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을 지키던 사람은 잠시 멍해졌다. 평소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서현재에게 이렇게 날카로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이내 서현재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소원의 손을 잡고 병실로 향했다.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한마디도 못 하고 침묵을 지켰다.서씨 가문에서는 관계없는 사람이 면회를 오는 것을 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현재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규칙도 있었다. 그의 기분은 아주 중요했다.병실에 들어서며 서현재는 소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밥은 잘 챙겨 먹었어요?”그는 곧 소원의 손목을 만지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살이 좀 빠진 것 같아요.”‘내가 겨우 살을 찌워놨는데...’그러자 소원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서현재가 신경 쓰는 부분은 항상 남들과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몸 상태만 걱정했다.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녀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먹었어.”거짓말이었다.그녀가 먹은 것은 육경한이 억지로 먹인 것과, 쓰러지지 않아야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애써 자신을 밀어붙이며 조금씩 삼킨 음식뿐이었다.“걱정하지 마요. 유진이랑 어머님 일은 우리 같이 해결해요.”소원은 순간 멍해졌다. 서현재가 이렇게 빨리 유진이와 전미영의 일을 알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서씨 가문에서도 서현재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는데 특히 서진태 곁의 비서가 그의 은혜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과거 그 비서의 아이가 희귀병에 걸렸을 때, 오랫동안 병을 고치지 못했지만 그는 이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다.서진태의 월급과 보너스에 의존해 아이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느 날, 서현재는 비서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물었다.그러고는 한의학 의사를 소개해 아이를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그렇게 마침내 비서의 아이는 병이 나았고 그는 서현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서씨 가문의 도련님들
‘괜찮아. 내가 대답만 잘해주면 돼.’곧 소원은 손을 들어 서현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버리지 않을게. 우리 앞으로 잘 될 거야.”...서씨 가문 별장.육경한은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탁자 위로 뻗고 있었다. 자세가 매우 오만했다.“어르신, 그때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그는 과거 서씨 가문의 상황을 알았기에 서진태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었다.그러자 서진태는 감격하며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현재를 소원과 떼어놓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육경한이 선처를 베푼 것은 절대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그는 서현재가 죽어 소원의 마음속 영원한 그리움이 되는 것보다는 둘이 서로 등을 돌리며 미워하게 되는 것을 더 보고 싶었다.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미움으로 가득 찬 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육경한이 바라는 장면이었다.그는 절대 서현재가 소원의 마음속 주홍글씨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서진태는 육경한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참고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현재를 잘 감시하라고 제가 사람도 붙였지만 소원 씨가 찾아오는 건 제가 막을 수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직접 키운 아이가 아니라 현재랑 우리도 서먹한 사이인데 제가 너무 강하게 나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이 말은 육경한에게 변명으로 들렸다.서진태는 이제 이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고 다리를 건너면 다리를 끊어버리려는 속셈이었다.사실 그는 서현재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서씨 가문의 핏줄만 이어갈 수 있다면 말이다.서현재에게 젊고 예쁜 비서를 붙여 몇 번 유혹하게 하면 마음이 돌려질 거라 생각했다.서진태의 목적은 단 하나, 서씨 가문의 후손을 늘리는 것이었고 서현재는 그저 핏줄을 잇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그러나 지금 서씨 가문에 남은 도구는 서현재 하나뿐이었다.‘우리 서씨 가문의 그 많은 재산이 다른 데로 새게 할 수는 없지.’하여 서진태는 서현재와 관련된 일
그는 서진태와 계속 두서없는 논쟁을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두 사람의 생각은 애초에 맞닿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씨 가문을 건드릴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할 가치는 없었다.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낭비되기 때문이었다.“어르신 아직 모르시죠? 어르신 아드님이 사랑하는 여자는 한때 심각한 병을 앓았어요. 그 사람 몸은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처음 듣는 말에 서진태는 크게 당황했다.비록 서현재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서진태는 소원이 외모도 괜찮고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소원이 외견상으로는 전혀 불임일 것 같지 않았다.그러나 육경한의 한마디에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육경한은 이어서 말했다.