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옆에는 아가씨 한 명씩 서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술 먹는 방식이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소원은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 앞에 앉은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늙은 남자는 소원을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더니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를 밀어내며 헤벌쭉 웃었다.“오랜만이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한 소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에 소원을 추행했던 조세진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보낸 사람이 조세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세진은 소원을 뼈저리게 미워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역시 방민아는 아는 게 많았고 수단도 어마어마했다.“거기 서서 뭐 해? 오지 않고.”조세진이 재촉했다.소원이 앞으로 걸어가자 조세진은 소원이 앞에 단 명찰을 보고는 비웃었다.“아, 체리? 이름 하나는 잘 어울리네.”체리처럼 매혹적인 소원을 조세진은 진작에 노리고 있었다. 전에 소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방민아가 준 선물이 소원일 줄은 몰랐던 조세진은 쾌재를 부르며 소파에 드러눕더니 손가락으로 옆에서 술 시중을 들던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보고 똑같이 시중들면 돼.”소원은 역겨움을 꾹꾹 참아내며 거절했다.“같이 술 먹는 건 되는데요, 이렇게 먹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요.”휙.조세진이 술잔을 뿌리자 소원이 피했지만 술이 그대로 소원의 얼굴을 적셨다.“네까짓 게 뭐라고 거절이야? 그 명찰 달았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시중을 들어야지.”조세진이 불같이 화를 내더니 옆에 있는 두 여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얘들처럼 무릎 꿇으라고. 알아들어?”“아니요.”소원이 얼굴에 쏟아진 샴페인을 닦아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퍽.조세진이 소원을 발로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그 땅끝에 있는 마을에서 너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너는 지금쯤 꿈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겠지?”소원은 입에서 단내가 느껴졌지만 이 말을 듣자마자 매서운 눈
조세진은 소원의 턱을 꽉 잡더니 테이블에 내팽개치며 이렇게 말했다.“젠장. 개가 뭔지 몰라? 내가 가르쳐줘?”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조세진이 언성을 높였다.“꺼져.”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영숙에게 알려줬다.영숙이 이를 듣더니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얼른 불을 붙여줬다. 영숙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이렇게 말했다.“고작 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러면 괴롭힘을 받아도 싸지.”순간 두 아가씨는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영숙이 원칙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만 잘 들으면 위험이 닥쳐도 직접 나서서 도와줬지만 반항하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혼쭐을 내줬다.선미가 제일 좋은 시범 케이스였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남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영숙이 그렇게 말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고 육 대표에게 들러붙었다가 육 대표에게 폭행을 당했을뿐더러 업소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영숙은 그 손실을 다 선미에게 돌렸고 선미도 미친 듯이 일해서 갚았지만 아직도 몇억은 더 갚아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스폰해줄 사람만 잘 만나도 금방 갚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요새 예쁜 아가씨도 많고 경쟁도 심해 선미처럼 얼굴을 뜯어고친 여자는 잘 먹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뒤로 영숙은 방 대표와 붙어먹었지만 방 대표는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여자 사람 친구도 많았다. 선미가 그쪽으로 기술이 좋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절대 방 대표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돈을 들여 소원의 배상을 대신 해주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다들 영숙의 말이라면 어명처럼 받들었다. 영숙은 이 바닥에 오래 있어서 눈치를 잘 살폈고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미리 짚어주기도 했다.아가씨들은 영숙이 고개를
두 아가씨는 혀를 삐쭉 내밀더니 더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숙은 담배를 절반쯤 태우고는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채워야 할 금액은 채우고 떠드는 거야?”두 아가씨는 영숙의 말에 입을 앙다물며 얌전하게 말했다.“이만 내려가 볼게요.”영숙은 대꾸하지 않았다. 두 아가씨가 물러가고 영숙은 조세진이 있는 룸 앞으로 다가가 서서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속이 탔는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데이고 말았다. 사실 영숙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 듣던 영숙은 안에서 더 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조세진에게 내동댕이쳐진 소원은 갈비가 부서진 것처럼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세진의 더러운 입술이 곧 소원에게 닿으려는데 소원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애초에 왜 육경한에게 당했는지 잊은 거 아니죠?”조세진이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무슨 말이야?”소원이 이 틈을 타서 한숨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간 거 육경한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조세진은 육경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성욕마저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소원이 이렇게 말했다.“육경한이 조 대표님을 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보낸 건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조 대표님을 내쫓는 것으로 내게 잘 보이려고 한 거죠.”조세진은 그때 수영장에서 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라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다 네년 때문이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일은 없었어.”조세진이 소원의 옷을 벗기며 계속 중얼거렸다.“이제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가 있잖아. 이제 더는 너를 도와줄 리 없으니까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촤락.소원이 챙겨입었던 유니폼이 조세진에 의해 볼품없이 찢어지고 말았다. 소원은 얼른 손으로 찢어진 천 쪼가리를 움켜쥐고 조세진에게 따귀를 날렸다.조세진은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소원의 머리
