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움직인 영숙이 이렇게 말했다.“그러면 네가 알아서 골라. 옷은 저쪽에 있어.”소원이 그쪽으로 걸어가 한참 찾았지만 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억지로 셔츠에 짧은 치마를 고르긴 했지만 여전히 유혹하려는 의도가 뻔한 옷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매혹적이면서도 그렇게 살이 드러나지는 않은 옷이었다.영숙이 옆에서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싹수는 괜찮네.”같은 옷이지만 소원이 입으면 왠지 모르게 더 매혹적이었다. 영숙처럼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도 소원이 예쁘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비록 사장님들은 나이가 어린 아가씨를 좋아했지만 소원은 분위기가 아우라가 독보적이었다. 여우를 닮은 눈은 반달처럼 은은하면서도 깊었는데 한눈에 봐도 돈을 잘 벌어다 줄 상이었다.소원은 영숙이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여기 그냥 술만 마셔주면 되는 데 맞죠?”영숙이 잔뜩 긴장한 소원을 보며 웃었다.“당연하지. 우리 여기 건전한 영업장이야. 사장님들과 얘기 나누면서 술 마셔주고 기분 달래주면 돼.”“네, 알겠어요.”소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말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신뢰 관계가 쌓이지 않은 터라 무슨 일이 터지면 소원이 알아서 해야 했다.영숙이 한마디 덧붙였다.“이제 예명도 지어야지. 전에 다니던 직원이 체리였는데 퇴사했어. 아니면 그냥 체리할래?”“네, 언니.”소원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이제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었다. 이곳에 왔으니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소원도 알고 있었다.영숙은 그런 소원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 오늘 소원을 찜한 사람은 그야말로 변태였다. 이렇게 가녀린 몸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얌전하게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영숙이 귀띔했다.“절대 사장님들 화나게 하지 마. 정말 화나면 나도 너 못 도와줘.”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언니.”영숙은 소원이 알았다고 하자 더는 아무 말도 하
양옆에는 아가씨 한 명씩 서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술 먹는 방식이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소원은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 앞에 앉은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늙은 남자는 소원을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더니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를 밀어내며 헤벌쭉 웃었다.“오랜만이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한 소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에 소원을 추행했던 조세진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보낸 사람이 조세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세진은 소원을 뼈저리게 미워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역시 방민아는 아는 게 많았고 수단도 어마어마했다.“거기 서서 뭐 해? 오지 않고.”조세진이 재촉했다.소원이 앞으로 걸어가자 조세진은 소원이 앞에 단 명찰을 보고는 비웃었다.“아, 체리? 이름 하나는 잘 어울리네.”체리처럼 매혹적인 소원을 조세진은 진작에 노리고 있었다. 전에 소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방민아가 준 선물이 소원일 줄은 몰랐던 조세진은 쾌재를 부르며 소파에 드러눕더니 손가락으로 옆에서 술 시중을 들던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보고 똑같이 시중들면 돼.”소원은 역겨움을 꾹꾹 참아내며 거절했다.“같이 술 먹는 건 되는데요, 이렇게 먹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요.”휙.조세진이 술잔을 뿌리자 소원이 피했지만 술이 그대로 소원의 얼굴을 적셨다.“네까짓 게 뭐라고 거절이야? 그 명찰 달았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시중을 들어야지.”조세진이 불같이 화를 내더니 옆에 있는 두 여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얘들처럼 무릎 꿇으라고. 알아들어?”“아니요.”소원이 얼굴에 쏟아진 샴페인을 닦아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퍽.조세진이 소원을 발로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그 땅끝에 있는 마을에서 너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너는 지금쯤 꿈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겠지?”소원은 입에서 단내가 느껴졌지만 이 말을 듣자마자 매서운 눈
조세진은 소원의 턱을 꽉 잡더니 테이블에 내팽개치며 이렇게 말했다.“젠장. 개가 뭔지 몰라? 내가 가르쳐줘?”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조세진이 언성을 높였다.“꺼져.”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영숙에게 알려줬다.영숙이 이를 듣더니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얼른 불을 붙여줬다. 영숙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이렇게 말했다.“고작 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러면 괴롭힘을 받아도 싸지.”순간 두 아가씨는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영숙이 원칙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만 잘 들으면 위험이 닥쳐도 직접 나서서 도와줬지만 반항하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혼쭐을 내줬다.선미가 제일 좋은 시범 케이스였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남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영숙이 그렇게 말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고 육 대표에게 들러붙었다가 육 대표에게 폭행을 당했을뿐더러 업소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영숙은 그 손실을 다 선미에게 돌렸고 선미도 미친 듯이 일해서 갚았지만 아직도 몇억은 더 갚아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스폰해줄 사람만 잘 만나도 금방 갚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요새 예쁜 아가씨도 많고 경쟁도 심해 선미처럼 얼굴을 뜯어고친 여자는 잘 먹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뒤로 영숙은 방 대표와 붙어먹었지만 방 대표는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여자 사람 친구도 많았다. 선미가 그쪽으로 기술이 좋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절대 방 대표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돈을 들여 소원의 배상을 대신 해주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다들 영숙의 말이라면 어명처럼 받들었다. 영숙은 이 바닥에 오래 있어서 눈치를 잘 살폈고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미리 짚어주기도 했다.아가씨들은 영숙이 고개를