“어르신 아드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정말 사랑에 빠진 거면 다른 여자를 택해 아이를 낳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자기 사랑을 배신하는 일일 테니까.”서현재가 황소처럼 고집이 센 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서진태는 말문이 막혔다.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전 육씨 가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지 않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아무리 해도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소원이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라면 이제는 대책을 다시 세워야 했다.그리고 서진태의 머릿속에 곧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그 방법뿐이야.’세월의 흔적을 담은 그의 눈빛이 매서운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다.“대표님, 저 혼자만으로는 힘들겠네요. 소원 씨를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는 대표님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어떠신가요?”서진태가 결심을 굳히자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좋아요. 우리가 굳이 적대적인 위치에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협력하면 더 나아질 겁니다.”“물론입니다. 물론이죠.”서진태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비굴한 자세로 돌아갔다.하지만 육경한은 이미 속으로 서씨 가문을 협력
“이건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전화하실 건가요?”도우미가 물었다.“네... 해야죠.”아주머니는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건네받았다.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소원에게 전화를 걸게 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시실 그녀는 늘 유진이에게 이곳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엄마인 소원이 걱정하지 않게 착하게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유진이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불편한 몸 상태를 참다가 고열로 결국 쓰러진 것이다.너무 놀란 나머지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따질 겨를이 없었다.‘일단 먼저 소원 씨한테 전화해야 해.”.전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소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주머니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소원 씨, 유진이가...”소원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유진이가 왜요?”“유진이가 고열이 나서 의식을 잃었어요... 육 대표님도 병원에 데려가 주질 않네요...”작게 울먹이며 아주머니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이 말을 듣자 소원의 가슴은 단단히 조여드는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서현재가 물었다.“유진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이가 열이 나서 쓰러졌대...”그러자 서현재는 바로 주삿바늘을 뽑으려고 하며 말했다.“내가 같이 가줄게요.”“안 돼!”하지만 소원이 그를 막았다.“움직이지 마. 여기서 잘 치료받고 있어. 내가 가면 되니까.”그녀는 서현재가 가면 육경한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또 혹시라도 괜히 육경한을 자극해 유진이의 치료에 방해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여러 가지 걱정이 소원의 머릿속을 채웠다.“걱정 마. 이제 난 육경한이 두렵지 않거든. 끝까지 맞서 싸울 거야.”그러고는 서현재를 안심시키며 덧붙였다.“너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회복을 잘해야 한다는 거야. 잘 회복해야 우리 둘이 변호사를 찾아서 유진이를 되찾을 수 있지.”소원의 다급한 표정을 본 서현재는 자신이 가면 상황이 악화될 것을 알고는 말했다.“그럼 얼른 가서 유진이 먼저
비록 유진이와 함께한 시간이 부족하고 마음의 벽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소원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유진이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유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충분히 지켜볼 시간이 없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육 대표님이 데려온 의사 선생님 덕분이에요.”장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주머니도 처음에는 육경한이 치료를 막을 줄 알았지만, 소원과 통화한 후 그는 의사를 불러 유진이의 열을 내리게 했다.유진이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아주머니는 그 의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의사는 몇 번만 진찰하고 유진이의 심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냈다. 이어서 해열 주사를 놓고 해열 패치도 주었다.의사가 방을 나가 육경한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그는 유진이를 한 번 바라보고는 또다시 방을 나갔다.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소원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유진이의 병을 이용해 날 돌아오게 한 거였어. 이 비열한 자식!’역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육경한은 자신의 친자식마저 협상의 도구로 삼았다.그래서 소원이 그동안 유진이를 숨기며 아이가 육경한의 협박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게 했던 것이다.엄청난 분노가 느껴졌지만 소원은 유진이의 곁을 지키며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저녁 무렵, 유진이는 잠시 깨어났다.아이는 소원을 보더니 갑자기 작은 손을 뻗으며 약간 서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안아줘요...”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유진이는 서현재에게는 종종 애교를 부리고 떼를 쓰곤 했지만 소원에게는 이런 모습을 거의 보인 적이 없었다.항상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유진이였기에 그녀는 아이가 병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생각했다.그럼에도 소원은 몸을 기울여 유진을 안아주었다.작고 부드러운 유진이의 몸이 자신의 품에 완전히 기대 안겨 있자 소원의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졌다.자신에게 의지하는 이런 유진이의 모습과 모자간의 친근함이 소원으로 하여금
