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매우 깊게 키스했다.틈새라곤 찾을 수 없는 입맞춤, 윤혜인은 온몸이 이준혁의 차가운 향기에 휩싸인 것 같았다.이준혁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으며 힘을 조금이라도 풀지 않았다.윤혜인은 그가 상할까 봐 너무 힘껏 밀지도 못했다. 마음은 더욱더 초조하게 타들어 갔는데 말이다.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면서 윤혜인은 별수 없이 이 상황을 버텨냈다.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미쳤어, 이준혁은 정말 미쳤어.’마침내 웬 냄새가 차가운 분위기를 뚫고 천천히 풍겨왔다.피 냄새였다.윤혜인은 정말 다급해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온통 백지장으로 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하지만 이준혁은 아직도 그녀와 깊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을 전부 흡입해갈 것 같이 말이다.그때, 윤혜인과 이준혁의 시선이 마주쳤다.한 사람은 탈출하고 싶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었다.찰나의 순간, 이준혁의 손에 잠시 힘이 풀렸다. 그러자 윤혜인은 망설이지 않고 이준혁의 아랫입술을 꽉 하고 물었다.밀려오는 고통에 이준혁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눈빛은 여전히 사나운 늑대처럼 그녀를 박탈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윤혜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제일 먼저 호출 벨을 눌렀다.의사를 기다리고 있으며 반쯤 쪼그려 앉아 이준혁의 상처를 살펴보던 윤혜인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피가 이전보다 더 빨리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눈가마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이준혁 씨! 당신 미친 거예요?”그는 자신의 목숨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이준혁은 힘이 빠져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조금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마치 무슨 약을 먹은 것처럼 그의 얇은 입술조차 붉게 변했다.그는 허약한 목소리로 그녀한테 대답했다.“응, 미쳤어.”윤혜인은 조금 당황해했다. 진짜로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자신의 몸을 갖고 너무 장난치는 것 같아서 화냈을
“뭐 먹으려고요? 주 비서님한테 사 오라고 할게요.”이준혁은 고개를 옆으로 올리더니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여기 먹을 거 있잖아.”그는 돼지 간 죽을 가리키고 있었다.‘아까는 안 먹겠다고 하지 않았나?’그러나 그녀는 굳이 물어보지 않고 차가워진 죽을 병실의 주방에 가져가 버리고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이준혁이 윤혜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말했다.“아직 먹을 수 있어.”윤혜인은 대답했다.“이미 차가워졌어요.”그의 몸은 지금 차가운 것을 먹을 수 없었고 하물며 차가운 돼지 간은 맛도 없었다.윤혜인은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비록 뚜렷하진 않았지만 이준혁은 그녀가 그와 피부를 가까이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많이 끓어와서 괜찮아요.”하지만 왜서인지 이준혁은 그녀가 버리지 못하게 계속 고집을 부렸다.“그냥 놔둬. 나 다 먹을 수 있어.”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을 받아 작은 탁자 위에 놓고 먹기 시작했다.그러나 상처가 가슴 쪽에 있었기에 스스로 먹으면 몸이 앞뒤로 움직여 무리가 갈 수 있었다.상처 부위의 피부가 당겨질 때 마다 그는 소리 없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먹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윤혜인은 손을 뻗어 그릇을 뺏더니 탁자를 정리하고 그를 눕혀 놓았다. 그리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직접 먹여줬다. 그제야 이준혁은 이전보다 조금 순해진 것 같았다.이 단어는 이준혁처럼 카리스마 있는 사람에게 쓰면 적절하지 않지만, 윤혜인은 그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순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느새 그는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고 뒤이어 윤혜인이 물었다.“더 먹을래요?”그러자 이준혁은 조금 전의 키스로 인해 빨갛게 부은 윤혜인의 입술을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더 먹을래.”그러고 나서는 겁탈할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윤혜인은 귀마저 빨갛게 변했다.“죽을 더 먹겠냐고 물어본 거예요.”우수 깊은
윤혜인은 그의 우수 깊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살며시 주먹을 쥐고는 거의 애원하듯 간절하게 말했다.“준혁 씨, 꼭 이렇게 날 힘들게 해야만 해요? 준혁 씨도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없다는 거 알잖아요.”분명 그는 쉽게 윤혜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걸까?이준혁은 숨이 막히는 듯했고 상처도 자극을 받은 듯 아팠다. 차가워진 눈빛으로 그는 말을 할 때조차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돈이 없으면 몸을 팔아. 너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화가 났다. 이번 일로 두 사람 사이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멀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그와 엮이기 싫다는 뜻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있었다.만약 지금 부상을 입고 누워 있지 않았다면, 이준혁은 윤혜인을 강제로 눕혀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직 잠자리를 함께할 때만 그녀는 순순히 굴었으니까.그의 무자비한 말에 윤혜인의 마지막 인내심도 무너졌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이준혁 씨, 날 무시하는 게 그렇게 기쁜 거예요? 그냥 한 번 찌르면 되는 거죠? 내가 그대로 해줄게요!”그녀는 미친 듯이 침대 머리맡에 있던 과도를 집어 들고 가슴에 찌르려 했다.“그만둬!”눈빛이 차갑게 번뜩이더니 이준혁은 갑자기 팔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쾅!과도는 바닥에 떨어졌다.윤혜인은 그의 강한 끌어당김에 상반신이 침대 위로 넘어지며 그의 다리를 누르게 되었다. 그러자 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더니 애써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날 또 한 번 찌를 셈이야?!”윤혜인의 등은 그의 손에 꽉 눌려 있었고 얼굴은 하얀 이불에 파묻혀 있었다. 그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렇게 싫어? 그럼 내 목숨을 너한테 주면 좀 낫겠어?!”그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목숨을 줄
