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그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윤혜인이 자지 않으면 자신도 자지 않겠다는 이준혁의 뜻 말이다.그녀는 짐짓 모른 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30분의 시간이 흘렀다.고개를 든 윤혜인은 이준혁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발견했다. 오래 앉아있다 보니 힘든 모양이었다.그 모습을 본 윤혜인은 또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때때로 그녀는 너무 쉽게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이 불만스러웠다.그녀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내가 침대에 오르면 잘 거예요?”이준혁이 그 매력적인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응. 너랑 같이 잘래.”곧 윤혜인은 일어나 벽장에서 이불을 안고 와서 깔았다.“우선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 한 사람이 한 이불 덮고 또 절대 이 선 넘으면 안 돼요.”이준혁은 조금 후회했다.‘간호사한테 이불도 가져가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깜빡 잊었네.’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병원에서 나온 소원은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다름 아닌 위암이라고 했다.이미 위암 3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수술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며 말이다.그녀는 검사 보고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위에 적힌 수치들은 소원의 위가 만신창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문제가 아니었다.손에 쥐고 있는 또 다른 혈액 검사 보고서에는 그녀가 임신했다고 나와 있다!그것도 이미 두 달 차에 접어들었다고 한다.그동안 육경한과 관계를 맺으며 여러 번 출혈을 경험했기에 그녀는 줄곧 자신이 정상적으로 생리를 한다고 생각했다.때문에 임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육경한은 별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매번 스스로 사후피임약을 챙겨 먹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임신을 하게 될 줄이야...의사의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가능한 한 빨리 중절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위암 수술을 진행할 수 있어요.”소
육경한의 개인 크루즈 선 마리나 1호는 빈해항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도심에서 차로 3시간 떨어져 있었다.소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가 다 되어있었다.아침에는 검진을 받아야 했기에 아침을 먹지 않았고 그다음에는 제품에 문제가 생겨 지금껏 바삐 돌아쳤기에 그녀는 점심 역시 걸렀다.그래서인지 위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정말 불에 타는 듯한 느낌 말이다.소원은 비참하게 웃었다. 이런 느낌은 연초부터 자주 있었는데 우리 신체의 기관은 위험을 감지할 때 각종 방식으로 주의를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육경한이 돌아온 관계로 그녀는 바삐 움직이며 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래서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고 만 것이다.차에서 내리자 12월 하순의 찬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코트를 여미며 몸을 가린 후 눈에 띄는 초호화 크루즈로 향했다.크루즈 선 앞에는 검은 옷의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있어 초대장이 있어야 올라갈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의 전화를 걸었고, 곧 누군가가 받았다.그녀가 급히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지금 마리나 1호에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잠시 내려와 만나도 되고 제가 올라가도 됩니다.”하지만 육경한이 이내 짜증 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은 시간 없다니까? 너랑 자고 싶지 않다고. 얼른 돌아가!”“5분, 5분이면 되요.”소원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5초도 안 돼. 난 오늘 아연이랑 함께 있을 거야.”육경한은 차갑게 거절했다.“꺼져. 내 눈앞에 띄지 말고.”“뚜뚜뚜...”전화가 끊겼다.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보아하니 그가 소원의 연락처를 차단한 모양이었다.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추운 바람 속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 서 있었다. 회사에 있는 비서가 또 전화를 걸어와 문제가 생기지 않은 협력사에서도 대량으로 반품하면 안 되겠냐 물었다고 했다.심상치 않은 조짐에 모두들 협력을 끊으려는 듯했다.소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
그래서 그는 자주 웃지 않는다. 사실 진아연 외의 다른 사람 앞에서는 거의 웃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그도 그럴 것이 사업계는 전쟁터와 같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호한 대표이지 따뜻한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육경한은 자신의 단점을 숨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직 진아연과 마주할 때만 육경한은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소원이 기억하는 그 따뜻한 육경한으로 변했다.별안간 술 냄새가 스쳐 지나가더니 ‘쫘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소원의 코트에 와인을 뿌린 것이다.곧이어 누군가 술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소원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사람은 바로 진아연이 친오빠 진찬성이었다.그녀가 그를 알아보는 이유는 이전에 본 동영상 때문이었다.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찬성이 또 입을 열었다.“내가 닦아줄게요.”이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뻗어 소원의 코트를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그가 와인을 뿌린 곳은 소원의 가슴 쪽이었다. 더불어 그 음흉한 표정은 누가 봐도 이 기회를 틈타 소원을 만지려는 것 같았다.소원은 즉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냉담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했다.