밤새 그렇게 고생한 끝에 날이 밝아올 무렵, 유진이의 열이 드디어 내렸다.소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 잠시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교대하러 온 아주머니는 의자에서 자는 소원이의 모습이 불편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그래서 침대에서 쉬게 하려고 깨우려 했다.“소원 씨.”아주머니가 불렀지만 소원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원래 몸이 약한 데다 밤새 지친 탓에 깊이 잠든 것이다.아주머니가 손을 뻗어 소원을 살짝 흔들려는 순간, 단단하고 길쭉한 한 손이 그녀보다 먼저 움직였다.육경한이 아주머니를 지나 소원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그러자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육 대표님...”하지만 그녀의 말을 육경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번에 막아버렸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유진이를 잘 돌보는 거야말로 아주머니의 책임입니다.”유진이가 밤마다 이유 없이 울지 않았다면 육경한은 아주머니를 이곳에 남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아주머니도 함께 따라왔는데 육경한이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이 남자가 유진이의 생부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판박이였다.심지어 말투와 행동조차 닮아 있었다.유진이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이 적은 아이였는데 그것도 분명히 육경한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아주머니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전에 유진이의 생부가 뛰어난 수단을 많이 쓰고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소원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소원은 아주머니에게 만약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절대 정면으로 대립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그가 유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그냥 데려가게 두라는 것이었다.유진이는 해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다행히 그때 아주머니는 재치 있게 약 한 보따리를 꺼내며 유진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이 약을 먹이는 법은 자신만이 안다고 말했다.그래서 육경한은 그녀를 데리고 왔다.지금 이 별장에서, 아주
다음 순간, 소원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육경한의 침실에 있는 약장을 향했다.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으려면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육경한이 계속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약들은 모두 개인 주치의가 처방한 것으로 병원에서는 처방받은 적이 없었다.‘만약 육경한이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유진이를 양육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언제든지 무너질 위험이 있는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키우기에 지나치게 위험하니 말이다.약장에서 약을 찾아보았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소원은 약장의 맨 위 칸에 있는 약상자를 꺼내려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너무 높아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섰고 간신히 약상자를 손에 넣었다.그러나 소원은 자신이 아직 의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곧 몸이 휘청거리며 그녀는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누군가 들을까 두려워서 말이다.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단단한 가슴에 안기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들고 있던 약상자는 땅에 떨어져 안에 든 약들이 와르르 쏟아졌다.뒤이어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찾고 있는 건데?”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은 냉혹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표정이 굳어졌지만 소원은 금세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몸이 좀 안 좋아서 약 좀 찾으려고.”“어디가 안 좋은데?”육경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머리가... 머리가 아파.”소원은 대충 둘러댔다.그러자 육경한은 바닥에 흩어진 약들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먹어. 두통에 좋은 약이야.”하지만 소원은 그 약을 감히 먹을 수 없었다.그가 무슨 약을 건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방금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약을 고른 걸 봤으니 말이다.하여 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이
