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도망쳐야 하지?”소원은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육경한, 네가 말해봐. 내가 왜 숨어야 하지?”육경한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그는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소원은 원래부터 그의 것이었으니 말이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라 생각했다.“네가 날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피해 숨어야 했을까?”소원은 육경한을 바라보며 단호한 눈빛으로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네가 유진이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유가 그 아이가 네 아들이라는 부성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그러자 주먹을 꽉 쥔 채 육경한이 입을 다물었다.그는 자신의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소원을 붙잡아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에 소원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너도 알고 있잖아. 난 아이의 양육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증거를 모아서 끝까지 너랑 싸울 거라고.”곧 육경한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나랑 법정에서 또 싸우겠다고? 정말 제 분수를 모르는군.”소원은 차분히 말했다.“인생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야. 육경한, 네가 돌아와서 만들어낸 성과를 기억하니? 하지만 지금은? 그때랑 비교할 수 있겠어? 지금 이 모습, 이건 다 내 성과야!”소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기에 육경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유민 그룹은 이미 그녀의 두 차례 통합 전략으로 인해 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하여 육경한은 방씨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다시 부활할 계획이었다.사실 지금도 육경한은 여전히 수천억대의 자산을 가진 남자였고 소원 같은 여자를 제압하는 것은 개미 한 마리를 짓밟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소원은 그의 경멸 어린 눈빛에서 이런 생각을 읽어냈다.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낙타가 굶어 죽어도 말보다 크다지만 네가 지금 나보다 백 배, 천 배 강하다고 해도 난 널 두려워하지 않아. 맨발은 신발 신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 못 들어봤
문 앞을 지키던 사람은 잠시 멍해졌다. 평소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서현재에게 이렇게 날카로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이내 서현재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소원의 손을 잡고 병실로 향했다.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한마디도 못 하고 침묵을 지켰다.서씨 가문에서는 관계없는 사람이 면회를 오는 것을 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현재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규칙도 있었다. 그의 기분은 아주 중요했다.병실에 들어서며 서현재는 소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밥은 잘 챙겨 먹었어요?”그는 곧 소원의 손목을 만지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살이 좀 빠진 것 같아요.”‘내가 겨우 살을 찌워놨는데...’그러자 소원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서현재가 신경 쓰는 부분은 항상 남들과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몸 상태만 걱정했다.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녀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먹었어.”거짓말이었다.그녀가 먹은 것은 육경한이 억지로 먹인 것과, 쓰러지지 않아야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애써 자신을 밀어붙이며 조금씩 삼킨 음식뿐이었다.“걱정하지 마요. 유진이랑 어머님 일은 우리 같이 해결해요.”소원은 순간 멍해졌다. 서현재가 이렇게 빨리 유진이와 전미영의 일을 알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서씨 가문에서도 서현재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는데 특히 서진태 곁의 비서가 그의 은혜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과거 그 비서의 아이가 희귀병에 걸렸을 때, 오랫동안 병을 고치지 못했지만 그는 이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다.서진태의 월급과 보너스에 의존해 아이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느 날, 서현재는 비서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물었다.그러고는 한의학 의사를 소개해 아이를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그렇게 마침내 비서의 아이는 병이 나았고 그는 서현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서씨 가문의 도련님들
‘괜찮아. 내가 대답만 잘해주면 돼.’곧 소원은 손을 들어 서현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버리지 않을게. 우리 앞으로 잘 될 거야.”...서씨 가문 별장.육경한은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탁자 위로 뻗고 있었다. 자세가 매우 오만했다.“어르신, 그때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그는 과거 서씨 가문의 상황을 알았기에 서진태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었다.그러자 서진태는 감격하며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현재를 소원과 떼어놓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육경한이 선처를 베푼 것은 절대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그는 서현재가 죽어 소원의 마음속 영원한 그리움이 되는 것보다는 둘이 서로 등을 돌리며 미워하게 되는 것을 더 보고 싶었다.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미움으로 가득 찬 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육경한이 바라는 장면이었다.그는 절대 서현재가 소원의 마음속 주홍글씨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서진태는 육경한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참고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현재를 잘 감시하라고 제가 사람도 붙였지만 소원 씨가 찾아오는 건 제가 막을 수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직접 키운 아이가 아니라 현재랑 우리도 서먹한 사이인데 제가 너무 강하게 나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이 말은 육경한에게 변명으로 들렸다.서진태는 이제 이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고 다리를 건너면 다리를 끊어버리려는 속셈이었다.사실 그는 서현재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서씨 가문의 핏줄만 이어갈 수 있다면 말이다.서현재에게 젊고 예쁜 비서를 붙여 몇 번 유혹하게 하면 마음이 돌려질 거라 생각했다.서진태의 목적은 단 하나, 서씨 가문의 후손을 늘리는 것이었고 서현재는 그저 핏줄을 잇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그러나 지금 서씨 가문에 남은 도구는 서현재 하나뿐이었다.‘우리 서씨 가문의 그 많은 재산이 다른 데로 새게 할 수는 없지.’하여 서진태는 서현재와 관련된 일
