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도망쳐야 하지?”소원은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육경한, 네가 말해봐. 내가 왜 숨어야 하지?”육경한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그는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소원은 원래부터 그의 것이었으니 말이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라 생각했다.“네가 날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피해 숨어야 했을까?”소원은 육경한을 바라보며 단호한 눈빛으로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네가 유진이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유가 그 아이가 네 아들이라는 부성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그러자 주먹을 꽉 쥔 채 육경한이 입을 다물었다.그는 자신의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소원을 붙잡아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에 소원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너도 알고 있잖아. 난 아이의 양육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증거를 모아서 끝까지 너랑 싸울 거라고.”곧 육경한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나랑 법정에서 또 싸우겠다고? 정말 제 분수를 모르는군.”소원은 차분히 말했다.“인생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야. 육경한, 네가 돌아와서 만들어낸 성과를 기억하니? 하지만 지금은? 그때랑 비교할 수 있겠어? 지금 이 모습, 이건 다 내 성과야!”소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기에 육경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유민 그룹은 이미 그녀의 두 차례 통합 전략으로 인해 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하여 육경한은 방씨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다시 부활할 계획이었다.사실 지금도 육경한은 여전히 수천억대의 자산을 가진 남자였고 소원 같은 여자를 제압하는 것은 개미 한 마리를 짓밟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소원은 그의 경멸 어린 눈빛에서 이런 생각을 읽어냈다.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낙타가 굶어 죽어도 말보다 크다지만 네가 지금 나보다 백 배, 천 배 강하다고 해도 난 널 두려워하지 않아. 맨발은 신발 신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 못 들어봤
문 앞을 지키던 사람은 잠시 멍해졌다. 평소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서현재에게 이렇게 날카로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이내 서현재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소원의 손을 잡고 병실로 향했다.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한마디도 못 하고 침묵을 지켰다.서씨 가문에서는 관계없는 사람이 면회를 오는 것을 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현재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규칙도 있었다. 그의 기분은 아주 중요했다.병실에 들어서며 서현재는 소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밥은 잘 챙겨 먹었어요?”그는 곧 소원의 손목을 만지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살이 좀 빠진 것 같아요.”‘내가 겨우 살을 찌워놨는데...’그러자 소원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서현재가 신경 쓰는 부분은 항상 남들과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몸 상태만 걱정했다.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녀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먹었어.”거짓말이었다.그녀가 먹은 것은 육경한이 억지로 먹인 것과, 쓰러지지 않아야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애써 자신을 밀어붙이며 조금씩 삼킨 음식뿐이었다.“걱정하지 마요. 유진이랑 어머님 일은 우리 같이 해결해요.”소원은 순간 멍해졌다. 서현재가 이렇게 빨리 유진이와 전미영의 일을 알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서씨 가문에서도 서현재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는데 특히 서진태 곁의 비서가 그의 은혜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과거 그 비서의 아이가 희귀병에 걸렸을 때, 오랫동안 병을 고치지 못했지만 그는 이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다.서진태의 월급과 보너스에 의존해 아이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느 날, 서현재는 비서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물었다.그러고는 한의학 의사를 소개해 아이를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그렇게 마침내 비서의 아이는 병이 나았고 그는 서현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서씨 가문의 도련님들
‘괜찮아. 내가 대답만 잘해주면 돼.’곧 소원은 손을 들어 서현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버리지 않을게. 우리 앞으로 잘 될 거야.”...서씨 가문 별장.육경한은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탁자 위로 뻗고 있었다. 자세가 매우 오만했다.“어르신, 그때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그는 과거 서씨 가문의 상황을 알았기에 서진태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었다.그러자 서진태는 감격하며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현재를 소원과 떼어놓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육경한이 선처를 베푼 것은 절대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그는 서현재가 죽어 소원의 마음속 영원한 그리움이 되는 것보다는 둘이 서로 등을 돌리며 미워하게 되는 것을 더 보고 싶었다.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미움으로 가득 찬 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육경한이 바라는 장면이었다.그는 절대 서현재가 소원의 마음속 주홍글씨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서진태는 육경한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참고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현재를 잘 감시하라고 제가 사람도 붙였지만 소원 씨가 찾아오는 건 제가 막을 수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직접 키운 아이가 아니라 현재랑 우리도 서먹한 사이인데 제가 너무 강하게 나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이 말은 육경한에게 변명으로 들렸다.서진태는 이제 이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고 다리를 건너면 다리를 끊어버리려는 속셈이었다.사실 그는 서현재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서씨 가문의 핏줄만 이어갈 수 있다면 말이다.서현재에게 젊고 예쁜 비서를 붙여 몇 번 유혹하게 하면 마음이 돌려질 거라 생각했다.서진태의 목적은 단 하나, 서씨 가문의 후손을 늘리는 것이었고 서현재는 그저 핏줄을 잇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그러나 지금 서씨 가문에 남은 도구는 서현재 하나뿐이었다.‘우리 서씨 가문의 그 많은 재산이 다른 데로 새게 할 수는 없지.’하여 서진태는 서현재와 관련된 일
