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뵙고 난 후, 윤혜인은 저녁에 있는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차 문을 잠그고 윤혜인을 못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왜 이래요?”이준혁은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은 기혼자야. 한구운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부부인 동안에는 절대 만나지 마, 알겠어?”“알겠어요.”윤혜인은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어차피 원래부터 한구운과 더는 엮이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으니 말이다.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자 이준혁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며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그런데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대답이 왜 이렇게 빨라? 그 자식이 상처받을까 두렵지 않아?”윤혜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지난번 오해를 생각하며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랑은 원래부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다른 일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한구운이 윤혜인을 구해준 것만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구운의 좋고 나쁨은 그저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이윽고 윤혜인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준혁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는 거칠게 물었다.“아무 사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그가 하도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불편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하지만 그는 놓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두 사람 같이...”말을 하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을 멈췄다. 그녀의 대답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결벽이 있는 이준혁이었지만 만약 상대가 눈앞에 있는 윤혜인이라면 그 결벽증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처럼, 그는 그녀를 속여서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윤혜인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이만 내려야 해요. 강의 늦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이준혁은 지그시 응시하다가 순간
찰나의 순간, 육경한의 차가운 눈빛은 진아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무섭게 대하는 일은 드물었다.지난번 크루즈선에서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진아연을 내던져 바닥에 쓰러지게 했었다.진아연은 육경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경한 씨... 설마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진아연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소원이 아직도 깨어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육경한은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럴 일 없어.”“하지만 방금 나한테 화냈잖아요!”진아연은 콧물을 훌쩍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조금 전 경한 씨 행동 때문에 나 진짜 화났어요!”그녀는 육경한이 자신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좋아하고 연약한 모습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진아연은 적절하게 연약함과 제멋대로인 성격을 섞어가며 육경한에게 접근했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알겠어. 너도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먼저 가서 쉬어.”그 말에 화가 난 진아연은 이를 악물었다.이건 그녀를 달래는 걸까? 아니, 이건 그녀를 내쫓는 것이었다.진아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가 나를 다치게 한 일을 그냥 넘길 작정이에요? 그 여자 정말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아직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요!”하지만 육경한은 담담하게 말했다.“소원이는 이미 벌을 받았어.”그러자 진아연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벌을 받았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고작 아이 하나 잃은 거로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거야? 설마... 그 아이가 경한 씨 아이였나?’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육경한은 진아연이 고개를 숙인 채 매우 슬퍼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네가 억울해하는 거 알아. 내일 소
진아연의 말에 진찬성은 마음이 놓였다.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그 여자 진짜 명도 길어? 그런데 그 몸매가 죽으면 좀 아깝긴 하겠다.”진찬성은 소원의 굴곡 있는 몸매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정말 매혹적인 여자라니까.’오빠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아연은 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챘다.이건 그가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다 문득 진아연은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오빠, 정말 그 여자랑 하고 싶다면...”한편 병실 안.소원이 막 깨어난 후, 간병인이 그녀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다.그녀의 손, 얼굴, 목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나아져 덜 부어 있었다.육경한이 들어오자 간병인은 그의 눈짓을 보고 나갔다.그렇게 그가 그릇을 받아들고 계속 소원에게 음식을 먹여주었다.거부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소원은 그런 기색 없이 숟가락이 오자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심지어 너무 급하게 먹다가 입가에 국물이 조금 흐르기도 했다.육경한은 그릇을 내려놓고 휴지로 그녀의 입을 닦아주며 말했다.“무슨 애처럼 먹어, 천천히 먹어도 돼, 여기 너랑 밥 뺏는 사람 없어.”그의 말에는 은근히 애정 어린 느낌이 묻어 있었지만 본인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늘 털을 쭈뼛 세운 고양이처럼 행동하던 소원이 이렇게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육경한도 자연스럽게 놀리게 된 것이었다.그러나 곧 이상함을 느꼈다. 소원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상처투성이 얼굴에는 표정조차 없었고 온몸이 마치 곧 부서질 것 같은 깨진 유리 인형 같았다.찝찝하긴 했지만 육경한은 이내 다시 그릇을 들어 먹여주었고 소원도 계속해서 받아먹었다.