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우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백현주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조금 전의 강렬한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은 이웃집 소녀처럼 친근해 보였다.“체리 언니, 나중에 그 조세진이라는 사람이 언니를 괴롭히진 않았어요?”소원은 잠시 백현주를 바라봤다.‘혹시 이 사람도 방민아가 심어둔 사람이 아닐까? 혹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지금 이걸 묻는 건가?’소원이 이렇게까지 의심하는 이유는 방민아의 성격 때문이다. 그녀라면 분명히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클럽에 눈을 심어둘 가능성이 컸다.소원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으려고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 좀 별로였어요...”애매모호하게 말하며 조세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뉘앙스를 남겨 상대방이 알아서 추측하게끔 여지를 남겼다.백현주는 더 묻지 않고 수다를 이어갔다.“근데 언니가 이렇게 멀쩡히 나온 게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그 조세진이라는 사람, 진짜 끔찍하거든요. 특히 신입 괴롭히는 걸 아주 좋아해요. 게다가 얼굴은 둥글둥글해서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정작 하는 짓은 완전 쓰레기예요. 이상한 짓까지 시키고...”그녀의 말은 끝날 기미가 없었지만 소원은 조세진의 더러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결국 이마를 어루만지며 그녀는 쉬고 싶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백현주는 한참 떠들다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체리 언니, 제가 괜히 방해했죠? 쉬고 계세요. 먼저 나갈게요.”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백현주를 불렀고 그녀는 대답한 뒤 소원에게 다시 말했다.“언니, 저 여기서 1년 넘게 일했거든요.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여기 어떤 대표님이 까다롭고 어떤 대표님이 후한지 제가 다 알거든요.”백현주의 지나친 친절은 소원에게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여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그럼 이만 갈게요, 체리 언니.”백현주가 나간 뒤 방 안은 겨우 조용해졌다.소원은 침대에 누워 유진의 생각으로 마음을 놓지 못했다.
선미가 성형미인이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으나 소원이 오기 전에는 그녀가 누구를 따라 성형한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소원이 오고 나니 상황이 묘해졌다.선미의 얼굴은 마치 소원을 본떠 만든 듯했지만 인위적이다 보니 일종의 ‘저급 버전 소원’처럼 보였다.매일 진한 화장을 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화장을 지우면 성형 부작용으로 비뚤어진 부분들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소원은 일부러 선미의 근무 시간에 맞춰 몇 번 마주치려 했지만 선미는 소원만 보면 피하며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소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물어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그녀를 몰래 관찰하기로 했다.그렇게 지켜보는 동안 이상한 점이 하나둘씩 드러났다.선미는 왼손으로 식사를 했고 때때로 새끼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동작을 했다.그 모습과 표정이 소원으로 하여금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했는데...’소원은 선미를 따라 그녀의 휴게실까지 갔고 선미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안으로 들어섰다.“어이, 누구야...”선미는 발끈하려다 상대가 소원인 것을 보고 기세가 약간 꺾인 듯했다.“나가주세요. 남의 휴게실에 무단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몰라요?”소원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선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 진아연이구나?”몇 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 소원은 차마 믿을 수 없었다.진아연이 여기, 그것도 이런 모습으로 숨어 있었을 줄은 말이다.소원은 그녀가 왜 자신의 얼굴을 따라 성형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무슨 목적이 있었던 걸까?’소원은 차분하게 물었다.“내 얼굴을 따라 한 이유가 뭐야?”선미는 처음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태연한 척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나 원래 이 얼굴이야. 누가 네 얼굴 따라 했대?”“원래?”곧 소원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비
소원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과거 진아연은 육경한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채 도망쳤다.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니, 얼마나 비정상적인 집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하지만 선미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네 말도 이해할 수 없어.”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휴게실에서 뛰쳐나갔다.그 뒷모습은 마치 도망치듯 허겁지겁이었다.소원은 선미의 반응이 너무나 뚜렷하다고 생각했다.‘육경한한테 당한 뒤에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그녀가 성형을 하고 모습을 바꿀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누군가 그녀를 도왔다는 뜻일 것이다.‘도대체 누가 도와준 거지? 진아연을 돕는 목적은 뭐고?’소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휴게실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가방에서 작은 이어폰 모양의 장치를 꺼내 귀에 꽂았다.조금 전 선미의 턱을 잡을 때, 얇은 형태의 초소형 도청기를 그녀의 옷깃 아래쪽에 붙여두었던 것이다.이제 선미가 누군가와 접촉하면 그 대화를 통해 그녀가 숨겨온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예상대로 이어폰에서는 곧 진아연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저예요.”“누가 너보고 전화하라고 했어!”상대방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쉰 듯했으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저... 저를 누군가 알아챘어요.”진아연이 말했다.“뭐라고?”“소원이 저를 알아봤어요. 제가 진아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이제 어떡하죠...”그녀는 겁에 질린 듯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인정했어?”상대방이 물었다.“아니요. 아니요.”진아연은 상대를 두려워하는 듯 여러 번 부인하며 말했다.“그래, 그럼 된 거야. 기억해, 진아연은 이미 죽었어. 이 세상에 진아연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너는 지금 임선미야. 아무도 네가 진아연이라는 걸 증명할
