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이 말했다.“조 대표님 방민아 씨 덕분에 밥 벌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조 대표님 방씨 가문 방민기 대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 빌어먹을 년이 독심술이라도 쓰나? 어떻게 다 알지?’조세진은 얼굴을 굳히더니 소원이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소원은 조세진이 어떻게 나오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조 대표님 지금 방씨 가문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요? 방민기 대표가 여러 번 실수하는 바람에 방씨 가문에 악영향을 끼쳐서 이사회도 방민기 대표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아요. 오히려 방민아 씨가 착하고 대범한 이미지로 일을 척척 해결하며 주주들의 환심을 사고 있죠.”조세진도 능구렁이라 소원의 말에 숨겨진 뜻을 바로 알아챘다. 회사에서 입지가 좋지 않은 방민기는 방민아보다 실권이 없기에 조세진이 라인을 잘못 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세진은 소원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 소원네 가문도 육경한과 엮이면서 파산했지만 전에는 꽤 이름있는 실업가였다.소원도 어찌 보면 참 불쌍했다. 원수나 다름없는 육경한의 아들을 낳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조세진은 당연히 육경한이 어떻게 소원을 핍박했으며, 이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는지 몰랐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뒤에 숨은 깊은 뜻을 안다면 육경한에게 소원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테고 소원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결국 얻어낸 결론이라면 소원이 머리도 좋으면서 수단도 있다는 것이었다.조세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이간질하지 마. 우리나라는 아직 가부장적인 나라야. 아들이 있는 한 절대 가업을 딸에게 물려줄 리가 없어. 방씨 가문에 산업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다 방민아에게 물려주겠어? 육경한 손에 들어갈 게 뻔한데?”소원이 말했다.“그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조 대표님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르네요. 내가 바로 가업을 물려받은 제일 전형적인 케이스잖아요. 그리고 HT 그룹의 임 대표님도 딸에게 회
너무 맞는 말이라 조세진은 정말 이마라도 탁 치고 싶은 생각이었다.방민기는 정말 양아치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궁지에 몰린 사람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노루도 급하면 뒷다리를 문다는데 누군가 앙심을 품고 방민기가 전에 원수를 졌던 사람을 찾아간다면, 이익만 보장한다면 방민기를 정말 죽여버릴 수도 있다. 방민기가 죽고 없으면 방현수도 영원히 회사를 지킬 수는 없는 일이라 딸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조 대표님, 이런 생각은 해봤어요? 조 대표님이 방민기 대표 쪽 사람이라는 걸 알고 방민아 씨가 일부러 함정을 팠을 수도 있잖아요.”소원이 손으로 목을 긋는 동작을 하며 또박또박 말했다.“토사구팽인 거죠. 나도 죽이고 조 대표님도 죽이고.”조세진은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았다. 소원의 손이 조세진의 목이라도 긁은 것처럼 너무 섬뜩했다. 조세진은 이제야 소원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상황 분석이 예리할뿐더러 바로 핵심을 잡아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줄도 알았다.“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조세진의 말투에서 어느새 존경이 묻어났고 이미 소원의 지혜에 감탄하며 진심으로 소원을 우러러보고 있었다.“손을 잡는 건 어때요?”소원이 말했다.“언제까지 방씨 가문만 바라볼 수는 없잖아요. 무슨 일 있으면 방민기 대표는 조 대표님을 보호하기보다는 제일 먼저 잘라낼 거예요.”조세진도 이 말에 동의했다. 방민기와 방민아는 배다른 남매라 누구라 할 것 없이 잔꾀가 많았고 함정도 잘 팠다.방민기는 방민아를 무너트리고 싶어 하지만 그 뒤에 육경한이 있어 별수 없이 조세진을 선택해 다른 방법으로 방민아를 공격했다. 육경한과 방민아에게 소원의 행방을 흘리라고 한 것도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였다.방민기도 방민아가 소원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고 내린 결정이었고 그 결정은 정확했다. 소원은 예리한 비수라 방민아와 육경한을 괴롭히기엔 딱 맞았다.고민을 마친 조세진은 주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
그랬다. 소원이 원하는 건 바로 방민아가 유진의 새엄마가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방민아처럼 악독한 사람에 유진을 가까이할 기회가 생겨서는 안 된다. 그때가 되면 육경한이 말했던 약혼녀와의 사이가 돈독하고 안정적이라는 증언도 무효가 될 것이다.방민아는 아이를 돌보는 데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육경한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도 일종의 실책이었다.소원은 아까보다는 밝아진 눈빛으로 조세진에게 말했다.“내가 원하는 정보만 가져다주면 돈도 두둑이 받고 이 전쟁에서 발 뺄 수 있게 도와줄게요.”조세진이 말했다.“장난해?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소원처럼 집도 없고 절도 없는 여자가 그의 위기를 모면해 주고 돈까지 벌게 해준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교외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손에 넣을 수 있게 도와줄게요.”“교외?”조세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프로젝트는 수익이 보장되어 있어 손에 넣으면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프로젝트였다.“미우 그룹 프로젝트를 어떻게 손에 넣는다는 거야?”육경한이 공짜로 줄 리는 없었다. 이익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여자 하나 때문에 프로젝트를 그대로 내준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육경한은 이제 소원에게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소원이 말했다.“조 대표님, 나랑 도박 한번 해볼래요?”조세진은 소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옷은 찢어졌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정말 숨겨놓은 카드라도 있는 거 아니야?’조세진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래. 한번 해보자.”잘만 하면 신분 상승할 좋은 기회였다. 거짓말이라 해도 조세진이 손해 볼 건 없었다.조세진은 소원을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한 말 기억해. 일단은 믿어보겠지만 허튼수작 부리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소원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기다릴게요.”“용기 하나는 참 대단해. 여장군이야 뭐야.”조세진이 이렇게 비꼬았다.“아참, 아들을 육 대표한테 뺏겼지?”조세진은 웃을 때 유독 얼