그는 서진태와 계속 두서없는 논쟁을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두 사람의 생각은 애초에 맞닿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씨 가문을 건드릴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할 가치는 없었다.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낭비되기 때문이었다.“어르신 아직 모르시죠? 어르신 아드님이 사랑하는 여자는 한때 심각한 병을 앓았어요. 그 사람 몸은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처음 듣는 말에 서진태는 크게 당황했다.비록 서현재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서진태는 소원이 외모도 괜찮고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소원이 외견상으로는 전혀 불임일 것 같지 않았다.그러나 육경한의 한마디에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육경한은 이어서 말했다.“어르신 아드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정말 사랑에 빠진 거면 다른 여자를 택해 아이를 낳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자기 사랑을 배신하는 일일 테니까.”서현재가 황소처럼 고집이 센 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서진태는 말문이 막혔다.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전 육씨 가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지 않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아무리 해도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소원이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라면 이제는 대책을 다시 세워야 했다.그리고 서진태의 머릿속에 곧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그 방법뿐이야.’세월의 흔적을 담은 그의 눈빛이 매서운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다.“대표님, 저 혼자만으로는 힘들겠네요. 소원 씨를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는 대표님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어떠신가요?”서진태가 결심을 굳히자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좋아요. 우리가 굳이 적대적인 위치에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협력하면 더 나아질 겁니다.”“물론입니다. 물론이죠.”서진태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비굴한 자세로 돌아갔다.하지만 육경한은 이미 속으로 서씨 가문을 협력
“이건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전화하실 건가요?”도우미가 물었다.“네... 해야죠.”아주머니는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건네받았다.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소원에게 전화를 걸게 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시실 그녀는 늘 유진이에게 이곳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엄마인 소원이 걱정하지 않게 착하게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유진이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불편한 몸 상태를 참다가 고열로 결국 쓰러진 것이다.너무 놀란 나머지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따질 겨를이 없었다.‘일단 먼저 소원 씨한테 전화해야 해.”.전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소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주머니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소원 씨, 유진이가...”소원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유진이가 왜요?”“유진이가 고열이 나서 의식을 잃었어요... 육 대표님도 병원에 데려가 주질 않네요...”작게 울먹이며 아주머니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이 말을 듣자 소원의 가슴은 단단히 조여드는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서현재가 물었다.“유진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이가 열이 나서 쓰러졌대...”그러자 서현재는 바로 주삿바늘을 뽑으려고 하며 말했다.“내가 같이 가줄게요.”“안 돼!”하지만 소원이 그를 막았다.“움직이지 마. 여기서 잘 치료받고 있어. 내가 가면 되니까.”그녀는 서현재가 가면 육경한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또 혹시라도 괜히 육경한을 자극해 유진이의 치료에 방해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여러 가지 걱정이 소원의 머릿속을 채웠다.“걱정 마. 이제 난 육경한이 두렵지 않거든. 끝까지 맞서 싸울 거야.”그러고는 서현재를 안심시키며 덧붙였다.“너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회복을 잘해야 한다는 거야. 잘 회복해야 우리 둘이 변호사를 찾아서 유진이를 되찾을 수 있지.”소원의 다급한 표정을 본 서현재는 자신이 가면 상황이 악화될 것을 알고는 말했다.“그럼 얼른 가서 유진이 먼저