두 아가씨는 혀를 삐쭉 내밀더니 더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숙은 담배를 절반쯤 태우고는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채워야 할 금액은 채우고 떠드는 거야?”두 아가씨는 영숙의 말에 입을 앙다물며 얌전하게 말했다.“이만 내려가 볼게요.”영숙은 대꾸하지 않았다. 두 아가씨가 물러가고 영숙은 조세진이 있는 룸 앞으로 다가가 서서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속이 탔는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데이고 말았다. 사실 영숙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 듣던 영숙은 안에서 더 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조세진에게 내동댕이쳐진 소원은 갈비가 부서진 것처럼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세진의 더러운 입술이 곧 소원에게 닿으려는데 소원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애초에 왜 육경한에게 당했는지 잊은 거 아니죠?”조세진이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무슨 말이야?”소원이 이 틈을 타서 한숨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간 거 육경한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조세진은 육경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성욕마저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소원이 이렇게 말했다.“육경한이 조 대표님을 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보낸 건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조 대표님을 내쫓는 것으로 내게 잘 보이려고 한 거죠.”조세진은 그때 수영장에서 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라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다 네년 때문이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일은 없었어.”조세진이 소원의 옷을 벗기며 계속 중얼거렸다.“이제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가 있잖아. 이제 더는 너를 도와줄 리 없으니까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촤락.소원이 챙겨입었던 유니폼이 조세진에 의해 볼품없이 찢어지고 말았다. 소원은 얼른 손으로 찢어진 천 쪼가리를 움켜쥐고 조세진에게 따귀를 날렸다.조세진은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소원의 머리
소원이 이렇게 되묻자 조세진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오만하기 그지없는 방민아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잘 보이려고 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 방민아가 갑자기 이런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게 이상하긴 했다.조세진은 소원의 말에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방민아가 함정을 판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육경한이 물으면 방민아는 얼마든지 발을 빼고 조세진에게 덮어씌울 수 있었다.‘젠장. 방민아 역시 듣던 대로 무서운 여자네.’조세진은 속으로 이렇게 궁시렁거렸지만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지금 이런 말 하는 거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지어낸 걸 수도 있잖아.”소원이 침착하게 말했다.“말은 많이 한다고 효과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해명한다고 해서 다 먹히는 것도 아니고요. 본인이 직접 그 말이 맞는지 마음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죠.”소원은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해 해명하면 조세진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의문만 잔뜩 던져 알아서 생각하게 했다.소원의 말에 거의 넘어간 조세진이 한마디 덧붙였다.“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방민아가 여기로 보냈다고 직접 육경한에게 말하지 않는 거야?”“방민아가 아이로 협박한 거지?”조세진이 이렇게 추측했다. 생긴 건 우락부락하고 다소 멍청해 보였지만 소원은 한 번도 조세진을 바보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서울에 발을 붙이고 이름을 날릴 정도면 절대 바보일 리 없었다.“육경한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지금 당장 전화해서 알려. 어떻게 처리하는지 좀 보게.”조세진이 소원에게 전화를 걸라며 몰아세우기 시작했지만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제안 바로 거절해도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여기 남아있는 것뿐이에요.”방민아가 무서워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소원이 방민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방민아의 경계심을 풀면서 육경한의 경계심도 같이 풀려는 것이었다.이번에는 절대 저번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유진의 양육권을
조세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 바닥에 오래 있은 사람 중에 능구렁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 마음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했다.“너나 방민아나 다 똑같이 나쁜 년이야. 상대가 죽기를 누구보다 바라잖아.”조세진이 콧방귀를 뀌더니 헤벌쭉 웃었다.“둘 다 나를 샌드백으로 쓰겠다는 거잖아.”속셈을 들킨 소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못 믿겠으면 방법 하나 알려줄까요? 이 방법대로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조세진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무슨 방법?”“지금 방민아에게 전화해서 내가 죽었다고 해봐요. 어떤 반응인지 보면 바로 알지 않겠어요?”조세진은 소원의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속이 텅 빈 예쁜 꽃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까지 총명했다. 조세진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방민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아가 전화를 받았다.“삼촌,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평소 방민아는 조세진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대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소원의 처참한 상황을 들으려고 조세진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조세진은 일부러 당황한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어떡해요...”