윤혜인은 화가 났다.정유미를 위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함께할 생각도 없으면서 정유미와 잠을 잔 이준혁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정말 무책임한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서려던 찰나, 이준혁의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뒤로 당겼다.윤혜인은 그대로 침대 가장자리에 넘어졌고 이준혁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그렇게 이준혁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윤혜인의 자세가 묘하게 변해버렸다.윤혜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이준혁 씨!”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의 상처를 고려해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왜 불러?”이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우수 깊은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놔줘요.”윤혜인은 그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 팔은 마치 용접된 철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는 큰 동작 없이 긴 팔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물었다.“나한테 쓰레기라 헌 게 무슨 뜻인지 설명 좀 해봐, 응?”윤혜인은 입술을 물어뜯더니 말했다.“정유미 씨와 약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유미 씨한테 그런 짓을 했잖아요... 그게 쓰레기가 아니면 뭐예요!”윤혜인은 속으로 여성을 가지고 노는 그의 행동을 비열하고 저급하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런 짓이라니?”윤혜인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런 짓이요.”“그게 뭔데?”윤혜인은 손가락 두 개를 교차시키며 말했다.“이거요!”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당황해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난 정유미 씨랑 손도 안 잡았어.”“손을 잡는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그럼 뭔데?”이준혁은 일부러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강하게 끼워 넣고는 빠르게 교차시키며 물었다.“이게 뭔데?”얼굴이 익은 토마토보다 더 빨개지더니 윤혜인은 고개를 돌리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당신은 정말 변태
그의 유치함과 충동적인 성격은 그녀가 그를 성인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아직도 못 믿겠어?”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작은 만두처럼 포동포동한 손가락 끝을 살짝 물었다. 그리고는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내 키스 실력이 많이 못 해졌나 보군. 내가 너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느끼지 못했다니...”그는 마지막 단어를 속으로 삼켰다.그녀가 놀랄까 봐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윤혜인은 잔뜩 긴장하며 몸을 뒤로 피하려 했다. 그러자 이준혁의 안색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는 윤혜인의 허리를 잡아 다시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말했다.“피하지 마.”이준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자신을 향해 돌리더니 깊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난 이제 해명 다 했으니 이제 네 차례야.”그러자 윤혜인의 심장이 요동쳤다.“제 차례요? 그게 무슨...”“너한테 한 가지만 물을게. 한구운이랑 정말...”이준혁은 잠시 멈추었다. 그 몇 마디가 매우 쓰라린 듯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그가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사귀고 있는 거야?”그러자 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피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이준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숙여 피하지 못하게 했다.두 눈이 마주쳤고 그는 윤혜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말해줘. 나한테는 그게 정말 중요해.”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이것은 다음 단계에서 그녀를 어떻게 되찾아올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그의 조사에 따르면 그날 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그리고 이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설명해준다,그는 윤혜인의 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한 번이라도 맛보면, 한번 또 한 번 원하게 되는 그런 매력.어떤 남자도 이를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그 남자가 고자가 아니라면 말이다.병실의 따뜻한 노란 불빛 아래, 그의 오똑하게
윤혜인은 순간 조금 화가 났다.‘왜 아직도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거야?’“혜인아...”그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무리 아파도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준혁의 이런 모습을 보고 윤혜인은 코끝이 조금 시큰거렸다.‘진짜인지 아닌지,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인데.’마침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준혁에게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겼다.“읍...”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이준혁의 가느다라고 예쁜 손가락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얇은 그의 입술은 천천히 더욱 깊게 윤혜인의 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그의 폭풍 입맞춤에 윤혜인은 다리가 다 나른해졌고 더불어 조금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이내 그의 부상이 떠올라 그녀는 두 손을 어깨에 받치고 가능한 한 자신이 그 상처에 닿지 않도록 했다.