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으려고요? 주 비서님한테 사 오라고 할게요.”이준혁은 고개를 옆으로 올리더니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여기 먹을 거 있잖아.”그는 돼지 간 죽을 가리키고 있었다.‘아까는 안 먹겠다고 하지 않았나?’그러나 그녀는 굳이 물어보지 않고 차가워진 죽을 병실의 주방에 가져가 버리고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이준혁이 윤혜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말했다.“아직 먹을 수 있어.”윤혜인은 대답했다.“이미 차가워졌어요.”그의 몸은 지금 차가운 것을 먹을 수 없었고 하물며 차가운 돼지 간은 맛도 없었다.윤혜인은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비록 뚜렷하진 않았지만 이준혁은 그녀가 그와 피부를 가까이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많이 끓어와서 괜찮아요.”하지만 왜서인지 이준혁은 그녀가 버리지 못하게 계속 고집을 부렸다.“그냥 놔둬. 나 다 먹을 수 있어.”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을 받아 작은 탁자 위에 놓고 먹기 시작했다.그러나 상처가 가슴 쪽에 있었기에 스스로 먹으면 몸이 앞뒤로 움직여 무리가 갈 수 있었다.상처 부위의 피부가 당겨질 때 마다 그는 소리 없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먹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윤혜인은 손을 뻗어 그릇을 뺏더니 탁자를 정리하고 그를 눕혀 놓았다. 그리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직접 먹여줬다. 그제야 이준혁은 이전보다 조금 순해진 것 같았다.이 단어는 이준혁처럼 카리스마 있는 사람에게 쓰면 적절하지 않지만, 윤혜인은 그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순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느새 그는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고 뒤이어 윤혜인이 물었다.“더 먹을래요?”그러자 이준혁은 조금 전의 키스로 인해 빨갛게 부은 윤혜인의 입술을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더 먹을래.”그러고 나서는 겁탈할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윤혜인은 귀마저 빨갛게 변했다.“죽을 더 먹겠냐고 물어본 거예요.”우수 깊은
윤혜인은 그의 우수 깊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살며시 주먹을 쥐고는 거의 애원하듯 간절하게 말했다.“준혁 씨, 꼭 이렇게 날 힘들게 해야만 해요? 준혁 씨도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없다는 거 알잖아요.”분명 그는 쉽게 윤혜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걸까?이준혁은 숨이 막히는 듯했고 상처도 자극을 받은 듯 아팠다. 차가워진 눈빛으로 그는 말을 할 때조차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돈이 없으면 몸을 팔아. 너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화가 났다. 이번 일로 두 사람 사이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멀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그와 엮이기 싫다는 뜻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있었다.만약 지금 부상을 입고 누워 있지 않았다면, 이준혁은 윤혜인을 강제로 눕혀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직 잠자리를 함께할 때만 그녀는 순순히 굴었으니까.그의 무자비한 말에 윤혜인의 마지막 인내심도 무너졌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이준혁 씨, 날 무시하는 게 그렇게 기쁜 거예요? 그냥 한 번 찌르면 되는 거죠? 내가 그대로 해줄게요!”그녀는 미친 듯이 침대 머리맡에 있던 과도를 집어 들고 가슴에 찌르려 했다.“그만둬!”눈빛이 차갑게 번뜩이더니 이준혁은 갑자기 팔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쾅!과도는 바닥에 떨어졌다.윤혜인은 그의 강한 끌어당김에 상반신이 침대 위로 넘어지며 그의 다리를 누르게 되었다. 그러자 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더니 애써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날 또 한 번 찌를 셈이야?!”윤혜인의 등은 그의 손에 꽉 눌려 있었고 얼굴은 하얀 이불에 파묻혀 있었다. 그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렇게 싫어? 그럼 내 목숨을 너한테 주면 좀 낫겠어?!”그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목숨을 줄
윤혜인은 화가 났다.정유미를 위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함께할 생각도 없으면서 정유미와 잠을 잔 이준혁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정말 무책임한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서려던 찰나, 이준혁의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뒤로 당겼다.윤혜인은 그대로 침대 가장자리에 넘어졌고 이준혁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그렇게 이준혁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윤혜인의 자세가 묘하게 변해버렸다.윤혜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이준혁 씨!”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의 상처를 고려해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왜 불러?”이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우수 깊은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놔줘요.”윤혜인은 그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 팔은 마치 용접된 철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는 큰 동작 없이 긴 팔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물었다.“나한테 쓰레기라 헌 게 무슨 뜻인지 설명 좀 해봐, 응?”윤혜인은 입술을 물어뜯더니 말했다.“정유미 씨와 약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유미 씨한테 그런 짓을 했잖아요... 그게 쓰레기가 아니면 뭐예요!”윤혜인은 속으로 여성을 가지고 노는 그의 행동을 비열하고 저급하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런 짓이라니?”윤혜인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런 짓이요.”“그게 뭔데?”윤혜인은 손가락 두 개를 교차시키며 말했다.“이거요!”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당황해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난 정유미 씨랑 손도 안 잡았어.”“손을 잡는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그럼 뭔데?”이준혁은 일부러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강하게 끼워 넣고는 빠르게 교차시키며 물었다.“이게 뭔데?”얼굴이 익은 토마토보다 더 빨개지더니 윤혜인은 고개를 돌리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당신은 정말 변태