비록 유진이와 함께한 시간이 부족하고 마음의 벽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소원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유진이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유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충분히 지켜볼 시간이 없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육 대표님이 데려온 의사 선생님 덕분이에요.”장씨 아주머니가 말했다.아주머니도 처음에는 육경한이 치료를 막을 줄 알았지만, 소원과 통화한 후 그는 의사를 불러 유진이의 열을 내리게 했다.유진이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아주머니는 그 의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의사는 몇 번만 진찰하고 유진이의 심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냈다. 이어서 해열 주사를 놓고 해열 패치도 주었다.의사가 방을 나가 육경한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그는 유진이를 한 번 바라보고는 또다시 방을 나갔다.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소원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유진이의 병을 이용해 날 돌아오게 한 거였어. 이 비열한 자식!’역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육경한은 자신의 친자식마저 협상의 도구로 삼았다.그래서 소원이 그동안 유진이를 숨기며 아이가 육경한의 협박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게 했던 것이다.엄청난 분노가 느껴졌지만 소원은 유진이의 곁을 지키며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저녁 무렵, 유진이는 잠시 깨어났다.아이는 소원을 보더니 갑자기 작은 손을 뻗으며 약간 서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안아줘요...”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유진이는 서현재에게는 종종 애교를 부리고 떼를 쓰곤 했지만 소원에게는 이런 모습을 거의 보인 적이 없었다.항상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유진이였기에 그녀는 아이가 병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생각했다.그럼에도 소원은 몸을 기울여 유진을 안아주었다.작고 부드러운 유진이의 몸이 자신의 품에 완전히 기대 안겨 있자 소원의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졌다.자신에게 의지하는 이런 유진이의 모습과 모자간의 친근함이 소원으로 하여금
밤새 그렇게 고생한 끝에 날이 밝아올 무렵, 유진이의 열이 드디어 내렸다.소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 잠시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교대하러 온 아주머니는 의자에서 자는 소원이의 모습이 불편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그래서 침대에서 쉬게 하려고 깨우려 했다.“소원 씨.”아주머니가 불렀지만 소원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원래 몸이 약한 데다 밤새 지친 탓에 깊이 잠든 것이다.아주머니가 손을 뻗어 소원을 살짝 흔들려는 순간, 단단하고 길쭉한 한 손이 그녀보다 먼저 움직였다.육경한이 아주머니를 지나 소원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그러자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육 대표님...”하지만 그녀의 말을 육경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번에 막아버렸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유진이를 잘 돌보는 거야말로 아주머니의 책임입니다.”유진이가 밤마다 이유 없이 울지 않았다면 육경한은 아주머니를 이곳에 남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아주머니도 함께 따라왔는데 육경한이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이 남자가 유진이의 생부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판박이였다.심지어 말투와 행동조차 닮아 있었다.유진이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이 적은 아이였는데 그것도 분명히 육경한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아주머니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전에 유진이의 생부가 뛰어난 수단을 많이 쓰고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소원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소원은 아주머니에게 만약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절대 정면으로 대립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그가 유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그냥 데려가게 두라는 것이었다.유진이는 해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다행히 그때 아주머니는 재치 있게 약 한 보따리를 꺼내며 유진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이 약을 먹이는 법은 자신만이 안다고 말했다.그래서 육경한은 그녀를 데리고 왔다.지금 이 별장에서, 아주
다음 순간, 소원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육경한의 침실에 있는 약장을 향했다.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으려면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육경한이 계속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약들은 모두 개인 주치의가 처방한 것으로 병원에서는 처방받은 적이 없었다.‘만약 육경한이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유진이를 양육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언제든지 무너질 위험이 있는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키우기에 지나치게 위험하니 말이다.약장에서 약을 찾아보았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소원은 약장의 맨 위 칸에 있는 약상자를 꺼내려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너무 높아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섰고 간신히 약상자를 손에 넣었다.그러나 소원은 자신이 아직 의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곧 몸이 휘청거리며 그녀는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누군가 들을까 두려워서 말이다.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단단한 가슴에 안기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들고 있던 약상자는 땅에 떨어져 안에 든 약들이 와르르 쏟아졌다.뒤이어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찾고 있는 건데?”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은 냉혹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표정이 굳어졌지만 소원은 금세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몸이 좀 안 좋아서 약 좀 찾으려고.”“어디가 안 좋은데?”육경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머리가... 머리가 아파.”소원은 대충 둘러댔다.그러자 육경한은 바닥에 흩어진 약들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먹어. 두통에 좋은 약이야.”하지만 소원은 그 약을 감히 먹을 수 없었다.그가 무슨 약을 건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방금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약을 고른 걸 봤으니 말이다.하여 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이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