이 자세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하게 되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은 더는 참을 수 없다 할 때쯤, 적절한 타이밍에 그녀를 놓아주었다.윤혜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그가 다친 게 아니었다면 일찍이 뺨 한 대를 날리고도 남았을 것이다.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자 이준혁은 더욱 꽉 잡았다.“이준혁 씨!”윤혜인은 마치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나랑 약속한 거 후회하는 거예요?”‘아무 상관없는 일 아닌가? 왜 계속 이렇게 시시때때로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응. 후회해.”이준혁은 미안한 표정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마치 약속을 파기한 사람이 윤혜인인 것처럼 말이다.“너!”윤혜인은 화가 났다.하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승복하지 못하겠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입이 떡 벌어지다 못해 윤혜인은 하마터면 턱이 땅에 닿을 뻔했다.이준혁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했다.“그날 밤, 세 번, 너한테 두 배의 보상을 줄게, 어때?”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준혁은 진지하
윤혜인은 그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윤혜인이 자지 않으면 자신도 자지 않겠다는 이준혁의 뜻 말이다.그녀는 짐짓 모른 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30분의 시간이 흘렀다.고개를 든 윤혜인은 이준혁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발견했다. 오래 앉아있다 보니 힘든 모양이었다.그 모습을 본 윤혜인은 또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때때로 그녀는 너무 쉽게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이 불만스러웠다.그녀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내가 침대에 오르면 잘 거예요?”이준혁이 그 매력적인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응. 너랑 같이 잘래.”곧 윤혜인은 일어나 벽장에서 이불을 안고 와서 깔았다.“우선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 한 사람이 한 이불 덮고 또 절대 이 선 넘으면 안 돼요.”이준혁은 조금 후회했다.‘간호사한테 이불도 가져가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깜빡 잊었네.’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병원에서 나온 소원은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다름 아닌 위암이라고 했다.이미 위암 3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수술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며 말이다.그녀는 검사 보고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위에 적힌 수치들은 소원의 위가 만신창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문제가 아니었다.손에 쥐고 있는 또 다른 혈액 검사 보고서에는 그녀가 임신했다고 나와 있다!그것도 이미 두 달 차에 접어들었다고 한다.그동안 육경한과 관계를 맺으며 여러 번 출혈을 경험했기에 그녀는 줄곧 자신이 정상적으로 생리를 한다고 생각했다.때문에 임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육경한은 별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매번 스스로 사후피임약을 챙겨 먹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임신을 하게 될 줄이야...의사의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가능한 한 빨리 중절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위암 수술을 진행할 수 있어요.”소
육경한의 개인 크루즈 선 마리나 1호는 빈해항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도심에서 차로 3시간 떨어져 있었다.소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가 다 되어있었다.아침에는 검진을 받아야 했기에 아침을 먹지 않았고 그다음에는 제품에 문제가 생겨 지금껏 바삐 돌아쳤기에 그녀는 점심 역시 걸렀다.그래서인지 위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정말 불에 타는 듯한 느낌 말이다.소원은 비참하게 웃었다. 이런 느낌은 연초부터 자주 있었는데 우리 신체의 기관은 위험을 감지할 때 각종 방식으로 주의를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육경한이 돌아온 관계로 그녀는 바삐 움직이며 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래서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고 만 것이다.차에서 내리자 12월 하순의 찬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코트를 여미며 몸을 가린 후 눈에 띄는 초호화 크루즈로 향했다.크루즈 선 앞에는 검은 옷의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있어 초대장이 있어야 올라갈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의 전화를 걸었고, 곧 누군가가 받았다.그녀가 급히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지금 마리나 1호에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잠시 내려와 만나도 되고 제가 올라가도 됩니다.”하지만 육경한이 이내 짜증 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은 시간 없다니까? 너랑 자고 싶지 않다고. 얼른 돌아가!”“5분, 5분이면 되요.”소원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5초도 안 돼. 난 오늘 아연이랑 함께 있을 거야.”육경한은 차갑게 거절했다.“꺼져. 내 눈앞에 띄지 말고.”“뚜뚜뚜...”전화가 끊겼다.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보아하니 그가 소원의 연락처를 차단한 모양이었다.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추운 바람 속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 서 있었다. 회사에 있는 비서가 또 전화를 걸어와 문제가 생기지 않은 협력사에서도 대량으로 반품하면 안 되겠냐 물었다고 했다.심상치 않은 조짐에 모두들 협력을 끊으려는 듯했다.소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있었어요. 방금 떠났고요.”소원은 속으로 계산했다.‘이 시간대라면... 그럼 우리도 내일 아침쯤에 떠나겠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은 아니야.’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는 상태였다. 좋은 기회가 아니었다.