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일 때, 소원의 표정이 약간 흔들리더니 곧바로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먹은 죽을 모두 토해냈다.끈적한 액체가 침대와 육경한의 팔에 쏟아졌고 이윽고 위산 냄새가 함께 몰려왔다.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며 육경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원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은 후, 갑작스러운 폭력 앞에서 소원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구치소에서 두 여자가 그녀의 손톱을 뽑던 모습을 즉각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기도 했다.그녀의 이런 모습에 육경한은 마음이 마치 무엇인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멈칫했다. 이윽고 높이 치켜들었던 손이 갑자기 힘을 잃었다.분노로 거칠게 들썩이던 그의 가슴은 신기하게도 진정되었다.그는 펼쳐진 손가락을 모아 천천히 내리며 여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예상대로 소원의 몸은 본능적으로 떨리기 시작했고 깊은 혐오감 때문에 그의 스킨십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러자 육경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말이다.그녀는 마치 꼭두각시 인형인 척하며 그가 알아서 떠나기를 바랐던 것이다.“내가 만지는 게 싫어?”육경한은 담담하게 물었다.넓은 손바닥은 소원의 뒤통수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하얀 목에 멈췄다. 그러더니 마치 그녀의 목 너비를 재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그가 실제로 목을 조르지는 않았지만 소원은 목이 꽉 조여지는 느낌을 받았다.뒤이어 육경한은 비웃듯이 말했다.“그게 가능할 것 같아?”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악마의 예언처럼 들렸다.더 이상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육경한의 손목을 세게 붙잡고는 마구 물어뜯었다.방심하고 있던 육경한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곧 피 냄새가 사방에 퍼지자 소원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피를 생으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예 다 마셔버려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육경한은 그녀를 떼어내지 않고 오히려 팔을 낮춰 소원이 좀 더 쉽게 물 수 있도록 했다.각도를 조금 틀자 그는 소원이 자신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정말로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온몸의 피가 ‘훅'하고 불타오르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단지 ‘흥분’이라는 감정만 느낄 뿐이었다.그는 몸을 굽혀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담담하게
“네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우리는 다시 하게 될 거야. 그러니 나를 거부하려고 하지 마. 말 잘 듣고 나를 화나게 하지만 않으면 죄는 피할 수 있을 거야. 알겠어?”육경한은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고 더욱이 이런 유혹하는 듯한 말투로 말한 적도 없었다.오늘 밤 그는 사상 최고의 인내심을 보였다.두 사람의 몸은 밀착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육경한이 소원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있었다.소원의 몸은 너무나도 허약했다. 조금 전 피를 빨 때 모든 힘을 소진했기 때문에 지금은 반항할 힘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그저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한참 후, 그녀는 절망과 무력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육경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를 놔줄 거야?”그러자 소원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육경한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다음 생에.”‘다음 생엔 이렇게 엮이지 말자, 나도 힘들어.’곧이어 그가 덧붙여 말했다.“이번 생엔 꿈도 꾸지 마.”다음 생이라는 이 단어에 소원은 밀폐된 철상자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이 악마 같은 육경한의 손에 있었다.끝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싸움이 소원에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지친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육경한,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야? 그렇게 나를 미워한다면, 나를 죽여서 내 시체를 개에게, 늑대에게, 돼지에게 먹이는 게 더 통쾌하지 않겠어?”그러자 육경한은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네 마음속에 나는 사람을 죽이는 악마인 거야?”“그 정도는 아니지.”소원은 차분하게 말했다.“내 마음속에서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돼지나 개만도 못한 짐승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약혼자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역겨워하는지 알긴 알아?”그 말을 들은 육경한이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화난 얼굴로 말했다.“역겨워도
소원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의 품에 꼭 안기고 말았다.온기를 머금은 눈물은 독약처럼 남자의 딱딱한 가슴으로 스며들어 그 냉혈하고 무정한 심장을 물들였다.슬픔이 전염되기라도 하는 듯 육경한의 심장도 욱신거리기 시작했다.꽉 힘을 준 그의 훤칠한 손가락 마디가 창백하게 질렸고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널 죽게 할 순 없어.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소원은 더 이상 반박할 힘이 없었고 아픈 몸에 의해 그녀는 오랫동안 깨어있는 것에 한계를 느껴 곧 남자의 품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창밖으로 푸른 달빛이 흘러들어와 방 전체가 은은한 하얀 빛깔의 천에 뒤덮인듯한 느낌이었다.육경한은 자신의 품에 안긴 어린 여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조롱하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입 밖에 내지 못한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소원아, 내가 또 너한테 잘해주고 싶다니.”“나 진짜 싼 인간이지. 응?”매번 이 여자에게 무자비한 우롱을 당하고 매번 그녀의 손에 익사하고 싶었다.육경한은 정말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다....윤혜인은 8시 반에 끝나는 저녁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길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를 느끼고 열어보니 이준혁의 전화였다.“수업 끝났어?”“네.”“내가 데리러 갈까?”그의 열정에 윤혜인은 더욱 경악하며 눈을 들어 몇백 미터만 있으면 도착하는 지하철역을 바라보았다.“괜찮아요. 지하철역에 도착했어요.”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남자의 매력적인 음성이 들려왔다.“뭐가 괜찮아. 넌 내 와이픈데.”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멈칫한 윤혜인은 이제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협의에 불과한 부부관계.두 번 다 할아버지 때문에 이준혁이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니 윤혜인은 마음이 씁쓸했다.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는 끌어내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아무렇게나 버려도 되는 물건 말이다.사실 이준혁에게 있어 그녀는 있든 없든 중요