“괜찮습니다. 필요 없어요.”진찬성에 대해 소원은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유명한 카사노바이며 특히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침대에서 여자를 갖고 놀다 죽게 만든 일도 있었는데 적지 않은 돈을 써서 겨우 논란을 잠재웠다고 한다.소원은 한때 육경한의 수단이 자신의 미래 처남이 될 진찬성에게 배운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그러다 그녀는 어느 한번 떠도는 동영상을 보고 진찬성이 수단이 육경한보다 훨씬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육경한은 기껏해야 흥분을 돋궈 다른 사람이 빌게 만드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하지만 진찬성은 정말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을 정도로 별별 물건을 가지고 사람의 몸을 찔러댔다.그래서 소원은 진찬성을 보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속이 안 좋아져 토하고 싶었
진찬성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소원을 자신의 밑에 깔며 그녀의 옷을 벗기려 했다.남자의 열기가 얼굴에 고스란히 전해지자 속이 안 좋아진 소원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젖 먹던 힘을 다해 그녀는 소리쳤고 마침내 진아연과 육경한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그곳에 엎드려 더러운 움직임을 하는 진찬성을 발견하자 육경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아연은 육경한의 안색을 보고 즉시 달려가 진찬성의 팔을 잡아당겼다.“오빠, 왜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어!”뒤이어 그녀는 경비원에게 분분했다.“아직도 오빠 안 잡고 뭐 해요? 뭐가 그리 급해서... 대체 어떤 여자길래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여기서 오빠랑 이러는 건지!”진아연의 한 마디로 뭇 여자들의 시선이 전부 아래쪽에 있는 여자에게 쏠리게 되었다.그리고 잇달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찬성이 그쪽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들은 여전히 자신과 같은 여성인 소원이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비난했다.진찬성은 경비원들에게 밀려난 후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그는 천천히 바지 벨트를 정리하고 진아연의 말에 대답했다.“아, 미안해. 조금 급해서.”그 말이 암시하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원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육경한은 지저분해진 소원의 옷과 가슴에 있는 수표를 보고 순간 분노에 차 눈시울이 붉어졌다.곧 그가 경비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사람들 먼저 다른 데로 데리고 가.”경비원은 즉시 사람들을 무대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는 미리 초대한 연예인 두 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은 쉽게 그곳으로 집중되었다.주변이 깨끗해진 후, 육경한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너 대체 얼마나 더 천하게 굴 수 있는거야?!”그 말에 소원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뺨에 맞은 것보다 그 말이 더욱 아픈 것 같았다.‘참 재밌네.’악명 높은 진찬성을 두고 육경한은 오히려 소원이 천하다고 생각한다!하
‘며칠 후에 반드시 저년을 먹고 말겠어.’그러고 나서 진찬성은 비틀거리며 갑판으로 가 다시 한 여자를 끌어당겼다. 오늘의 욕구는 해소해야 할 테니 말이다.육경한은 소원을 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분부했다.“끌어가!”두 명의 경비원이 즉시 손을 쓰자 소원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대표님, 5분, 제게 5분만 주시면 됩니다.”하지만 육경한은 발로 그녀를 걷어차며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분노하여 말했다.“아직도 끌어 안 가고 뭐 해!”이내 두 명이 경비원이 소원의 팔을 잡고 그녀를 내던지려고 했다.그때, 진아연이 갑자기 유혹적인 말투로 말했다.“소원 씨, 부탁할 일이 있으면 성의를 보여야죠.”진아연은 소원의 아래에 있는 갑판 바닥을 보며 눈짓했다.순간 소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지만 더는 생각할 여지가 많지 않았다.“풀썩.”소원은 무릎을 꿇었다.그렇게 육경한은 소원의 부모를 제외하고 그녀가 무릎을 꿇게 한 첫 사람이 되었다.몰려오는 굴욕감에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한참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그녀는 육경한에게 부탁했다.“대표님, 부탁드립니다. 한이 그룹을 놔주세요.”육경한은 고개를 돌려 예전에 빛을 발하던 이 소씨 집안 큰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자 육경한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사실 그는 이런 모습을 보면 자신의 마음이 퍽 풀릴 줄 알았다.소원이 자신을 배신하고 속였으니 그는 분명히 그녀를 매우 증오해야 했다.그러나 어쩐지 칼에 베인 듯 마음이 아파왔다.그 두 무릎에 무슨 독이라도 묻었는지 육경한은 볼 때마다 눈이 시큰거렸다.‘왜? 도대체 왜 이러지? 틀림없이 내가 아직 독하게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걸거야. 마음이 아픈 것도 단지 이 여자가 내 앞에서 불쌍한 척 연기를 하기 때문이고. 더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이 느낌들을 전부 버려야 해.’생각을 끝마치자 육경한의 안색이 순간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칠흑같
“소원!”육경한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걸어갔다.그는 소원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한 손으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너 미쳤어? 내가 나가라고 했잖아! 당장 나가! 알겠어?!”그의 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고, 소원은 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그러나 팔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어릴 때 육경한이라는 악마를 건드린 것이 한탄스러웠다.그 결과 부모님과 소씨 집안 전체에 큰 재앙을 가져오게 됐으니 말이다.소원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지만,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여자의 무언의 울음은 날카로운 칼처럼 육경한의 심장을 찔렀다.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진아연의 마음에는 질투의 불길이 점점 치솟았다.