소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옆의 사람들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것을 차례로 전달하도록 했다.말이 끝나자 모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더라도 눈을 감고 몸을 편히 쉬었다.드디어 밤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닫혀 있던 나무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남자가 손전등을 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비추더니 소원의 얼굴을 비추고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너, 나와.”그 목소리는 소원에게 익숙했다.소원에게 머리를 맞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설마 했는데 그가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소원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말 그대로 기회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마치 이제야 남자를 알아본 것처럼 깜짝 놀라며 말했다.“오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신호를 보냈다.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소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문지기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고 소원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움직이라는 손짓을 보냈다.그렇게 남자는 소원을 데리고 작은 초가집으로 향했다.그 초가집은 굉장히 작아 두 사람이 몸을 돌리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다.하지만 내부에는 등불이 있었고 그녀들이 있던 곳보다 훨씬 상태가 나았다.냄새도 심하지 않아 아마도 문지기가 교대할 때 쉬는 공간으로 보였다.문이 닫히자마자 남자는 소원의 손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그러고는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손을 뻗어 소원의 가슴 쪽으로 만지려고 했다.소원은 몸을 재빨리 비켜 손길을 피했다.그
아마 이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습관이 된 것 같았다.소원은 양옆으로 펼쳐진 길을 관찰했다. 지금은 아마 깊은 산속에 있는 것 같았다.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소원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다른 두 여자도 졸렸는지 바로 잠에 들었다. 하지만 소원은 손바닥을 꼬집고 입을 악물며 절대 잠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때는 일분일초도 놓치지 말고 기회를 잡아야 했다.아쉽게도 소원은 이 차가 개조한 적이 있는 차라는 걸 발견했다. 잠금이 바깥으로 되어 있어 안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아마도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도망갈까 봐 이렇게 설계한 것 같았다.소원은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새들을 바라봤다.그렇게 한 시간쯤 달리던 차는 정원 같은 곳에서 멈췄다. 이 정원은 비탈진 산 아래에 지어져 있어 매우 은밀했고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운전기사가 경적을 세 번 울리자 대문이 안에서 열렸다. 운전기사는 차를 운전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봤던 것과 또 다른 풍경이었다. 산길이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밖에서 보이던 정원은 그저 나무판자로 만든 가짜 건물이었다.안으로 들어가 험난한 산길을 20분쯤 운전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크고 작은 판잣집이 아주 많았다.운전기사가 경적을 두 번 울리자 안에서 무기를 장착한 사람 둘이 걸어 나와 차 문으로 다가오더니 안에 앉은 여자들에게 중얼중얼 시끄럽게 뭐라고 얘기했다.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고 지금은 내려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소원은 고분고분 차에서 내렸다. 뒤에 있던 여자가 잠깐 넋을 놓고 있자 무기를 들고 앞장선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여자의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자는 중얼거리며 계속 뭐라고 말했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욕하는 것 같았다.여자는 울고 싶었지만 울었다가 매를 맞을까 봐 얼른 구르다시피 차에서 내려왔다.소원은 앞에 선 사람에게 이끌려 어떤 초막으
남자는 얌전하게 창틀에 묶었던 손을 풀더니 두 손을 고쳐 묶고는 차로 압송했다.소원은 터덜터덜 걸어가며 대책을 생각했다.일단 저 차에 오르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여 기회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4, 5명이나 지키고 있어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소원이 너무 느리다고 잡고 있던 밧줄을 확 당겼다.“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좀 걸어.”소원은 좋은 기회를 찾지 못해 희망을 전부 남자에게 걸었다.“오빠...”소원이 소리를 낮추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나 너무 무서워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남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더니 경계했다.“내가 말했지. 몰라도 될 건 묻지 말라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연홍 누나가 말한 것처럼 정말 도망이라도 갈려고?”소원은 그제야 안경 쓴 여자의 이름이 연홍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남자가 눈치챌까 봐 일부러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감히 도망갈 생각을 하겠어요. 오빠가 인상이 좋기도 하고 여기서 아는 사람이 오빠밖에 없으니까 오빠하고만 대화하는 거죠. 오빠는 나 안 때릴 것 같거든요...”남자가 이 말을 듣더니 우쭐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칭찬을 마다할 남자가 없었다. 그게 예쁜 여자라면 더더욱 말이다.남자가 말했다.“하긴, 이제 행복할 날이 별로 안 남았네. 거기 가면 너 사람으로 봐줄 사람이 있을까?”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무서워서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오빠, 나 가기 싫어요.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남자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얼른 차 타. 내가 널 왜 놓아줘. 마지막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헤헤.”남자가 얍삽하게 웃었다. 아까 했던 생각을 아직 버리진 않은 것 같았다.이 말에 소원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다. 아직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기회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홍이 말했던 것처럼 남자가 아랫도리를 잘 간수하지 않으면 재수 없어질 수밖에 없다.