이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천수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에 아직은 공개할 수가 없다.꾹 입을 닫고 있는 이준혁에 원지민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준혁아, 네 전 와이프는 널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그 말은 마치 커다란 자석처럼 이준혁의 가슴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다시 돋우어 주었다.허...원지민처럼 일면식도 없는 외부인조차도 그녀가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줄은 몰랐다.그만큼 윤혜인의 마음이 선명하다는 것이다.이준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원지민은 그제야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고 감정도 안정되었다.“이건 아줌마의 뜻이니 계략을 쓰는 건 어때?”뜻밖의 제안에 이준혁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내가 없어도 아줌마는 계속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거잖아. 그렇다면 내가 방패막이가 돼도 상관없어.”그러자 이준혁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걱정 마, 난 너한테 그런 마음이 없어. 나도 당분간은 선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네가 나를 방패막이로 삼으면 나도 너를 허울로 삼을 거야. 아무도 손해 볼 거 없잖아.”이준혁이 그 어떤 부정도 하지 않자 원지민은 곧바로 기회를 틈타 멋대로 결정을 내려버렸다.“그럼 그렇게 하자. 네가 내 부탁 하나 들어주는 거로 퉁치자고. 공개 안 해도 돼. 그냥 각자 부모님한테만 말하는 거로 하자.”말을 마치고 그녀는 도시락을 들고 두어 번 흔들어 보이며 한마디 거들었다.“이건 내가 가서 먹고 보여줄게.”사무실을 나서자 원지민의 얼굴에 어려 있던 순진함도 일순간에 깨끗하게 사라졌다.이렇게 몇 년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이준혁이 그녀를 남자로 여기며 친구로 지냈던 시간이다. 그때야말로 그들이 가장 가까이 의지했을 때니까.원지민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 후, 이준혁은 즉시 그녀를 멀리했다.결국, 원지민은 상심을 품고 유학을 떠났지만 돌고 돌아보니 그녀는 여전히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그를 갖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켜졌고 편집증도
말을 이어가며 그녀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재빨리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지하철역 안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설마 잡으러 올 리는 없겠지?지하철을 탔는데도 윤혜인의 마음은 계속 두근거렸다.그녀는 한구운의 또 다른 그 얼굴이 너무 두려웠다.지하철이 곧 역에 도착하고 윤혜인은 군중을 따라 역을 나서 앞사람을 따라 걸었다.지하철역은 단지에서 2천 미터도 채 안 되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아파트 단지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앞사람이 다른 길로 꺾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윤혜인은 문득 불안한 마음에 동네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그때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윤혜인이 가방 안에 있는 늑대 방지 스프레이를 슬쩍 움켜쥐자 등 뒤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도 갑자기 빨라졌다. 그 순간, 윤혜인은 재빨리 몸을 틀어 그 사람을 향해 스프레이를 번쩍 들었다.그러나 그녀를 앞선 그 사람은 마치 그녀를 정신병자처럼 쳐다보는 것이다.그 사람은 정말 순전히 행인일 뿐이었다.윤혜인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스트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혜인아.”가슴이 흠칫 떨려났고 막 발을 옮겨 뛰려는데 남자가 뒤에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남자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청아했다.“혜인아, 난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얌전히 차에 타, 알았지?”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지척에 있는 경비실을 보고 재빨리 언성을 높여 구조요청을 하였다.“살려...”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허리춤에 주삿바늘이 닿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이윽고 한구운이 젊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네가 도망간다면 배 속의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거야.”아이가...한구운이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있다.윤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예요?”“얘기 좀 하고 싶어.”“싫어요.”그러자 한구운이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차갑고 섬뜩한 육경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속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만약 그가 화를 낸다면 지금 그의 집에 있는 상황에서 소원이 저항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지금 나 위협하고 있는 거야?”육경한이 입을 떼자마자 강렬한 압박감이 그녀를 덮쳤다.소원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평온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했다.“위협이 아니야. 단지 거래지. 내가 현재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현재가 유진이의 생명의 은인이라서야. 그때 그 해변 절벽에서 현재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유진이와 함께 떨어져 죽었을 거야. 현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유진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소원은 육경한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서현재에게도 불리했다.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육경한에게 서현재의 안전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다.이건 육경한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변화무쌍한 서울에서 뿌리 없는 두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정말 쉽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비록 그 적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맞서야만 했다.지난밤 만약 영숙의 말이 아니었다면 소원은 지금 이토록 빠르게 마음을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영숙이 말했다.