진아연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작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부족해서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신비로운 사람은 차갑게 명령했다.“당장 소원에게 접근해.”그러자 진아연은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선생님?”소원만 보면 겁이 덜컥 나는 그녀였다.과거에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이 이제 자신을 알아봤으니 불리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고 싶은데 오히려 다가가야 하다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러나 신비로운 사람은 단호했다.“그래야 육경한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겨. 그 약은 반드시 정해진 횟수만큼 먹여야 효과가 나.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소용없어. 알겠어?”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진아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신비로운 사람은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투로 경고했다.“진짜 그렇게 하길 바라.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건 너도 약을 먹었다는 거야. 네 생사는 내가 정해!”진아연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겁먹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반드시 따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끊을게. 앞으로는 나한테 먼저 연락하지 마.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네, 네. 알겠습니다.”진아연은 마치 병아리가 쪼아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곧이어 전화가 끊겼고 진아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러더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보고 그 년한테 접근하라고? 대체 왜?! 내가 원하는 건 그년이 죽는 거야!”휴게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혼잣말은 정신이 이상해 보일 정도로 날카로웠다.한편으로는 소원이 죽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죽기를 바랐다.하지만 육경한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면서도 그녀의 말투에서는 어딘가 미련과 아쉬움이 묻어났다.소원은 이어폰을 통해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혼란스러웠다.‘진아연이 아직도 육경한을 좋아한다고? 정말 정신
“그...”소원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으로 손님 잔에 술을 따르던 중이었다.최근 만난 두세 명의 손님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모두 방씨 가문이나 육씨 가문과 관련된 비즈니스를 다루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작은 방에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소원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해 대화 내용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소원은 그들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정보들을 듣는 것이 흥미로웠다.방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한편 손님은 영숙과 소원의 대화 소리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영숙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영숙 씨. 체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그러자 영숙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쪽 방에서 한 단골 손님이 체리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손님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지금 체리 여기서 잘 서비스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부른다고 해서 데려가려고? 내가 돈이 없어서 서비스 비용을 못 낼까 봐 그러는 거야?”이 말에 영숙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양 대표님이 돈이 없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면 제가 바보죠.”“근데 왜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 돈 때문이 아니면 날 무시하는 거야?”손님이 더욱 화를 내며 공격적으로 나오자 영숙은 가슴에 손을 얹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억울합니다, 양 대표님. 제가 그쪽에도 예약 없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오늘 그쪽 방에 있는 한 여성 손님의 생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여기는 제가 술 한 병 더 드리면서 보상해드릴게요. 이렇게 하면 괜찮으실까요?”손님은 상대방이 생일이라는 말을 듣자 더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만 넘어가겠어. 하지만 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해.”“당연하죠. 정말 감사합니다.”영숙은 싹싹하게 고개를 숙이며 소원을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문밖으로 나온 소원은 영숙에게 물었다.“대체 누가 절 지목한 거예요?”소원