소원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 남자와는 단 1초도, 조금의 신체 접촉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간신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는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꺼져! 너 같은 짐승은 인간 취급도 못 받으니까!”그러나 육경한은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낮고 욕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약으로 억누르지 않았다면 지금 너랑 하기 전에 먼저 목 졸라 죽이고 나서 했을 거야.”시체와 그런 일을 하겠다는 이 미친 발언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이런 사람이 아빠라면 유진이가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마음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지만 소원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래, 그럼 날 죽여 봐. 지금 당장 죽이지 않으면 기어가서라도 경찰에 신고할 거야. 네가 날 강제로 덮쳤다고.”그러자 관자놀이에 있던 힘줄이 붉어지며 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분노가 이미 극에 달한 듯했다.소원은 계속해서 그를 자극하며 비웃었다.“육경한, 너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왜? 서울 여자들은 네 입맛에 안 맞아? 안타깝지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갑게 덧붙였다.“안타깝지만 난 너 같은 놈은 너무 혐오스러워서.”순간, 육경한의 얼굴은 광기를 띤 짐승처럼 일그러졌다.쫘악!소원의 옷이 반쯤 찢겨 나가며 매끈한 쇄골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가늘고 잘록한 허리는 여전히 감싸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았고 지금의 그녀는 이전보다 더 풍만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이었다.사실 예전에 뼈만 남은 듯 마른 몸일 때도 육경한은 그녀에게 흥미를 잃지 않았었다.소원은 말라 있어도, 지금처럼 풍만해도 치명적으로 매혹적이었다.마치 육경한을 파멸시키기 위해 내려온 여우 요괴처럼 말이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물었다. 고운 백조 같은 목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는 사람을 쉽게 취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고통에 찡그리며 약한 떨림을 보였고 육경한은 그녀의 몸에 빠져들듯 계속해서 탐닉했다.그
소원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육연주는 소원의 매혹적이고 예쁘장한 얼굴만 보면 자꾸 괴롭히고 싶었다.“따라다닐 때는 잘만 따라다니더니 쪽팔리긴 한가 보죠? 삼촌 애인으로 있으면서 몸 팔아서 소씨 가문에 조금이라도 보태겠다고 아등바등 버틴 거잖아요. 그러면 뭐해요. 소씨 가문이 약해 빠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기어오르지 못하는걸.”소원은 이 말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멍청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씨 가문이 누구 때문에 망했는데.’애초에 육경한이 핍박하지만 않았어도 소씨 가문이 그렇게 될 일은 없었다.육연주는 소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자기가 한 말에 소원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줄 알고 내심 통쾌해 앞으로 팔짱을 끼고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 알아요? 부모님이 그 모양이니까 딸도 다른 사람 가정이나 파괴하는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육연주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소원을 모욕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소원이 육연주의 귀싸대기를 날리려 했지만 손이 육연주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차가운 손 하나가 소원의 팔을 으스러지게 잡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소원은 팔목이 부러질 것 같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다가온 사람을 보고 육연주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더니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오빠, 와줘서 고마워. 이 미친 여자가 나 때리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육연주가 표독스럽던 아까와는 달리 애교를 부리자 소원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저기요, 왜 내 여자 친구에게 손을 댄 거죠?”목소리가 살짝 차가웠지만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고개를 들자 햇빛이 너무 강렬해 소원은 눈을 찡그렸다. 이내 상대의 조각 같은 턱과 점잖지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앞에 서 사람은 다름 아닌 서현재였다.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소원은 심장이 미칠 듯이 벌렁거렸다.‘돌아왔다고? 언제 돌아온 거지? 왜 아무 소식도 없이...’소원은 요새 소송 준비하느라 바빴다. 육경한과
소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고마워. 혜인아.”윤혜인이 소원의 손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유진이가 그런 사람 밑에서 자라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찾은 변호사가 소원과 연락했다.“소원 씨, 안녕하세요. 저는 주석훈 변호사입니다.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주석훈은 먼저 소원에게 사건에 대한 분석을 들려줬다.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 다른 변호사와는 다르게 주석훈은 전문가 다웠고 핵심을 잘 짚었다.“소원 씨, 어떤 사건인지 잘 알겠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생부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거네요. 이 부분을 빼면 이 소송에서 이길 방법이 거의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소원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아이를 데려오고도 남았을 것이다.“소원 씨, 최근 1년간 육경한 씨가 계속 이 약을 복용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나요?”주석훈이 물었다.“확신합니다.”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육경한 옆에 있으면서 약으로 조증을 억제하고 있는 걸 봤고 이 병을 가진 지도 꽤 오래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그 병이 더 심각해졌을 뿐이다.“그래요. 