방민아는 조세진의 말투에 일단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이 조세진에게 당해 반병신이 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친근하게 말했다.“삼촌, 왜 그래요?”“죽었어요. 죽었어. 내가 소원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죽어버렸어요.”조세진의 연기는 꽤 자연스러웠다. 버벅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정말 진짜 같았다.“...”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조세진은 방민아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의심하기 시작했다.“이제 어떡하죠? 민아 씨... 아...”방민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삼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죽은 거예요?”방민아는 소원이 병신이 됐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도 죽일 정도까지 가지고 놀았을 줄은 몰랐다. 예상밖의 일이라 방민아는 일단 대충 관심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조세진이 대답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조세진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나 골로 보내려고 작정했어요?”방민아가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세진 삼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세진 삼촌을 골로 보내요? 난 그냥 KB 클럽에 선물을 보낸다고 했을 뿐이지 소원 씨가 거기서 출근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소원 씨를 그쪽으로 보내요?”아니나 다를까 방민아는 계획대로 발을 뺐다. 애초에 조세진에게 말할 때도 소원이라는 말은 일절 없었고 선물을 준비했다고만 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걸 대비해 여지를 많이 남겨둔 덕분에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조세진은 이제 소원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민아는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고 선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은 악하기 그지없었다.“방민아 씨,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나 말해봐요. 이 여자 전에 민아 씨 약혼자랑 붙어먹었던 그 여자 아닌가요? 뭐 시체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해야죠. 육경한이 나 찾아오거나 그러진 않겠죠?”“세진 삼촌, 삼촌도 그 여자가 과거라는 거 아네요. 적어도 지금은 경한 씨도 내게 그 여자를 꺼낸 적이 없어요. 해결하고 싶으면 나랑 얘기하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요.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듣기만 해도 너무 끔찍하네요.”방민아는 쓸데없는 말만 이어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다만 방민아의 말투에서 발을 빼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 혹은 경찰이 조사한다 해도 방민아는 농담인 줄 알았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긴 방민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었고 조세진 혼자서 벌인 일이라 방민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조세진은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이 바닥에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에게 호되게 데일 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조세진의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업보였다.조세진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방민아와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손 떼겠다는 말로
방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조세진이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움직여요. 움직여요. 방금 움직였어요. 안 죽은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조세진은 방민아에게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방민아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명줄이 어찌나 질긴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며 방민아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다만 죽지 않았다 해도 조세진 손에 들어가면 반병신이 되어야 나올 수 있었다. 방민아는 조세진이 얼마나 추잡스러운 인간인지 잘 알았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소원의 몸이 망가져야 미련도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방민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원이 조세진의 손에 놀아난 걸 알면 육경한도 소원을 역겨워하며 더는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조세진이 별 볼 일 없긴 했지만 추잡스럽게 논다는 소문은 이 바닥에 자자했다. 방민아는 이제 유진도 더는 거슬리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이게 다 너희 엄마 덕분이야.”‘명줄이 긴 덕분이지.’...한편, 조세진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애초부터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예정이었다니, 정말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조세진도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방민아가 이렇게 나온 이상 조세진도 똑같이 갚아줄 생각이었다.소원은 아무 말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조세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이겼음을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을 바라보는 조세진의 눈에는 이제 그 어떤 욕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조세진은 이제 정신을 차렸다. 방민아가 이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는 건 육경한의 마음속에 소원이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런 소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다시 육경한의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 남자라면 자기가 가지긴 싫어도 남에게 주기는 더 싫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