“스스로 살아가는 게 고결하게 보일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오히려 스스로만 의지해서 초라하게 산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밖에 안 될 거야. 똑똑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기회를 붙잡는 법이지.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옳은 길이야.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어...”영숙의 위로에 소원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그동안 수없이 부딪혀 왔던 벽들, 이제는 좀 더 똑똑하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소원은 눈앞에 놓인 담백하고 향긋한 보양식을 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몸이 다쳤을 때는 보양식으로 보충할 수 있다지만 마음은 어떡해야 하지? 상처 입은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건강한 몸이 필요했다.절식하며 저항하는 건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할 짓이었다.약해진 몸으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제대로 된 판단도 할 수 없었다.억지로 먹긴 했지만 그 양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다.정상적인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양에는 한참 못 미쳤다.남은 음식을 도우미가 들고 나갈 때, 육경한은 그 모습을 흘낏 보며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연근을 좋아하니까 다음 끼니엔 연근 요리를 준비해.”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도우미는 속으로 생각했다.‘연근 같은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다니... 이 여자는 정말 육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어.’다음 날 아침, 소원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도우미에게 말했다.“육 대표님을 불러주세요.”그녀에게는 삼일이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유진이의 안전은 단 한순간도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곧이어 육경한이 방 안에 들어서자 방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소원이 입을 열었다.“조건 받아들일게.”이 결정에 육경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사람은 약점이 있으면 잡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소원의 약점은 언제나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그녀는 어머니를 포기할 수도, 아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소원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동안 그런 수를 쓰지 않았다.자신에게 아직 그 알량한 자신감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결국 육경한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고 소원은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소원이 덧붙였다.육경한은 그녀가 조건을 제시하는 일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조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건 소원
육경한은 눈앞의 여자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욕망이 뒤섞였다.조금 전의 짧은 접촉만으로도 그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 듯했다.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눌러 제 몸 어디 한 부분에라도 붙여두고 싶었다.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말이다.특히 그녀가 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현재야’라는 말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그는 지금 당장 서현재를 붙잡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육경한,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모자에게 부끄럽지 않아? 왜 내가 당신에게 빌어야 하지? 유진이는 당신 아들 아니야?!”소원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 깊은 증오를 느꼈다.육경한은 차분히 말했다.“내가 두 사람에게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그걸 만회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잖아.”그의 말은 소원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렸다.그렇지만 육경한은 개의치 않았다.소원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비웃음을 사는 것쯤은 상관없었다.“네가 유진이의 엄마로 돌아와 내 곁에 머문다면 내가 필요한 권리를 줄 거야. 하지만 네가 유진이의 엄마가 아니라면 그 권리는 너와 아무 상관없어.”육경한의 말은 현실적이고도 냉정했다.교환을 원하는 것이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했다.곧 소원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육경한, 당신 왜 이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 둘 사이엔 사랑 따윈 없어!”극도로 지친 소원은 무력감을 느꼈다.육경한은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그를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서현재조차 위험에 빠져 있었다.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경한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이제 와서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는 소원의 손가락을 단단히 얽으며 열 손가락을 맞물렸다.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키스는 어젯밤 일에 대한 대가야. 이제부터가 내가 내놓을 조건이야.”소원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뭘 하겠어? 당연히...”눈을 가늘게 뜨더니 육경한은 고개를 숙였다.“널 가질 거야.”뒤이어 거칠고 압도적인 키스가 다시금 그녀에게 덮쳐왔다.이번 키스는 이전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더 거침없었다.조금 전의 키스는 단순한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소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그녀의 손톱이 등과 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남자는 소원을 침대 위로 강제로 밀어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가슴 위로 억누르며 반항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그의 뜨겁고 거친 키스는 소원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이어졌고 술에 취한 듯한 짙은 욕망이 가득했다.남자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내려가며 탐욕스럽게 그녀를 더듬었다.서로 뒤엉킨 숨소리는 남자가 흥분했을 때만 내뱉는 거친 숨결이었다.정신이 아득해지며 소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육경한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분명 최근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눈빛에 진한 욕망의 빛이 서린 채 육경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잠시 놓아주었다.“아까 나한테 물었었지?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건은 간단해. 널 내게 줘. 그러면 내가 유진이의 엄마로 만들어줄게.”소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멍해졌다.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진이의 엄마’라니. 유진이는 원래부터 그녀의 아이다.‘난 이미 유진이의 엄마잖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말뜻을