육경한 씨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입증할 수만 있다면 이 소송에 이길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주석훈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었다. 이선 그룹에 있을 때부터 크고 작은 사건을 맡으면서 불패의 기록을 세워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퇴사하고 외국에 나간 것도 업무에 변화를 주고 더욱 많은 성장을 이룩해 모국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이 말을 들은 소원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법원 수속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모든 절차를 끝내고 나니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소원은 이따금 서현재는 잘 치료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날 주석훈과 식사를 마치고 나와 혼자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육연주였다.소원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는데
비록 걱정되긴 했지만 아줌마가 있으니 그래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신경전을 펼치며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고 소원이 원하는 건 양육권이었기에 절대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이제 한주라는 시간이 흐르면 육경한도 통지를 받을 거라고 생가했는데 소원이 연락했던 변호사가 갑자기 선임 비용을 돌려주며 사건을 수임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서울에서 양육권 다툼에는 제일 좋은 변호사라 선임료가 비쌌지만 소원은 변호사의 능력을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유명한 변호사가 선임했던 사건을 못 하겠다고 다시 내려놓을 줄은 몰랐다.소원이 변호사를 찾아갔지만 변호사는 만나주지 않았다. 너무 억울했지만 변호사가 협박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로펌을 찾아가도 사전에 누가 언질이라도 한 것처럼 사건을 수임하는 사람이 없었고 상대가 육경한이라는 말만 들으면 모두 절레절레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윤혜인을 불러냈다. 카페에서 윤혜인이 소원의 손을 덥석 잡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원아, 너 말랐어.”소원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예전보다 찐 거야.”서현재와 같이 있으면서 쪘던 살이 아이를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생긴 골치 아픈 일로 다 빠지고 말았다.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나도 다 보여.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육경한이 아이를 뺏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윤혜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네.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아이를 뺏어가서는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소원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육경한의 손에는 유전자 감식 결과가 있는 데다 소원의 병원 이력, 소원의 아버지가 연루된 금융 문제, 그리고 소원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던 자료가 있었다. 여기서 하나만 공개되어도 생모인 소원은 양육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바로 육경한의 정신질환이었다. 육경한을 법정에 세울 수만 있다면 법원은 정신질환이 있는 육경환이 아
이렇게 차분한 성격의 부모님이 있으니 교육한 아이들도 매우 뛰어날 테지만 육경한은 달랐다. 자기 자신도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 아이를 잘 교육할 리가 없었다.실수로 유진이 육경한의 그런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서웠다. 한번 각인된 기억은 그림자처럼 영원히 평생 따라다니게 된다.소원은 약을 윤혜인이 알려준 기구에 맡기며 어떻게든 아이를 그 처지까지 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돌아가는 길에 소원은 서현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나 외국 나가서 치료받으니까, 걱정하지 마요.]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두 사람은 전에 서로만 아는 암호로 문자를 보낼 때 점을 찍지 않기로 했는데 마지막에 점이 붙었다는 건 서현재가 보낸 문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외국으로 나가 치료받을 생각이라면 전화로 말하거나 만나서 말하지 이렇게 문자만 딸랑 보낼 리가 없었다.소원은 마음이 불안해져 미간을 찌푸리고는 얼른 택시를 불러 서현재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서현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로 나왔다. 유일한 연락처마저 없어졌다는 생각에 소원의 마음이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병원에 도착한 소원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이렇게 물었다.“현재야?”침대에 누워있던 남자가 몸을 돌렸지만 서현재가 아니었다.“누구세요?”상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소원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제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다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죄송해요. 혹시 전에 있던 환자는 언제 나갔는지 알아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오늘 아침에 들어왔거든요.”“아, 그러시구나. 죄송해요. 쉬세요.”소원이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몸을 돌렸다. 아마도 서현재네 가족이 서현재를 빼돌린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것저것 알아보니 확실히 육경한이 말한 것처럼 서씨 가문에는 대를 이을 사람이