그녀는 육경한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화를 내면 낼수록 그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신경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었다.한이 그룹과 합병하려는 계획은 이미 다 말이 끝난 일이었다.육경한도 그녀에게 한이 그룹과 합병한 뒤에는 소원과 얽히지 않고 진아연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3년의 약속이라는 것도 본래 소원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녀가 방심하게 만들고 육경한과 지낼 시간이 많이 남았다 착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이 모든 것은 진아연의 제안이었다. 희망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산산조각내어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통쾌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육경한이 주저하고 있다!‘역시 이 빌어먹을 여자가 아직 경한 씨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어... 반드시 더 큰 한방이 필요해.’진아연은 독기 가득한 눈빛을 감추고 육경한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경한 씨,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오늘 제 생일이잖아요. 저 불쾌해지고 싶지 않아요...”곧 육경한의 분노는 마치 진아연의의 위로 한 마디에 잠잠해진 듯했다.그는 갑자기 손을 놓았고, 소원은 간신히 갑판의 난간에 기대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그
육경한은 명령했다.“아연이 안으로 데려가서 쉬게 해.”진아연은 육경한의 팔을 꽉 잡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글썽였다.“경한 씨...”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달래듯 말했다.“말 들어, 너 억울하게 두지는 않을 거야.”진아연은 고개를 숙이고 슬며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소원, 이 정도면 너 지옥으로 보내기 충분하겠지?!’육경한은 싸늘한 눈빛을 하고 돌아섰다. 그의 반짝이는 구두는 매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소원의 심장을 짓밟는 듯했다. 그는 소원 앞에 멈춰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소원, 너한테 기회를 줄 테니까 아연이를 밀어 떨어뜨린 이유를 설명해봐.”그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지만, 소원은 이것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무서운 평온함에 여러 번 시달렸고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떨렸다. 이 고요함이 소원은 너무나도 두려웠다!소원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떨며 말했다.“나 안 밀었어...”육경한이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비록 온몸이 젖어있었지만 전혀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옆 사람에게서 불붙은 시가를 받아 들고 느긋하게 난간에 기대어 가볍게 한 모금을 빨았다.“그럼 아연이가 스스로 떨어졌다는 말이야?”“아연 씨가 일부러 내 손을 잡고...”말을 다 하기도 전에 육경한의 시가가 소원의 손가락 옆으로 떨어졌다.붉은 불꽃에 그녀는 하마터면 손등을 델 뻔했다.육경한은 반짝이는 구두 끝으로 소원의 턱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말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아연이가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스스로 떨어졌다는 거지?”턱이 단단한 구두에 눌려 아팠다.소원은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우뚝 선 남자를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정말 안 밀었다니까...”그러자 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 키가 190cm쯤 되어서 그런지 그는 작은 벌레를 보듯 소원을 내려다보았다.“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거야?”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경호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말해, 뭘 봤나?”경호원은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대
‘윙’하는 소리만 머릿속에 울려 퍼질 뿐, 소원은 거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얼굴에는 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그녀는 무뚝뚝하게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매우 뜨거웠다!사랑했던 사람에게 뺨을 맞는 것이 이렇게 아픈 것이라니!육경한의 손은 여전히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왜 소원의 뺨을 때렸는데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보다 더 아픈지!왜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역겨워한다는 말을 들은 후에 소원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지!자신을 배신한 위선적인 여자가 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육경한은 그 일을 끝내고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무정하고 잔인한 배신이었다.그는 이미 그녀에게 두 번 속았다. 그러니 결코 또다시 소원에게 속을 수 없었다!‘소원이한테 조금의 연민도 품어서는 안 돼!’여러 번의 고심 끝에 육경한은 침착해졌다. 곧 그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을게. 아연이를 민 것에 대해 인정해?”“왜,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라도 보내게?”육경한은 냉혹하게 말했다.“알긴 아네?”고개를 숙인 채, 소원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렇다. 이것이 바로 그녀와 육경한 사이의 상황이다. 그들 사이에는 오직 끝없는 증오만이 존재했다!그녀는 턱을 들고 육경한의 핏기 어린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육경한, 당신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돼?”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경멸하는 듯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소원은 다시 자신감 넘치는 재벌집 딸 신분으로 돌아간 듯했다.“좋아! 네가 좀 이따도 이렇게 자부할 수 있기를 바랄게!”육경한의 눈 속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온기도 전부 사라졌고 말투는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주변 사람에게 몇 마디 속삭였다. 곧 옆에서 경호원 두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