쳐버렸다.그녀는 아랫배를 꼭 감싼 채 경계 어린 눈빛으로 한구운을 경고했다.“한구운, 내 아이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마. 내 아이가 있어야 내가 있어.”그러자 한구운이 담담하게 답했다.“난 네가 그를 기억하는 게 싫어. 그러니 이 기억은 내가 지워줄게.”윤혜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하지만 그녀는 감히 그의 말을 의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구운이라면 정말 그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안 돼!절대 그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한구운이 다시 차를 돌려 출발하려 하자 윤혜인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악! 아파. 배가 너무 아파. 빨리 차 세워요.”그러자 한구운은 마치 그녀의 말 속의 진위를 고찰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했다.“선배, 저... 아파요... 죽는 건 아닐까요...”윤혜인은 시트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는데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윽고 그녀는 손을 내밀어 적극적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는데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마치 애교처럼 들리기도 했다.“선배...”부드럽고 찰진 목소리에 한구운은 잠시 멍해져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아파?”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어디 보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은 갑자기 센터 콘솔의 향수병을 들고 한구운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구운의 관자놀이가 깨지면서 새빨간 피가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윤혜인은 재빨리 기회를 틈타 손을 뻗어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고 안전벨트를 잡아당긴 뒤 미친 듯이 문을 당겼다.그런데 다음 순간 등 뒤의 한구운이 곧바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겼다.“악.”윤혜인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한구운은 싸늘한 눈빛과 함께 온통 피투성이인 얼굴을 하고 있어 감정이 없는 가면을 쓴듯한 착각이 들었다. “혜인
차는 앞으로 수백 미터나 밀려났다. 파란 차의 미친 듯한 움직임에 윤혜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퍽!한구운의 등은 유리에 부딪혔다. 윤혜인은 의자에 묶여 있는 덕에, 그리고 한구운이 앞에 있는 덕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앞으로 날아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뒤에 있던 차는 잠깐 멈춰 있다가 금세 다시 무서운 엔진 소리를 냈다.부릉!듣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소리였다. 윤혜인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파란색 차는 다시 돌진하지 않고 엔진 소리만 시끄럽게 났다. 일종의 경고인 듯했다. 한구운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다친 채로 운전석에 가서 엑셀을 힘껏 밟았다.부릉!차는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갔다. 파란색 차도 금세 따라왔다.남자는 화려한 기술로 한구운의 앞에 가서는 억지로 차를 세우게 했다. 하지만 한구운은 차를 세우기는커녕 아까 당했던 것처럼 힘껏 파란색 차를 향해 돌진 했다.파란색 차는 진작 예상한 듯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렇게 둘은 아무도 양보하지 않고 신경전을 벌였다.잔뜩 겁먹은 윤혜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 우리 일단 차에서 내리자, 응?”한구운은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널 쉽게 넘기지 않을 거야.”파란색 차 안의 사람이 누군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윤혜인은 상대가 진짜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아닐 것이라고 위안하기는 했지만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두 차량은 아직도 서로 마주 붙은 채 신경전을 벌였다. 귀를 찌르는 엔진 소리에 그녀는 숨 막히도록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얼굴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이때 파란색 차가 먼저 양보하고 길을 비켜줬다. 한구운의 차는 시끄럽게 앞서 나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던 윤혜인은 울면서 외쳤다.“오빠, 차 세워! 세우라고!”한구운 어두운 눈빛으로 지금도 따라오는 파란색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이준혁은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피투성이가 된 한구운은 자기 몸으로 윤혜인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의 몸은 철근에 찔리고 깔려 너덜너덜해졌는데도 말이다.윤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준혁은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고 약간의 찰과상만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옷을 붉게 물든 핏자국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한구운이 자신을 희생해서 그녀를 지켜줬다는 걸 깨달았다.차가 미친 듯이 질주할 때 그녀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한구운이 자기 몸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한구운이 의자를 뒤로 당겼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두 사람 다 철근에 관통됐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를 납치한 범인이 목숨 걸고 그녀를 지켰다. 이걸 미워해야 하는지, 고마워해야 하는지 헷갈렸다.그녀는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고 이준혁을 바라보며 애원했다.“오빠 좀 살려줘요... 제발...”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군다나 한구운은 그녀를 다치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이준혁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윤혜인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던 모습은 낙인처럼 가슴에 찍혔다.그는 앞으로 가서 확인했다. 창백한 안색의 한구운은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신고부터 했다.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는 한구운을 절대 건드릴 수 없었다.손가락을 굽힌 그는 한구운이 호흡은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이때 한구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하... 봤어요? 혜인이... 날 위해 울고 있어요... 혜인이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다고요...”한구운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을 마친 다음에는 피까지 토해냈다. 마치 마지막 힘을 짜낸 것처럼 그는 머리를 들어 이준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다.그 순간
남자의 냉정함에 윤혜인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잠시 후 그녀는 차에서 내리려고 버둥거렸지만 이준혁이 말려 섰다.그는 윤혜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차가운 시선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그렇게 떨어지기 싫어?”그의 시선에 겁먹은 윤혜인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난 그냥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둘 수 없을 뿐이에요.”이 세상에서는 매 순간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저 사람이 낯선 사람이었다고 해도 이럴 거야?”이준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다 저 새끼가...!”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바다가 사이 두고 있는 것 같았다.윤혜인이 다시 한번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이준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겹겹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안 돼!”윤혜인은 비명을 지르며 옷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준혁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속옷만 남을 때까지 벗겨졌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싼 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준혁 씨 미쳤어요?!”이준혁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하나 남은 속옷까지 찢어냈다. 결국 그녀의 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준혁 씨... 빨리... 옷 돌려줘요...”이준혁은 적나라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그 눈빛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랐다.그녀는 물기 머금은 표정으로 애원했다.“돌려줘요...”이준혁은 차 창문을 열고 옷을 내던졌다. 한구운의 피가 묻은 옷은 보기만 해도 미칠 것만 같았다.“차에서 내리고 싶다며?”그는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악문 모습은 무언가 참고 있는 것 같았다.“가!”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윤혜인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옷을 전부