소원이 이렇게 되묻자 조세진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오만하기 그지없는 방민아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잘 보이려고 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 방민아가 갑자기 이런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게 이상하긴 했다.조세진은 소원의 말에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방민아가 함정을 판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육경한이 물으면 방민아는 얼마든지 발을 빼고 조세진에게 덮어씌울 수 있었다.‘젠장. 방민아 역시 듣던 대로 무서운 여자네.’조세진은 속으로 이렇게 궁시렁거렸지만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지금 이런 말 하는 거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지어낸 걸 수도 있잖아.”소원이 침착하게 말했다.“말은 많이 한다고 효과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해명한다고 해서 다 먹히는 것도 아니고요. 본인이 직접 그 말이 맞는지 마음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죠.”소원은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해 해명하면 조세진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의문만 잔뜩 던져 알아서 생각하게 했다.소원의 말에 거의 넘어간 조세진이 한마디 덧붙였다.“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방민아가 여기로 보냈다고 직접 육경한에게 말하지 않는 거야?”“방민아가 아이로 협박한 거지?”조세진이 이렇게 추측했다. 생긴 건 우락부락하고 다소 멍청해 보였지만 소원은 한 번도 조세진을 바보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서울에 발을 붙이고 이름을 날릴 정도면 절대 바보일 리 없었다.“육경한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지금 당장 전화해서 알려. 어떻게 처리하는지 좀 보게.”조세진이 소원에게 전화를 걸라며 몰아세우기 시작했지만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제안 바로 거절해도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여기 남아있는 것뿐이에요.”방민아가 무서워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소원이 방민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방민아의 경계심을 풀면서 육경한의 경계심도 같이 풀려는 것이었다.이번에는 절대 저번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유진의 양육권을
조세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 바닥에 오래 있은 사람 중에 능구렁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 마음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했다.“너나 방민아나 다 똑같이 나쁜 년이야. 상대가 죽기를 누구보다 바라잖아.”조세진이 콧방귀를 뀌더니 헤벌쭉 웃었다.“둘 다 나를 샌드백으로 쓰겠다는 거잖아.”속셈을 들킨 소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못 믿겠으면 방법 하나 알려줄까요? 이 방법대로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조세진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무슨 방법?”“지금 방민아에게 전화해서 내가 죽었다고 해봐요. 어떤 반응인지 보면 바로 알지 않겠어요?”조세진은 소원의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속이 텅 빈 예쁜 꽃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까지 총명했다. 조세진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방민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아가 전화를 받았다.“삼촌,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평소 방민아는 조세진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대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소원의 처참한 상황을 들으려고 조세진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조세진은 일부러 당황한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어떡해요...”방민아는 조세진의 말투에 일단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이 조세진에게 당해 반병신이 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친근하게 말했다.“삼촌, 왜 그래요?”“죽었어요. 죽었어. 내가 소원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죽어버렸어요.”조세진의 연기는 꽤 자연스러웠다. 버벅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정말 진짜 같았다.“...”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조세진은 방민아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의심하기 시작했다.“이제 어떡하죠? 민아 씨... 아...”방민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삼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죽은 거예요?”방민아는 소원이 병신이 됐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도 죽일 정도까지 가지고 놀았을 줄은 몰랐다. 예상밖의 일이라 방민아는 일단 대충 관심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조세진이 대답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조세진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나 골로 보내려고 작정했어요?”방민아가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세진 삼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세진 삼촌을 골로 보내요? 난 그냥 KB 클럽에 선물을 보낸다고 했을 뿐이지 소원 씨가 거기서 출근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소원 씨를 그쪽으로 보내요?”아니나 다를까 방민아는 계획대로 발을 뺐다. 애초에 조세진에게 말할 때도 소원이라는 말은 일절 없었고 선물을 준비했다고만 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걸 대비해 여지를 많이 남겨둔 덕분에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조세진은 이제 소원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민아는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고 선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은 악하기 그지없었다.