소원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직 영숙이 방민아의 사람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았고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지만 뭐가 이상한지 콕 집어서 얘기하긴 어려웠다.영숙을 보자마자 소원은 영숙이 두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영숙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모습은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지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뒤에 숨겨진 그 모습이 좋은지 나쁜지는 아직 추측하기 어려웠다.다행히 조세진은 빠릿빠릿한 편이었기에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들인 아가씨들 영 마음에 안 드네. 성격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숙 매니저가 잘 좀 교육해.”“오늘 제대로 즐기지 못했나 보네요.”영숙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제가 쏘는 걸로 할게요. 조 대표님 기분을 풀어드리지 못한 건 제 잘못이죠. 다 제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노여움 푸세요. 화내면 몸 상하는데 조 대표님 몸 상하면 나 마음 아파요.”여전히 매혹적인 영숙이 조세진을 살살 달래자 조세진의 기분도 금세 풀렸다. 영숙이 기싸움에서 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숙이 밑지는 장사를 할 리가 없었다. 물장사는 원래 큰 이익이 오가는 장사였기에 영숙은 단골이 찾아올 때마다 서비스를 톡톡히 줬다. 덕분에 KB 클럽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장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하지만 영숙도 밑지는 건 없었다. 소비하러 온 사장님들이 쓴 돈으로 서비스해 주는 거라 돈도, 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주 쉽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특급 마케팅이었다.조세진의 커다란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역시 일은 숙 매니저가 잘한다니까. 숙 매니저 없이 오늘의 KB 클럽이 있을 수 있겠어?”“조 대표님 또 농담하신다. 전 그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KB 그룹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거죠.”영숙의 말에서 KB 그룹 대표에 대한 고마움이 물씬 느껴졌다.“KB 클럽이 아니었다면 저도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영숙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소원이 놀란 가슴을 쓸
영숙이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소원은 뒤에 있는 거울로 등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피가 나긴 했지만 양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아까 조세진이 그녀를 테이블에 밀치면서 생겨난 상처 같았다.소원에게는 별거 아닌 작은 상처였기에 개의치 않고 바로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앞으로 며칠은 쉬어.”영숙의 말에 소원이 다급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이 상처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마든지 출근할 수 있어요.”소원이 다급해진 건 소원이 집에서 휴식한다는 걸 방민아가 알게 되면 유진을 괴롭히며 협박할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KB 클럽은 방씨 가문과 연관된 산업이라 좋은 장소였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불법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없는지 확인해 하루라도 빨리 방씨 가문을 무너트리고 싶었다. 게다가 선미라는 여자에 대한 수수께끼도 아직 남아 있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내가 너 걱정해서 이러는 것 같아?”영숙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아직 손님 접대에 서툰 것 같으니 일단 수업 들으면서 배우라고 그러는 거야.”“수업이요?”소원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신입에 한해서 진행하는 수업이 있어. 어떻게 술을 따르는지, 어떻게 말하는지 등등 다 포함되어 있지. 내일부터 열심히 배워. 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수업 끝나고도 어리바리하면 돈 두 배로 물어내.”소원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영숙이 소원에게 쉬라고 한 건 집에서 쉬라는 게 아니라 나와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소원은 이곳에 나올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네. 언니.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할게요.”소원이 얌전하게 대답하자 영숙도 더는 흠을 잡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소원은 직원 전용 휴게실로 향했다. 개인 구역이 나누어진 휴게실이라 한곳에 모여 어색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소원은 아까 테이블에 부딪히면서 몸 여러 군데에 멍이 든 터라 일단 잠깐 누웠다가 갈 생각이었지만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소원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소원은 우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백현주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조금 전의 강렬한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은 이웃집 소녀처럼 친근해 보였다.“체리 언니, 나중에 그 조세진이라는 사람이 언니를 괴롭히진 않았어요?”소원은 잠시 백현주를 바라봤다.‘혹시 이 사람도 방민아가 심어둔 사람이 아닐까? 혹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지금 이걸 묻는 건가?’소원이 이렇게까지 의심하는 이유는 방민아의 성격 때문이다. 그녀라면 분명히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클럽에 눈을 심어둘 가능성이 컸다.