그의 유치함과 충동적인 성격은 그녀가 그를 성인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아직도 못 믿겠어?”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작은 만두처럼 포동포동한 손가락 끝을 살짝 물었다. 그리고는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내 키스 실력이 많이 못 해졌나 보군. 내가 너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느끼지 못했다니...”그는 마지막 단어를 속으로 삼켰다.그녀가 놀랄까 봐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윤혜인은 잔뜩 긴장하며 몸을 뒤로 피하려 했다. 그러자 이준혁의 안색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는 윤혜인의 허리를 잡아 다시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말했다.“피하지 마.”이준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자신을 향해 돌리더니 깊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난 이제 해명 다 했으니 이제 네 차례야.”그러자 윤혜인의 심장이 요동쳤다.“제 차례요? 그게 무슨...”“너한테 한 가지만 물을게. 한구운이랑 정말...”이준혁은 잠시 멈추었다. 그 몇 마디가 매우 쓰라린 듯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그가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사귀고 있는 거야?”그러자 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피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이준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숙여 피하지 못하게 했다.두 눈이 마주쳤고 그는 윤혜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말해줘. 나한테는 그게 정말 중요해.”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이것은 다음 단계에서 그녀를 어떻게 되찾아올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그의 조사에 따르면 그날 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그리고 이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설명해준다,그는 윤혜인의 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한 번이라도 맛보면, 한번 또 한 번 원하게 되는 그런 매력.어떤 남자도 이를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그 남자가 고자가 아니라면 말이다.병실의 따뜻한 노란 불빛 아래, 그의 오똑하게
윤혜인은 순간 조금 화가 났다.‘왜 아직도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거야?’“혜인아...”그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무리 아파도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준혁의 이런 모습을 보고 윤혜인은 코끝이 조금 시큰거렸다.‘진짜인지 아닌지,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인데.’마침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준혁에게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겼다.“읍...”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이준혁의 가느다라고 예쁜 손가락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얇은 그의 입술은 천천히 더욱 깊게 윤혜인의 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그의 폭풍 입맞춤에 윤혜인은 다리가 다 나른해졌고 더불어 조금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이내 그의 부상이 떠올라 그녀는 두 손을 어깨에 받치고 가능한 한 자신이 그 상처에 닿지 않도록 했다.이 자세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하게 되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은 더는 참을 수 없다 할 때쯤, 적절한 타이밍에 그녀를 놓아주었다.윤혜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그가 다친 게 아니었다면 일찍이 뺨 한 대를 날리고도 남았을 것이다.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자 이준혁은 더욱 꽉 잡았다.“이준혁 씨!”윤혜인은 마치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나랑 약속한 거 후회하는 거예요?”‘아무 상관없는 일 아닌가? 왜 계속 이렇게 시시때때로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응. 후회해.”이준혁은 미안한 표정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마치 약속을 파기한 사람이 윤혜인인 것처럼 말이다.“너!”윤혜인은 화가 났다.하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승복하지 못하겠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입이 떡 벌어지다 못해 윤혜인은 하마터면 턱이 땅에 닿을 뻔했다.이준혁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했다.“그날 밤, 세 번, 너한테 두 배의 보상을 줄게, 어때?”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준혁은 진지하
윤혜인은 그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윤혜인이 자지 않으면 자신도 자지 않겠다는 이준혁의 뜻 말이다.그녀는 짐짓 모른 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30분의 시간이 흘렀다.고개를 든 윤혜인은 이준혁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발견했다. 오래 앉아있다 보니 힘든 모양이었다.그 모습을 본 윤혜인은 또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때때로 그녀는 너무 쉽게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이 불만스러웠다.그녀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내가 침대에 오르면 잘 거예요?”이준혁이 그 매력적인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응. 너랑 같이 잘래.”곧 윤혜인은 일어나 벽장에서 이불을 안고 와서 깔았다.“우선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 한 사람이 한 이불 덮고 또 절대 이 선 넘으면 안 돼요.”