이준혁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관찰했다. 잘 묶었던 샤워 타올이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흐트러진 상태였다.출장을 다니기도 했고 아이도 생겼던지라 보름 남짓 잠자리를 가지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이 빨개지며 이렇게 말했다.“그... 아기들 잠들었는지 한 번만 확인해 볼게요...”몸을 돌리려는데 이준혁이 윤혜인의 허리를 꼭 끌어안더니 자기 다리에 앉히고는 오후의 커피숍에 울려 퍼지는 첼로 연주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매혹적이게 말했다.“엄마가 아기들 데리고 옆집으로 갔어. 아름이도 따라가서 오늘 여기 아무도 없어...”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며 한 손을 윤혜인의 허리에 갖다 대고 다른 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윤혜인은 그대로 테이블에 눕고 말았다.윤혜인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여기는 서재잖아요. 도우미들이 보면 어떡해요...”“다 휴가 갔어.”이준혁이 윤혜인의 샤워 가운을 풀어 헤치자 샤워 가운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길고 부드러운 윤혜인의 머리가 고풍스러운 테이블에 촥 펼쳐져 유난히 매혹적이었다.“휴가...”윤혜인의 얼굴이 이 자세로 인해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고 심장이 미칠 듯이 벌렁거렸다.“내가 휴가 보냈어.”이준혁이 고개를 숙여 윤혜인의 목과 쇄골에 뽀뽀하며 흔적을 남겼다. 뜨거운 숨결이 살갗에 닿자 간지러우면서도 전율이 흘렀다.“읍... 여보...”윤혜인이 교태를 부렸다.“오늘은 마음껏 즐겨도 돼.”이준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이준혁은 오늘 밤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휴가를 줬고 퇴근하기 전 문현미에게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했다. 문현미는 이준혁의 뜻을 바로 눈치챘고 아이들과 함께한다는 생각에 기뻐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옆집으로 향했다.“방으로 돌아가요... 여보...”윤혜인은 너무 부끄러워 얼른 손을 들고 얼굴을 가렸지만 이준혁은 기회
소원은 기분이 좋아졌다. 어찌 됐든 아직 믿을만한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모든 서러움과 울분을 왈칵 쏟아냈다.그때 수화기 너머로 말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웅아... 웅아...”윤혜인이 부드럽게 말했다.“아이고, 내 새끼, 일단 아줌마랑 나가서 놀아. 엄마는 친구랑 통화 중이니까 이따 놀아줄게.”“네...”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말할 줄은 몰라 그저 엄마라는 발음을 얼추 따라 하며 웅얼대는 목소리가 참으로 귀여웠다.소원은 윤혜인에게 아직 모유 수유를 해야 하는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마도 쌍둥이 중 더 어린애 같았다. 친구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 소원도 너무 기뻐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마음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윤혜인이 나선다고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육경한은 수단이 셀뿐더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육경한은 이준혁과 친구였기에 소원은 윤혜인이 난처한 상황에 놓이는 게 싫어 말을 짧게 끝냈다.“혜인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이따 다시 얘기하자. 일단 하나만 부탁할게.”윤혜인은 약간 서운했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는 말했다.“무슨 일인데?”“성분 감정할 수 있는 기관이 있을까? 약물 성분 검사하고 싶은데.”“그래, 일단 준혁 씨한테 연락해 보라고 할게. 이 부분은 준혁 씨가 잘 알아서.”윤혜인은 소원이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친구 간의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에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준혁 씨한테 비밀로 하라고 할게.”윤혜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소원과 육경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고 이준혁은 육경한과 이준혁이 친구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소원이 부탁하는 일은 육경한을 피해야 했다.결혼한 후로 이준혁은 회식 자리가 줄었고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 회식에 나가지 않았다. 매일 퇴근하면 끝내지 못한 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고 먼저 두 아이를 달래서 재운 후 곽아름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줬다. 아이들이 다 잠에 들고
육경한 같은 사람은 유진이를 진심으로 좋아할 리 없었다.정말로 아이가 필요했다면 그에게 아이를 낳아줄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그가 유진이를 데리고 있는 이유는 단지 소원을 협박하기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소원은 유진이가 이 비참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육경한을 증오했고 그가 사라지길 바랐지만 아이는 무고했다.그동안 유진이가 아주머니에게 아빠에 대해 물어볼 때면, 소원은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쳤다.“아빠와 엄마는 같이 있지 않지만 아빠도 엄마도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소원은 유진이가 자신과 육경한처럼 증오 속에서 평생을 살길 바라지 않았다.또한 부모 간의 갈등 때문에 성격이 삐뚤어지거나 기이하고 자존감 낮은 아이로 자라길 원하지 않았다.그런 이유로 유진이는 별장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왜냐하면 유진이는 아빠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언젠가 유진이가 자신이 단지 아빠가 엄마를 협박하기 위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충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일 것이다.“육경한, 제발 유진이를 놓아줘.”소원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전까지 몸부림치며 모든 기운이 사라졌으니 말이다.지금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았다.