그는 서진태와 계속 두서없는 논쟁을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두 사람의 생각은 애초에 맞닿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씨 가문을 건드릴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할 가치는 없었다.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낭비되기 때문이었다.“어르신 아직 모르시죠? 어르신 아드님이 사랑하는 여자는 한때 심각한 병을 앓았어요. 그 사람 몸은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처음 듣는 말에 서진태는 크게 당황했다.비록 서현재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서진태는 소원이 외모도 괜찮고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소원이 외견상으로는 전혀 불임일 것 같지 않았다.그러나 육경한의 한마디에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육경한은 이어서 말했다.“어르신 아드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정말 사랑에 빠진 거면 다른 여자를 택해 아이를 낳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자기 사랑을 배신하는 일일 테니까.”서현재가 황소처럼 고집이 센 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서진태는 말문이 막혔다.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전 육씨 가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지 않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아무리 해도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소원이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라면 이제는 대책을 다시 세워야 했다.그리고 서진태의 머릿속에 곧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그 방법뿐이야.’세월의 흔적을 담은 그의 눈빛이 매서운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다.“대표님, 저 혼자만으로는 힘들겠네요. 소원 씨를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는 대표님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어떠신가요?”서진태가 결심을 굳히자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좋아요. 우리가 굳이 적대적인 위치에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협력하면 더 나아질 겁니다.”“물론입니다. 물론이죠.”서진태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비굴한 자세로 돌아갔다.하지만 육경한은 이미 속으로 서씨 가문을 협력
“이건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전화하실 건가요?”도우미가 물었다.“네... 해야죠.”아주머니는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건네받았다.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소원에게 전화를 걸게 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시실 그녀는 늘 유진이에게 이곳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엄마인 소원이 걱정하지 않게 착하게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유진이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불편한 몸 상태를 참다가 고열로 결국 쓰러진 것이다.너무 놀란 나머지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따질 겨를이 없었다.‘일단 먼저 소원 씨한테 전화해야 해.”.전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소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주머니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소원 씨, 유진이가...”소원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유진이가 왜요?”“유진이가 고열이 나서 의식을 잃었어요... 육 대표님도 병원에 데려가 주질 않네요...”작게 울먹이며 아주머니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이 말을 듣자 소원의 가슴은 단단히 조여드는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서현재가 물었다.“유진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이가 열이 나서 쓰러졌대...”그러자 서현재는 바로 주삿바늘을 뽑으려고 하며 말했다.“내가 같이 가줄게요.”“안 돼!”하지만 소원이 그를 막았다.“움직이지 마. 여기서 잘 치료받고 있어. 내가 가면 되니까.”그녀는 서현재가 가면 육경한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또 혹시라도 괜히 육경한을 자극해 유진이의 치료에 방해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여러 가지 걱정이 소원의 머릿속을 채웠다.“걱정 마. 이제 난 육경한이 두렵지 않거든. 끝까지 맞서 싸울 거야.”그러고는 서현재를 안심시키며 덧붙였다.“너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회복을 잘해야 한다는 거야. 잘 회복해야 우리 둘이 변호사를 찾아서 유진이를 되찾을 수 있지.”소원의 다급한 표정을 본 서현재는 자신이 가면 상황이 악화될 것을 알고는 말했다.“그럼 얼른 가서 유진이 먼저