소원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으려고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 좀 별로였어요...”애매모호하게 말하며 조세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뉘앙스를 남겨 상대방이 알아서 추측하게끔 여지를 남겼다.백현주는 더 묻지 않고 수다를 이어갔다.“근데 언니가 이렇게 멀쩡히 나온 게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그 조세진이라는 사람, 진짜 끔찍하거든요. 특히 신입 괴롭히는 걸 아주 좋아해요. 게다가 얼굴은 둥글둥글해서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정작 하는 짓은 완전 쓰레기예요. 이상한 짓까지 시키고...”그녀의 말은 끝날 기미가 없었지만 소원은 조세진의 더러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결국 이마를 어루만지며 그녀는 쉬고 싶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백현주는 한참 떠들다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체리 언니, 제가 괜히 방해했죠? 쉬고 계세요. 먼저 나갈게요.”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백현주를 불렀고 그녀는 대답한 뒤 소원에게 다시 말했다.“언니, 저 여기서 1년 넘게 일했거든요.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여기 어떤 대표님이 까다롭고 어떤 대표님이 후한지 제가 다 알거든요.”백현주의 지나친 친절은 소원에게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여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그럼 이만 갈게요, 체리 언니.”백현주가 나간 뒤 방 안은 겨우 조용해졌다.소원은 침대에 누워 유진의 생각으로 마음을 놓지 못했다.
선미가 성형미인이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으나 소원이 오기 전에는 그녀가 누구를 따라 성형한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소원이 오고 나니 상황이 묘해졌다.선미의 얼굴은 마치 소원을 본떠 만든 듯했지만 인위적이다 보니 일종의 ‘저급 버전 소원’처럼 보였다.매일 진한 화장을 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화장을 지우면 성형 부작용으로 비뚤어진 부분들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소원은 일부러 선미의 근무 시간에 맞춰 몇 번 마주치려 했지만 선미는 소원만 보면 피하며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소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물어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그녀를 몰래 관찰하기로 했다.그렇게 지켜보는 동안 이상한 점이 하나둘씩 드러났다.선미는 왼손으로 식사를 했고 때때로 새끼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동작을 했다.그 모습과 표정이 소원으로 하여금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했는데...’소원은 선미를 따라 그녀의 휴게실까지 갔고 선미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안으로 들어섰다.“어이, 누구야...”선미는 발끈하려다 상대가 소원인 것을 보고 기세가 약간 꺾인 듯했다.“나가주세요. 남의 휴게실에 무단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몰라요?”소원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선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 진아연이구나?”몇 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 소원은 차마 믿을 수 없었다.진아연이 여기, 그것도 이런 모습으로 숨어 있었을 줄은 말이다.소원은 그녀가 왜 자신의 얼굴을 따라 성형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무슨 목적이 있었던 걸까?’소원은 차분하게 물었다.“내 얼굴을 따라 한 이유가 뭐야?”선미는 처음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태연한 척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나 원래 이 얼굴이야. 누가 네 얼굴 따라 했대?”“원래?”곧 소원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비
소원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과거 진아연은 육경한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채 도망쳤다.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니, 얼마나 비정상적인 집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하지만 선미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네 말도 이해할 수 없어.”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휴게실에서 뛰쳐나갔다.그 뒷모습은 마치 도망치듯 허겁지겁이었다.소원은 선미의 반응이 너무나 뚜렷하다고 생각했다.‘육경한한테 당한 뒤에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그녀가 성형을 하고 모습을 바꿀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누군가 그녀를 도왔다는 뜻일 것이다.‘도대체 누가 도와준 거지? 진아연을 돕는 목적은 뭐고?’소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휴게실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가방에서 작은 이어폰 모양의 장치를 꺼내 귀에 꽂았다.조금 전 선미의 턱을 잡을 때, 얇은 형태의 초소형 도청기를 그녀의 옷깃 아래쪽에 붙여두었던 것이다.이제 선미가 누군가와 접촉하면 그 대화를 통해 그녀가 숨겨온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예상대로 이어폰에서는 곧 진아연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저예요.”“누가 너보고 전화하라고 했어!”상대방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쉰 듯했으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저... 저를 누군가 알아챘어요.”진아연이 말했다.“뭐라고?”“소원이 저를 알아봤어요. 제가 진아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이제 어떡하죠...”그녀는 겁에 질린 듯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인정했어?”상대방이 물었다.“아니요. 아니요.”진아연은 상대를 두려워하는 듯 여러 번 부인하며 말했다.“그래, 그럼 된 거야. 기억해, 진아연은 이미 죽었어. 이 세상에 진아연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너는 지금 임선미야. 아무도 네가 진아연이라는 걸 증명할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