남자가 팬티를 벗기 시작하자 소원은 몸에 힘을 바짝 주고 기회를 노렸다.일촉즉발의 순간,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온 발차기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넋을 잃은 소원은 남자의 비명과 함께 들어온 사람이 전에 본 안경을 낀 점잖은 여자라는 걸 발견했다.발차기 한 번에 남자를 쓰러트리는 걸 봐서는 유단자라는 의미였다. 소원은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을 마쳤는지 손에 들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아 감추고는 마치 괴롭힘이라도 당했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여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앞으로 달려가 남자에게 발차기를 두 번 더 날리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모자란 놈, 아랫도리 관리가 그렇게 안 돼? 물건에 문제라도 생기면 돈은 어떻게 받으려고? 돈 있으면 유흥가에 가든가. 돈만 주면 너랑 자겠다고 나서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꼭 이래야겠니?”“아야. 난... 난 그냥 재미 좀 보려고 그랬던 것뿐이지 정말 뭘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퉤.”여자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남자의 얼굴에 침을 내뱉더니 말했다.“그 더러운 생각 집어치워. 전에 지성이가 운반하는 물건이랑 잤다가 일 터진 거 몰라? 너도 이 여자 손에 죽고 싶어서 그래?”소원은 여자의 말에서 팀원 중 한 명이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다가 일이 터진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여자의 말투와 전투력만 봐도 남자보다 훨씬 월등했기에 절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전에 태연하게 신고를 도와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팀원의 전화번호를 신고 센터로 고쳐 소원이 믿을 수 있게 유도한 것이었다.이 여자는 머리마저 무서울 정도로 비상한 사람이었다.남자는 다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알았어요. 알았어. 지성이랑 똑같은 잘못은 안 저질러요. 얼마나 쓸모없었으면 여자 하나 못 이겨서 오히려 죽임을 당해. 다행히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긴 했지만.”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소원을 힐끔 쳐다보더니 에둘러서 경고했다.“잡히면 곱게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몸이 이성을 앞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는 소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고개를 쳐들게 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발랑 까졌네. 남자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어?”소원은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끔은 성격을 앞세우기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오빠,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원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손바닥엔 어느새 튼실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남자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남자가 소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껴안자 소원은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한데 손이라도 좀 풀어줄래요?”남자는 소원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경각심을 세웠다.“무슨 꿍꿍이야?”“아니. 이러면 뭘 하기도 불편하잖아요.”소원이 제안했다.“혹시 걱정되면 한쪽만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창문에 묶어두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자는 제법 소원의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결박해달라고 하니 정말 땡큐였다.“정말 다른 꿍꿍이 없는 거지?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면 당장 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남자가 소원에게 경고했다.소원은 너무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듯 연기했다.“오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에 버려졌는데 오빠 말이라도 잘 들어야 고통이라도 덜 받을 거 아니에요.”“그래, 총명하긴 하네.”남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오빠, 나 지금 클럽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오빠 잘 모실 테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줘요.”어차피 소원이 아가씨라고 신분을 속여도 남자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의 말
여자는 소원이 쓰러지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꽤 오래 버티네. 다른 사람보다 몇분 더 버텼어.”여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얼마나 잤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깨보니 작은 판잣집에 누워 있었다. 크지 않은 걸 봐서는 아마 임시 피난처 같아 보였다.손발이 묶인 소원은 약물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밧줄을 풀고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여 아예 포기하고 체력을 보존하며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소원의 판단에 의하면 바깥엔 두 사람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 같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대화 소리가 사라지고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어젯밤 소원을 차에 태운 그 운전기사였다.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더니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침을 내뱉었다.