윤혜인은 이런 말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지금의 이준혁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밖에서 구급차와 소방차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윤혜인도 이제야 시름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준혁을 바라보더니 조금 전의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그렇다면 계약 해지해요.”서로 싫어하는 사람끼리 얼굴을 마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해지...?”이준혁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구운이 윤혜인을 끌어안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난폭하게 윤혜인의 턱을 잡더니 매정한 칼같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옷자락을 꽉 잡았다.가슴도 아프고, 폐도 아프고... 그저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안 아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문현미에게서 모진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말이다.윤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입만 열지 않으면 눈물 참을 자신이 있었다. 이준혁 앞에서는 더 이상 눈물 한 방울 흘리기 싫었다.이준혁은 시선을 거뒀다. 창밖에서 한구운이 구급차에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표정하게 시동을 걸었다.어둠을 가르며 운전하다가 차는 스카이 별장 앞에 세워졌다. 낯설고도 익숙한 곳을 보고 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나 집에 돌아갈래요.”이준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여기가 네 집이야.”그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무서울 정도로 담담했다. 그래서 윤혜인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적어도 저 혼자 걸어가게 해줘요.”이준혁의 시선에는 냉기가 맴돌았다. 그는 그녀를 확 들어 올리더니 침실에 가자마자 욕조에 내려놓았다.물을 채우는 사이 그는 또다시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아플 정도로 살을 팍팍 문질렀다.윤혜인은 공허한 눈
윤혜인은 넋이 나갔다. 이런 건 계약서에 쓰지 않아도 되는 상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괜히 이런 얘기를 꺼내 봤자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자의식 과잉이라면서 말이다.그녀의 얼굴에 붙은 잔머리를 넘겨준 이준혁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결혼까지 해놓고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나?”욕조의 물이 넘쳐났다. 안으로 들어온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갑게 물었다.“앞으로 할래? 뒤로 할래?”흠칫 놀란 윤혜인은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준혁이 그녀의 발목을 확 낚아챘다.“꺄악!”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욕조를 붙잡았다. 눈부시도록 하얀 등은 자꾸만 남자를 자극했다.이런 자세에 흥분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압도적인 덩치 차이에 이준혁은 손쉽게 그녀의 허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허리 들어.”윤혜인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이준혁에게 잡힌 탓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물었다.“준혁 씨, 이러지 마요. 무섭다고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눈물만은 끝까지 흘리지 않았다.“왜 그 새끼를 따라갔어?”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윤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흐트러진 호흡으로 눈물을 흘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뚝뚝 욕조 안에 떨어졌다.“따라간 거 아니에요...”그녀는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겨우 설명했다. 그러나 이준혁은 믿지 않는 듯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CCTV에서 한구운이 그녀를 안을 때, 그녀는 추호의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후에 이준혁은 GPS로 두 사람의 위치를 추적했다. 뒤따라가는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굳이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만약 막지 않았다면 금방이라도 차가 흔들릴 것 같았다.아이가 생긴 것을 보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한구운이 치료받으러 가기 전에 생긴 일일지도
힘이 빠진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다. 이준혁의 입장에서는 약간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목욕할 때부터 그녀는 계속 얌전히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약해진 이준혁은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여기 뭐 묻었어.”이때 무언가 떠오른 윤혜인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그녀는 이준혁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 주동적으로 움직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한없이 수치스럽고 슬픈 것들이었다.‘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날 때도 똑같이 해야 하나?’다행히 아직은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계약이 끝날 때가 되려면 4개월이나 기다려야 했다. 계약이 끝나기 전에 들킨다면 아주 귀찮아질 것이다.윤혜인은 굳이 직접 묻지 않아도 이준혁의 태도가 예상이 갔다. 아이를 낳든 말든 떠나서 그는 절대 그녀에게 아이를 넘겨주지 않을 사람이었다.이 아이는 분명히 그녀의 아이인데, 어떻게 이준혁에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이미 한 번 잃어 본 트라우마와 오늘 밤의 기억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그녀는 임신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결심을 점점 더 굳혔다.그녀는 너무 후회되었다. 애초에 이준혁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이다.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멍청하게 결혼한 탓에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는가?그녀는 우느라 퉁퉁 부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욕망이 가신 다음의 이준혁도 이성을 되찾았다.이준혁은 그녀의 몸에 남은 키스 마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노도 약간은 달래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실망과 두려움이었다.실망은 끝까지 거짓말한 그녀를 향한 것이었고, 두려움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그는 이제 그녀와 떨어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아마도 전자를 선택할 것 같았다.이준혁은 자신의 곁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계속 바라봤다.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