이준혁은 조금 후회했다.‘간호사한테 이불도 가져가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깜빡 잊었네.’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병원에서 나온 소원은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다름 아닌 위암이라고 했다.이미 위암 3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수술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며 말이다.그녀는 검사 보고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위에 적힌 수치들은 소원의 위가 만신창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문제가 아니었다.손에 쥐고 있는 또 다른 혈액 검사 보고서에는 그녀가 임신했다고 나와 있다!그것도 이미 두 달 차에 접어들었다고 한다.그동안 육경한과 관계를 맺으며 여러 번 출혈을 경험했기에 그녀는 줄곧 자신이 정상적으로 생리를 한다고 생각했다.때문에 임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육경한은 별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매번 스스로 사후피임약을 챙겨 먹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임신을 하게 될 줄이야...의사의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가능한 한 빨리 중절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위암 수술을 진행할 수 있어요.”소
육경한의 개인 크루즈 선 마리나 1호는 빈해항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도심에서 차로 3시간 떨어져 있었다.소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가 다 되어있었다.아침에는 검진을 받아야 했기에 아침을 먹지 않았고 그다음에는 제품에 문제가 생겨 지금껏 바삐 돌아쳤기에 그녀는 점심 역시 걸렀다.그래서인지 위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정말 불에 타는 듯한 느낌 말이다.소원은 비참하게 웃었다. 이런 느낌은 연초부터 자주 있었는데 우리 신체의 기관은 위험을 감지할 때 각종 방식으로 주의를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육경한이 돌아온 관계로 그녀는 바삐 움직이며 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래서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고 만 것이다.차에서 내리자 12월 하순의 찬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코트를 여미며 몸을 가린 후 눈에 띄는 초호화 크루즈로 향했다.크루즈 선 앞에는 검은 옷의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있어 초대장이 있어야 올라갈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의 전화를 걸었고, 곧 누군가가 받았다.그녀가 급히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지금 마리나 1호에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잠시 내려와 만나도 되고 제가 올라가도 됩니다.”하지만 육경한이 이내 짜증 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은 시간 없다니까? 너랑 자고 싶지 않다고. 얼른 돌아가!”“5분, 5분이면 되요.”소원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5초도 안 돼. 난 오늘 아연이랑 함께 있을 거야.”육경한은 차갑게 거절했다.“꺼져. 내 눈앞에 띄지 말고.”“뚜뚜뚜...”전화가 끊겼다.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보아하니 그가 소원의 연락처를 차단한 모양이었다.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추운 바람 속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 서 있었다. 회사에 있는 비서가 또 전화를 걸어와 문제가 생기지 않은 협력사에서도 대량으로 반품하면 안 되겠냐 물었다고 했다.심상치 않은 조짐에 모두들 협력을 끊으려는 듯했다.소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
그래서 그는 자주 웃지 않는다. 사실 진아연 외의 다른 사람 앞에서는 거의 웃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그도 그럴 것이 사업계는 전쟁터와 같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호한 대표이지 따뜻한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육경한은 자신의 단점을 숨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직 진아연과 마주할 때만 육경한은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소원이 기억하는 그 따뜻한 육경한으로 변했다.별안간 술 냄새가 스쳐 지나가더니 ‘쫘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소원의 코트에 와인을 뿌린 것이다.곧이어 누군가 술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소원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사람은 바로 진아연이 친오빠 진찬성이었다.그녀가 그를 알아보는 이유는 이전에 본 동영상 때문이었다.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찬성이 또 입을 열었다.“내가 닦아줄게요.”이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뻗어 소원의 코트를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그가 와인을 뿌린 곳은 소원의 가슴 쪽이었다. 더불어 그 음흉한 표정은 누가 봐도 이 기회를 틈타 소원을 만지려는 것 같았다.소원은 즉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냉담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했다.“괜찮습니다. 필요 없어요.”진찬성에 대해 소원은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유명한 카사노바이며 특히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침대에서 여자를 갖고 놀다 죽게 만든 일도 있었는데 적지 않은 돈을 써서 겨우 논란을 잠재웠다고 한다.소원은 한때 육경한의 수단이 자신의 미래 처남이 될 진찬성에게 배운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그러다 그녀는 어느 한번 떠도는 동영상을 보고 진찬성이 수단이 육경한보다 훨씬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육경한은 기껏해야 흥분을 돋궈 다른 사람이 빌게 만드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하지만 진찬성은 정말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을 정도로 별별 물건을 가지고 사람의 몸을 찔러댔다.그래서 소원은 진찬성을 보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속이 안 좋아져 토하고 싶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