비록 유진이와 함께한 시간이 부족하고 마음의 벽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소원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유진이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유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충분히 지켜볼 시간이 없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육 대표님이 데려온 의사 선생님 덕분이에요.”장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주머니도 처음에는 육경한이 치료를 막을 줄 알았지만, 소원과 통화한 후 그는 의사를 불러 유진이의 열을 내리게 했다.유진이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아주머니는 그 의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의사는 몇 번만 진찰하고 유진이의 심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냈다. 이어서 해열 주사를 놓고 해열 패치도 주었다.의사가 방을 나가 육경한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그는 유진이를 한 번 바라보고는 또다시 방을 나갔다.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소원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유진이의 병을 이용해 날 돌아오게 한 거였어. 이 비열한 자식!’역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육경한은 자신의 친자식마저 협상의 도구로 삼았다.그래서 소원이 그동안 유진이를 숨기며 아이가 육경한의 협박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게 했던 것이다.엄청난 분노가 느껴졌지만 소원은 유진이의 곁을 지키며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저녁 무렵, 유진이는 잠시 깨어났다.아이는 소원을 보더니 갑자기 작은 손을 뻗으며 약간 서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안아줘요...”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유진이는 서현재에게는 종종 애교를 부리고 떼를 쓰곤 했지만 소원에게는 이런 모습을 거의 보인 적이 없었다.항상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유진이였기에 그녀는 아이가 병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생각했다.그럼에도 소원은 몸을 기울여 유진을 안아주었다.작고 부드러운 유진이의 몸이 자신의 품에 완전히 기대 안겨 있자 소원의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졌다.자신에게 의지하는 이런 유진이의 모습과 모자간의 친근함이 소원으로 하여금
밤새 그렇게 고생한 끝에 날이 밝아올 무렵, 유진이의 열이 드디어 내렸다.소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 잠시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교대하러 온 아주머니는 의자에서 자는 소원이의 모습이 불편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그래서 침대에서 쉬게 하려고 깨우려 했다.“소원 씨.”아주머니가 불렀지만 소원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원래 몸이 약한 데다 밤새 지친 탓에 깊이 잠든 것이다.아주머니가 손을 뻗어 소원을 살짝 흔들려는 순간, 단단하고 길쭉한 한 손이 그녀보다 먼저 움직였다.육경한이 아주머니를 지나 소원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그러자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육 대표님...”하지만 그녀의 말을 육경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번에 막아버렸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유진이를 잘 돌보는 거야말로 아주머니의 책임입니다.”유진이가 밤마다 이유 없이 울지 않았다면 육경한은 아주머니를 이곳에 남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아주머니도 함께 따라왔는데 육경한이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이 남자가 유진이의 생부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판박이였다.심지어 말투와 행동조차 닮아 있었다.유진이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이 적은 아이였는데 그것도 분명히 육경한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아주머니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전에 유진이의 생부가 뛰어난 수단을 많이 쓰고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소원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소원은 아주머니에게 만약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절대 정면으로 대립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그가 유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그냥 데려가게 두라는 것이었다.유진이는 해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다행히 그때 아주머니는 재치 있게 약 한 보따리를 꺼내며 유진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이 약을 먹이는 법은 자신만이 안다고 말했다.그래서 육경한은 그녀를 데리고 왔다.지금 이 별장에서, 아주
다음 순간, 소원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육경한의 침실에 있는 약장을 향했다.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으려면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육경한이 계속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약들은 모두 개인 주치의가 처방한 것으로 병원에서는 처방받은 적이 없었다.‘만약 육경한이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유진이를 양육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언제든지 무너질 위험이 있는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키우기에 지나치게 위험하니 말이다.약장에서 약을 찾아보았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소원은 약장의 맨 위 칸에 있는 약상자를 꺼내려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너무 높아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섰고 간신히 약상자를 손에 넣었다.그러나 소원은 자신이 아직 의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곧 몸이 휘청거리며 그녀는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누군가 들을까 두려워서 말이다.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단단한 가슴에 안기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들고 있던 약상자는 땅에 떨어져 안에 든 약들이 와르르 쏟아졌다.뒤이어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찾고 있는 건데?”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은 냉혹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표정이 굳어졌지만 소원은 금세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몸이 좀 안 좋아서 약 좀 찾으려고.”“어디가 안 좋은데?”육경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머리가... 머리가 아파.”소원은 대충 둘러댔다.그러자 육경한은 바닥에 흩어진 약들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먹어. 두통에 좋은 약이야.”하지만 소원은 그 약을 감히 먹을 수 없었다.그가 무슨 약을 건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방금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약을 고른 걸 봤으니 말이다.하여 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이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