소원의 숨이 순간 멎었다.물론이다. 당연히 유진이의 양육권을 원했다.그것만이 유진이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 말이다.유진이는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허약했다.다른 사람이 조금만 속임수를 써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소원이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걸고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 부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유진이의 몸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게다가 의사는 유진이의 건강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며 적합한 기증자를 찾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유진이를 반드시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 했고 이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소원은 평생을 후회할 것이었다.“나는 당연히...”하지만 소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육경한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조용히 ‘쉿’하고 말했다.약간 거친 그의 손가락 끝은 마치 사포처럼 꺼끌꺼끌한 촉감을 남겼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낯선 감각이 스쳤다.몸에 소름이 돋으며 소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육경한은 가볍게 비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원한다면 진심을 보여야지.”소원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한 발 더 물러섰다.“원하는 게 뭔데?”그녀가 다시 묻기도 전에 육경한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육경한은 소원을 옷장 문에 밀어붙였고 열기가 느껴지는 입술이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가에 닿았다.그것은 마치 시험하듯 시작되었고 이내 그녀의 입술로 깊숙이 파고들었다.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소원은 한순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소원이 손발을 모두 사용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육경한은 무릎으로 그녀의 두 다리를 꽉 누르고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거칠게 키스했다.그의 입술은 거칠었고 심지어는 물기까지 했다.소원은 그의 강압적인 키스에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남자의 힘 앞에서는 그녀의 저항은 무력할 뿐이었다.결국 육경한의 입술이 소원의 것을 물어 피가 묻어났고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동안 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그는 담담하게 소원의 얼굴빛을 살폈고 소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신이 유진이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엄마인 내가 할 수밖에 없지. 내일...”“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 모두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거야.”소원의 단호한 말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백업 파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물었다.“그리고 나면?”소원은 잠시 멈칫했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육경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공개한다고 해도 연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야. 우리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최악의 경우 해외로 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면 그만이지. 연주의 이후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방민아와 방민기도 마찬가지야. 방씨 가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네가 벌이는 이 작은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만약 돈과 인맥을 써서 이슈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육경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들의 대응 방식은 연주와 다를 게 없어.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거야.”그리고 그는 냉랭하게 덧붙였다.“소원, 꿈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방민아와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야. 근데 내가 그 여자들이 유진이에게 나쁜지 좋은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육경한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점들이 속속 보였다.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지금 그녀가 가진 영상은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님 부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그녀가 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겠는가.결국 육경한이 유진이를 놓아주지 않는 이상 양육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으며 잠재적인 위험은 피할 수 없었다.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