“방민아 씨,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나 말해봐요. 이 여자 전에 민아 씨 약혼자랑 붙어먹었던 그 여자 아닌가요? 뭐 시체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해야죠. 육경한이 나 찾아오거나 그러진 않겠죠?”“세진 삼촌, 삼촌도 그 여자가 과거라는 거 아네요. 적어도 지금은 경한 씨도 내게 그 여자를 꺼낸 적이 없어요. 해결하고 싶으면 나랑 얘기하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요.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듣기만 해도 너무 끔찍하네요.”방민아는 쓸데없는 말만 이어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다만 방민아의 말투에서 발을 빼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 혹은 경찰이 조사한다 해도 방민아는 농담인 줄 알았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긴 방민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었고 조세진 혼자서 벌인 일이라 방민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조세진은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이 바닥에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에게 호되게 데일 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조세진의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업보였다.조세진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방민아와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손 떼겠다는 말로
방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조세진이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움직여요. 움직여요. 방금 움직였어요. 안 죽은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조세진은 방민아에게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방민아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명줄이 어찌나 질긴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며 방민아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다만 죽지 않았다 해도 조세진 손에 들어가면 반병신이 되어야 나올 수 있었다. 방민아는 조세진이 얼마나 추잡스러운 인간인지 잘 알았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소원의 몸이 망가져야 미련도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방민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원이 조세진의 손에 놀아난 걸 알면 육경한도 소원을 역겨워하며 더는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조세진이 별 볼 일 없긴 했지만 추잡스럽게 논다는 소문은 이 바닥에 자자했다. 방민아는 이제 유진도 더는 거슬리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이게 다 너희 엄마 덕분이야.”‘명줄이 긴 덕분이지.’...한편, 조세진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애초부터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예정이었다니, 정말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조세진도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방민아가 이렇게 나온 이상 조세진도 똑같이 갚아줄 생각이었다.소원은 아무 말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조세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이겼음을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을 바라보는 조세진의 눈에는 이제 그 어떤 욕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조세진은 이제 정신을 차렸다. 방민아가 이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는 건 육경한의 마음속에 소원이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런 소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다시 육경한의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 남자라면 자기가 가지긴 싫어도 남에게 주기는 더 싫
소원이 말했다.“조 대표님 방민아 씨 덕분에 밥 벌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조 대표님 방씨 가문 방민기 대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 빌어먹을 년이 독심술이라도 쓰나? 어떻게 다 알지?’조세진은 얼굴을 굳히더니 소원이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소원은 조세진이 어떻게 나오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조 대표님 지금 방씨 가문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요? 방민기 대표가 여러 번 실수하는 바람에 방씨 가문에 악영향을 끼쳐서 이사회도 방민기 대표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아요. 오히려 방민아 씨가 착하고 대범한 이미지로 일을 척척 해결하며 주주들의 환심을 사고 있죠.”조세진도 능구렁이라 소원의 말에 숨겨진 뜻을 바로 알아챘다. 회사에서 입지가 좋지 않은 방민기는 방민아보다 실권이 없기에 조세진이 라인을 잘못 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세진은 소원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 소원네 가문도 육경한과 엮이면서 파산했지만 전에는 꽤 이름있는 실업가였다.소원도 어찌 보면 참 불쌍했다. 원수나 다름없는 육경한의 아들을 낳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조세진은 당연히 육경한이 어떻게 소원을 핍박했으며, 이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는지 몰랐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뒤에 숨은 깊은 뜻을 안다면 육경한에게 소원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테고 소원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결국 얻어낸 결론이라면 소원이 머리도 좋으면서 수단도 있다는 것이었다.조세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이간질하지 마. 우리나라는 아직 가부장적인 나라야. 아들이 있는 한 절대 가업을 딸에게 물려줄 리가 없어. 방씨 가문에 산업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다 방민아에게 물려주겠어? 육경한 손에 들어갈 게 뻔한데?”소원이 말했다.“그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조 대표님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르네요. 내가 바로 가업을 물려받은 제일 전형적인 케이스잖아요. 그리고 HT 그룹의 임 대표님도 딸에게 회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