“빌어먹을 년. 내가 운반만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당해본 건 처음이네. 이 화를 참을 수가 있어야지.”소원은 이 남자가 전문적으로 이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운반 작업만 몇 년을 했다고 토로하는 걸 봐서는 지금까지 쭉 이런 거래를 해왔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소원이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매를 버는 걸 수도 있으니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매라도 적게 맞아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당연히 모르지. 당신이 나를 알았으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어?”남자가 손을 비비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냅다 소원을 걷어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날 말했지.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야.”다리뼈를 정통으로 맞은 소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나도 그저 살고 싶어서...”남자가 그런 소원을
소원이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혹시 신고 좀 해주실 수 있나요?”안경을 쓴 여자는 꽤 통쾌했다.“당연하죠. 지금 바로 신고해 줄게요.”여자는 소원이 근심할까 봐 그러는지 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고 수화기 너머로 콜센터의 노련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경찰서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여자가 말했다.“안녕하세요. 길에서 많이 다친 여성분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나쁜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지금 혼자 길에 버려졌는데 신고해달라고 해서요.”“그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여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소원이 이름을 말했다.“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저를 납치했어요. 모르는 사람이고 차량번호는 XX...”“네, 지금 바로 경찰 인력을 그쪽에 보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세요.”통화가 끝나자 소원의 경계심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타요. 밖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깨에서 아직 피나잖아요. 그러다가 경찰 올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요...”소원은 아까 일을 겪으면서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콜센터와 통화하며 자기 이름을 진세연이라고 밝혔다.“네.”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원이 차에 오르자 여자는 조수석 캐비닛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서 건네며 말했다.“일단 좀 닦아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요.”“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받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더니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닦았다.“콜록콜록...”소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진세연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긴요.”여자가 수건을 받아 가다니 조수석에 던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한쪽 팔을 차창에 기대고는 말했다.“어차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뭐.”빗소리가 너무 커서 소원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해 다시 한번 물었다.“진세연 씨, 뭐라고 하셨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별거
이것이 오히려 소원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쪽을 주시하며 속도를 확인했다. 속도가 70대까지 내려가자 기회를 잡은 소원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다 기회를 잡고 운전기사가 방심한 틈을 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차 문을 열었다.탈칵.그렇게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었다.“어, 저 빌어먹을...”화들짝 놀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원의 귀로 들어왔다가 차와 함께 사라졌다.쿵.소원이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번 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빠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소원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칼로 팔을 자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앞으로 질주하던 차는 이내 방향을 틀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큰비로 시야가 가려진 덕분에 소원은 옆에 있던 풀밭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바닥이 물컹해 발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이내 운전기사가 뒤따라왔다. 건장한 남자였기에 달리는 게 소원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걸음을 멈추더니 몽둥이 하나를 줍고 풀숲에 숨어 소리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자박자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와. 내가 찾아내면 다리부터 분질러 버릴 테니까. 헤헤. 그러면 좋은 값에 팔 수가 없잖아. 그러면 장기를 뜯어내 팔고 사지를 잘라서 인형으로 만드는 수밖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방민아, 육연주, 그리고 서씨 가문...’“아가씨, 말 들어. 다리라도 온전하면 아가씨도 덜 아프지 않겠어?”“숨어도 소용없어. 여기 내 친구들 많아. 어딜 가든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거야.”소원은 마음이 강한 편이었기에 상대가 어떻게 말하든 그 자리에 숨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2미터도 남지 않은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나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