하지만 곧 그녀는 이 생각을 부정했다.영숙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영숙을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영숙이 소원을 해치려 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도와줄 필요도 없었고 지금 같은 시점에 와서 그녀를 해칠 이유도 없었다.그렇다면 이건 분명 육경한이 알아챈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몰랐다.‘내가 육연주와 방민아를 몰래 찍어둘 줄 어떻게 알아챘지?’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초소형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겨우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조용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이미 소용없어.”확인해 보니 과연 카메라 안의 저장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육경한이 이걸 손에 넣고 안에 있는 내용을 봤다면 그녀에게 돌려줄 리 없었다.그 안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의 조카, 약혼녀, 그리고 그의 큰처남이었다.그들과의 관계가 워낙 가깝기에 육경한이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도록 놔둘 리 없었다.소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장카드를 가져갔다면 그 안의 내용도 이미 보셨겠죠, 육 대표님.”“응, 봤어.”육경한은 솔직히 인정했다.“봤다면 당신 약혼녀가 한 말을 들었을 텐데요?”소원은 약간 흥분하며 물었다.“그 여자가 정말 유진이 새엄마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육경한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하지만 이 순간, 문득 어젯밤 무의식중에 소원이 흘린 한마디가 떠올랐다.“현재야...”그리고 그동안 소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냉담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장난처럼 다루었는지, 그 안에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던 것들이 떠올랐다.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바꾸었다.“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될 거야. 유진이는 어쨌든 새엄마가 필요하니까. 누구도 유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필 수 없다면 차라리 나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이 낫지.”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자신의 아이를 이익의 발판으로 삼
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약간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지금은 육경한과 이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어젯밤, 소원이 영숙에게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게 한 것은 방민아의 수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 외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방민아의 수를 깨뜨리지 못하면 유진이를 지킬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육경한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이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이후 소원은 영숙에게 부탁해 숨겨 둔 소형 카메라를 가져오게 했다.현재 그 증거는 영숙의 손에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그래야만 육경한과 조건을 논할 수 있었다.그녀는 확신했다. 이 증거를 본다면 육경한도 미우 그룹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방민아와 결혼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설사 결혼을 강행하려 해도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었다.소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나가야겠어. 내 옷 줘.”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너무 헐렁해 입고 나가면 거의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민망했다.육경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네 옷? 그 찢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입고 나가겠다고?”소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싸움으로 옷이 모두 찢겨나갔던 것이다.“그럼 부탁할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 좀 찾아줘.”그러나 육경한은 냉소하며 말했다.“왜 내가 널 위해 옷을 찾아줘야 하지? 나가고 싶으면 그냥 지금 입은 채로 나가.”소원은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곧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지금 입은 그대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문까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육경한이 발로 문을 차며 문을 닫아버렸다.소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정말 그렇게 나가려는 거야?”육경한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투는 뭔가 숨은 의도를 담고 있는 듯했다.속이 덜컥 내려앉았
피가 끝없이 번져가 끝내는 눈까지 뒤덮자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눈이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머릿속은 웅웅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낯선 방을 둘러보며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이전의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방민아가 쉽게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그 룸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었다.그리고 영숙이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다음은 육경한이 그녀를 데려간 장면이 이어졌다.머리를 감싸 쥐고 문질렀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정신도 완전히 맑지 않았다.공기 중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맴돌았다.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닌 소원은 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저절로 미간도 찌푸려졌다.‘어젯밤...’소원은 서둘러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방민아, 방민기와 몸싸움을 벌이며 생긴 상처들 외에 민감한 곳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허리에 남은 손자국이 의심스러웠다.그 자국은 너무 깊어서 마치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흔적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분명 싸움에서 생긴 자국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하려니 겁이 났다.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본래 소원이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육경한이 성큼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원을 보고 무심히 말했다.“깼네.”말을 끝내자마자 커다란 베개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육경한은 손을 살짝 들어 그것을 쳐냈고 베개는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구해줬더니 이렇게 보답하는 건가?”“나한테 무슨 짓 했어?”소원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물었다.육경한은 그녀가 화가 난 모습을 보며 얇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었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도우미가 가져다 놓은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뭘 했다면 네가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 같아?”순간 멍해졌지만 소원은 이내 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