“이 천박한 게...”육연주의 친구가 다가와 소원을 밀치려 하자 소원도 만만치 않게 방어했다.그 친구는 힘이 약한 편이라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감히 나를 밀어?”여자는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소원을 덮치려 했다.하지만 소원은 그녀가 덤벼들 것을 예측하고 이미 자리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지금은 육연주와 정면으로 맞설 처지가 아니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서비스를 거부해 영숙에게 혼나는 게 차라리 낫지 더 큰 싸움에 휘말려 자신만 손해를 보는 건 피해야 했다.소원이 아직 몸을 피하지 못했을 때, 육연주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친구를 붙잡아 떼어놓았다.이 행동은 소원에게도 뜻밖이었다. 육연주는 평소 남을 위해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육연주는 말했다.“그만 좀 해. 오늘 내 생일 파티야. 곧 다른 사람도 올 거라고.”그녀의 친구도 육연주의 생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분위기를 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얌전히 따랐다.그러나 여전히 소원을 노려보며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두고 보자.”소원은 그녀의 분노를 무시한 채 육연주를 바라보았다. 막 떠나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방 문이 다시 열렸다.바깥에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너무도 익숙한 발소리였다.소원이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정장을 차려입은 육경한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지난번 병원에서 그를 본 이후로 소원은 한동안 육경한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 뒤로 의료비를 납부하며 연락했던 소종이 한 말이 떠올랐다.“대표님은 앞으로 소원 씨와 엮일 일이 없을 겁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거고 아이 역시 소원 씨에게 절대 넘기지 않을 거예요.”육경한은 아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고 소원에게도 아이를 보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두 사람의 현재 위치가 너무 다르다 보니 육경한이 만나기를 원치 않으면 그는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지낼 수 있었다.소원은 아이의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었고 육경한이 아이를 돌보는 아주머
소원은 말없이 있었지만 방민아는 내심 무척 즐거워했다.물론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육연주에게 다소 정색하며 말했다.“연주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그러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소원에게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어려운 일 생기면 꼭 말해주세요. 소원 씨랑 경한 씨 서로 동창이잖아요.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겁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방민아는 자신이 충분히 ‘배려 깊은’ 모습을 보였다고 느끼며 만족한 듯했다.이어서 그녀는 작은 보석 가방을 꺼내 육연주에게 건네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주야, 이건 나랑 네 삼촌이 같이 고른 거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그러자 육연주는 기쁘게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언니는 뭘 주셔도 다 좋아요. 언니 눈썰미는 최고니까요.”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제윤’ 브랜드 최신작 보석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이 목걸이는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 등급의 회원만이 예약 가능한 특별한 제품이었다.육연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 삼촌, 고마워요.”이 말에 방민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아직 그렇게 부를 때는 아니잖아, 연주야...”그러자 육연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곧 그렇게 부를 날이 오잖아요. 미리 연습하는 거예요.”“어머, 이 녀석 정말...”육연주는 방민아의 손을 잡고 앉으며 말했다.“어서, 저희 삼촌이랑 이모한테 술 한 잔 따라 드려요.”소원은 이 상황에서 육연주가 자신을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술잔을 채운 뒤 육경한에게 건넸다.“드세요.”하지만 육경한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잔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드세요.”소원이 다시 말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때 방민아가 잔을 대신 받아들며 말했다.“죄송해요. 경한 씨가 요즘 술을 끊었거든요. 담배도 마찬가지고
육연주는 서현재와 단단히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재 오빠, 드디어 왔네요! 할아버지가 오빠 프로젝트 준비한다고 하던데 많이 힘들었죠?”서현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팔을 뽑아냈다. 이어서 손을 주머니에 깊이 넣어 육연주가 다시 끼지 못하게 만들었다.지난번 서현재가 결혼식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이후, 육연주는 분노에 차 사흘간 그를 무시했다.그러나 사흘이 지나자 참지 못하고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예상대로 서진태는 둘 사이의 갈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사실을 알게 된 뒤 서현재를 심하게 꾸짖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서현재가 처음으로 서진태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제가 이 여자를 사랑했다고요? 혹시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제가 이런 여자를 사랑할 수 있죠?”서현재가 무언가 기억해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서진태는 속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서현재는 과거와 달리 순종적이라 서진태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예전에는 그가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협력을 무시하며 소원의 손에 증거 자료를 넘기고 결국 함께 도망친 일까지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잃은 후 서현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만약 약물을 과다 사용할 시 부작용이 생긴다고 의사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서진태는 서현재가 평생 기억하지 못하도록 더 많이 투여하고 싶을 정도였다.의사는 기억 상실이 일시적이며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몇 년 혹은 10년이 지나도록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도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재가 이렇게 빨리 의심할 줄은 서진태도 예상치 못했다.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하겠냐? 네가 먼저 그 애와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린 거잖아. 이제 와서 싫다고 하면 그 애는 어딜 시집가겠니? 네가 그 애의 평판을 이렇게 망쳐놓았는데.”서현재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제 안목이 그렇게 없을 리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악독한 그런 여자를 좋아할 리 없잖아요.”서진태는 한숨을 내쉬며 서현재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