창백하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는 곧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곧 육경한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선택해.”그리고 다시 한번 말을 이어갔다.“유진이에게 부모가 함께 있는 삶을 줄지 말지, 선택은 네게 달렸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그는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그녀가 서현재와 함께 지냈던 것도 따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소원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서현재를 용서할 수도 있었다.비록 유진이에게 큰 감정은 없었지만 육경한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냉혹하고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지만 연기하는 법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그러니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은 배우면 그만이라 생각했다.하지
소원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 남자와는 단 1초도, 조금의 신체 접촉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간신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는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꺼져! 너 같은 짐승은 인간 취급도 못 받으니까!”그러나 육경한은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낮고 욕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약으로 억누르지 않았다면 지금 너랑 하기 전에 먼저 목 졸라 죽이고 나서 했을 거야.”시체와 그런 일을 하겠다는 이 미친 발언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이런 사람이 아빠라면 유진이가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마음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지만 소원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래, 그럼 날 죽여 봐. 지금 당장 죽이지 않으면 기어가서라도 경찰에 신고할 거야. 네가 날 강제로 덮쳤다고.”그러자 관자놀이에 있던 힘줄이 붉어지며 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분노가 이미 극에 달한 듯했다.소원은 계속해서 그를 자극하며 비웃었다.“육경한, 너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왜? 서울 여자들은 네 입맛에 안 맞아? 안타깝지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갑게 덧붙였다.“안타깝지만 난 너 같은 놈은 너무 혐오스러워서.”순간, 육경한의 얼굴은 광기를 띤 짐승처럼 일그러졌다.쫘악!소원의 옷이 반쯤 찢겨 나가며 매끈한 쇄골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가늘고 잘록한 허리는 여전히 감싸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았고 지금의 그녀는 이전보다 더 풍만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이었다.사실 예전에 뼈만 남은 듯 마른 몸일 때도 육경한은 그녀에게 흥미를 잃지 않았었다.소원은 말라 있어도, 지금처럼 풍만해도 치명적으로 매혹적이었다.마치 육경한을 파멸시키기 위해 내려온 여우 요괴처럼 말이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물었다. 고운 백조 같은 목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는 사람을 쉽게 취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고통에 찡그리며 약한 떨림을 보였고 육경한은 그녀의 몸에 빠져들듯 계속해서 탐닉했다.그
다음 순간, 소원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육경한의 침실에 있는 약장을 향했다.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으려면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육경한이 계속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약들은 모두 개인 주치의가 처방한 것으로 병원에서는 처방받은 적이 없었다.‘만약 육경한이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유진이를 양육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언제든지 무너질 위험이 있는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키우기에 지나치게 위험하니 말이다.약장에서 약을 찾아보았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소원은 약장의 맨 위 칸에 있는 약상자를 꺼내려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너무 높아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섰고 간신히 약상자를 손에 넣었다.그러나 소원은 자신이 아직 의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곧 몸이 휘청거리며 그녀는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누군가 들을까 두려워서 말이다.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단단한 가슴에 안기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들고 있던 약상자는 땅에 떨어져 안에 든 약들이 와르르 쏟아졌다.뒤이어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찾고 있는 건데?”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은 냉혹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표정이 굳어졌지만 소원은 금세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몸이 좀 안 좋아서 약 좀 찾으려고.”“어디가 안 좋은데?”육경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머리가... 머리가 아파.”소원은 대충 둘러댔다.그러자 육경한은 바닥에 흩어진 약들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먹어. 두통에 좋은 약이야.”하지만 소원은 그 약을 감히 먹을 수 없었다.그가 무슨 약을 건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방금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약을 고른 걸 봤으니 말이다.하여 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